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김일성 부대가 가짜일 수 있나!
<광복60주년기념 만주항일유적답사> 홍기하 전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05/08/30 [19: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홍기하전투지휘처

중국정부에서 지휘처를 기념하여  절벽에 세운 기념비, 기념비 뒤 바위에 홍기하전투 김일성 주석 지휘처가 있었다고 한다.


 


역변역사연구소 리광인 부장의 설명에 의하면 홍기하 전투는 일제 시대 만주에서 김일성 부대가 벌린 마지막 대규모 전투라고 한다.
김일성 부대와 중국의 항일 부대들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1940년대 후반기부터 국제당의 요청에 의해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들어가 소부대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홍기하전투가 일제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으며, 조선과 중국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힘을 주었던지, 청나라 시절 많은 사람들이 사금을 캐며 꽂은 홍색 깃발이 강을 이루었다고 해서 홍기하라고 붙여졌던 이름이, 전투에서 죽은 일제의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가 강을 이루어서 그 이름이 홍기하가 되었다고 후손들이 지명의 유래마저 바꾸어 인식할 정도였다.
홍기하 전투는 마지막 대규모 전투라는 특징도 있지만 김일성 부대가 이끈 전투라는 가장 명확한 근거자료가 남아있는 전투이다.
홍기하전투를
<사진:홍기하전투를 소개하고 있는 연변일보 05년5월27일자 3면>
화룡현에서 깊고 깊은 밀림을 뚫고 난 임업도로를 따라 90킬로미터를 가니 홍기하 골짜기가 나왔다. 골짜기에는 깍아지른 절벽이 있어 매복전을 펴기에 안성마춤이었다. 김일성 장군이 지휘처로 이용했다고 하는 절벽의 바위 앞에는 화룡인민정부에서 세운 목판 기념비가 서 있었고 골짜기 앞에는 화강암으로 번듯하게 깍아세운 홍기하전투전적비가 서 있었다.

김일성 장군이 지휘한 다른 전적비에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명칭이 없이  그저 동북항일연군이라고만 표현하고 있는데 이 홍기하전투기념비에만은 ‘김일성장군’이란 이름을 분명하게 새겨 넣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홍기하
<사진: 홍기하 전투 기념비>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장군은 이곳에서 항일무장부대를 지휘하여 유인매복전으로 일위‘마에다경찰토벌대’를 소멸하였다.” 
 화룡현 인민정부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세움
 
이것이 비문의 전문이다. 필자가 리광인 부장게세 홍기하 전투를 김일성 장군이 지휘했다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홍기하 전투가 김일성 장군이 이끈 전투라는 근거자료는 무수히 많이 있다고 하며 서너 가지 자료를 알려주었다.



기념비



기념비 뒤면에는 김일성 부대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중 하나만 소개하자면 ‘김일성 부대’라는 글자가 쪼아박혀 있는, 일제가 직접 만든 비문이다.
 
1982년 10월 화룡현 부흥향 청산촌 위만 경찰분주소 낡은 집터에서 돌비석이 발견되었는데 한백옥으로 쪼아 만들어지고 높이 90, 너비 18, 두께 14센티미터였다.
이 비석은 위만 강덕 10년 경장 훈 8위 리홍재를 위해 세운 것이였다.


이 비문에서 1940년 3월25일 홍기하 전투의 형평을 기술하여 이르기를 “강덕 7년 3월 25일 16시 만주국 간도성 안도현 대마록구 서부 악 25킬로미터의 밀림지대에서 토벌활동을 벌릴 때 갑자기 김일성 부대 200여명을 만났다. 마에다 중대장 이하 전체 관병들이 적들의 포위협공과 지형의 불리에도 마다하고 용감하게 몇 시간의 격전을 벌리였다.”, “마에다는 불행히 적들의 탄알에 적중되였다.”라고 적고 있다.
리홍재는 친일주구 중에서 좀 높은 급이었나 보다. 그래서 일제는 그를 추모하는 비를 세워주었고 그 비문에 친일 경찰들과 일본 경찰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며 영웅적(?)으로 싸웠는지를 기념하기 위해 이런 비문을 박아넣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김일성 부대가 일제를 격멸했다는 사실만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겠다.

