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84]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1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1/29 [13:4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신단민사와 신단실기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록

 

고구려 건국기사에 대한 신단민사(新檀民史)와 신단실기(神壇實記)를 보기 전에 저자 김교헌에 선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신단민사와 신단실기의 저자 김교헌 선생은 1868년에 태어나 1928년에 생을 마쳤다. 조선조 말기 대사성(大司成)과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撰集委員)을 거쳐 규장각부제락(奎章閣副題樂)으로 있으면서 국조보감감인위원(國朝寶鑑監仁委員)을 겸직하였다.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내다가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대종교 도사교(都司敎)로 있다가 만주에서 별세하였다. 남긴 저서들은 신단민사, 신단실기, 홍암신형찬가 등이 있다.

 

김교헌 선생의 관직이력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까지 선생은 조선조에서 갖고 있었던 우리겨레의 역사서, 종교, 사상, 철학서 등 많은 자료들을 접하였다. 바로 당시 접하였던 사료와 자료들을 토대로 하여 우리 겨레의 역사, 문화, 종교, 철학, 문화, 예술, 인습과 풍습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배달겨레의 자취를 기록한 것이 신단민사와 신단실기이다.

 

신단민사나 신단실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를 보도록 한다.

 

<신단민사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

 

고구려의 동명성왕 주몽의 성은 고()씨다.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활과 살을 만들어 백발백중시키니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다. 부루의 아들 금와가 자리를 이으니 그 일곱 아들이 주몽의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했다. 주몽이 이를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을 때 그 때에 소서노(召西奴)가 어린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과부로 살았다. 주몽이 장가들어 소서노를 이내를 삼고 나라를 세우니 소서노의 내조가 컸다.

 

신하에 오이와 마리와 협보는 지모(지모)로써 쓰고 마의와 납의와 수조의는 현명하고 재능 있게 일을 맡았다. 비류(비류)를 빼앗고 행인(荇人)과 북옥저를 멸하여 군현(郡縣)으로 삼고, 동쪽으로 읍루(挹婁)를 물리치며 서족으로 선비(鮮卑)를 막아 물리치니, 사방에 소문이 퍼져 와서 붙는 자가 많았다.

<신단민사, 김교현, 고동영 옮김한뿌리 65~66>

 

위 신단민사의 고구려 건국기사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커다란 모순도 함께 엮여 있다. 그 두 가지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백제가 왜 고구려의 동명성와 추모를 시조로 모셨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상세하지는 않지만 그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본문에 그 때 소서노가 어린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과부로 살았다. 주몽이 장가들어 아내로 삼고 나라를 세우니 내조가 컸다.”는 기록이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가 한 뿌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추후 다른 자료들과 백제의 건국에 관한 기록을 언급하면서 더욱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둘째, 고구려 시조 고추모와 동부여의 금와왕 그리고 금와왕의 아들들인 대소 형제들에 대한 대수 차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신단민사에는 부루의 아들 금와가 자리를 이으니 그 일곱 아들이 주몽의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와 동부여의 3번째 임금인 대소가 같은 대수일 수가 없다. 왜 그런지는 뒤에서 명확하게 밝힐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타난 년대만을 가지고 논증하기로 한다.

 

만약 동부여 2대 임금인 대소가 주몽과 같은 세대라면 주몽이 22세에 고구려를 건국하고 19년을 재위하였으며 고구려 제 2대 임금인 유류가 제위에 37년간 있었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소는 고구려 제3대 임금인 대주류 재위 5년에 고구려와 전투 중 복명 사람 괴유에게 머리가 베어져 전사하였다. 그렇다면 수학적 셈법만으로도 대소가 추모와 동갑이라고 해도 그 나이는 벌써 83세나 된다. 83세가 된 노인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한다는 것은 아무리 장수시대라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삭감하다보니 빚어지는 모순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명백하고 고증하고 논증할 것이므로 일단 여기까지만 언급한다. 일단 신단민사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기사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그 뿌리 관계는 언급한 것이 중요하다고 평가를 할 수가 있다.

 

<신단실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성은 선씨이다. 처음에 북부여의 왕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했다. 나이 겨우 7세에 보통 사람과 뛰어나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화살이 나가면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으니 주몽은 곧 부루와 어머니가 다른 아우이다.

 

부루이 아들 금와가 왕위를 계승하자 아들 일곱명이 있었으니 재주가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가 주몽을 없애 뒷탈을 없게 하자고 했으나 금와는 듣지 않고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은 혼자서 시험하여 말이 좋고 나쁜 것을 알아가지고 날랜 말은 먹이를 줄여 파리하게 하고 둔한 말을 잘 먹여 살찌게 하니 금와는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파리한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에 나가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화살을 조금 주었으나 짐승을 많이 잡았다. 이에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 어머니가 이 사실을 은밀히 알고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하는데 너의 재주와 시혜를 가지고 어디를 간들 일을 하지 못하겠느냐. 여기에 있다가 욕을 보는 것보다는 멀리 가서 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하니, 주몽이 이에 친하고 믿을만한 오이, 마리, 협부 등과 함께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엄사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물을 건너려 하니 다리가 없었다.

주몽이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난을 피하는데 쫓는 자가 다가오니 어찌 한단 말이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는 이루었다가 주몽이 건너가자, 다리가 풀어져서 쫓던 자는 따르지 못했다.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니, 베옷을 입은 자의 이름은 재사, 중의 옷을 입은 자의 이름은 무골, 마름으로 만든 옷을 입은 자의 이름은 묵거인데, 모두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이에 주몽은 재사(再思)에게는 극씨라는 성을 주고, 무골에게는 중실씨라는 성을 주고,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내리고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큰 명령을 받아서 근본이 될 터에 살고자 하는데 이 세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랴?”하고 드디어 그들의 능력을 헤아려서 일을 맡겼다.

 

졸본천에 이르러 땅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청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드디어 거기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 그러나 미처 중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비류수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2421(단기 2297) 갑신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또한 졸본부여라고도 하니, 그로 인하여 성을 고씨라고 했다.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사방에서 이 소식을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은 읍루와 경계가 면해 있어서 이를 물리치니 읍루는 감히 덤비지 못했다.

<신단실기, 김교현 저, 이민수 옮김한뿌리 20~23>

 

 

신단실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관련 기사를 압축, 요약한 내용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나 삼귝유사에 기록된 고구려 거국에 관한 기사에 더해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다. 오히려 비록 짧기는 하지만 신단민사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에는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졸본천에 이르러 비류와 온조 어린 두 아들을 기르며 과부로 살고 있던 소서노와 결혼을 하였고, 또 그 후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내조가 컸다는 기사가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단민사의 고구려 건국기사는 내용이 길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고구려 건국 기사와 그 내용면에서 차이가 없는 신단실기의 고구려 건국기사보다 역사적 실체와 진실을 밝히는 데에는 더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신단실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에 관한 내용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기에 앞서 인용 연재하면서 짧게 언급하였던 두 사서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오류가 그대로, 즉 북부여 역대 임금들과 고추모와의 년대 문제, 동부여 시조인 해부루, 금와, 대소 임금과의 년대 문제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또 신단민사에는 언급이 되었지만 신단실기에는 누락되어 있는 소서노와의 결혼에 관한 내용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들을 종합할 때 고증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신단실기의 고구려 건국기사 역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모순과 문제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염두에 두고 대하면 된다.

 

-계속-

 

201817

 

서울구치소에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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