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장군, 100번 싸워 100번 이겼다.
<만주항일유적 광복60주년기념기행2> 왕청유격근거지1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05/08/11 [06: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편집자 주: 광복60주년 기념으로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기획연재로 조명해본다. 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특히 강만길 교수의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이에 1930년대 전반기에 김일성 주석의 주요한 활동근거지로 알려진 소왕청유격근거지를 찾아가 보았다. 여기의 날짜와 수치들 그리고 내용들은 모두 중국 연변역사학자이자 작가인 리광인 선생과 길림성 왕청현 당안국 역사연구소 최금철 소장의 진술 그리고 연변항일렬사전 ‘장백의 투사들’이란 책의 내용에 기초한 것이다. 북한의 주장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왼쪽이

김일성 장군 관련 조사를 했던 두 학자, 왼쪽 리광인, 오른쪽 최금철 



<왕청유격근거지는 어떤 곳인가!>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만주지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민중들의 항거도 거세졌다. 특히 공산주의 계열의 반일운동가들은 이런 민중들의 기세에 힘입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장투쟁을 잘 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육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 군대를 뒷받침할 지역적, 민중적 토대를 구축할 필요가 생겼다. 바로 유격대가 의지하고 일제와 싸울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만특위(동만주 공산당을 총지휘했던 특별위원회)에서는 1932년 초부터 안도, 연길, 왕청, 화룡, 훈춘 의 산악지대들인 왕우구, 해란구, 삼도만, 소왕청, 가야허, 요영구, 어랑촌, 대황구, 연통라자를 등에 유격근거지를 광범위하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1933년 2월 쯤에는 기본적으로 근거지 건설이 완료되어 생활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비행기까지 가지고 있던 일본군은 수적, 장비적으로 유격대와 비교할 수 없이 강했기 때문에 유격대는 개활지에서 일본군과 싸우기에 불리하여 주로 산골 깊숙한 곳에 근거지를 만들고 이 골짜기에 의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특히 왕청은 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높았다. 동만주의 간도지역 동만특위 소속 공산당 당원의 90%는 조선족이었으며 기자가 취재를 간 왕청유격근거지에도 대부분 조선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왕청현 당안국 역사연구소 최금철 소장은 왕청현은 20년대 초기부터 독립운동과 초기 공산당 활동이 활했던 곳이라고 말한다.
그 유명한 홍범도 장군이 왕청현 봉오동 골에서 일본군들을 박살내었으며 그 후에 서일, 김좌진, 이동휘 등이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학교까지 세워 군대를 육성했던 곳이라고 한다.

북로군정서는 일제에게 쫓겨 화룡으로 넘어가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를 벌려 일제강도들에게 통쾌한 불벼락을 안겨주었다. 이후 일제에게 타격을 받고 북로군정서는 해체되었지만 1930년대 들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그 반일투쟁 기상을 왕청 땅에서 다시 이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1920년대 30년대 독립운동이 왕청에서 잘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곳 조선이주민들의 반일기세가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 땅에서 일제시대 초기에 압박을 받다 받다 고통스러운 조선 사람들이 이리 건너왔는데 여기까지 일제가 쫒아와서 고통을 주니 조선족들의 반일정신이 강했지요” 최금철 소장은 이 지역 반일기세가 드세 이유를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주민들의 반일 기상이 강하고 골짜기가 깊어 유격근거지를 만들기에 소왕청 골짜기가 딱이다.
소왕청 골짜기에 근거지를 만든 1500여명의 주민들이 골짜기에 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살았다. 농민협회, 반제동맹, 부녀회, 소년단, 아동단, 적위대 등의 계급·계층별 조직도 묶어 활발히 활동하였고 자체에 병원과 학교도 운영하였으며 병기공장도 두 개나 두었다고 한다.

물론 유격근거지 안의 골짜기 밭만으로는 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먹고 살 수 없어서 유격대 밖 적통치구역의 일본군을 들이쳐서 수시로 전리품을 얻어왔으며 유격근거지와 적통치구역 사이의 중간지대의 벌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려 추수를 해오기도 했다.

소왕청유격근거지



소왕청유격근거지 기념비, 쏘비에트에서 인민혁명정부로 고쳤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초기에는 유격근거지의 정부는 소련과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실시한 소비에트 형태로 건설되었다. 지주나 자본가의 재산을 다 압수해버리고 공동소유 공동생활을 기본에 둔 소비에트정부를 건설했으나 주민들이 반발하여 지리멸렬해지고 반일애국역량을 단결하는데 저해를 가져와 인민형명정부형태로 곧 바뀌었다고 한다. 그 인민혁명정부는 일제에 반대한다면 지주나 자본가도 인정해주고 함께 하려고 했다. 물론 개인소유도 인정해주었으며 땅이 없는 사람에게는 땅도 나누어주었다. 


