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88]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5
이용섭기자
기사입력: 2018/02/28 [21: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고구려 건국기사

 

지난 회차까지는 조선상고사에 기록된 북·동부여와 동남부여·동북부여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고구려의 건국과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출생 및 혈통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북·동부여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또 본 연재는 단순하고 단편적인 어느 특정한 사건을 몇 회에 걸쳐서 연재하는 것이 아니고 해당하는 사건을 종자로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등과 그와 관련된 대외 항쟁사 등 종합적인 역사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삼국시대, 다국시대를 학술적으로 논증하고 고증하는 것이다. 본 연재를 대하는 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고구려 건국기사와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출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동부여어의 갈등 등을 종합적으로 가장 잘 기술한 것이 단재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다룬 고구려 건국기사이다. 앞서도 수차례 언급하였듯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다른 고구려 건국과 고추모의 출생과 혈통을 기록한 사서들만 보면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사료들을 동시에 접하면서 비교 분석을 해야만 고구려의 건국과 고추모의 출생, 그리고 혈통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또한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출생, 그리고 혈통관계를 제대로 파악을 해야만 고구려와 백제가 한 뿌리에서 나고 자란 나라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저 막연하게 고구려와 백제는 한민족으로서 동족의 나라라는 심정적인 것만이 아닌 역사적 사료에 의해 는증과 고증을 거쳐 양국은 비록 나라는 두 개지만, 그 뿌리와 줄기가가 하나라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은 고구려 제22대 안장왕과 백제 변경 개벽현의 장자 한씨의 딸, 한주와의 사랑이야기가 싹들 수 있는 국가, 사회, 민족이 하나와 같은 상태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본 연재에서는 이를 시대적으로 역사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학술적으로 논증하고 고증해 나가는 것이다.

 

먼저, 고구려 건국에 대해 단재 선생은 아래와 같이 종합하였다. 이를 인용해본다. 

 

“고구려 시조 추모(또는 주몽이라 하기도 한다.)는 태어나면서 타고난 용기와 힘, 활쏨씨를 가지고 과부 소서노의 재산에 의거하여 웅걸들을 불러들이고, 교묘히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천란(天卵)에서 태어났다고 자칭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열국의 신앙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는 그 기행과 이적의 이야기를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그곳 제왕과 인민들이 그를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신라 문무왕은 ‘입공남해, 적덕북산(立公南海, 積德北山->남해 지방에서 공을 세우고, 북쪽 지방에서 덕을 쌓는다)’라는 찬사를 올렸으며 중국 2천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였던 동한의 학자 왕충은 그의 사적에서 자기 책에 기재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64~165쪽>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있어 위 단재 선생의 종합적인 평가를 보면 주요한 세 가지를 다른 사서들과 다르게 다루었다. 

첫째,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과부인 “소서노의 재산에 의거하여 웅걸들을 불러들여” 고구려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편 고구려 건국을 갈무리할 때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하나 대부분의 우리 겨레 구성원들을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거부인 과부 소서노의 재산에 의거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삼국사기에도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가 없다. 

 

둘째, 단재 선생은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함에 있어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찬란에서 태어났다고 자칭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하였다. 물론 “알에서 태어났다.”, “하늘에서 점지를 해주어 태어났다.”, “빛에 감응하여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등 수없이 많은 탄생신화는 비단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탄생신화에서만 강조하는 바가 아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 석탈해왕 그리고 김알지 등의 탄생신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당대의 영웅들에 대한 탄생신화는 우리의 조상들 뿐 아니라 화하족들과의 조상들이라고 주장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동이족들의 영웅호걸들의 탄생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임신을 했다거나 빛이 몸에 들어와 임신을 했다고 하며, 제비의 알을 먹고 임신을 했다고 하는 등의 무수한 탄생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영웅호걸들에 대해 탄생신화를 부여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종족들만인가? 결코 아니다. 서양의 역사 역시 영웅호걸들의 탄생신화 역시 동양이나 여타의 민족들의 탄생신화 못지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탄생신화이다. 예수는 요셉과 결혼한 마리아가 미카엘 대천사의 계시를 받고 임신을 하였고 예수를 낳았다. 이는 남과 여가 합하여 예수를 임신한 것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의 명을 받은 미카엘 대천사가 전해 준 명, 즉 천명에 의하여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보통 사람이 아닌 신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하느님이요, 신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수탄생 신화에 대해 오늘날에는 서양의 기독교 신학자들 중 상당수가 믿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이와 같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대의 영웅호걸들 특히 한 나라를 건국한 시조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탄생과정에 신화를 부여하여 그 위대성을 부각시키려 하였다.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탄생에 대해 신화를 부여하였다 하여, 고추모의 탄생을 부정하거나 그의 위대성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능력이 탁월하고,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지적·육체적으로 완성된 인간이었다고 인정을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세 번째는 “안으로는 열국의 신앙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는 그 기행과 이적의 이야기를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그곳 제왕과 인민들이 그를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다.”고 분석을 한 부분이다. 이는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물론 현대사회도 명목상으로는 “정교의 분리”요, “종교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등등 인민들을 속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묘한 방법을 통하여 정치는 종교에 종교는 정치에 강력한 영햐력을 미치면서 “정교는 하나”, “정교일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 집단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어찌보면 그 폐해는 완전 정교일치를 이우었던 고대 사회보다 훨씬 더 심가하고 복잡하다.   

