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87]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4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2/26 [17:35]  최종편집: ⓒ 자주시보

 

단재 신채호 선생이 분석한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한 분석한 단재 선생의 글을 상세히 살펴보는 이유는 곧 현 우리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현황이 어디에 있는지 그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단재 선생의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한 인식이 아래에서 인용하여 살펴보게 될 수준에 있다면 우리의 상·고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은 더 이상 할 필요성이 없다. 물론 단재 선생이 분석한 북부여와 동부여의 전체적인 역사 전개 과정은 혼재되어 있지만 그 외에 역사를 연구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분석기재, 즉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단재 선생의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한 분석 글을 대하기 바란다. 그럼 아래에서 단재 선생의 글을 인용해 본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 인이나 동부여 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한갓 고구려 인이 그 시조 추모왕의 출신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부루, 해모수 즉 동·북부여를 분립한 양 대왕의 약사를 말할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출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그 하나이며, 그리고 이 마저도 고구려인이 기록한 본래의 글이 아니고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고쳐서 쓴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상가>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이라 썼으며, <가사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라 쓰지 않고 불경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이라 써서 보낼의 문자가 아니게 만들 것이 그 둘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59>

 

북부여와 동부여를 기록한 사서에 대해 분석한 단재 선생의 위 글은 일반적으로 역사를 어느 정도 섭렵했다는 이들도 알지 못했던 대단히 귀중한 역사 분석기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분석글이다.

 

첫째, 단재 선생은 선생이 접하였던 북부여와 동부여의 기록들이 북부여나 동부여인이 기록하고 또 이 기록이 후대들에게 전해져서 이를 토대로 사서를 기록하여 그 후대들 즉 현대를 살아가는 민족 구성원들이 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수많은 사서들이 역사과정에서 외적의 침략에 의한 병화에 불타 없어지고 또 내부의 지도층의 집단 이익의 수호를 위하여 수집되어 비밀 서고에 비장되어 있다가 그 서고가 또 외적의 침략으로 병화를 입어 사라졌다는데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다. 단재 선생은 바로 이점을 통렬하게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부여 인이나 동부여 인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고구려인이 고려의 시조인 추모왕의 탄생과 출신을 설명하기 위해 북·동부여를 기록한 내용은 아무래도 양 부여에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왜곡이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나마 북부여나 동부여에 대해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기록마저 고구려인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사서들을 가져다가 신라인들의 입맛에 맞춰 가감, 첨삭, 왜곡한 것으로 신뢰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단재 선생의 분석은 정확하다고 본다. 단재 선생은 바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우리 역사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둘째, 이두의 해석이다. 이두의 해독문제는 우리역사의 해석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동부여, 남동부여, 북동부여, 갈사국, 옥저 등의 관계에 대해 단재 선생의 이두문 해독에 의해 규명되는 내용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필자는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나 조선상고문화사의 백미는 우리에게 이두문 해독의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을 든다. 일반역사 학계에서는 후박달나라의 <선배>,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고려 중기까지의 <선배>에 대해 우리 민족사 으뜸으로 평가를 하는 것과 <선배사상>이 붕괴되는 고려 묘청과 사대주의파 김부식의 대결에서 조선의 사상과 도를 지켜나가는 묘청의 패배를 두고 조선 1천 년대에 최대의 사건이요 랑가사상의 붕괴요 하는 내용이 그 핵심이라는 등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물론 우리 민족사에서 그 시원 년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지도층은 물론이려니와 일반 백성들도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외적의 침입이나 국란을 당했을 때 스스로 나서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쳤던 <선배사상>, <조의선인>, <화랑도>를 명백히 밝히고 체계화하였으며 그 소멸과정은 바로 우리 겨레의 침체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밝힌 단재 선생의 공이 적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그에 대해 대단한 성과라고 본다. 그러나 단재 선생이 이두문을 해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것 역시 대단한 성과라고 본다. 이두문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면 우리 조상들의 상·고대사 해석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민족구성원들이라면 이두 해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란다. 이에 대해 인용하고 분석하는 단재 선생의 이두 해독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내용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남북갈사. 남북옥저, 양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지금의 혼춘)로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고어에 산림을 <> 혹은 <가시>라 하였으니, 고대에는 지금의 함경도와 길림 동북부와 연해주 남단에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수천리 숲의 바다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시라>라 칭하였으니 <가시라>는 삼림국이란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자로 갈사국, 가슬라, 가서라, 하서량 등으로 썼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며 또 혹은 <가섭원기>라 하였는데, 이는 대각국사가 쓴 <삼국사>에 보인 것이다.