람들은 늘 배가 고팠지만 일제통치가 없고 착취가 없는 근거지의 생활에 행복해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가 쳐들어오면 남녀노소가 다 떨쳐나서서 일본군대를 물리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그 행복의 요람인 근거지를 사수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왕청 가는길....>
연길에서 왕청까지는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 걸렸다.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나온 유격근거지는 8도구유격근거지였다.
리광인 선생은 이 8도구 근거지에서 김정숙 대원(김일성 주석의 아내)이 나병에 걸려 부모도 산속 움막에 내다버린 사람을 치료해주어 살려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정숙 유격대 대원의 이런 선행은 이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가는 길에 의란구 , 왕우구 유격근거지가 왼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리광인 선생은 왕우구 근거지를 지나면서 김금녀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달새
종달새 소녀 김금녀
“유명한 김금녀라는 소학교 나이의 어린 소녀가 왕우구 유격근거지에서 살았는데 부모형제가 일제토벌에 몰살당하고 이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소왕청 근거지로 넘어갔단 말입니다. 그 소녀가 소왕청에서 김일성장군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김금녀는 노래와 춤을 잘 해서 아동 유희대 활동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별명이 종달새였다. 김금녀는 북만까지 원정 공연을 가서 고 어린 것이 어찌나 노래를 잘하고 반일선전연설을 잘 했던지 중국의 민족주의 계열의 반일부대 시(채)사령 구군국 부대를 눈물바다로 만들어 주보중 공산주의 항일 유격대와 손을 잡게 하는데 있어서 특기할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 김금녀는 왕청 유격근거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러 나왔다가 배초구에서 안타깝게도 일제에 잡혔다. 그 애어린 초등학생에게 일제는 유격대와 연계된 사람들을 알아내기 위해 회유도 하고 악착같은 고문을 자행했지만 비명도 지르지 않은 채 “엄마, 아빠를 죽인 일제는 꼭 망한다. 유격대 언니오빠들이 복수를 해준다”며 대항하였다. 결국 악귀같은 일제는 12살 소녀를 잔인하게도 학살하였다. 
중국 동만의 골짜기란 골짜기에는 대부분 항일 유격근거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골짜기마다 이런 금녀처럼 나이어린 열사로부터 수많은 열사들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물론 연변의 조선족 소년소녀들은 이제 ‘강타’의 노래를 졸졸 외우고 한국 영화의 줄거리는 줄줄 꿰고 있어도 금녀를 모른다. 그래서 금녀가 살았던 왕우구 골짜기를 바라보는 나의 가슴은 더욱 아려왔다.


 

왕청으로



왕청으로 가는 길청령고개 여기서 유격대가 일본군과 트럭을 많이 잡았다.


조금 더 가니 길청령이라고 하는 높직한 영마루가 나왔다. 리광인 선생은 여기서 1930년에 왕청현, 연길현 유격대가 일본의 군용트럭을 여러 번 습격하고 전리품을 획득했다고 말해주었다.
왕청현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본 군용트럭은 이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 영마루 양쪽의 절벽이어서 매복습격전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날의 통쾌한 복수의 총성과 함성을 떠올리니 금녀에 대한 쓰린 가슴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길청령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배초구라는 아주 넓은 들판이 나왔다. 들판 가운데로는 큰 강이 흐르고 있어 논농사 짓기에 아주 좋은 들이었다. 산골에서 이런 넓은 들을 보니 신기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왕청현 소재지가 이곳에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운 들판이지만 일제시대 그날에는 유격대의 습격이 끊이지 않던 일본 본거지였던 것이다.  
배초구를 지나 험난한 고개를 넘으니 ‘왕청’이 나왔다. 그곳에서 최금철 소장을 만나서 소왕청 골짜기로 갔다.



80여



80여 가구를 일제가 완전히 불태워버려 지금은 밭으로 변해버린 동일촌, 앞의 강이 동림하이다.


 
동림하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동일촌이 보인다. 최금철 소장은 7-80호의 마을이었는데 일제가 소왕청유격근거지 토벌을 하면서 저 마을을 몽땅 불질러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집은 두어채밖에 없고 모두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얼마나 악랄했으면 마을이 아예 없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장군 왕청에서는 전설적 영웅.....>
최금철 소장은 오랫동안  당 연사연구 기관에서 항일의 연사를 연구해 온 사람이라고 해서 나는 이북의 김일성 주석이 청년시절 이곳에서 실제로 일본군과 싸웠냐고 물어보았다.
최금철 소장은 싸운 정도가 아니고 지금까지도 전설적으로 전해내려오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장군 여기에 오기는 1932년 12월 15일 와서 왕청현 유격대대 건설에 참여했지요, 직무는 참모장이지만 실제 역할은 대대장 역할을 했다.
육문중학교

