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에 더 절절해지는 이세춘이사장의 민족사랑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5/09 [15: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이세춘(89) 민족재단 이사장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민족재단창립

 

한반도 영세중립화통일론을 주창해온 이세춘 박사가 2015년 1월 28일 구순을 눈앞에 둔 88세 나이로 (재)민족재단을 설립하고 5월 22일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에서 창립식을 열었었다.


민족재단은 학술·연구·교육 등 남북 사회·문화교류 사업과 남북교류 활성화를 위한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 등 남북교류협력법의 규정에 의한 사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이세춘 이사장이 적지 않은 사재를 내어 만든 재단이다.


구순을 눈앞에 둔 나이라면 그저 편히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거나 어떻게든 단 1년이라도 더 살기 위해 공기 좋은 곳을 찾거나 심신이 편안한 삶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얼마나 조국의 평화적 통일 간절했으면, 오죽이나 민족의 번영할 미래가 절절했으면 많은 사재를 털어 이런 뜻깊은 재단을 만들었을까!

 

▲ 이세춘 민족재단 이사장     © 자주시보

 

 

✦ 이세춘 이사장의 민족관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있는 민족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세춘 이사장은 대담 내내 민족이라는 단어를 입에서 떼어내질 못했다.


“가족, 그 가족의 연장이 민족이다. 세계역사라는 것이 다 민족 대립이며 강한 민족의 역사이다.
다민족국가에서도 주가 되는 강한 민족이 다른 이민족들을 이끌어가고 있다.
50여개 민족이 있는 중국도 황하 중류에 주로 살았던 한족이 지배민족이다. 이들은 문자가 있어 다른 민족을 동화시켰다. 중국에는 55여 이민족이 살고 있다.
200여 민족이 모여 있다는 미국도 엥글로색슨 민족이 주된 민족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의 모임엔 다른 민족은 참여할 수 없다.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다. 민족이 곧 국민이다.”


이렇듯 이세춘 박사는 민족의 형성에서부터 최근 민족과 국가 사이의 교류가 넓어진 현대산업사회에 민족과 국가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 지, 그리고 다민족국가와 단일민족국가의 특징까지 정연한 논리, 해박한 지식을 곁들여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특히 이세춘 이사장은 많은 민족이 힘이 없어 이민족의 침략과 정복으로 동화 흡수되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으로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으며 지금도 작은 섬나라 원주민들은 거의 관광객 상대로 재롱이나 떨며 먹고사는 동물원 동물과 큰 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며 민족이 강해야 사람의 존엄도 누릴 수 있고 물질적인 풍요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민족이 작다고 힘도 작은 것은 아니다. 우리민족의 한 갈래인 여진족 30만명 인구가 4, 5억이나 되는 한족을 410여년이나 다스린 정복왕조를 이끌었고 몽고족 수십만 명이 중국, 러시아, 동구권 등을 100여년이나 다스린 정복왕조 원나라의 근간이었다.
대국을 무서워하면 예속된다.
대국도 언젠가는 무너졌다.
소국도 얼마든지 대국이 될 수 있다. 소국도 대국보다 어딘가 앞선 힘이 있으면 가능한 것이다.
영국 그 작은 나라가 산업혁명을 일으켜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도 원자탄보다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면 그 나라가 세계를 선도한다.”


이세춘 이사장은 이렇듯 그 민족의 수나 영토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대국을 무서워하는 사대주의가 문제라며 우리민족도 고구려 시대까지는 사대주의에 젖지 않아서 대륙을 주름잡았지만 외세에 의존하기 시작한 신라시대부터 내내 대국을 두려워하는 사대주의 때문에 제대로 된 발전과 번영을 이루지 못해 한의 민족이 되었다며 가슴아파했다.

 

▲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야 민족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역설하는 민족재단 이세춘 이사장     © 자주시보

 

 

✦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


우리민족은 조선(근대조선과 구별되는 고조선), 고구려로 이어진 4000여년(조선 3000년, 고구려 1000년) 역사를 두고 남으로 한(조선)반도 전역, 북으로는 중국 산동반도를 포함한 황하 이북과 구만주 전역 그리고 로시아의 연해주까지 광대한 원조선 문화권을 형성하여 중화문화권과 대립하며 민족자주의 웅혼한 기상 떨치며 번영했다.


