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화 가꿔가기 54] “함흥농마국수”와 “함흥냉면”의 공존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9/30 [11:36]  최종편집: ⓒ 자주시보

 

남북 평화분위기가 이뤄지면서 북을 알리려는 글들이 많이 나온다. 동기야 어떠하던지 그 노력은 일단 높이 평가해야겠다. 단 열심히 썼음이 확연히 알리는 글들에서도 부족점이 보이곤 하여 유감스럽다. 

며칠 전에 북에는 없는 “함흥냉면”이 남에서 생겨난 사연을 다룬 음식칼럼을 보았다. “북한 농마국수, 남한서 함흥냉면 되다”는 결론은 정확했다. 그를 위해 들인 품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함흥냉면”이라는 단어가 북에서 거의 쓰이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동신문》 창간해인 1946년부터 현재까지 “함흥랭면”을 검색했으나 한 건도 나오지 않았고,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북에서 나온 조리 책들에서도 “함흥냉면 조리법”은 없었다고 자신 있게 단언한다. 헌데 함흥에서 제일 유명한 국수집인 신흥관을 소개하면서는 탈북자의 이야기를 거드는데 그쳤다. 

 

“북한 평양냉면 대표 식당이 옥류관이라면 농마국수를 대표하는 식당은 함흥에 있는 ‘신흥관’이다. 

신흥관은 1976년 6월 1일 문 열었다. 대한민국에서 발간되는 잡지 ‘북한’ 1996년 5월호에 실린 ‘두고 온 내 고향-함경남도 함흥’편에는 함흥 출신 탈북자의 함흥에서 먹는 냉면 이야기가 나온다. ‘함흥시에서 1970년대까지는 8•15 이전의 법원이 있었던 자리 부근에 ‘반룡국수집’과 다른 곳의 ‘룡마국수집’이 국수를 제일 잘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으나 1970 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반룡국수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흥관’이 세워졌는데 북한에서 냉면을 제일 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신흥관에는 8•15 이전부터 힘흥에서 국수를 해오던 ‘똥데노친’이라고 알려진 할머니 한 분이 함흥냉면의 진맛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똥데노친은 1988년에 사망하고 현재는 ‘성아마이’라고 하는 할머니가 함흥냉면의 진맛을 내고 있다.’”

 

무척 아쉬웠다. 필자가 2014년 11월 9일에 발표한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253편 “소설 속의 함흥 국수”는 함흥 신흥관의 사진과 장편소설 2부, 단편소설집 1부의 표지사진들을 곁들이면서 소설 속에서 그려진 함흥 농마국수와 그 요리사를 소개했고 글 뒤에 2014년 10월 18일자 《노동신문》 기사 “농마국수로 소문이 자자한 신흥관”(오철훈 기자)를 첨부했다. 음식칼럼니스트가 노동신문 데이트베이스에서 “신흥관”이나 “농마국수”로 검색했더라면 독자들에게 훨씬 풍부한 자료를 제공했을 텐데... 

 

▲ 함흥 신흥관과 함흥 농마국수가 나오는 소설들     © 자주시보,중국시민

 

예전의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시리즈를 지금 인터넷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글에서 인용했던 소설 속의 일부 대목들을 다시 소개한다. 

장편소설 《등대》(리북명 지음 문예출판사 1975년 7월 출판발행, 431쪽)에서는 일제강점시기 함흥일대에서 노동자들이 일제와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서, 국수는 공작원 김석호가 비료공장이 있는 사하지구에 잠입하기 위해 항일유격대를 떠날 때 김일성 장군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대목에서 나온다. 

