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 3] 지조가 기생보다도 못했던 최고영도자 샹중파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6/08/30 [01: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누가 변절했느냐 간첩노릇을 했느냐는 예로부터 쟁의가 많은 바이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박헌영을 비롯하여 북에서 스러진 남로당 출신들이 변절자냐 간첩이냐 혁명가냐를 놓고 설들이 많고 철저한 혁명가로 믿고 싶어 찬미일색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꽤나 된다. 필자는 이에 관해 본 역사자료가 많지 않으므로 어느 편이 꼭 맞다 틀린다고 단언하지 못하지만, 역사는 굉장히 복잡함은 충분히 인식한 터이다.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천핑(陈平, 1924~ 2013)은 22살 나던 1947년에 당의 수반으로 되었는데 만년에 구술하여 《My Side Of History(우리 측의 역사)》라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그에 의하면 전임 총서기 라이트(莱特)가 간첩임이 적발되어 추적에서 공을 세운 천핑이 총서기로 되었는데, 누구엔가 의해 처단된 라이트는 베트남인으로 추정되는바, 원래 영국의 간첩이었다가 일본군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했을 때에는 일제의 간첩으로 되었다. 라이트가 간부회의를 소집하면 늘 습격을 받았고 남들은 잡히거나 죽는데 그는 탈출하는 등 전설적인 능력을 과시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그의 상사인 일본 특고과의 고급정보관 고니시(小西) 소좌가 1947년 3월 싱가포르의 빅토리아 기념관에 설치된 법정에서 라이트와 결탁한 상세한 자료를 털어놓았기에 진상이 밝혀졌다. 종신감금형을 언도받은 고니시는 싱가포르에서 5년 갇혔다가 일본으로 송환되어 석방되었다. 당의 총서기가 2중간첩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통해 당년 반공산주의자들의 수단과 음모를 가늠할 수 있다. 누구의 지위가 높다 해서 변절할 리 없다거나 간첩노릇을 할 리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 전 말레이시아 공산당 총서기 천핑     © 자주시보, 중국시민

 

중국에서는 한때 2인자 계승자 지위에 올랐던 류사오치(刘少奇, 류소기, 1898~ 1969)가 변절자냐 아니냐를 놓고 말썽이 많았는데, 나중에 공식적으로 내린 결론은 아니다이다. 류사오치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다나니 경력에 의문점이 수두룩하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가 변절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건국 후 그가 펴냈던 주장들과 추진했던 정책들이 옳으냐 그르냐가 더 중요하다. 좌파들은 틀렸다고 인정한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류사오치와 함께 “류덩”으로 거들어진 덩샤오핑(邓小平, 등소평, 1904~ 1997)이 비판은 받았으나 대우와 결말이 류사오치와 달랐던 건 마오쩌둥도 지적했다시피 체포된 적 없는 게 중요한 이유였다. 즉 변절혐의를 받을 소지가 없었다.
중국공산당은 일단 동지가 잡히면 필사적으로 구원한다. 그런데 후에는 두고두고 그 절개에 의심의 꼬리표를 붙인다. 문화대혁명기간에 활약했던 중장 류즈졘(刘志坚, 류지견, 1912~ 2006)은 1942년 10월의 어느 날 다리에 중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구원된 경력 때문에 변절자혐의를 받았는데, 옛 동지들이 단 하루만에 구원한 경과를 근거로 반박했다.
조선혁명가 장지락(김산)이 옌안(延安, 연안)에서 처형된 데는 그 본인의 성격적 약점을 비롯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체포경력이 다양한 그가 한때 서울에서 감옥살이를 했었기에 그의 감옥생활을 증명하고 출옥의 결백성을 증명할 사람이 현지에 하나도 없었다는 점도 한 몫 하지 않을 수 없다.
체포되거나 사로잡혀 하루나 한나절 만에 구원되거나 탈출한 게 결백성 증명의 근거로 될 때도 있다만, 꾸순장의 예처럼 체포 즉시 변절하여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고, 또 밖의 동지들이 구원하려고 손을 쓰기도 전에 변절해버린 웃지 못할 희비극도 벌어졌으므로 체포, 감금 기간과 변절이 꼭 정비례관계를 이루는 건 아니다.
구원하려는 동지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변절해버린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중국공산당의 최고지위를 차지했던 샹중파(向忠发, 향충발, 1880~ 1931)이라는 인물이 창조했다.

