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의 올기강 전투
<만주항일유적 광복60주년기념기행>올기강전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05/08/28 [18:18]  최종편집: ⓒ 자주시보

올기강

올기강 전투유적 기념비, 여기서는 백일평(백리평) 전투기념비라고 적고 있고


 

올기강전투기념비

올기강전투기념비 비문,  한글로 쓰인 마지막 글씨가 '혹은 올기강 전투라고도 칭함'이다.

 

화룡현에서 홍기하 전투 전적지를 가지 위해 천연의 밀림 속을 뚫고 비포장길로 50여키로미터 정도를 가자 올기강 전투 유적지와 백리평(백일평이라고도 함) 마을이 나왔다. 백리평은 화룡현에서 100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백리평 마을은 산골 치고는 꽤 넓은 들을 가지고 있었다.
 
전 연변일보사 기자였고 현재 연변역사연구소에서 일하는 리광인 부장은 바로 이 자리에서 1939년 6월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일본토벌대를 섬멸한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전투를 했던 곳에서 좀 떨어진 마을 입구에 중국 인민정부에서 세운 백일평전투기념비(올기강 전투를 백일평전투라고도 함)가 서 있었다.


1939년이면 동북항일련군 즉 조선인민혁명군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며 일제는 강력한 토벌대를 꾸려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던 때라고 한다.
다음은 리광인 부장이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장군”이란 자신의 저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들려준 올기강 전투의 내용이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우리와 다른 일부의 어법을 그대로 살렸다. 이 글의 내용은 리광인 부장이 직접 당시 전투에 참여한 사람과 마을 사람들을 취재하여 정리한 것으로 일부 내용이 북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고 한다.
때는 1939년 5월 18일, 장백의 5호물동으로 압록강을 건넌 항일련군(조선족들에게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도 했음) 제 1로군 제2방면군(주로 한국사람들로 구성)은 총 지휘 김일성 장군의 지휘하에 조선무산지구에서의 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진행한 후 5월 말에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너들어 오면서 바야흐로 올기강 전투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장군은 제7련대(북에서는 오중흡 연대로 유명하다고 함)를 올기강 서쪽지대에서 활동하게 한 후 직접 경위중대와 8련대 독립대대를 친솔하고 두만강물줄기를 따라 동쪽의 옥돌골, 휘충동일대로 이동하였다.
화룡현 취풍동집단부락의 적 경찰대는 접전도 못하고 꼬리를 뺐다.