물론 김일성 부대가 마에다를 격멸한 전투가 꼭 홍기하 골짜기에서 일어난 전투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제는 친절하게도 이 의문도 풀 수 있는 비석을 남겨두었다.


 

일제가



일제가 마에다를 추모하여 홍기하골짜기에 세운 현장비, 연변일보 5월 27일자 3면


 


연변의 역사학자 김철수씨가 홍기하전투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1982년 4월, 홍기하전투가 일어난 곳에 일제가 세운 돌비석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폭파해버렸다는 것을 한 임업일꾼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그는 현장의 풀밭을 샅샅이 뒤져 끝내 비석 쪼각 3개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맞추어 놓으니 한쪼각이 비록 모자라기는 했지만 새겨진 글은 모두 있었다. 거기에는 ‘마에다중대격전지지(마에다중대가 격전한 장소)’라고 새겨져있었다. (연변일보 5월 27일 3면 ‘홍기하에서의 대승리 중에서’


이것은 일제가 직접 마에다 중대 격전지가 홍기하 골짜기라는 것을 입증한 것으로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일제가 이렇게 두 개의 비석으로 김일성 부대가 마에다토벌대를 소멸했다는 것과 그 마에다토벌대가 전투를 치른 격전지가 홍기하골짜기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정말 이런 실증자료가 있음에도 ‘가짜김일성’설이 계속 떠도는지 한번더 두고 볼 일이다.
다음은 리광인 부장이 홍기하 전투가 얼마나 박진감 넘친 전투였는지를 설명한 내용이다. 어법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리광인 부장의 것을 따른다. 내용은 리광인 부장이 자체로 조사한 것이어서 북의 주장과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다. 
 

국내 무산지구로 진출하여 대흥단에서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항일연군(중국과 조선의 연합반일군대) 제 1로군 제2방면군은 김일성장군의 지휘 하에 1939년 5월 23일 유유히 두만강을 건너 화룡 땅에 들어섰다.
혼비백산한 위 “화룡현 경무과”는 위 “길림성 경무청”의 긴급명령에 따라 급급히 토벌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올기강 전투(백일평 전투)에서 그들은 무리죽음을 면치 못했다. 올기강에서 당한 후 일제는 화룡현경무과 청구에 의해 “연합토벌대”까지 조직하였다. 이 연합토벌대대의 기본역량은 화룡, 훈춘, 연길의 경찰들로 이루어진 3개 중대로 구성되어 1939년 9월부터 11월까지 두 달 동안 밀림을 헤매고 다녔으나 김일성장군의 신출귀몰하는 전법에 말려들어 번번이 헛물만 켜고 말았다. 결국 훈춘과 연길의 경찰 중대는 본영으로 돌아감으로써 ‘연합토벌대’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룡현경무과의 마에다 중대는 기어이 김일성 부대를 잡아보겠다고 날뛰었다. 마에다는 일게 중대장의 직책이었지만 악랄성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홍기하 전투를 한 달 가량 앞둔 그 무렵, 제 2방면군부대는 무송현 백석탄 밀영 군정학습을 하다가 밀영으로 기어든 적들을 본때스레 답새기고(본때 있게 혼쭐내고) 백색지대를 지나 안도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도중에 로수하에서 또 한 차례의 전투를 하고는 두도백하 이도백하, 삼도백하를 가로 질러 안도현 남단으로 빠지었다. 화룡현 장산령인 대마록구 부근에 이르니 식량이 결단나고 의복과 신발도 볼품없었다. 의복과 식량준비 임무를 맡았던 림수산이란 자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그런 추위와 굶주림에 고생해야 했던 것이다. 


 

대마록구



대마록구 절벽의 진달래, 김일성부대가 저진달래처럼 절벽위에 매복해있다가 일제를 족쳤다고 한다.


큰말사슴골이라는 뜻의 대마록구는 적 ‘토벌대’의 본거지로써 평소 삼림경찰중대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주밀한 정찰을 거쳐 대마록구에는 50명의 삼림경찰이 남아 수비하고 나머지는 청산리쪽으로 ‘토벌을 나갔다는 것과 삼림경찰중대의 자동차로 매일 림장과 중대본부사이를 오가며 목재를 운수하고 있다는 것이 실증되었다 김일성 장군은 대마록구를 쳐서 후방물자(생필품)를 해결하기로 작심하였다.