 

▲ 샹중파     © 자주시보, 중국시민

 

샹중파는 후베이(湖北)성 한촨(汉川, 한천) 사람이다.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공부를 좀 하다가 그치고 14살에 중국의 첫 근대식 무기공장인 한양병공창(汉阳兵工厂)에 들어가 학도(学徒, 견습노동자)로 되었다가 16살 때 한양조폐공장(汉阳造币厂, 화폐공장)으로 옮겨서 역시 학도로 일했다. 공장이 망한 다음 쟝시성의 어느 부자집에 가서 하인노릇을 하다가 3년 후 능력을 인정한 주인의 소개로 기선회사(轮船公司)에 들어가 4개월 만에 이등항해사(二副)로 2년 뒤에는 일등 항해사(大副)로 승진했다.
그후 곡절을 거쳐 국내 굴지의 한예핑공사(汉治萍公司)에 속하는 기선에 가서 일했는데 차차 글을 많이 알고 활동능력이 상당하며 남을 즐겨 도와주는 등 장점으로 하여 한예핑 공회(노조)에 들어가 일했다. 여러 해 지나 1921년에 41살에 난 그는 근 천 명 회원이 있는 한예핑공회의 부위원장으로 되었고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부두노동자운동을 지도했다.

 

중국공산당은 경력을 특별히 따지는데 혁명시기에는 어느 때 입당했느냐가 직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항미원조전쟁기간에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원이었던 훙쉐즈(洪学智, 홍학지, 1913~ 2006)는 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怀, 팽덕회, 1898~ 1974)가 어느 회의에서 불같이 화를 내어 남들이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워졌을 때, 다른 부사령원 덩화(邓华, 등화, 1910~1980)가 자기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기에 자기가 새로 부임한 부사령원 천겅(陈赓 1903~ 1961)을 내세웠는데 천겅의 언행이 먹혀들어 분위기가 돌아섰다고 회억했다. 훙쉐쯔는 그런 원인을 “우리가 다 알다시피 천겅은 경력이 오래기에 그가 말하면 팽사령이 그한테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因为我们都知道,陈赓资历老,陈讲话,彭总不会向陈发火。)”(《항미원조전쟁회억(抗美援朝战争回忆)》, 해방군문예출판사 1991년 7월 2판1쇄, 167쪽)고 설명했다.
펑더화이는 천겅보다 연상이고 지위도 훨씬 높았으나 1928년에 입당해 당내경력은 늦둥이였고 천겅은 1922년의 당원이었으므로 같은 말이라도 남보다 무게가 있었다. 언제 입당했느냐는 언제 혁명가의 자격을 인정받았느냐는 의미를 지닌다. 정식당원이 된 연수를 가리키는 “땅링(党龄, 당령)”이라는 개념이 공산주의정당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에 정식 창당했는데 그때 전국과 해외의 당소조 성원들이 50여 명이었다고 계산한다. 당창건에 참가했던 마오쩌둥 같은 이들은 당령을 1920년부터 계산할 수 있으나 본인은 1921년부터 계산했고,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저우언라이는 1921년 봄에 중공성립발기 8개 소조 중의 하나인 파리공산주의소조에 가입했으나 자신은 기어이 여구중국소년공산당(旅欧中国少年共产党)에 가입한 1922년부터 당령을 계산했다. 지금 학자들은 마오쩌둥 같은 이들의 당령을 1920년부터, 저우언라이 같은 이들의 당령을 1921년부터 계산하는데, 이 두 명인의 당령계산법을 알게 되면 1922년의 당원이라는 게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늠할 수 있겠다.