한편 적 토벌대는 피눈이 되어 아군의 종적을 밟았다. 김일성 장군은 적과의 로정거리를 따져본 후 배포유하게도 부대를 휘풍동에서 하루밤 숙영하면서 군중정치사업(대중들에세 일제와 싸우자고 선동하고 교양하는 사업)을 벌리도록 하였다. 군중들은 분분히 식량과 신 등을 모아왔고 끓어 넘치는 감격과 환희로 부대를 맞이하였다.
이튿날 이른 새벽, 부대는 군중들과 항일의 승리를 기약하면서 올기강 방향으로 떠났다. 김일성 장군은 피눈이 된 적을 일망타진할 전투구상을 무르익힌 후 두만강 상류의 동경평, 대동, 원봉 등지에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던 7련대를 부르고 전 부대를 백리평 북쪽의 약 10리 거리에 위치한 페문촌 물북 동수구막바지에 집결시켰다.
한편 4명의 정찰조를 파견하여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워낙 백리평에는 적 ‘치안대’ 약 8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자들은 우리 항일련군부대가 휘풍동에서 군중정치사업을 벌린 후 식량 등을 가지고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매일 페문어구의 사금구다리에 가서 기관총을 걸어놓고 40명씩 두 교대로 나누어 다리목을 지키었다.
리철수 등 4명의 정찰대원들은 사금구다리목의 물남 숲속에 숨어 적들의 거동을 면밀히 살피었다. 이때 강압에 의해 ‘공산당정탐’에 나선 그곳 농민 둘이 올기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오후 늦을 녘에 두사람이 돌아서자 정찰조는 그들을 설득하여 부대로 데리고 갔다. 
2명의 정탐꾼은 박씨와 채씨였다. 이들이 말에서 적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적들은 화룡현 지구의 도로요소와 마을 마다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6월 5일 깊은 밤 중 동수구 막바지에 일어선 풍막마다에 식사와 행군준비를 다그치라는 김일성장군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작식대의 녀전사들은 능란한 솜씨로 짧은 시간에 전부대의 식사를 마련했다. 그사이 제8련대 김일(본명이 박덕산이라고도 함) 정치위원이 거느린 정찰조가 먼저 떠났다.
페문
<사진: 페문 마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산, 저 산에 매복하여 있다가 일본토벌대를 멸살시켰다.>
6월 6일 새벽 3시경에 제2방면군의 300여명 대오는 동쪽산 릉선을 타고 물남의 페문어구에 이르렀다. 부대는 적들을 유인하고자 곧 페문의 금전굴주위의 풀들을 짓밟아 놓은 다음 부근의 눅눅한 땅에 매복하였다. (페문마을이라는 말은 올기강전투 이후에 생긴 말로서 전투에 패한 일본 군대가 두려움에 더는 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금전굴은 올기강으로부터 약 200미터 떨어진 길가에 있었다. 올기강 양쪽 기슭에 갈대숲이 우거지고 길이 그 한편으로 뻗어있었다. 길 오른쪽에 산들이 남북으로 가로 놓이였다. 싸우기에 안성맞춤한 곳이었다. 게들
<사진: 들 저편에 올기강이 흐르고 있다. 전투 당시에는 여기가 갈대밭이어서 매복하기에 좋았다고 한다.>
다가 전부대가 풀로써 위장을 하고 있어 가까이에서도 그 정체를 가려보기 어려웠다.
만단의 전투준비가 다 되자 2명의 전사가 백래평 쪽으로 좀 내려가다가 총소리를 내었다,

때는 오전 8시경이었다. 드디어 백일평 쪽에  일본군 지도관 다이노가 거느린 40여명의 치안대가 나타났다. 다이노라는 자는 가슴팍에 아수라(불교에서 말하는 악마)라는 글을 새겨가지고 다니며 ‘아수라’로 자칭하기도 하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올기강을 건넌 놈들은 길어구에서 머뭇거리며 주위지형과 동정을 살피더니 큰 길을 따라 움지럭거렸다.
치안대 경찰놈들은 금전굴 곁에 이르러 문뜩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저기 고개를 기웃거리며 떠드는 품이 짓밟힌 풀들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이때였다. 김일성 장군의 사격신호소리와 함께 아군의 30여정의 기관총과 보총 등이 일제히 불을 토하였다. 가뜩이나 겁을 먹고 주춤거리던 놈들은 듯밖의 불벼락에 혼비백산을 했다. 내꼴봐라 하고 내뛰는 놈, 총에 맞아 나뒹구는 놈, 아우성 치는 놈 등 적진은 대뜸 아수라장이 되었다.
올기강 기슭에는 순식간에 놈들의 시체가 지저분하게 널렸다. 다이노 대장놈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첫 총알에 명중된 놈은 그래도 살겠다고 금전굴로 뒹굴어 떨어졌다가 그곳에 매복하고 있던 전사들에 의해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
이어 돌격나팔소리가 올리었다. 서릿발 총창을 비껴든 2방면군 전사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몇 놈은 도망을 치다가 포로로 생포되었다.
흥분된 한 녀전사가 김정숙대원(후일 김일성 주석의 처)을 보고 “정숙아 우리는 승리했다.”라고 환호성을 울렸다. 이어 “개들처럼 우리 뒤를 자꾸 따르더니 싹 죽었다” 하고 소리치더니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이 전투에서 제 2방면군 부대는 김일성 장군의 지휘하에 40여명의 적을 대부분 살상하고 몇몇을 생포하였으며  기관총 등 적잖은 무기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부대에서는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부상자 여럿을 교육한 후 돌려보내었다. 이에 감화된 적 중대장은 뒤에 대부대가 추격하니 빨리 산에 오르라고 실토하였다. 전사들은 싸움터를 떠나기에 앞서 나뭇가지들에 항일선전삐라들을 걸어놓았다.
올기강 전투가 끝난 후 적들은 일제 수비대와 각지 경찰 600여명을 긁어모아가지고 대토벌을 획책하고 우리 부대에 의해 생금되었다가 풀린 5명중 2명을 공산군 정탐으로 내세웠다.
울며겨자먹기로 정탐에 나선 이들 둘은 산속에서 우리 부대를 찾은 후 다시 오게 된 연유를 낱낱이 고백하였다.