 

“본래 사하지구는 살기 좋은 고장이였소. 사철 푸르게 출렁이는 동해바다를 끼고 있어 신선한 물고기를 늘 먹을 수 있고, 입에 한번 넣으면 한사발을 다 먹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다는 함흥국수 또한 유명하오. 함경도사투리가 경상도사투리에 못지 않게 세서 사람들이 외견상 뚝한데가 있기는 하지만 소탈하고 생활력이 강하고 뚝심이 있어 한번 사귀면 틀림이 없을거요. 하루빨리 함경도사투리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오.”(124쪽) 

 

다음 총서 “불멸의 역사”중 장편소설 《번영의 길》(박룡운 지음, 문학예술출판사 2001년 11월 출판발행, 572쪽)은 1950년대 전후 복구건설을 다뤘는데, 함흥국수는 1954년의 어느 날 김일성 수상이 함흥 역전에 세운 열차 안에서 소련공산당 기관지 《쁘라우다(프라우다, 뜻은 “진리”)》의 조선특파기자를 접견하고 인터뷰를 받다가 식사하러 가서 소개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여기 함흥에는 <함흥똥똥이>란 사랑스러운 별명을 가진 30안팎의 한 녀인이 있습니다. 그 녀인은 농마국수를 잘 말기로 소문이 났는데 함흥에 한번 왔다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 녀인이 만 국수를 먹는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그 녀인이 우리가 함흥에 내려왔다는 것을 알고 오늘 점심에 이름난 함흥농마국수를 말아오겠다고 우리 동무들에게 간절히 청원했다고 합니다. 꼴랴꼬브동무는 우리나라 국수를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289) 

 

《평양국수를 먹을 때에는 간장, 식초, 고추가루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 들여온 함흥농마국수에는 양념장을 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양념장을 들여온 것 같은데 이것은 우리나라 북쪽지방의 풍습이기도 합니다. 자, 국수를 드시오. 오래 두면 국수오리가 풀어집니다.》(291쪽) 

 

단편소설집 《봄날의 미소》(한익훈 등 지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5년 2월 출판발행, 215쪽)에 실린 김길환의 작품 《돌아온 길》(83~ 105쪽)은 1980년대에 함흥 신흥관에서 일하던 여성 요리사 유정녀가 평양 옥류관으로 소환(전근)되었다가 건국기념일(9월 9일) 경축연회를 8일 저녁 치른 다음 그날 밤으로 함경남도로 돌아가게 되어 평양- 함흥 기차에서 지난날을 회억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워낙 함흥시의 동흥산 기슭에서 자그마한 국수집을 경영하던 유정녀는 전후 복구건설시기 김일성 수상이 함경남도에 와서 현지지도를 진행하는데, 전쟁으로 변변한 집이 한 채도 남지 않았으므로 역전에 세운 열차에서 숙식한다는 말을 듣고 “그런 일이 이곳 시민인 자기의 잘못으로 빚어진 듯 가슴이 저려와 일손을 잡지 못했”(86쪽)다가 시원한 국수라도 대접하고픈 충동이 일어나 열 그릇 분의 국수를 만들어서 함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부리나케 역전으로 달려간다. 헌데 김일성 수상이 흥남비료공장 복구문제 때문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교복 입은 소년 하나가 사연을 들어보고 오후 3시에 다시 와달라고 한다. 다시 국수를 만들어가지고 가서 넘긴 유정녀는 얼마 후 소년의 안내로 김일성 수상과 수행원들이 있는 방으로 간다. 김일성 수상의 물음으로 유정녀는 자신의 인생경력을 길게 이야기한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다음부터 부전산골을 떠돌아다니면서 잔디떼를 떠서 팔기도 하고 장진강발전소 공사장에서 고역을 겪던 이야기, 7살 때 가난한 화전농의 민며느리로 들어가 부자집 아이보개와 삯빨래질로 목숨을 근근히 이어가던 중 온 식구가 장질부사에 걸려 겨우 혼자 살아남은 이야기, 14살에 다시 함흥시내에 시집을 와 가난한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고구마를 구워 팔기도 하고 국수를 눌러 팔기도 한 사실을 숨김없이 말씀드렸다. 그는 ******께서 자기의 긴 사설 같은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어주시는데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남편이 43년도에 목단강 쪽으로 벌이를 떠났는데 해방되기 전해에 토목공사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지금까지 아이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산다는 이야기까지 하였다.”(93~94쪽) 

 

김일성 수상은 유정녀의 하소연을 주의 깊이 들어주었고 노동자들을 위해 국수를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하여 며칠 뒤 유정녀는 들끓는 복구현장으로 국수를 날라 가면서 주동적인 이동봉사를 시작한다. 

