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92]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9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3/19 [16:55]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한단고기 고구려 건국기사

 

이 여재를 시작하였을 때는 <북부여><동부여>에 대해서는 후일에 상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연재를 진행하다 보니 양 부여에 대해 다루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북부여와 동부영 대해 모르고서는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나왔다.”던가 백제와 고구려는 그 뿌리가 같다.”는 것과 같은 설을 선뜻 이해를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와 같은 설들을 설이 아닌 역사적 실체임을 이해하기 위해 이번 연재에서 양 부여에 대해 간략하게 보기로 한다.

 

. 북부여

 

북부여에 대해 그 기록의 정확성과 상세함을 떠나 언급을 한 서서들에는 한단고기, 단기고사, 삼국유사, 신단실기, 신단민사, 조선상고사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조에 동부여를 건국한 해부루가 금와를 얻는다는데 대해 기록을 하면서 동부여의 건국과 북부여의 옛 도읍에 새로운 지도자가 와서 임금이 되어 북부여를 이끌어간다는 기록을 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해모수가 북부여 구도에다 도읍을 정하였다고 하여 해모수가 해부루를 같은 세대로 하였으며, 또 해모수와 해부루가 친족관계가 전혀 없는 것으로 기록하는 등 그 어는 것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기록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뒤 부분에 증명을 할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 이외에 북부여나 동부여를 다룬 다른 사서들 역시 부정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주로 하여 고증을 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다른 사료들도 함께 살펴 보면서 그 오류에 대해서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단기고사에는 북부여의 건국에 대해 후단군조선 제23(실제47) 고열가 단군 58년 조에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대를 이을 후사가 없으므로 종친 해모수가 옛 도읍지 부여에서 반기를 들어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라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계속하여 단기고사는 후단제는 이것으로 대가 끊기니 1세 솔나로부터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23875년 간이다. 전단조 1,222년 후단조 875, 모두 2,096년간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위와 같은 단기고사의 기록은 <후박달나라>이 붕괴되고 그를 이어 북부여가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후박달나라의 역년이 전·후단조를 통틀어 2,096년이라고 함은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의 기록과 일치하며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서기 전(B.C) 238년 계해이다. 이 역시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반면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북부여 건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규원사화가 북부여 건국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으나 <후박달나라> 마지막 임금이 남긴 최후의 말씀을 실어 놓았는데 이 내용이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어차피 북부여가 <후박달나라>를 이어서 일어선 나라이니 두 사서에 기록된 고열가 단군의 최후의 발언을 비교해보면서 기록의 신뢰성을 검증해 보는 것이 북부여의 건국년대도 논증하기로 하자.

 

 

규원사화에는 임금이 여러 가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황조께서 나라를 세워 만세 후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황실이 점차 쇠약해지고 제후들은 점점 강해져서 외방 제후들 중에는 명을 받드는 자가 없다. 비록 갈라진 백성일지라도 선조들의 가르침을 배우며 충성하는데 오직 내가 덕이 부족하여 그 가르침과 위풍을 세우지 못했다. 이에 덕이 있는 사람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다. 그러나 자손들을 두루 보아도 사람이 없다. 그러니 내가 당장경으로 옮겨 아사달에 들어가 선조들의 신령을 평안히 모시겠다.’고 했다. 모든 가들이 슬퍼하며 따랐다. 임금이 제기를 받들고 당장경에 피해 살다가 마침내 아사달에 자리 잡았다. 근처의 많은 백성들도 뒤를 따라 모두들 집을 장당경에 정했다.이렇게 되어 나라는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후박달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제47세 고열가 단군의 최후 발언과 나라가 붕괴되었음을 기록하였다.

 

<후박달나라>의 붕괴와 마지막 임금인 47세 고열가 단군의 최후발언에 대하여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엣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건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를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위에 인용한 규원사화나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을 보면 표현상의 차이는 있지만 <후박달나라> 마지막 임금인 제 47세 고열가 단군의 최후발언과 나라의 붕괴과정에 대한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두 기록과 단기고사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후박달나라는 건국된지 2,096년 계해(B.C 238) 붕괴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확실하다.

 

이렇게 후박달나라가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제후들은 제 각기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며 독립을 추구하게 되니 후박달나라는 붕괴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후박달나라가 나라다운 기능을 하지 못하고 흔들리니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해모수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한단고기의 여러 기록을 통해 철저히 고증해보기로 한다.

 

안함로의 삼성기전 상편에는 임술(B.C 239)년 진나라 시황때 신인이신 대해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일으켜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말엽의 학자이자 도원수를 지낸 행촌 이암(1298~1361)이 지은 단군세기에는 임술 57(B.C 239) 48일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라고 하여 삼성기전 상편과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여 놓았다. 계속해서 단군세기는 고열가 단군 계해(B.C 238) 58년 조에 이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도읍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랑왕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며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라고 하여 삼성기전 상편과 단군세기 고열가 단군 임술 57년 조와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여 놓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단기고사와 한단고기, 삼성기전 상편, 단군세기 고열가 단군 임술 57년 조, 그리고 계해(B.C 239) 58년 조의 기록들은 후박달나라 종실인 대해모수가 옛 도읍지 웅심산에서 군대를 일으켜 천왕랑이라 칭하며 후박달나라에 강력을 압박을 가하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또 이 기록들은 해모수가 북부여의 시조이며, 해모수는 고리국 출신이라는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신단실기 부여 편을 보면 아래와 같다.

