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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미국> 5. 20세기 전쟁을 주도한 미국 2

우리사회연구소 곽동기 상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5/09/09 [21:10]

<제국주의 미국> 5. 20세기 전쟁을 주도한 미국 2

우리사회연구소 곽동기 상임연구원 | 입력 : 2015/09/09 [21:10]
 

지난 20세기, 미국은 세계 각지의 분쟁에 개입하며 전면전과 소규모 군대 투입을, 때로는 외교적 압박을 일삼아왔습니다. 미국은 스스로를 “세계의 경찰”이라 칭하면서 온갖 분쟁에 관여하였습니다.

냉전 시기 미국은 분쟁의 책임을 공산주의 세력에게 돌렸습니다. 1945년 이전의 미국은 모든 문제를 나치에게 돌렸다면 2차 대전을 계기로 분쟁의 근원이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리고 소련이 붕괴하자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악의 근원은 공산주의에서 테러리즘으로 넘어갔습니다.

파시스트에서 공산주의로, 공산주의에서 테러리즘으로.

미국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이들이 순차적으로 인류의 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이들을 응징해주고 있다는 주장은 어린이 만화책만큼 유치한 헐리우드식 변명입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소-독 전쟁과 중-일 전쟁에서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무 인연이 없습니다.

결국 20세기 전쟁은 ‘악의 축’의 지속적 등장이 아니라 세계패권을 추구하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었습니다. 1989년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탈냉전의 해빙이 곳곳에서 피어났지만, 역설적으로 미국의 침략전쟁은 더욱 증가했습니다. 

 

 

미국은 1991년, 이라크를 쳐들어가 걸프전을 일으키고, 1998년에는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해 코소보 분쟁에 개입하였습니다. 2001년에는 9.11 테러를 구실로 아예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더니 아프간을 침공하고,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을 벌였으며, 2011년에는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였고 지금 2015년에는 이라크, 시리아 일대의 IS와의 교전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 과정에서, 미국은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각종 첨단무기를 강매하며 한반도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1) 위기의 미국

미국이 지난 20세기 내내 승승장구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미국은 6.25 전쟁에서 정치군사적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며 베트남전쟁에서는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1968년, 미국과 유럽의 대학가에는 미국의 전쟁을 반대하는 집회가 물결을 이뤘습니다. 달러의 패권적 지위는 위협받아 1971년 8월, 닉슨 대통령은 35달러를 언제든지 금 1온스와 바꿔주던 금태환 조치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달러가치는 폭락하였으며 세계 각국은 변동환율제로 이행하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중동의 산유국들이 석유생산량을 줄여 석유파동이 왔습니다. 1974년, 서구진영은 물가는 지속적으로 오르는데 성장세는 후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습니다.

미국의 제조업은 70년대에 일본과 독일에게 추월당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크라이슬러와 포드 같은 미국 자동차 보다 BMW와 벤츠 같은 독일 자동차를 더 좋아하며 General Electric에서 생산하는 미국 냉장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LG 디오스나 삼성 지펠 냉장고를 구입합니다.

1980년, 레이건이 취임해서 미-소 대결이 본격화되자 미국의 무역적자는 1000억 달러를 돌파하였습니다. 미국이 믿을 것은 오직 핵무기와 군사력밖에 없었습니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0년에 국방비를 무려 17%나 인상하였습니다. 1980년대 미 정부 재정의 적자 수준은 전체 재정의 최대 6.0%, 평균적으로도 4.2%에 달했습니다.

 

2) 소련붕괴는 미국의 최고보약

미-소의 군사대결은 첨예하게 빚어졌지만 먼저 쓰러진 세력은 소련이었습니다.

애당초 미-소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시점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였습니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며 기지 건설을 강행하면 이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극단적인 긴장 끝에 먼저 물러난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당시 후르시쵸프 정권은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지하였습니다. 미국도 이에 대한 대가로 터키에 있던 미국측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지를 철수시킨다는 조건으로 사태가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로부터, 소련은 미국과 대결에서 계속 끌려다녔습니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관료주의의 병패를 혁신하지 못했습니다. 1945년의 소련은 히틀러로부터 유럽을 구해 준 해방자였지만 1985년의 소련은 고루하고, 딱딱하고, 강압적인 존재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1985년, 소련공산당의 체르넨코 서기장이 사망하자 신임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50대 초반의 젊은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취임하였습니다.

고르바쵸프는 경직된 소련식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였지만,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해체하였습니다. 고르바쵸프는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고, 소련군을 공산당의 지도에서 독립시켰습니다. 나아가 고르바쵸프는 사유재산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미국과 서구사회는 열광하였습니다.