그런데 기원 전 108년에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조선왕조과 붕괴된 후 다시 고구려, 발해를 세워 자주의 기상을 떨쳤으나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매족 행위에 의해 지금까지 대대로 우리 여성들도 포함된 조공을 바치며 사대주의에 찌든 자들이 득세해오게 된 것이다.


“강대국에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에 한의 민족이 된 것이다.”


이세춘 이사장은 민족재단을 설립하게 된 배경을 이 한 마디에 압축하였다.
우리민족이 힘을 키워야 주변 강대국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선도하고 주도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민족을 위해 한 일이 없다. 다만 민족을 위해 통일에 뭐라도 기여해보고 싶어 민족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박근혜정부도 추진하고 있는 인도적 차원에서 북을 도와주어 평화적 통일 분위기도 만들고 통일조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초석도 다지자는 것이다. 특히 대북 교육지원 사업에 관심이 많다. 북에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의 오바마정부도  미국식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이 북에 교육지원사업을 펴는 것을 허가 장려하고 있다.

 

▲ 오바마 정부가 대북 인도적 교육지원을 허가한다는 공문서, 그래서 미국은 평양과기대에 교수도 보내 강의를 하게 하는 등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며 이세춘 이사장은 우리정부도 대북 인도적 지원만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자주시보


그래서 현재 평양과기대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데 남북관계가 계속 긴장되다 보니 잘 진척되지는 않고 있다. 이렇게 남북교류가 열리지 않으니 민족재단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남측의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바로 세우는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인터넷신문이 그것이다.”


이세춘 이사장은 이렇듯 강한민족 강국의 꿈을 이루려면 교육에 힘을 써야 한다고 재삼 재사 강조하였다.


“미국도 하버드 등 교육제도로 세계를 지배한다. 저 작은 이북이 그래도 중국 러시아에 휘둘리지 않고 또 미국과도 당당하게 대화를 요구하는 것도 교육제도를 잘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북은 지나칠 정도로 민족을 강조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하는데도 미국이 못 때리는 것을 보면 이 뭔가 신기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힘들어하고 있는데 이세춘 이사장은 “민족이 잘 되면 다 해결된다”며 그 역시 민족문제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직결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우리 젊은이 개개인들이 잘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금과 같이 잘 사는 나라들마다 일자리가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가의 도움 없이 젊은이들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안 된다. 특히 분단된 조국에서는 더욱 곤란하다.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야 일자리도 만들어진다.
그 일자리도 문제이지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여 남북관계가 긴장되어 외국과의 경제교류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우선 전쟁이 안 나야하고 우리 민족이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든지 전쟁은 막아야 한다.
그런데 B-52핵폭격기가 날고, 핵잠수함과 핵항공모함이 한반도로 달려드는데 이걸 뭘 자랑이라고 방송에서 그렇게 좋다고 떠드는지, 핵폭탄 하나만 떨어져도 끝장이 난다. 전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긴장이 고조되어 우리가 주로 상대하는 미국, 중국 시장과 단절만 되어도 다 굶어죽는다.”


이세춘 이사장은 나아가 진보적 이념과 민족주의 관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더불어 국수주의, 지배주의적 관점에서 강대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들도 한 때 인류사회를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보수 대 혁명의 대립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왜 소련과 중국, 중국과 월남이 국경문제로 전쟁까지 했고 지금와서도 혈맹국이라던 중국과 조선(북)이 왜 갈등을 하고 월남은 왜 미국과 함께 군사연습을 하며 중국을 적대시하는가!
민족은 체제와 주의 주장, 계급을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막스레닌주의다 뭐다 하면서 일부 운동권이 민족보다 계급을 우선시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체제보다 민족이 우위에 있다. 체제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더 좋은 체제나 제도를 계속 찾아가면서 변화발전하게 되지만 민족은 영원하다. 그 체제나 제도도 민족국가 단위로 형성되고 발전하며 민족국가가 바로 서지 못하면 좋은 제도도 스스로 만들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민족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한다. 특히 분단된 민족은 그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루는데 일단 힘을 모아야 한다.
그렇다고 선진민족이 후진민족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지 깔고 뭉개는 정책은 안 된다.”

 

▲ 이세춘 민족재단 이사장은 어려서부터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 자주시보

 

 

✦ 한 평생 책과 더불어


이세춘 이사장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인터넷을 다 뒤져봐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유는 대담 과정에 금방 알게 되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살아온 삶이 궁금하다는 끈질긴 질문을 이 말로 몇 번을 피해갔다. 하도 조르니 감회 깊은 표정으로 고향 평양에서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들려주었다.