 

단재 선생이 고추모가 왕검의 신화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열국의 신앙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였다 함은 당시까지만 해도 후박달나라가 무너지고, 그 강력한 지지기반이던 삼신교·삼신사상이 체계 역시 그 힘을 잃어 과거만은 못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동북아시와 그 일대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 증거 할 수 있는 기록을 보도록 한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 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대ㅡ <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을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로 되었다. 밝은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사람들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墟)가 지극하면 정(靜)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가득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의 개물교화(開物敎化)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상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다.”

<한단고기 대백일사 고구려 본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262쪽>

 

위 인용한 내용은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 신하들과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내린 조서이다. 이 조서를 대변경에서 기록하여 후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고추모 동명성제가 내린 조서의 핵심은 바로 삼신사상·삼신교 교리이다. 바로 삼진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교화이다.”라는 구절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단재 선생은 단군의 삼신설, 삼신교 교리가 수천년 동안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온 누리를 풍미했다고 고증하였다. 필장 역시 이러한 단재 선생의 고증과 논증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37년 조에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나라에 현묭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은 풍류이다. 이 교가 세워진 내력은 선사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그 실제 내용인즉 세 가지 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예건데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은 노나라의 사구, 즉 공자의 가르침이며, 무위지사(자연에 순응하고 인위적으로 일을 만들어 하지 않음)에 따르면서 자연의 말없는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것은 주나라의 주사, 즉 노자의 근본사상이고, 어떤 악행도 하지 말고 선생은 무엇이든 다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축건국의 태자, 즉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유교는 화하족들이 창작한 교요, 선가, 곧 노장사상도 화하족들의 독창적 창작이고, 불교는 인도의 석가모니가 창작한 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세 종교의 뿌리와 줄기는 곧 우리 겨레의 오랜 역사에서 온 사회의 모든 지침으로 내려온 삼신사상, 삼신교 교리라는 내용을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서 밝혀주고 있다.

 

이렇듯 적어도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던 시기까지 약 7,200여 년간 이어져 내려온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삶의 지침이자 좌표였던 삼신사상, 산신교 교리, 선교의 교리를 따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고추모가 “왕검의 신화를 이용하여 천란설을 주장하고, 또 왕검의 교리로서 조선인의 정신의 결집하여 통일을 이루고, 화하족들에게 전파하여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교주로 숭배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하등 이상할 것도 없고 오히려 당시의 믿음체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 즉 기행이 되는 것이다. 

 

이제 아래에서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 고추모의 출생과 혈통 그리고 성장과정, 고구려 건국에 단재 선생의 기록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처음에 아리라(송화강) 부근의 어느 장자가 유화, 훤화, 위화 세 딸을 두었는데 셋 다 절세의 미인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놀러 나갔다가 유화를 보고는 그만 사랑에 빠져 야합하여 아이를 배었다. 아이를 배었지만 이 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할 수 없었으므로, 해모수는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였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찾아가서 폐백을 바치고 사위가 되게 해달라고 두 번, 세 번 애걸하여 그 부모의 승낙을 얻어야만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한 뒤에도 남자는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그 집에 들어가 머슴이 되어서 3년 간 고역을 다하고 나서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의 가정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유화의 범행이 발각되자, 그 부모는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를 건져서 동부여 왕 해금와에게 바쳤다. 금와왕이 유화의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들여 첩을 삼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금와왕이 유화에게 따지고 물으니, 유화가 대답하기를 ‘햇빛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의 아들이고 나는 아무 죄도 범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금와왕이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돼지우리에 넣었으나 돼지가 피하여 먹지 않았고, 말에 밟혀서 죽게 하려고 길에 던져놓았으나 말들이 피하며 밟지 않았으며 산짐승의 밥이 되라고 깊은 산에 갖다 버렸으나 다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유화에게 그를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그 용기와 힘일 같은 또래에서 뛰어났고 활솜씨가 기묘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그 이름을 <추모>라고 불렀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65~166쪽>

 

위에 인용한 내용은 고구려 시조 고추모에 대한 탄생설화를 단재 선생이 여러 차서들을 자료로 하여 종합한 기록이다. 위의 인용된 내용만 본다면 우리가 이미 살펴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신단민사, 신단실기와 그리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위의 고추모 탄생신화는 다른 사서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위의 내용은 이미 우리가 살펴봤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다른 사서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서민들의 혼인풍습과 계층 간 혼인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언급해 줌으로써 유화가 어떻게 동부여의 왕과 연계를 가질 수 있었는가 하는 그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단재 선생이 언급한 고추모이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왕과 연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고추모의 출생지가 동부여라는 것은 뒷받침해준다. 