이때 김일성 장군은 “좋다, 한번 더 해보자!”하고 호기 있게 말하면서 돌아가서 빨리 추격해오도록 말하라고 하였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일제수비대 대장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더 해보자!’고 호걸차게 말한걸 보면 이만저만한 모양이 아니다. 이제 다시 나도 다이노신세가 될 수 없다.”
그리고는 대부대를 돌려세워가지고 삼도구 쪽으로 물러가버렸다. 그곳 치안대 놈들도 그 뒤를 따라 도망쳐버렸다
.
(이상 리광인 부장의 진술)

연변일보 2005년 5월 13일 금요일자 3면에도 ‘우리역사 바로 알고 삽시다’라는 특별기획물로 올기강 전투가 소개되었다. 김철호 기자가 쓴 글인데 내용은 위와 비슷하다. ‘김일성’이라는 이름도 분명히 기사에 들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 기사에서는 올기강 전투와 관련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의 한 부분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기강전투를



올기강전투를 소개하고 있는 연변일보


 

 

[적의 대오가 우리의 매복권에 모조리 들어섰을 때 긴 칼을 탄 일본장교가 웬일인지 물도랑 옆에 와서 걸음을 멈추더니 수상한 흔적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적의 종대들은 일제히 행군을 멈추었습니다. 부하장교 몇이 달려와서 물도랑을 들여다보며 고개들을 기웃거렸습니다. 아마 우리 동무들 중 누구인가 거기에 발자국을 냈던 모양입니다.
싸움을 끝내고 전장을 수색할 때 전사한 일본군 장교들의 가슴을 헤쳐보았는데 물도랑 옆에서 우리의 흔적을 맨처음 발견한 긴 칼을 찬 그 장교가 바로 ‘아수라’로 자처하는 토벌대 대장이였습니다.
‘아수라’가 물도랑옆에서 일어서는 순간에 나는 사격명령을 내리였습니다. 우리는 잠깐 사이에 200여명의 적을 살상포로하였습니다. ‘아수라’는 칼집에서 군도를 절반도 뽑지 못한채 물로랑 옆에 쓰러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리광인 부장은 살상포로한 적이 40여명이라고 하는데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서는 200여명을 살상포로하였다고 적고 있어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리광인 부장은 이렇게 자신이 조사한 것과 북의 주장 사이에 수치상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는 부분도 더러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변일보 기자이건, 리광인 부장이건 올기강 전투의 승리가 당시 연변의 우리 민족과 중국 사람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인정하였다. 당시 항일 군중들은 전투의 승리를 열렬히 환호하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련군에 참가하려고 서둘러 부대를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전투소식은 순식간에 두만강 건너 국내에로 급속히 퍼져나갔다고 한다. 김일성 장군의 무용담이 한반도 남단 산골의 개울가 빨래터의 아낙네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전투가 너무나 통쾌했기 때문에 그만큼 소문이 빨리 퍼진 까닭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 전투 유적지가 한반도에 없고 중국 땅에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벌써 이런 유적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깨닫고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씁쓸한 감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김일성 주석의 전투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중국정부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려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가짜 김일성설이 그래서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역사의 강 올기강, 이 강이 소마록구하와 만나 홍기하가 된다. 거기서 일제는 또한번 김일성 부대에게 괴멸당한다.


 


 

필자와



필자와 기념비






광고

트위터 페이스북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