대마록구
<사진: 대마록구 전투 기념비>
1940년 3월 11일 저녁 8시경에 제2방면군부대는 김일성장군의 지휘하에 대마록구를 불의에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대마록구본부에서 외계로 통하는 전화선을 차단하고 자동차가 오가는 길목에 매복했다가 적들의 자동차를 기습하고는 그 자동차에 앉아 곧추 삼림경찰대본부로 향하였다. 적보초병들은 의심도 하지 않고 들여보냈다 .제2방면군전사들은 번개같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삼림대본부를 포위하였다.

이날 저녁 불의의 습격으로 적 10여명을 살상하고 10여상자의 탄알과 경기관총 1정, 보총 10여 자루, 숱한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로획물자가 하도 많아 전사들이 한 짐씩 지고도 남았다. 수십 명의 목재소 노동자들이 너나없이 짐을 지고 따라섰다.
항일련군 김일성 부대의 대마록구습격소식은 적들을 놀래웠다. 안도와 화룡일대의 적들은 피눈이 되어 김일성 부대를 잡아보겠다고 날뛰었는데 화룡현경무과 과장 우나미와 마에다가 보다 그러했다. 이자들은 인차(곧) 70여명의 경찰과 신선대 50여명, 20여명쯤의 삼림경찰과 300여명의 위만군 등으로 로 ‘토벌대’를 뭇고 삼도구(화룡)에서 출발하였다.
김일성 장군은 언녕 이를 예견하고 한 개 소부대성원들과 로획물자를 지고나선 목재소 로동자 40여명을 대마록구로 되돌려 보내면서 발자취를 남기도록 지시하였다.
주력부대는 명령에 따라 발자국을 지우면서 반대방향으로 떠났다. 주력부대는 화라즈에서 몇 리 떨어진 홍기하의 서북방향 대마록구 상류의 한 협곡지대에 밀영을 설치하고 군정학습을 하는 한편 휴식하면서 피곤을 풀었다. 적토벌대는 산속에서 헤매다가 발자국을 따라 대마록구쪽으로 가보았으나 헛물만 켜고 말았다.
일부러 추운 산속을 헤매게 해서 힘도 빼놓고 토벌대놈들을 흥분시켜 자제력을 잃게 하자는 김일성 장군의 의도가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1940년 3월 25일 항일련군 제2방면군은 다시 대마록구 방향으로 진출하여 발자국을 찍었다. 적들은 매일같이 산속을 헤매다가 드디어 김일성 부대의 행방을 탐비하고 뒤를 물기 시작하였다. ‘토벌대’에 인부로 뽑힌 두 농민에 의해 적 ‘토벌대’가 150명 가량 되고 그 뒤에 위만군 중에서도 악질적인 정안군 300여명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일성 장군은 화라즈까지 뒤를 물고 따라온 적들이 다시 본부로 돌아가자면 반드시 홍기하 골짜기를 지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적 토벌대를 홍기하 골짜기에서 소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곤 적들을 유인하기 위해 부대를 거느리고 골짜기를 따라 한참 내려가다가 왼쪽켠의 산릉선을 타고 다시 상류쪽으로 올라갔다. 상류를 향한 오른쪽에는 삼형제를 방불케하는 3개의 봉우리가 솟아있었다. 골짜기 왼쪽에도 봉우리가 있고 그 기슭에는 수림까지 있어 매복전을 벌리기에 알맞춤이었다.

김일성 장군은 이곳에서 지휘부 모임을 가지고 기관총 소대와 경위중대, 지휘부는 골짜기 오른켠의 3개 봉우리에 배치하고 7퇀(7연대)와 8퇀(8연대)의 주력부대는 왼켠 봉우리의 변두리 수림속에 배치하기로 하였다. 골짜기의 첫 고지북쪽과 골짜기 끝에는 차단대와 방차대(지원병을 막기 위한 부대)가 배치되었다.


 

홍기하의



홍기하의 골짜기, 이 위에서 저 아래 일본 토벌대를 향하여 몰사격을 퍼부었다고 한다.