첫 번째 회억은 양덕 역에서 끝난 다음 급행열차가 다시 움직이면서 유정녀의 생각은 30여 년 뒤로 넘어온다. 국수집은 국영식당으로 신흥관으로 변하여 최신설비로 꾸려졌고, 현장으로 국수를 날라가는 이동봉사는 굳어진 습관으로 됐으며 소년 김정일은 지도자로 성장하여 현지지도차로 함흥에 온다. 유정녀는 지도자에게 국수를 대접하려고 열심히 준비했으나 지도자는 어느새 용성기계공장으로 가다나니 헛방을 친다. 하여 유정녀는 자신이 분초를 쪼개며 수고하는 수령과 지도자 가까이에 가서 제때 제때에 국수를 말아드릴 생각을 하지 못한 걸 뉘우치면서 꼭 평양에 올라가야겠다고 결심했고 드디어 옥류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뜻밖에도 되내려오게 되었다. 

두 번째 회억이 끝남과 더불어 열차는 함흥역에 도착한다. 지배인이 유정녀를 반겨 맞더니 도당책임비서가 기다린다면서 그녀를 곧장 승용차에 태우고 신흥관으로 달려간다. 숱한 직원들과 노동자들이 꽃다발을 들고 유정녀를 축하한다. 도당책임비서가 그녀를 맞아 식당으로 들어가 굉장한 연회석의 중심좌석에 앉힌 다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낭독한다. 오랫동안 사회급양부문에서 노동계급과 근로자들을 위해 숨은 노력적 위훈을 세운 유정녀에게 공훈요리사 칭호를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열렬한 박수가 지나간 뒤에 책임비서는 증서를 유정녀에게 주고 노력훈장을 가슴에 달아주더니 변화의 내막을 공포한다. 

전날 저녁 국경일 경축연회가 끝나자 휴게실에서 김정일 지도자가 책임비서를 가까이로 불러서 오늘 저녁 국수 맛이 신흥관 요리사 유정녀 아주머니가 만든 것과 신통히도 같은데 누가 했느냐 묻기에 책임비서가 바로 유정녀가 만들었다면서 본인도 제기하고 함흥사람들의 심정도 그렇고 하여 자기들이 유정녀를 옥류관으로 소환했음을 설명하니, 김정일 지도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유정녀 아주머니는 그럴 수 있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동무네가 일을 옳게 처리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한다. 

 

《함흥은 로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우리가 그곳 로동계급의 기쁨을 가져오면 됩니까? 농마국수야 함흥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 아닙니까? 유정녀아주머니를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유명한 료리사가 없으면 로동자와 시민들이 얼마나 섭섭해 하겠습니까.

…… 

유정녀아주머니는 지금껏 함흥에서 로동자들을 위해 일해 온 공로 있는 료리사입니다. 신흥관이라고 하면 먼저 그를 생각하게 됩니다. 래일은 명절인데 빨리 내려 보내도록 하시오. 환영조직도 잘 해주시오. 그는 공훈료리사칭호를 받을 만 합니다. 그 아주머니는 여태까지 남에게 봉사만 해왔지 남의 봉사는 못받아 본 녀성입니다.》(103~104쪽) 

 

그리하여 유정녀는 되돌아오게 되었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은 유정녀는 국수를 더 맛있게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소설은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명절의 밤거리로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소설 내용을 소개한 다음 필자는 이렇게 썼다. 

 

“소설은 한 요리사의 지역 간 이동을 다루면서 《돌아온 길》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따져보면 김정일 지도자의 처사는 조선이 수십 년 동안 일관적으로 견지해온 원칙에 부합된다. 즉 첫째로 지방특색을 여러 모로 보존할 것, 둘째로 거대도시의 출현을 방지할 것. 

조선에서 제일 큰 평양의 인구가 200만을 윗돌아 총인구의 10% 정도임은 잘 알려진 바이고, 지방들에서는 대도시로 불리는 도시랬자 고작 수 십 만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화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적당히 제한하여 도시와 농촌의 비례를 조화롭게 만들자는 의도가 숨어있지 않을까?