중국사에는 <가시라>를 옥저라고 썼는데,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와지>의 음역이고 <와지>는 만주어로 삼림이란 뜻이다.

, 곧 읍루는 만주족의 선조인데, 읍루는 당시 존선 열국 중에서 언어독이(言語獨異)-언어가 홀로 같지 않다.’라고 <삼국지><북사>에 투기해 놓았다. 예족은 우리의 <가시라><와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예족의 말을 번역하여 <옥저>라고 했던 것이다.

두만강 이북은 <북갈사>라 부르고 이남을 <남갈사>라고 불렀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이고 <남갈사>는 곧 <남옥저>이며,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한다.

고사에서 남북옥저를 다 토지가 비옥한 곳이라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땅이 척박하니 혹시 옛날과 지금 사이에 토지의 성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시라>의 인민들은 순박하고 근검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고 여자들이 더 아름다웠으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들은 이들을 착취하여 어염과 농산물을 천리 멀리까지 져다가 바치게 하고 미녀들을 뽑아다가 비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61~162>

 

위에서 인용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이두 독법에 의한 결론은 동부여와 가섭원 부여, 갈사국, 그리고 옥저는 다른 나라나 다른 땅이 아닌 한 나라, 한 지역을 다른 뜻글자를 벌어 이두를 다르게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남쪽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민족구성원들은 동부여, 갈사국, 옥저가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이두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전혀 하지 못하다 보니 한 나라 , 한 지역을 여러 나라로 여러 지역으로 서로 다른 뜻글자에 맞춰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한 사람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웃지 못할 희비극을 연출하는 것과 같은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다.

 

단재 선생의 인용문에서 북갈사는 곧 북옥저이고, 남갈사는 곧 남옥저이며라고 결론을 짓고 있는데 더 상세하게 글을 인용해 보도록 한다.

 

해부루가 북 <가시라>로 옮겨와서 동부여가 되었는데 아들 금와 손자 대소로 이어졌다. 대소가 고구려의 대주류왕과 싸우다 패하여 죽자, 그의 동생 모갑과 사촌동생이 서로 나라를 차지하려고 다투어 결국을 모을을 구도에 터전을 잡고 북갈사 혹은 북동부여라 칭하고 모갑은 남갈사 혹은 남동부여라 칭하며 분립하였다. -중략-

지금까지의 학자들은 동부여 분열하여 북동·남동의 양 부여로 된 것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였으며, 옥저가 곧 갈사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는 갈사를 찾았으며, 북동·남동의 양 부여 곧 남북의 양 갈사이고, 남북의 양 갈사가 곧 남북의 양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 세 개 서로 다른 지방으로 나누었으며 강릉을 <가시라>, 곧 가슬라라 한 것은 신라 경덕왕이 부강의 토지를 잃은 뒤에 설치한 고적인 줄 모르고 드디어 가슬라, 곧 동부여의 고도라 하였다.