“북에서 나는 부자집 아들이니 잘 지냈을 것이라고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주인 조부가 장자인 백부에게만 거금을 주고 나의 부모를 비롯한 온 가족이 돈이 무엇인지 만져보지도 써보지도 못하는 신세로 살았다. 사실 흥부와 놀부의 전설보다 더한 우리 가족의 내막을 다 말하려면 책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49년도 전쟁 나기 전 스물 두서너 살 되었을 때 단신 남쪽으로 내려왔다. 밥을 굶는 일이 먹을 때보다 훨씬 많았고 공원에서 신문지 덮고 잔 적도 많았다. 겨울엔 얼어죽을까봐 파출소를 찾아가 잠을 자기도 했다.
잘 사는 친척들도 서울에 있었지만 삼촌, 사촌들도 자신들만을 위한 사람들이었고 무일푼의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6.25때 소위로 군대에 갔다가 중위로 제대했다. 순전히 배고파서 밥 먹으려고 군대에 간 것이다.”


이세춘 이사장은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 굳은 마음을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 후 운 좋게 내무부 총무과 촉탁(수사급)으로 근무하게 되어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열심히 근무했다. 월급으로는 하숙도 못하고 돈은 필요했기에 비올 땐 직원들 상대로 우산장사를 하는 등 부업을 한 시도 쉰 적이 없다.

42세 때 늦은 결혼을 했다.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종로5가에서 금은보석점을 경영했다. 그러다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고 장사가 부진하여 장사도 그만 두고 명동의 신한빌딩을 매입해서 임대업을 했다. 돈벌이를 하려면 투자도 잘해야 하지만 운도 따라야 하고 노력도 많이 해야 한다.”


담담하고 간략하게 들려준 삶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짐작케 하는 이야기였다.


“당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3-4년만에 남대문, 동대문을 다 점령했고 6.25가 터진 후 부산으로 간 북쪽 사람들이 1-2년 사이에 국제시장을 다 석권하는 기적도 이루었다.  반대로 서울 토박이 양반들은 일하면 안 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논밭 팔아서 쓰고 다 망했다.”


특히 자신은 혼란기에 운이 맞았던 점도 컸다고 했다. 오늘의 십 원이 내일 이십 원으로 자꾸 곱으로 뛰었다며 겸손하게 노력을 운으로 돌렸다.
그의 이야기에는 이런 인격과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녹아있었으며 해박한 지식의 깊은 향이 풍겨났다.

결혼은 통일되면 고향에 가서 한다고 미루다가 40대에 접어들어 중매로 하게 되었고 늦은 나이라 아들 하나만 두게 되었다고 했다.
왜 고향을 두고 남쪽으로 내려왔냐는 질문에 몇 번 망설이더니 “우리 집안이 대지주여서 해방 후 나라에서 땅을 다 몰수하여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물론 우리들도 먹고 살만큼의 땅을 주기는 하지만 다른 곳에다 주기 때문에 이사를 가야했다. 그래서 가족친척들 일부는 평양에 남고 하나 둘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해 월남을 하게 된 것이다.”


이세춘 이사장은 평양이 고향이라 평양고보를 나왔다. 이남의 경기고 급의 학교였다. 당시 평양고보에 지방 소학교 학생이 합격하면 그 지방 소학교는 유명해졌을 정도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백부에게만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둘째인 아버지는 학교도 보내지 않고 집에서 논밭관리 마름일이나 시키고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대지주 집안의 손자였지만 그리 잘 먹지도 옷도 제대로 못입고 살았다고 했다.
평양고보시절에 할아버지이건 백부이건 학비도 대주지 않아 사과밭을 밤에 습격하여 팔아 월사금을 내기도 했는데 들켜도 학생이라고 하면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기만 했다. 그만큼 당시 모든 국민들이 학생 한 명 한 명을 아꼈는데 집안에서는 천덕꾸러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해방이 되어 땅을 모두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당한 지주가의 아들인데도 속으로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백부는 교육을 잘 받아 일제 강점기 판사 대감(정승급 호칭, 상감은 임금이고 영감은 군수급이다)까지 했다. 첩만 수십 명이 되었는데 그 첩의 자식들이 나보다 훨씬 돈도 잘 쓰고 옷도 잘 입었다.”