 


보리저녁 때에(해가 퍼그나 기울어진 때) 적 척후병이 홍기하 골짜기에 나타났다. 그 뒤에 신선대(조선사람들로 이루어진 방패막이 군대) 놈들과 토벌대의 주력이 줄레줄레 따라썼다. 김일성 장군은 척후병과 신선대놈들이 지나치도록 내버려두었다.
토벌대의 주력 앞머리가 매복권 안에 깊숙이 들어설 때 군도를 찬 마에다 중대장이 골짜기에 들어섰다.
마에다가 한그루 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추자 부하장교들이 모여들었다. 마에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지시를 줄 때 ‘토벌대의 주력부대가 전부 매복권 안에 들어섰다.


이때 김일성 장군은 사격신호를 내리었다. 아군진지에서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여러 문의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슈류탄이 적진으로 연해연방 날아갔다. 김정숙, 김선 등 녀전사들도 녀전사들도 뒤질세라 묘준사격을 들이댔다. 함화(적들의 기를 꺽어놓고 투항을 부추기기 위한 전투중의 선전선동)가 효과를 보아 매복권에서 벗어난 신선대 놈들은 싸울 념을 않고 출행랑을 놓았다.
적진이 수라장을 이룰 때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였다. 아군 전사들은 멸적의 함성높이 남북 량측에서 적진을 향해 돌입하였다. 중상을 당하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군도를 휘두르던 마에다는 황천객이 되고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놈들은 무리로 죽어나자빠졌다. 녀전사들은 “우리는 승리했다!”하고 소리치며 기뻐하였다.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었다. 이날 전투에서 제 2방면군은 김일성 장군의 지휘 하에 적 70여명을 소멸하고 30여명을 투항시키고 ‘신선대’ 놈들은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싸움터를 수색하니 전리품이 기관총 6대를 망라하여 100여 자루의 보총과 권총, 무전기1대, 탄알 수만발이었다.
김일성부대를 소멸하겠다고 기고만장하던 마에다토벌대가 도리어 유인매복전에 걸려 졸지에 풍비박산났다. 먼발치에 있던 정안군 300여명은 달려들 엄두도 못 내고 눈먼 총질만 할 뿐이었다. 김일성 장군은 로획한 기관총 6대를 전부 걸어놓고 정안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퍼붓도록 하였다.
정안군 놈들은 어둠을 타고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적들은 여러 날이 지나고 항일연군이 확실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서야 비로소 마에다의 시체를 삼도구로 옮겨갔다. 다른 시체들은 머리만 베어 몇 대의 마차에 싣고 갔다.

홍기하 전투가 있던 날 저녁 제2방면군부대는 산속으로 전이하여 여러 곳에 우등불(모닥불)을 피웠다. 밀가루로 뜨떡국(수제비로 보임)을 하여 포로들을 대접하였는데 포로거개가 조선인 경찰이었다. 아군은 포로들 속에서 “보라 전장에서 불쌍하게 죽은 것은 조선 경찰이다. 일본놈이 죽은 것은 북과 몇이 되지 않는다. 이제 더는 개목숨을 팔지 말라!”, “항일련군을 따를 사람은 나서라”고 하면서 정면교육을 들이댔다. 포로들이 부모처자 생각해서 나서지 못하겠다고 하니 아군은 그들을 잘 대접하여 길까지 알려주어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였다.
홍기하 전투 위력은 대단했다. 꽁무니를 뺐던 정안군놈들과 포로들의 입을 통해 그 위력은 백배, 천배로 번져갔다. 김일성 장군 부대는 하늘이 보낸 부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반공에 악질적인 김일로까지도 항일련군의 덕분에 겨우 개목숨을 부지하고는 항일련군이라면 진두에 나서기를 꺼리었다.
마에다부대가 쫄딱 녹았다는 소문은 날개라도 돋친 듯 두만강을 날아넘어 조선 땅에도 쫙 퍼졌다. 김일성부대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싸울수록 본때스레 적들을 족치고 있다는 소식은 국내 사람들에게 최대의 힘과 위안이었다. -이상 연변역사연구소 리광인 부장 진술-


 

청산리전투가



독립군에 의한 청산리전투가 벌어졌으며 그 뒤를 이은 항일빨치산들이 활동했던 베게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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