그리하여 지리가 뒤헝클어지고 사실이 혼란해져서 <갈이-목공소에서 나무를 갈아서 다양한 형태의 나무그릇을 만드는 기구-옮긴이>로 삼을 수 없게 되었으나 이에 갈사, 가슬 가섭의 이두문 읽는 법을 알아서 이들이 동일한 <가시라>임을 알게 되었으며, 대소의 동생 모갑과 그의 사촌동생 모을이 분거한 양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가시라>가 곧 남·북 옥저임을 알게 되었으며,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분이라는 말을 쓴 것과 주류왕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벌이라는 말을 쓴 것에 근거하여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게 되어서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62~163>

 

위 단재 선생의 글 인용문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용문에서 언급을 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부여, 동북부여, 동남부여가 따로 있고 갈사국이 있으며, 더구나 남옥저, 북옥저가 또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이미 위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이둥 대한 해독을 하지 못하다 보니, 뜻글자로 된 모든 나라 이름들을 따라서 따로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용문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B.C 86년 을미에 북부여 제() 자리를 이어받은 해부루는 졸본촌에서 스스로 동명이라 칭하며, 제위에 올라 나날이 흥성해가던 고두막의 압력과 위세에 눌려 성읍을 들어 항복을 한 후 재상 아란불의 청을 받아들여 <가시라>, <가섭원>으로 도응을 옮겨 동부여를 건국하였다. 그러한 이치에 따라 한단고기 동부여기는 <가섭원 부여기>이다. <가섭원>, <가시라>에 부여를 건국하여 세대를 이어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남갈사><북갈사>는 언제 건국이 되었는가. 이에 대해 인용문에 대소나 고구려 대주류왕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자 그의 동생 모갑과 사촌동생 모을이 서로 나라를 차지하려고 다투어 결국 모을을 구도에 터전을 잡고 북갈사 혹 북동부여라 칭하고, 모갑은 남갈사 혹은 남동부여라 칭하며 분립하였다.”라고 하여 그 뼈대만을 정리하여 놓았다. 후일 북부여, 동부여, 남동부여, 북동부여에 대해 상세할 것이기에 여기서는 양갈사에 대해서 간략히 보도록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고구려의 건국과 흥성에 대해 정확하게 규명을 하기 위해서는 북·동부여와 남·북 갈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하다.

 

그럼 남·북 갈사에 대해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기록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남갈사 즉 남동부여는 동부여왕 대소의 막내아우가 세운 나라이다. 동부여왕 금와의 막내 아들은 맏형님이자 동부여 2대 임금인 대소가 고구려와이 전투에서 진흙탕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고구려 장수 괴유에 의해 머리가 잘려 전사를 하자 장차 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고 그를 따르는 사람 100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때 해두국 왕이 사냥하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해두국의 백성들을 취하였다. 마침내 그곳에 도음을 정하고 왕위에 즉위하니 이이가 갈사왕이요, 그가 이끄는 나라가 남갈사국 혹은 남동부여이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남옥저이다.

남갈사는 고구려 태조 16(A.D 59)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므로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고 하여 갈사국을 건국한지 347년 만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남갈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사는 너무 간략하여 전모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한단고기 가섭원 부여기의 기사를 조금 더 보기로 한다.

 

임오 28(A.D 22), 여름 4월 왕의 동생(대소의 막내아우)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가라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라 한다. 갈사는 태조(고구려 제6대 임금) 무열제 융무 16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앙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47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태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더니 훈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역, 정신세계사 142>

 

이상이 남동부여, 남갈사, 남옥저에 대한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기록이다.

 

다음은 북동부여, 북갈사, 북옥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북동부여, 북갈사, 북옥저는 동부여와 대소의 종제가 세운 나라이다. 단재 선생은 이를 사촌동생이라 하였으나 동부여 제2대 임금인 금와왕에게는 형제가 없으니 동부여 제3대 임금인 대소와 그 형제들에게는 사촌형제나 사촌지간의 혈육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북갈사를 세운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종제가 될 수밖에 없다. 북갈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간략하기 그지없다. 이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가을 7, 부여 왕의 종제가 그 나라 백성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왕의 몸을 망치고 나라를 없애어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왕의 아우는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고 내 역시 불효하며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하고 드디어 만여 명과 함께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그를 봉하여 왕(제후)를 삼아 연나부에 안치하고 그의 등에 낙문이 있으므로 낙씨라는 성을 내렸다.”