그 시대 청년학생들이 다 그랬듯 이세춘 이사장도 평양고보 시절부터 사회과학서적을 좀 보았다고 했다. 일제도 면밀히 감시 추적하여 단체를 만들고 행동에 나서려고 하면 바로 대대적인 체포와 탄압을 가했지만 책을 보는 것까지는 뭐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더욱 북에서 자기 집안 토지를 몰수하여 땅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통쾌감까지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호의호식하던 백부도 북에서 무슨 탄압을 받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최고재판소 부소장까지 하다가 북진시에는 미군정 법무장관을 했고 1.4후퇴시 백림 법조인 대회에 미군 추천으로 남측 대표단을 이끌고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흥미 있는 점은 북이 부동산은 몰수했지만 동산은 하나도 몰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백부는 골동품과 고서적 수집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중요한 유물 수백 점을 집안에 모아두고 있었는데 당시 평양박물관장이 거의 매일 백부에게 놀러와서 골동품과 고서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더니 결국 북에서 골동품 모두를 480만원에 고서적을 200만원이라는 입이 떡 벌어질 거액을 주고 다 사서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어쨌든 백부는 돈과 권력복을 타고난 사람이다.”


물론 이후 화폐개혁으로 모든 돈은 다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18세 이상 성인에게 신권 5원씩 나누어준 게 끝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백부가 돈을 받고 나라에 팔기는 했지만 골동품을 그렇게 사서 모아두었다가 나라에 넘겼기에 나라의 귀중한 유물을 지킬 수 있었으리라.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문화재 수집에 피눈이 되었던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에게 그 문화재들이 거의나 다 넘어가지 않았겠는가. 전형필 선생이나 이세춘 선생의 백부와 같은 사람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의 자긍심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을 후손만대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북에서는 백부를 최고재판소 부소장이라는 높은 직책까지 주었던 것 같다. 

 

▲ 작은 민족도 교육을 통해 힘을 기르면 능히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다며 청년들의 교육 교양이 민족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역설하는 이세춘 이사장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남은 여생 민족자주통일과 민족번영을 위해


이세춘 이사장은 남북관계가 6.15남북공동선언과 10.4남북선언이 나왔던 시절로 되돌아가   하루라도 빨리 남북교류협력사업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6.15선언을 미국과 주변국에서는 달가와 할 리가 없다. 그러니 그런 주변국 눈치를 보다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남과 북이 스스로 결심을 내려야 한다. 우리 정부도 이제 특단을 내려 남북관계를 좋게 풀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세춘 이사장은 가족사를 들려주던 와중에도 민족과 통일, 남북관계의 회복, 민족의 자주권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렸다.


“지난날 거액의 후원금을 내어 김영삼 야당 정치인도 도와주고 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미움만 사서 억지 세무사찰만 당해 큰 곤욕을 치렀는데 김영삼은 처음에는 야당탄압 세무사찰로 중대 사건이라며 ‘나의 유일한 특별보좌관이고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에 대한 이 같은 탄압을 규탄한다’며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학로비서의 만류로 취소해버리고 말았다. 김영삼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그랬다. 10년 송사 끝에 전두환, 노태우 때도 유보했던 세금추징 판견을 김영삼정권 초기에 대법원에서 판결한 것이다.”


모든 민족 구성원이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한다면 그 민족은 잘 될 수가 없다. 힘 있는 자 힘으로 돈 있는 자 돈으로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 모두가 민족을 위해 떨쳐나서야만 작은 민족도 큰 민족에 짓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세계를 주름잡으며 웅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세춘 이사장과 같은 민족 사랑의 의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후대들은 마음 든든하고 힘이 부쩍부쩍 솟을 것이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어 우리민족이 통일을 이루고 세계 만방으로 무궁무진 웅비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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뵙는 어르신입니다. 오랜만에 16/05/09 [16:35] 수정 삭제
  못난 어버이들을 너무 많이 보다가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네요.

참 오랜만에 뵙게되는 진정한 어르신의 모습입니다.

맑은 눈빛에 온화하면서도 강건한 의지가 엿보이는 분이시군요.
무얼 하시든 존경받을만한 일을 하실 분처럼 보입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100억 재산가 16/05/09 [17:15] 수정 삭제
  왜 고향을 두고 남쪽으로 내려왔냐는 질문에 몇 번 망설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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