[우리역사이야기80] 고구려 안장왕의 사랑이야기7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7/12/27 [16: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그러나 우리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서술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 자주시보

 

백제와 고구려가 붕괴된 후 그 유민들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각 국으로 수많이 이동을 했다. 현 라오스, 북베트남, 태국, 미얀마 등의 소위 고산족들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종족들이 고구려와 백제의 후손들이다. 특히 라오스의 <라후족>, 미얀만의 <카텐족(까렌족)>이 대표적인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들이다.

 

미얀마 북부의 <카텐족>은 자신들의 고구려의 후예들이며, <카텐>은 즉 <고구려인-까우리리민, 까우려민>이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필자가 2001년 미얀마 양곤에 출장을 갔을 때 현지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또 현 중앙아시아 소수 민족들(주로 산악지대 거주)은 대부분 고구려의 후예들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설들을 그저 귓등으로 흘려듣지 말고, 찬란했던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정밀하게 현지답사도 하고 근거 자료들을 수집하여 연구해야만 한다. 그럴 때만 조상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되살릴 수가 있다.

 

우리 겨레의 역사강역은 결코 조선반도와 만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만약 고구려와 백제가 조선반도에만 머무르면서 흥망성쇠를 했다면 그처럼 광대한 지역에 그 후예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반도사관>과 <조선반도·만주사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조선반도·만주사관으로는 위와 같은 현상들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헬싱키 국제학술연단에서 몽고 과학원 수미야 바타르 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고송무씨가 아래와 같이 전해왔다고 임승국 교수가 <한단고기> 주역에 주석으로 달아놓았다. 이에 대해 보기로 한다.

 

“최근 헬싱키의 고송무씨가 전한 몽고 과학원 수미야 바타르 박사의 설에 의하면 주몽이나 도영의 설화 배경은 몽고 내부의 부이드와 할린골강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중략~ <몽고와 한국 민족 선조들의 민족 언어학적 상호 관계에 관한 문제에 대해>라는 몽고 과학원 수미야 바타르 교수의 책자가 밝힌 내용이다. <삼국유사>에 북부여 건국 장소로 언급되는 흘승골(訖昇骨)과 위서(魏書)에 나오는 고리(藁離)에서 온 동명이 세 사람을 만나 홀승골에 이르렀다는 지명은 몽고의 할린골 강이며, 고구려 건국기에 나오는 비류(沸流)는 몽고의 부이드 호수라고 증명하고, 북부여가 몽고 지역에서 건국했다는 사실은 광개토대왕 비문에서도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수미야 바타르 교수는 현재 바이칼 호 연반에 사는 부리아트 인들이 스스로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도 한민족사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학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주장들이다. ”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주역, 정신세계사 22쪽>

 

위 인용문에 대한 상세 해석은 고구려사만을 다를 때 상세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부리아트>에 대해서만 간략한다. <부리아트>는 고갱이 우리 말 그대로 <배달겨레>라는 말이다. 이를 도해하면 아래와 같다. 

 

부리아트

부리=불+이, 즉 “불이”가 연음이 되어 “부리”가 된 것이다. 이를 다시 해석하면 불은 “ᄇᆞᆰ”이다. “ᄇᆞᆰ”은 박->백->배로 변천을 한다. 따라서 “불”은 “배”가 된다. 또 “이”는 그대로 우리 고어·고갱이 말 “사람”, 즉 “겨레”가 된다.