1991년 8월, 사회주의의 붕괴 위기를 느낀 소련공산당 핵심세력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소집하고 고르바쵸프를 크림반도의 포로스 별장에 연금시켰습니다. 고르바쵸프는 소련을 무너뜨린 일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그의 정치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미국자본의 유혹은 강렬했습니다. 타만스카야 사단의 전차 대대 참모 대대장 에프도키모프 소령은 사회주의로의 복귀를 선언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소련공산당을 탈당하고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러시아 공화국의 보리스 엘친 대통령을 지지한 것입니다.

사회주의 군대가 자본주의 이행론자인 엘친을 지지하니, 소련은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의 일개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엘친의 입지는 이를 계기로 매우 강해졌습니다. 1991년, 결국 소련 내의 15개의 공화국은 독립을 결정, 독립국가연합을 만들었습니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 이후 74년을 이어오던 소련 사회주의 체제는 그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소련이 붕괴하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 소련만 쳐다보고 살아왔던 동유럽의 8개 사회주의 국가들도 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태어난 유럽 땅에서 사회주의 체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소련의 붕괴로 유럽대륙에서 냉전은 사라졌습니다. 1999년, 미국은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NATO는 지난날 소비에트 연방이었던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에게 소련의 붕괴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초대형 호재였습니다.

냉전대결을 지속하며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무장해제당한 소련을 그대로 둘 리 없었습니다.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의 생산시설을 차례로 민영화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였습니다. 소련의 물가는 폭등하였고 실업이 만연하였습니다. 소련국민들은 힘없는 빚덩이 나라 국민으로 치부당했습니다.

소련 국민들이 마음껏 술을 마실 자유와 문신을 새기고 서구문화를 흉내 낼 자유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치안은 무방비상태가 되어 청소년들은 갱단에 끌려다녔습니다. 소련 여성들은 세계 각국의 유흥업소로 굴러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련국민들은 놀고 먹는 “자유”도 국가체제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해 줄 때 비로소 의미있다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고르바쵸프의 개혁과 개방으로 인해 소련이 가지고 있던 “전략핵잠수함과 우주정거장”의 이미지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자리에 “러시아 석유재벌”과 “러시아 미녀무희 항시대기”가 들어찼습니다. 최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강력한 러시아”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러시아 국력 신장을 위해 힘쓰기 전까지, 소련 국민들은 수치와 모욕의 날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3) 탈냉전 이후 오히려 빈번해진 전쟁

미국과 세계패권을 다투던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의 눈 앞에는 거칠 것이 없어졌습니다. 미국은 “세계 유일초강대국”을 자처하며 세계정세에 노골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미국의 패권적 전횡에 희생된 대표적 지역은 중동입니다.

미국의 중동정책을 이해하려면 중동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1979년, 중동의 이란에서는 회교혁명이 일어나 친미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고 호메이니가 이끄는 회교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이란이 지금까지 미국과 대결을 지속하는 것은 현 이란 정부가 1979년 회교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친미에서 반미로 돌아선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에 인접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란은 이슬람 시아파였지만, 이라크는 국민 다수가 시아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담 후세인은 수니파였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사담 후세인은 1980년 9월 22일, 이란을 침공하였으며 1988년까지 이란-이라크 전쟁을 지속하였습니다.

레이건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은 1983년 11월26일 ‘국가안보 결정지침(National Security Decision Directive)에서 이란-이라크전쟁과 관련해 ▷미국의 이권이 걸린 중동 석유지대를 지키기 위해 이라크와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걸프만에서의 미군 작전능력을 높이는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1982년 미 국무부는 국제테러리즘 지원국가 명단에서 이라크를 뺐습니다. 럼스펠트 국방장관은 1983년 12월 20일, 바그다드에서 후세인을 만났습니다. 1984년 11월, 미국은 이라크와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활용해 이란 회교혁명의 정신이 전 중동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중동의 맹주로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91년, 소련이 붕괴하였습니다. 소련이 붕괴하자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배경을 믿고 중동의 패권을 차지할 목적에서 쿠웨이트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미국이 지난 시기에 사담 후세인을 도와주었다 하더라도, 중동의 패권은 미국의 것이 되어야지, 사담 후세인의 자리는 애당초 없었습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손과 발을 꺾어놔야겠다고 판단하고 쿠웨이트를 돕는다는 취지로 이라크를 쳐들어갔습니다. 이것이 1991년의 걸프전이었습니다.