중국공산당은 무산계급의 정당이라고 부르는데 비해 초기에 노동계급의 비율이 낮았다.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열강의 침략에 맞서 중국을 구할 방도를 찾다가 고른 게 공산주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20세기 초에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간단히 소개되었고 1910년대 중반에 베이징(北京, 북경)에서 사회주의를 연구, 선전하는 단체도 나오기는 했으나 마르크스와 레닌의 학설이 중국에서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첫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하여 노동자가 나라의 주인으로 되는 격변이 일어난 다음부터 중국의 지사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기에 마오쩌둥은 “10월혁명의 포성이 중국에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날라왔다(十月革命一声炮响,给中国送来了马克思列宁主义)”라고 얘기했다. 누구의 이름이 언제 중국의 출판물에 나타났는가 따위를 고증하는 연구방법으로는 역사의 변화발전을 제대로 해석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법이다.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이고 중공의 창립을 약속하여 이뤄낸 천두쓔(陈独秀, 진독수, 1879~ 1942)와 리따자오(李大钊, 이대소, 1889~ 1927)는 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고급인텔리였고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 등 초기 활동가들도 지식인이었다.
물론 초기의 중국공산당에도 노동자출신의 당원들이 있었고 일부는 노동운동 수령들 가운데서 발전해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졌으니 샹중파는 이러한 4명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논자들은 샹중파의 부상이 우한지구가 1927년 초에 혁명의 중심으로 된 덕을 보았다고 판단하면서도 이는 그의 출신성분보다는 돌출한 능력과시 덕이 더 크다고 분석한다.

 

그의 경력을 보면 1923년 2월에 유명한 징한(京汉, 경한) 철로 노동자 대파업에 참가했고, 3월이 중공 우한구집행위원회(武汉区执行委员会) 위원으로 되었으며, 1925년에는 중공 후베이구 집행위원회(湖北区执行委员会) 위원으로서 직공(职工, 종업원) 운동을 주관했는데, 10월에 후베이성 총공회 위원장 겸 중공 한커우(汉口, 한구)시 당부 노동자부장(工人部长)으로 되었다. 총공회 성립 27일 동안에 우한(武汉, 무한, 우창-武昌무창-과 한커우 등을 몰밀어 부르는 지명) 일대의 공회 즉 노조는 13개로부터 270개로 늘어나고 조직된 노동자는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노동자 규찰대 규모가 수천 명에 이르러 지역의 중요한 정치역량으로 부상했으니 위윈장으로서의 샹중파 공로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정부와 중공 중앙이 우한으로 옮겨감과 더불어 샹중파가 현지 노동운동의 최고영수로서 지위가 올라간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1927년 5월에 샹중파는 중공 5차 당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거되고 6월에는 제4차 전국노동대회에서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었다. 이쯤 하면 당당한 노동운동의 영수다. 그해 8.7회의에서는 출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거되고, 10월에는 후베이성 노동운동위원회 지도자 리쩐잉(李震瀛, 리진영, 1900~ 1937)중국노동대표단과 학생단을 거느리고 소련에 갔는데 대표단 주석단 주석으로 되었고 공산국제의 중공 대표로 활동했다.
1928년 2월에는 공산국제 집행위원회 제9차 확대회의에 참가하여 공산국제 집행위원회 위원과 주석단 위원으로 선거되었고, 얼마 후에는 적색직공(职工) 국제 4차 대회에 참가했다가 회의 후에는 적색직공국제에 남아 사업했다.
샹충파의 급부상은 그해 6월 18일부터 7월 11일까지 진행된 중공 제6차 당대표대회에서 이뤄졌다. 중공이 진행한 18차례의 전국 당대표대회가운데서 유일하게 해외에서 진행된 6차 대회는 진기한 기록을 많이 남겼고, 근년에는 러시아가 그 대회가 진행된 지역을 복구하여 “붉은 색 관광(红色旅游)”으로 중국 관광객들을 끈다.

 

▲ 러시아 모스크바 교외의 중공 6차 당대표대회 장소 상설기념관이 2016년 7월 1일 중공 탄생 95돌을 맞아 낙성의식을 진행했다.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때까지 중공의 최고지도자로 활동한 사람은 천두슈와 취츄바이(瞿秋白, 구추백, 1899~ 1935)였는바 취츄바이도 전형적인 인텔리로서 문학이론가, 평론가로서도 역사에 자취를 남겼다. 대혁명의 실패로 당원이 몇 분의 1로 줄어들었고 전국 여러 곳에서 일으킨 봉기들도 실패한 상황에서 6차 대회는 경험교훈을 정리하고 새 진로를 밝혀야 할 의무를 지녔는데, 당시 유년기의 중공은 물론 공산국제와 소련공산당도 중국식 진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대회의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공산주의의 중국화, 중국식 진로문제는 17년 후에 옌안에서 열린 7차 당대표 대회에서야 확실히 해결되었으니, 그동안 수많은 성공과 좌절, 실패를 겪으면서 중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되고 이를 위해서는 농촌근거지확립이 중요하다는 등등 마오쩌둥의 주장이 옳았음이 증명되어 “마오쩌둥사상(毛泽东思想, 모택동사상)”이라는 중공 특유의 이론무기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사후 제갈량으로 되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는 쉽지만 역사단계란 건너뛸 수 없는 법이요, 사람들의 인식은 쉬이 변하는 게 아니다.