 

아트=티·터·땅으로 고갱이 우리 “달”이 된다. 이를 종합하면 부리아트=“밝은 이”+“땅·달”로서 <배달겨레>라는 말로서 자신들을 우리와 똑같이 부르고 있다. 인터넷에 올라 온 자료를 보면 부리아트 지방을 여행했던 한국인이 현지 사람에게 <부리아트>의 뜻을 물으니 <불산인> 즉 <불산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자료를 올린 여행자는 우리 말, 즉 고갱이 우리 말을 모르다 보니 <불>을 <火>로 해석을 하였다. 물론 신라에서 <밝·벌·불>을 뜻 글자 <火>를 빌어 이두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리아트>에서 <부리>는 <불이>이며 이는 <밝은 이·사람>이라는 말이다. 2015년 러시아 언론 매체 <스푸트닉> 방송도 부리아트인들이 조선 사람과 똑같다, 그들의 생활습관 및 사고 등이 조선 사람과 같다면서 조선과 부리아트가 협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도를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간과하지 말고 신중히 받아들여 치밀하게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역사·문화·문명·종교 ··· 등은 온 누리 현생 인류의 모든 것의 뿌리요, 줄기라는 점이다. 우리 겨레는 결코 약소민족이거나 열등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가장 뛰어난 으뜸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 우리 조상들의 상·고대 역사 강역이 중원 대륙이나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동유럽까지 광대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 중심핵은 현 <조선반도>라는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이에 대해 후일 상세하도록 할 것이기에 여기서 그친다. 

 

우리 겨레 조상들이 이처럼 찬란한 역사를 꾸려왔음에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조상들은 언제나 화하족의 속국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화하족은 우리 조상들에 의해 문명개화된 족속들일 뿐이다. 후일 상세할 것이다.

 

삼국사기 무령왕 조의 기록 역시 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백제의 강성기를 이끌어 왔던 무령왕에 대한 기록이 대단히 간략하며, 그 업적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무령왕 시기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증했던 찬란하고 위대한 외교적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무령왕 12년(512), 사신을 양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21년(521), 겨울 11월 사신을 양에 보내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속국인 백제가 상국(上國)인 양나라에 대해 속국의 예를 차리는 듯 기록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외 관계사를 보면 개탄스럽고 그지없다.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노인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왜 그리도 증오에 가까운 비판을 했는지 충분히 공감이 간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고 삼국사기를 대해야 할 것이며,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삼국사기의 삼국이 대외 관계사 및 대외 항쟁사에 대한 기록이 온통 사대주의 사상·패전사만을 그리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가에 대해서는 조서신대와 일제강점기 삼국사기의 원본에 대해 가필·개찬 등을 가한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삼국사기 전편을 면밀히 연구하다 보면 가필·개찬의 흔적들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 이외에도 다른 많은 재야 사학자들이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백제 무령왕 시기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의 우열관계에 대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무령왕 21년 조에 “겨울 11월, 사신을 양(梁)에 보내어 조공하고 표(표)를 올려 말하기를 ‘이에 앞서 고구려에 패전을 당하여 여러 해를 쇠약하게 지내다가 이에 이르러 여러 번 고구려를 부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동성대왕과 무령왕 이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에 절대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었다는 말이다. 백제는 동성대왕을 기점으로 고구려에 대해 국력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무령왕 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우위에 서게 되었음을 대외적으로 선포를 할 정도가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록이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휘:사유, 331년 즉위, 41년 간 재위, 331~371) 39년(369) 왕이 군사 2만 여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지만 백제 치양성에서 패배를 하였다. 바로 이 전쟁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본격적인 대결전이다. 이는 양국이 건국한 이후 삼국사기 기준 약 400여 년간에 벌어진 본격적인 전쟁의 시초이다. 이 전쟁 후 고구려 고국원왕 41년(371), 백제 근초고왕 26년(371)년 “겨울 왕(근초고왕)이 태자와 더불어 정병 3만 여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구려 평양성(남평양-필자주)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와 사유(고국원왕)가 힘껏 싸워 막아내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당시의 전투상황을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 고국원왕, 백제 근초고왕 시기부터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는 본격적인 대충돌이 시기로 접어들었다. 물론 위에서 인용한 두 번의 전투가 두 나라 사이의 첫 번째 충돌은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첫 번째 전투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 살펴보기로 한다. 

 

-계속

 

2017년 12월 4일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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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천하 17/12/27 [22:06]
역사를 이야기 같이 쉽게 풀이 해서 좋고 더불어 우리 민족의 우월함을 알게 되닌 좋습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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