부여의 조상은 단군에서 나왔으며, 북쪽으로 옮겨가서 부부여가 되었다. 해로 성을 삼으니 대개 단군이 둘째 아들을 남은 땅에 봉해주고 후세에 와서 부여라 불렀다. 혹은 말하기를 부여는 처음 군을 봉한 이름이라고 한다.(전해오는 역사는 없다.) 2399 임술 48일에 해모수가 왕에 즉위하여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또 단군이라고도 했다.”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여기서는 북부여에 대한 상세가 아니기에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먼저 부여의 조상은 단군에서 나왔다.”는 내용은 단기고사의 종친 해모수가 옛 도읍지 부여에서 반기를 들어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라 하였다.”라는 기록과 한단고기 고열가 단군 계해 58년 조에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도읍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는 내용의 <종실>과 일치한다. <단군=종실>로서 세 사서의 기록이 똑같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았을 때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는 <후박달나라> 임금가문 즉 지도자 집안의 후손임을 알 수가 있다.

 

다음은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해를 단기 2275, 임술(B.C 59) 48일이라고 삼국유사와 똑같이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북부여 편에는 전환서에 선제 신작 3년 임술년(B.C 59) 48일에 천제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컫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고 하였다. 신단실기나 삼국유사의 북부여 건국년대 <임술 48>이라는 기록을 한단고기나 단기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하지만 신단실기의 <2399>나 삼국유사의 <선제 신작 3(B.C 59)>는 북부여의 건국, 동부여로의 도읍지 이전 후 건국 그리고 고추모의 탄생설과 건국기 등에 따라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불가능한 설이다. 북부여·동부여의 건국과 고추모의 탄생설화, 성장과정, 고구려 건국기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하였을 때 한단고기 기록이 합리적이고 정확하다고 본다. 즉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년도는 후박달나라 제47세 고열가 단군 임술 57(B.C 239)가 정확하다.

 

이제 한단고기 북부여기를 통해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는 과정과 건국년도 그리고 북부여 존속기간 등에 대해 보기로 한다.

 

휴애거사 범장이 지은 북부여기 상, 시조 해모수 단군조를 인용해 보자.

임술 원년(B.C 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귓털로 맏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계해2(B.C 238) 이해 3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칳여 밭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125>

 

이미 이전의 연재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북부여 시조 해모수는 <후박달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옛 도읍지였던 백악산을 습겨가여 빼앗는 등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암은 단군세기 고열가 단군 계해 58(B.C 238)조에서 이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도읍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라고 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여 기록해 놓았다. 물론 당시 해모수가 일으킨 군사반란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후박달나라(단군조선)의 도읍지에 입성하였으며 그곳에서 북부여를 건국하여다.

 

위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편의 인용문에는 해모수가 언제 최초로 군사반란을 일으켰는지 북부여의 건국은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이를 간략하면 해모수는 후박달나라 제 47세 고열가 단군 임술 57(B.C 239)에 웅심산에서 처음 군사반란을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을 점령하고 스스로 천왕랑이라 칭하며 재위에 오른다. 해모수는 백악산을 점령한 이듬해인 고열가 단군 계해 58년에 나라 다스리는 법을 제정하였으며 그 해 316일에는 하늘에 제사를 주관하여 지냈다.

 

인용문에는 해모수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여러 언급들이 기록되어 있다. “천왕랑이라 칭했다.”거나 까마귀 깃털오 모자를 썼다.”, “용광의 칼을 찼다.”, “오룡의 수레를 탔다.”,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었다.”는 것과 같은 칭호나 서술은 아무에게나 할 수 없다. 이는 고대사회에 최대·최상의 예우로써 임굼의 자리에 오른 자, 혹은 올라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던 칭호 및 서술이었던 것이다.특히 인용문의 이 해 316일에 하늘에 제사하였다.”는 것은 해모수가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성공을 한 다음 당시 후박달나라르 완전하게 장악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고대사회는 신정·제정일치의 사회였다. 당연히 오늘날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신정·제정일치에서도 신·제가 정을 압도하는 사회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주관한다.”함은 그가 곧 그 사회, 국가에서 으뜸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후박달나라는 계해(B.C 238)에 제 47세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 당장경으로 옮겨가 아사달산에 입산수도하니 그후 6년간 오가들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하였다. 한단고기 단군세기 고열가 계해 58(B.C 238) 조에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하여 후박달나라는 고열가 단군이 임금에서 물러난 후 6년이나 오가들에 의해 공화정이 실시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이와같이 고열가 단군이 물러난 후 후박달나라가 6년 간이나 공화정이 실시되면서 지도자가 없는 혼란이 지속되니 이에 웅심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을 점령하고 전권을 장악한 다음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단군은 후박달나라의 전 영토를 평정하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떨쳐나서게 되었다. 당시 해모수가 일어나 후박달나라 도읍지에 입성하는데 대해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에서는 기사 8(B.C 232)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가서 엣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로써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는 고열가 단군 임술 57(B.C 239) 웅심산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후박달나라의 고도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한 후 7년 만이 기사 8(B.C 232, 해모수 단군 재위년도임)에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고 만인의 추대를 받아 단군에 오르니 드디어 후박달나라의 전 영토와 만 백성을 이끌게 되었다. 실제로는 이때가 후박달나라를 이은 북부여라는 국가가 완성된 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북부여 건국년대는 임술(B.C 239)년이 기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나 신단실기의 기록된 전한서에 선제 3년 임술년(B.C 59) 48일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라거나 “2399(단기 2275 후박달나라 첫 임금이 탄생한 햇수임-필자주) 임술 48일에 해모수 왕이 즉위하여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또 단군이라고도 했다.”라고 하여 북부여가 해모수에 의해 임술(B.C 59)년에 건국이 되었다고 기록된 것과는 달리 한단고기와 단기고사에서는 그보다 세 갑자 올려잡은 임술년(B.C 239)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신빙성을 고증하기 위하여 한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 단군 조에 기록된 대외 항쟁사를 몇가지만 인용해 보도록 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 계속해서 연재하고자 한다.

 

201834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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