김정은 시대가 시작된 다음 조선이 관광업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키는데, 지금까지는 반도 동북부로 들어가서 나진까지나 다녀오는 정도에 그치지만 이제 원산- 금강산관광지구까지 여행코스가 늘어나면 중도에 있는 함흥에도 가보는 외부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언젠가는 전설적인 함흥국수를 먹어보기를 기대한다. “함흥 똥똥이”는 없더라도 그 제자와 제자의 제자들이 맛있는 국수를 만들어 내놓으리라고 믿으면서. 

그리고 반도 남반부와 해외의 사람들도 진짜 함흥국수를 맛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당분간 실현하지 못하는 이들은 필자의 글을 통해 상상이라도 하시라. 모든 발명이 상상에서 나온다면 모든 좋은 일 또한 상상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북과 남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남에서 “함흥냉면”을 만든 사람들은 함흥농마국수를 제일 잘 만들었던 “함흥똥똥이- 똥데노친”과 인연이 없어 보이고 따라서 국수 맛도 다르리라 짐작된다. 칼럼에 의하면 부산에서 제일 먼저 “함흥냉면”이 나왔다는데 북도 사람 구미에 맞던 국수를 남도사람 구미에 맞추면서 많은 변화가 생기지 않았겠는가. 함경도 국수에서 파생된 연변(옌변)조선족자치주의 냉면도 서울에 가니까 “연길냉면”이라고 간판은 달았으나 연변 출신 조선족들은 연길에서 먹는 연길냉면과 맛이 전혀 다르더라고 푸념하는 판이니까.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지금까지 “함흥농마국수”도 “함흥냉면”도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더욱 유감스럽게도 두 가지 음식을 다 맛보고 비교한 글마저 보지 못했다. 필자의 입맛대로는 아마 함흥농마국수가 맞을 것 같다. 

한국식 짜장면을 먹어온 한국인들은 중국에 가면 원조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고 잔뜩 기대했는데, 산둥성(산동성) 식 짜장면이나 베이징식 짜장면을 먹어보니 실망스러웠다는 식의 글을 꽤나 썼다. 한편 중국의 조선족들과 한족들은 한국식 짜장면이 맛이 없더라는 말을 곧잘 한다. 한식이 중국에서 꽤나 퍼졌음에도 한국식 짜장면은 아직도 별로다. 허나 누가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해서 수십 년, 수백 년 세월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음식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함흥냉면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함흥농마국수에 습관되지 않는다 해서 함흥농마국수가 사라지지 않을 테고, 함흥농마국수의 원래 맛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흥냉면을 악평한대서 함흥냉면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함흥농마국수에서 함흥냉면이 생겨난 건 전쟁 때문이지만, 이후에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고 통일되더라도 어느 것이 진짜냐를 따지지 말고 새로운 음식이 하나 늘어났다는 열린 마음으로 대하면 두 가지 국수의 존재가치가 돋보이게 될 것 같다. 

전날 첨부했던 《노동신문》기사를 다시 첨부한다. 위의 신흥관 사진도 기사에서 나온 것이다. 

 

첨부자료 1종: 농마국수로 소문이 자자한 신흥관 

2014년 10월 18일자 《로동신문》기사 

 

평양의 옥류관이라고 하면 고기쟁반국수가 유명하듯이 함흥의 신흥관은 농마국수로 전국에 소문이 자자하다.

달고 시원한 국수물도 좋지만 실같이 가느다란 국수오리들이 고무줄같이 질긴 농마국수의 맛은 독특하기 그지없다. 그러기에 신흥관의 농마국수와 관련한 재미나는 일화들도 적지 않다.

《신흥관》이라는 이름은 우리 ***께서 지어주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년전 *** ***께서는 동흥산 기슭에 조선식합각지붕을 건듯 떠이고 솟은 신흥관을 돌아보시면서 새로 일떠섰다는 의미에서 《신흥관》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친히 그 이름을 지어주시였다.

신흥관은 *******들의 크나큰 은정 속에 여러 차례 개건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였다.