걸프전은 이란-이라크 전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너무 성장해버린 사담 후세인을 견제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걸프전은 세계 최초로 CNN 언론에 의해 전쟁이 세계에 생중계되었습니다.

 

4) 네오콘과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를 대상으로 한 전쟁으로는 미국의 비대한 군사력과 국방산업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붕괴한 마당에, 미국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군사비를 늘릴 수 있었지만, 그러려면 국제사회에 내세울 명분이 있어야 했습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는 플로리다의 선거결과를 재검표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신보수주의(네오콘) 세력인 조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섭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동생 젭 부시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식 선민사상과 기독교 교리를 절대시한 채 공세적 군사노선으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세계에 주입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상징과도 같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이 미국 여객기의 자살공격을 받고 붕괴되었습니다. 동시에 버지니아의 펜타곤도 여객기의 자살공격을 받았습니다. 

 

 

9월 20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가 9.11 테러를 벌였다고 발표하였으며 알 카에다와 이를 지휘하는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의 새로운 적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합니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2001년 10월 7일, 350여 기의 항공기를 앞세워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였습니다. 그해 11월 20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함락했다고 발표하였으며 12월 22일에는 아프간 과도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것을 아프간 전쟁이라 부릅니다.

미국은 1989년 소련 붕괴 이후, 드디어 새로운 적을 상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 그들을 상대로 한 테러와의 전쟁입니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WMD)가 있지도 않은 이라크에 WMD가 있다며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공하는 엽기적 행각을 보이게 됩니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며 이라크를 전격 침공하였습니다. 미국 연합군은 승승장구하며 이라크군을 궤멸시켰으며 2006년, 사담 후세인을 체포해 사형시켰습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였지만,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정말 없다는 것은 곧 드러났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중동패권을 보다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세계 2위의 석유 국가인 이라크에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이라크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의미도 있었다고 보입니다.

당시 유엔은 대량살상무기가 의심된다며 사담 후세인의 대통령궁 지하까지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라크군은 WMD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바빠 나라의 모든 군사기밀을 미국에게 알려준 셈입니다. 이라크는 사막전에 알맞은 군사전술을 수립하지도 않았습니다. 소련의 T-64와 T-72 등의 탱크는 전방시야가 제한된 유럽의 평원에서 수적우세에 의거한 기동전차전에 알맞은 전차입니다. 사방팔방 시야가 확보된 이라크의 사막에서 이라크 탱크는 미영 연합군 탱크와 전투기의 먹이가 될 뿐이었습니다. 이라크는 모든 군사기밀을 유엔에 내주고 구체적인 사막전도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5) 미국이 패배한 테러와의 전쟁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하였으며 은근슬쩍 대량살상무기(WMD)의 위협을 끼워넣으면서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까지 고조시켰습니다.

테러는 은밀하고 기습적으로 이뤄지므로 적이 누군지 특정하고 대비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테러는 미국인에게 현실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은 테러위협을 고조시키며 2001년에 3160억 달러였던 미국 국방비를 2011년에는 7080억 달러까지 올렸습니다. 부시행정부는 9.11 테러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라크를 공습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없는데도 이라크를 유린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반대로, 미국이 싸우기 싫은 대상이라면 실제 테러를 자행하더라도 경찰력으로 대응하면 된다는 점도 있습니다. 2011년 7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유럽 극우주의자였던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의 테러로 노르웨이 청소년 93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미국은 유럽 극우세력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초강대국 소련이 붕괴된 상황에서 미국의 국방과 군수산업을 먹여 살리고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변명일 뿐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운다는 말도 안 되는 대테러전에서, 미국은 철저히 패배하였습니다.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하였지만, 그 후 2010년까지 미군은 무려 4500명이 넘는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900조원 가량의 비용을 쏟아부었습니다. 2007년 미국발 경제위기가 덮치자 미국은 이제 자기 국방비를 유지할 능력도 못 되어 결국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철군을 검토했습니다. 미국은 2011년,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군하였으며 아프간에서도 2016년께 완전 철군할 예정입니다. 

 

 

미국은 냉전으로 소련을 꺾었지만 스태그플레이션, 오일쇼크, 쌍둥이적자에 허덕였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중동을 침공하였지만 결정적으로 2007년 미국발 경제위기를 맞고 말았습니다. 이제 미국은 군사에서 세계 각국의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정치, 경제에서 미국의 시대는 확실히 저물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미국의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도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20세기는 전쟁 세기였습니다. 전쟁을 주도한 미국이 20세기의 중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평화의 세기입니다. 21세기에는 미국이 아니라 다극화된 새로운 세계질서가 한가운데에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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