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83]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0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1/16 [14:38]  최종편집: ⓒ 자주시보

 

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문에 기록된 고구려 역사

 

삼국사기 기준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경호태열제의 릉비에도 고구려 시조 고추모(高鄒牟)의 건국기사가 있다. 그 기사의 양은 그리 많지 않지만 다른 사서들에 기록된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서 고구려 건국기사와 관련성도 없지만 고구려 융성번영기를 이끌었으며,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넓혔던 국강상광개토경펴안호태열제의 칭호에 대해 아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하지만 배달겨레의 후손들이 자신들 조상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그 업적에 따라 붙여졌던 칭호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축소·왜곡되게 알고 있기에 이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바로 그러한 과정이 뒤틀리고, 홰곡되었으며 극단적으로 왜소하기 이를 데 없이 축소된 자신들 조상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복원한느 길이다.

 

먼저 고구려의 역사는 삭감이 되어있음을 참고로 알아두어야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조선의 역사학계 그리고 현 남측의 재야사학계에서는 대략 5대 정도의 년대가 삭감되어 있다고 분석을 하고 있다. 대략 약 200여 년 정도의 고구려사의 년대가 삭감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후일 고구려사를 다룰 데 많은 관련 자료들을 통해 고증하고 논증하고자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국가앙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를 고구려 제18대 왕으로 기록하였다. 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 혹은 광개토경호태왕에 대해 광개토왕의 휘는 담덕이니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생김이 웅위하고 점잖으며 얽매이지 않는 뜻이 있었다. 고국양왕 3년에 태다로 책봉되었다. 9년에 왕이 죽으니 태자가 즉위하였다.”라고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즉위 년대에 따라 업적이나 족적을 기록하기는 하였지만 열제(烈帝)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간략히 그지없으며, 다른 자료들에 기록된 업적들이 대부분 누락되었다. 우리는 삼국사기를 읽을 때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번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비에 기록된 칭호를 보도록 하자. 열제의 릉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물론 릉비가 위·변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고, 또 이병화 선생같은 이는 릉비 자체를 화하족의 명대에 새롭게 제작하여 내용을 각색하고 원래 있던 곳이 아닌 현재 릉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다 세웠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이병화 선생의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해 대부분 황당하고 무시하는 것이 현 실태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병화 선생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신중히 접근하고 규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상고대 및 중세사까지의 역사 강역에 대해 삼국사기나 기조 강단에서 주장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비교, 분석해보면 수많은 모순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강단사학에서도 위서요, 뭐요 하면서 그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지만 환단고기에는 국강사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의 릉비가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의 비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현재 열제의 릉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 과연 황성(황성)의 흔적 아니. 돌 하나라도 있는 곳인가. 바로 이러한 점들을 비교연구한 후 제기하는 문제 제기인 것이다. 상고대 및 중세에 있어 우리 조상들의 역사 강역은 분명 조선반도와 만주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과정에 수많은 우리 겨레의 역사적 흔적들이 사라지고 위, 변조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우리 겨레의 역사를 대해야 한다. 그럴 때만 올바른 역사 해석이 가능하다.

 

일단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의 릉비에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로 고구려가 년호를 쓰고, 창제 건원을 한 대제국 강국이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자가 자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럼 한단고기에 기록된 열제의 기사를 보도록 한다.

 

 

광개토경호태황은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사해 안에서는 모드 열제라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진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於阿)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첨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天樂)을 사용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265>

 

인용한 한단고기의 기록에 사해 안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한다.”라는 기록을 보았을 때, 당시 고구려의 국력과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외에도 한단고기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 본기를 보면 고구려는 그 역사를 마칠 때까지 건원칭제를 한 대제국이자 강대국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제19(삼국사기 기준) 임금을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열제”, 한단고기에 광개토경호태황이라 칭했음을 당연하다고 본다. 따라서 필자가 연재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논증함에 있어 관련된 고구려 임금에 대해서는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열제또는 광개토경호태열제라고 칭할 것이다.

 

그럼 아래에서 본 연재의 기본적 고증·논증 대상인 고구려 건국기사에 대해 다루기로 한다. 고구려 건국에 대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비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터전을 처음 잡았을 때 북부여에서 나왔다.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어진 덕이 있었다.수레를 메울 것을 지시하여 돌아다니면서 남으로 내려오는데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치게 되었다. 왕이 나루가에서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자라들을 줄짓게 하고 거북이를 뜨게 하라! >고 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곧 자라들이 줄을 짓고 거북이들이 떠올랐으니 그런 다음에 건널 수 있었고 비류골 홀본 서쪽에 있으면서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

인간 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므로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니 왕이 홀본 동쪽 언덕에 있는데 황룡이 없고, 하늘로 올라갔다. 세자 유류왕에게 유언을 지시하여 도리로써 잘 다스리도록 하였다.

<광개토왕릉비문연구, 조선사회과학원 손영종, 중심, 15~16>

 

위에서 인용된 조선사회과학원 손영종 연구자의 <광개토왕릉비 연구>에서 보듯이 열제의 릉비에도 고구려 시조인 추모 성제의 건국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물론 다른 건국 기사들의 내용에 비해 간략하기는 하다. 하지만 릉비에 건국기사가 새겨져있다는 것은 다른 건국기사 사료들의 신뢰성을 담보해준다고 볼 수 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 릉비에 기록된 건국기사 역시 이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건국기록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 연광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모든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들을 인용한 다음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고증하고 논증할 계획이다. 또한 고구려 건국에 관해서도 북부여와의 관련성, 과연 추모(주몽)은 북부여 건국 시조인 해모수의 직계 아들인지 등 상세하게 규명할 것이다. 따라서 일단 우선 고구려 건국에 기뢱된 여러 사서들의 기사를 인용하기로 한다.

 

-계속

 

20171231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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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국만쇠 18/01/17 [12:49]
고구려 - 고려 - 조선(일제강점기앞 죄선아님)으로 이어져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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