 

이상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3대 대주류왕 5년 조의 기사이다. 삼국사기의 기사만 보아서는 북동부여, 북갈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 “3년 갑술(A.D 494) 2, 부여왕이 자기 처자와 함께 와서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도대체 문자명왕 3년에 항복을 한 부여는 어떤 부여란 말인가.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아서는 북부여와 동부여에 관한 역사를 다루지 않다보니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사실 역시 대 혼란을 빚게 만들었으며, 북동·남동부여, 부여 등은 어떤 나라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북동부여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도록 한다.

가을 7,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를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다. 갈사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띠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다락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여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A.D 494)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143>

 

이상이 동부여 제3대 임금인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과의 전투에서 전사를 한 후 대소의 친척 아우가 고도에서 세운 북동부여·북갈사·북옥저의 약사이다. 북동부여는 동부여 제3대 대소가 전사하던 고구려 대주류왕 5, 임오 (A.D 22)7월에 일찍이 나라를 들어 항복을 하였지만 그후 점차 자립하여 연나라와이 접경지역인 백랑곡에서 472년 동안 나라를 계속 유지하다가 고구려 제21대 문자열제 3년 갑술(A.D 494)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니 나라의 명백이 완전히 끊기고 만다.

 

지금까지 북부여, 동부여, 남동부여, 북동부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를 다시 한 번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가 후박달나라 제 47대 고열가 단군을 이어 임술년(B.C 239)에 웅심산에서 건국을 하였다. 북부여는 해모수 단제가 45, 2대 모수리 단제가 35, 3대 고해사 단제가 49, 4대 고우루 단제가 34153년 간 이어오다가 을미(B.C 86) 고두막한의 압력에 못이겨 재상 아란불의 청을 받아들여 동부여 시조, 해부루가 가시라,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하였다.

북부여는 을미(B.C 86)에 고두막이 고도에 입성하여 북부여 단군이 되어 이끌다가 북부여 제6세 단제인 고무서 재위 2년 계해(B.C 58)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에 의해 나라가 흡수가 된다. 바로 이때가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해가 된다.

 

을미(B.C 86)에 건국한 동부여는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제2대 금와 임금 41년에 이어 제3대 대소 28년 재위하면에서 108년간 이어왔다. 동부여는 대소 재위 28년인 임오(A.D 22)에 고구려 제3대 대주류왕의 공격에 의해 대소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고구려 장수 괴유가 대소의 머리를 베어 전사함으로써 동부여는 건국 10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동부여가 멸망하자 동부여 마지막 임금 대소의 막내아우가 따르는 백성 수백명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 압록곡에 이르러 사냥을 나와 있는 해두왕을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여 도읍을 정하고 갈사국·남갈사·남동부여·남옥저를 건국하여 347년간 유지하다가 그 손자대인 도도왕이 고구력 날로 번성하는 거슬 보고 고구려에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때는 고구려 제6대 태조 무열제 융무 16(A.D 59)이다. 이로써 남동부여·남갈사·남옥저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동부여의 고도에서 동부여 제3대 임금이자 마지막 임금인 대소 친척 아우가 건국한 북동부여·북갈사·북옥저는 동부여가 망하던 해인 임오(A.D 22)7월에 일찍이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을 하였다. 하지만 북동부여는 점차 자립하여 연나라와의 접경지역인 백랑곡에서 나라를 유지하다가 고구려 문자열제(삼국사기 문자명왕) 명치 갑술(A.D 494)에 나라를 들어 항복을 하고 고구려 연나부에 편입하게 되니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동북부여·북갈사·북옥저는 동부여가 망하던 해인 임오(A.D 22)에 건국을 하여 472년여간 나라를 유지하였다.

 

이를 간략히 보면 북부여동부여남갈사·북갈사로 도식화 할 수 있다. 여기에 고구려 시조 고추모는 핏줄 즉 혈연관계에서 북부여의 황족이며 동부여에서 출생을 하여 성장을 한다. 또 고구려의 건국 역시 북부여의 땅인 졸본천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북부여와 동부여는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출생, 혈연관계와 건국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나라들이다.

 

-계속

2018128

서울동부구치소에서 이용섭

 


광고

트위터 페이스북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사랑방
최근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