해방직후 자그마한 국수집이 전쟁이 끝난 이듬해 반룡국수집(당시)으로 되였다.그때 종업원수는 15명, 수용능력은 한번에 300명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 ***의 따뜻한 손길아래 신흥관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여 1976년에 완공되게 되었다. 하여 연건축면적이 5천여㎡, 좌석수는 800석,12개의 대중식사실과 2개의 주방을 가진 큰 봉사기지로 변모되였다.

1978년에 다시 봉사기지능력확장공사가 진행되여 건축면적과 연건축면적이 종전보다 1.7배 늘어나고 수용능력도 훨씬 커지게 되였다.

하지만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신 우리 ***께서는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해인 2011년 함경남도를 현지지도하시면서 신흥관의 실태를 료해하시고 더 잘 꾸릴 데 대한 과업을 제시해주시였다. 그날 *** ***께서는 개건확장공사와 봉사활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들도 다 풀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결과 현대적인 인민봉사기지로 훌륭히 꾸려진 오늘의 신흥관은 공업도시 로동계급과 인민들의 문화정서생활과 식생활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인민군군인들과 탄부들,농민들,어로공들,공장,기업소들의 기술자, 로동자들은 물론 안변청년발전소, 광명성제염소를 비롯하여 수많은 중요대상과 단위들에 이동봉사를 진행한 사실은 인민의 사랑받는 봉사자로 살며 일해 나가려는 이곳 종업원들의 헌신적 복무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신흥관은 중요 국가연회와 대외봉사장소로도 리용되고 있다.

조국해방 50돐을 경축하는 연회,*** ***의 은정어린 사랑 속에 마련된 함경북도, 량강도안의 군인가족예술소조원들에 대한 연회가 신흥관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또한 전국일조우호촉진의원련맹대표단을 환영하는 연회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 대표단들과 전 쏘련국방상 야조브가족일행,로씨야모이쎄예브국립아까데미야민속무용단 그리고 수많은 해외동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신흥관에서는 봉사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이 조직된다.

매일 국수물품평회가 열리고 주마다 어떤 주에는 감자음식품평회,고기,물고기료리품평회,또 다른 주에는 남새료리품평회 등이 진행된다. 특히 농마국수의 질을 부단히 개선하기 위한 사업이 기본으로 되고 있다.

봉사가 일단 시작되면 일군들이 앞장에 서서 인민들에게 농마국수의 질이 어떠한가를 알아보며 그들의 요구를 원만히 충족시키기 위해 대책을 세워나간다.

전쟁로병, 영예군인들에 대한 농마국수봉사가 매일 진행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료리사들은 감자만으로 100여 가지의 료리를 만들고 있다. 그 가운데는 감자과자, 감자차,감 자막갈이국수, 감자3색경단, 감자꽈배기 등이 있다.

명절날 신흥관은 초만원을 이룬 손님들로 흥성인다. 그럴수록 봉사자들은 손님들의 얼굴에 한껏 피여나는 웃음꽃 속에서 인민의 참된 복무자로서의 긍지를 느끼군 한다.

지난 기간 료리사들은 전국적인 료리축전에서 자기들의 실력을 잘 보여주었다. 제11차,제12차, 제15차 4월의 명절 료리축전(당시)들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제13차 때는 3명의 료리사들이 1등을 쟁취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신흥관에서는 여러명의 공훈료리사와 공훈접대원들이 배출되였다.

신흥관 종업원들은 군중문화예술활동을 적극 벌려 전국적으로 진행된 로동자예술축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적도 있다. 그리고 중요대상건설장들에 달려나가 힘 있는 경제선동으로 건설자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속에는 신흥관에 와보아야만 맛볼수 있는 특색있는 료리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여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봉사기지로 되게 하려는 열정이 차넘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농마국수의 진맛을 보려거든 우리 신흥관으로 오시라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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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은 구더기 밥 18/09/30 [17:46]
신흥관은 국숫집이 아니라 궁전이구먼. 국수 먹으러 비행기 타고 함흥에도 가봐야 하니 좀 바빠지겠어.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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