김일성 장군의 청년시절 사진
나이는 21세(1912년 4월 15일 생)나마밖에 되지 않지만 사람이 대단히 총명했지요. 군사지휘능력이 출중해서, 이 일대 일본 수비대라든가, 위만군 경찰서, 자위단 단부를 습격하고 그 마을에서 정치연설을 꼭 했어요, 한족마을에 가면 한어(중국어)로 유창하게 했고, 조선말은 말할 것도 없고, 또 일본 놈들에게 정치공세를 할 때는 일본말도 아주 잘 한다. 러시아어도 잘 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청현 경형성 군사역사재료에는 왕청현 이 구역에 108차례 전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전투는 김일성 장군이 지휘했다. 뾰족산의 1934년 3월달 전투도 김일성 장군이 지휘한 거고, 4월 전투도, 33년 12월 중순 전투도 기본상 김일성 장군이 지휘한 전투였다. 개당(매개 전투에서) 양백명(2백명)에서 400명 정도 살상했지요. 그게 김일성 장군이 이골 안에서 싸운 전투예요.”
그러자 리광인 선생이 받아서 “김일성 장군은 100번 싸우면 100번 이깁니다.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젊은 나이에! 누가 이런 말을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리광인 씨와 최금철 소장은 중국 정부가 인정하는 역사학자들이 아닌가. 나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자료는 어디서 어떻게 수집한 것이냐고 묻자, 최금철 소장은 일본군대와 싸웠던 전투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이 이야기 한 것을 연구소에서 직접 조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일성 장군과 함께 왕청 유격 근거지에세 일했던 리만섭 할아버지가 알려준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리만섭 할아버지,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다. 그는 1932년도 12월에 소왕청 근거지 소비에트 인민정부를 세웠는데 비서사업을 했다. 소비에트 정부의 주석이 물론 있는데 일상 사무는 비서가 다 처리했다. 그분이 골 안에 대해서는 남보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분의 인상에 남은 김일성 장군은 나 어린 청년인데, 아주 총명할 뿐만 아니라 인물도 잘났고 매사의 일처리가 아주 올바르고 예절도 바른 청년이다.
리만섭 그분이 여기서 우리가 앞서 말한 세 차례 전투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이 현에서 놓고 말하면 라자구 전투에서 연속 3일을 싸웠어. 결국 김일성장군이 지휘하여 라자구 시내 정복했고, 동녕현성 전투도 3일 했는데 그것도 기본 다 점령했다.
동녕현성은 러시아를 치기위한 일본군대의 군사물자 후방기지였지, 그 물자를 노획하고자 했던 목적이 달성하자 철수했다. 그 당시 동녕현성전투는 조선인 중심의 유격대와 중국의 구국군 반일부대가 힘을 합쳐 공격했는데 총 지휘자가 김일성장군이었다.

리만섭 구술에 의하면 김일성 장군이 요영구 있을 때도 특히 한족(중국인) 분들과 관계가 영 좋았지, 최근에도 관내 한족 한분이 김일성 주석초청으로 조선에 갔다 왔어. 조선에 가서 아주 높은 대우를 받고 왔지에.
그리고 김일성 장군이 라자구 왔을 때 12명과 결의형제를 맺었는데 그 가운데 김일성 장군이 제일 나이가 어렸어요. 그 앞에 열 하나는 몽땅 중국사람인데 그 중국사람들이 지방에서 일정하게 그 잘사는 부자였데, 개명신사라든가, 지주라든가 하여튼 그 이렇게 가진 것이 많고  지역에서 일정하게 권위도 있고 이런 사람들과 김일성 장군이 결의형제를 통하다 노니까 김일성 부대가 4도하자에서 활동했는데 안전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지.
그 사람들과 다 충돌이 없으니까.
천이 요구되거나, 양식이 요구되거나 무장이 요구된다고 할 때 그 중국 사람들이 각가지 방법을 통해서 얻어 들여와 이 김일성 반일 부대 즉, 3퇀(3연대)에다가 제공해준단 말이지.


 

왕청현의



왕청현의 상징물


여기에 온제는 32년 12월 달에 와서 36년도 2월 달에 여기를 떠나갔지마는 실제 이 몇 년 어간에 왕청에서 아주 큰 공헌을 세웠고 일제 놈들에게 정말 타격도 많이 했고 왕청 지방정부에도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단 말이에. 
김일성 장군이 가장 유명했지, 이 일대에서 김일성 장군이라면 그 당시 노인들 사이에 여기저기서 마치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많았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든가. 축지법을 쓴다든가.”


노인들만의 평가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홍범도, 김좌진을 이어 김일성 반일 부대가 일본에게 많은 타격을 주자 주은래 총리마저 “중국에서 조선에 대한 항미투쟁(한국전쟁)을 해주었지만 조선족도 중국에 들어와서 일제와 정말 피어린 투쟁을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의 민과 관 그리고 조선족과 한족 모두는 김일성 항일유격대에 대한 전설적인 투쟁을 적극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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