 

인용문 가운데서 “당시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였는데 여자 부모에게 찾아가 폐백을 바치고 사위게 되게 해달라고 두 번, 세 번 애걸하여 그 부모의 승낙을 얻어야만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한 뒤에도 남자는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그 집에 들어가 머슴이 되어 3년간 고역을 다 하고 나서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의 가장이 되었다.”는 내용은 당시의 엄격한 혼인제도로써 <데릴사위제>를 말한다. 데릴사위제는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등이 가지고 있던 결혼풍습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할 예정이니 여기서 그친다. 

 

이제 인용문 가운데서 오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이미 앞선 장들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어머니 유화 부인과 야합하여 고추모를 임신하게 한 인물은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가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신단민사, 신단실기 등에서도 해모수는 북부여의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가 유화부인과 야합하여 고구려 시조 고추모를 임신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북부여 시조 아들인 고추모가 동부에 제2대 금와왕 때에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년대 모순, 즉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아래에서 분석해 보기로 한다.

 

먼저 동부여는 북부여에서 분립된 나라들이라고 위의 사서들도 모두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단재 선생 역시 동일한 언급을 하였다. 그러면서 동부여의 시조 해부루가 북부여로부터 분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모수가 북부여의 시조이고 북부여가 단 2세, 즉 해모수와 해부로루서, 해부루가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지 전까지 아주 짧은 기간만 존재하였다고 가정을 해도 북부여에서 동부여로 분립한 동부여 시조 해부루는 해모수보다 1세대 아래다. 이는 해부루가 재상인 아란불의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데로 피해가라. 동해가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를 삼기에 적당하다.”고 천제가 자신의 꿈에 내려와 말하였다는 청을 받아들여 도읍을 옮기고 나라이름을 동부여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결국 해부루가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직전까지 잠시나마 북부여의 왕으로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설령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시조이고 제2대 임금이 해부루라고 한다 해도, 당시는 선대 임금이 살아있는 한 후대가 그 자리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동부여 시조인 해부루는 해모수 사후 북부여 임금 자리에 오른다.

 

두 번째는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야합한 결과로 고추모를 배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면서 부모가 유화가 저지른 범행을 징벌하고자 우발수에 빠뜨린 유화를 어부가 건져올려 동부여왕 해금와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는 북부여라는 나라의 존재를 인정하고 해모수가 북부여의 시조이고 해부루가 북부여 임금으로 잠시나마 있었다고 한다면, 해모수의 아들인 고추모를 해부루가 늦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빌던 차 왕이 된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에 이를 이상히 여겨 그 돌을 뒤집어 보니 황금색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있어 그 아이를 데려다 기르게 되고 해부루 사후 임금 보위에 오른 금와왕에게 바치게 되었다는 논리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서 

 

이와 같은 극단적인 논리모순적인 기록들이 있게 된 이유는 우리 겨레의 삼국, 다국 이전이 역사를 모조리 다루지 않고 화하족들이 남긴 단편적인 자료들을 이곳저곳에서 취하여 기록하기에 빚어지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물론 삼국사기나 삼구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북부여 시조가 아니고 북부여왕 해부루가 도읍을 <가시라>로 옮기고 난 후 북부여 고도에 들어가서 왕위에 오른 듯 기록하여 놓았다. 하지만 해모수는 북부여의 시조이며 후박달나라를 이은 단군이다. 따라서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탄생했다고 한다면 결코 고추모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물론 고추모가 북부여 황실의 자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단민사, 신단실기 그리고 단재 선생의 고구려 건국기, 고추모의 혈통,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한 년대와 세대의 모순에 대해 그 오류를 정확히 바로잡는 문제는 고구려 건국에 관한 결론부분에서 최종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여기서는 오류와 모순에 논하는 선에서 그친다. 

 

위에서 인용한 단재 선생의 글 내용 중 “금와왕이 믿지 않고 -중략- 깊은 산에 갖다 버렸으나 소용이 없었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관련 부분을 다룰 때 분석하기로 한다.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 “그 아이가 성장함에 그 용기와 힘이 같은 또래에서 뛰어났고, 활솜씨가 기묘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그 이름을 <추모>라고 불렀다.”라는 내용에 대한 분석은 다음에 하기로 한다.

 

-계속-

2018년 2월 4일

서울동부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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