 

공산국제가 6차 대회를 위해 내린 처방 가운데 하나가 “영도간부성분의 노동자화(领导干部成分工人化)”였다. 인텔리들이 중공을 영도하여 실패를 보았으니 노동자들을 핵심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사실 전해부터 이런 방침이 추진되어 샹중파가 8.7회의에서 승진했는데, 이제 와서는 보다 극단적으로 추진된 것이다. 선거된 중앙위원과 중앙후보위원 36명 가운데서 22명이 노동자 출신이었다. 그 바람을 타고 샹중파는 6차 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되었고, 또한 6차 대회 정치위원회, 조직위원회, 소베트운동위원회, 부녀위원회, 재정심사위원회, 군사위원회의 성원으로 됨과 더불어 직공운동위원회의 소집자로 되었다. 뒤이어 7월에 소집된 중공 6기 중앙정치국 1차 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선거되어 중공의 최고영도자직위를 가졌다.
중공 역사상 지도자들이 거개 글이나 기록을 상당히 많이 남긴데 비해, 샹중파는 자신의 명의로 된 자료를 남긴 게 적어서 연구에 어려움을 조성한다. 또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의 변절을 망신스럽게 여기기에 거들기조차 원치 않아 간접자료들도 적다. 대체로 평가는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能力有限)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샹중파가 무능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튼 필자는 그런 주장을 보지 못했다. 공산주의조직의 특성 중 하나가 무능한 사람이 올라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면에서 무식해보이고 무모한 행동을 하더라도 어떤 지위를 갖기까지에는 반드시 어떤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첨이나 투기만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이다.

 

샹중파는 소련활동기간에 회의들에 참석하고 공개활동을 진행하면서 공산국제지도자들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을 남겼는데, 인터넷 자료에서 어떤 논자들은 공산국제의 인정을 받게 된 계기의 하나로 1928년 1월의 모스크바 동방대학 군사반의 중국학생 소동문제 해결이라고 본다. 당시 100여 명 중국학생들이 공산국제 청사 앞에 모여 시위를 벌리는 바람에, 공산국제 동방부 책임자마저 설득에 실패했으나, 샹중파를 내세웠더니 재빨리 사태를 평정시키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기본상 그의 제의대로 문제를 풀었다는 것이다.
무슨 문제였고 어떤 해결책이냐가 인터넷 자료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때문에 다른 자료를 통해 가늠해야 된다. 그 소동을 전면적으로 다룬 자료는 본 적 없으나, 군사가, 외교가인 우슈쵄(伍修权, 오수권, 1908~ 1997)의 회억문장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대혁명 실패 후 소련에 가서 군사공부를 한 사람들은 그 성분이 굉장히 복잡했다. 4. 12정변 뒤에 탈출한 투쟁 골간, 8. 1난창봉기 후 이리저리 에돌아 소련에 간 군대간부, 상하이무장봉기에 참가했던 노동자 열성분자, 중공의 영향을 받았던 허난성의 농민봉기조직 “훙챵후이(红枪会, 홍창회, 2편의 방회 부분을 참조하시라)” 중 선진분자, 군벌 펑위샹(冯玉祥, 풍옥상, 1882~ 1948)부대의 진보적인 청년장교 등등. 공산국제 동방부는 그들을 동방대학에 집중시키고 전문 군사반을 설립했는데 여러 모로 여의치 못한 상황들이 생겼던 모양이다. 당시 소련에 가있던 사람들의 회억담을 살펴보면 어느 학교에 들어가 어떤 과목을 배우느냐는 어떤 대우를 받느냐와도 직결되어 먹고 입는 문제만 보더라도 같은 고향출신이나 비슷한 경력자들과의 비교가 선명해지기에 실리 및 체면 때문만으로도 불평불만을 낳을 여지가 많았으니까, 경력과 사상이 다양한 사람들은 더구나 복잡하기 마련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동방대학 군사반 학생들이 모스크바 보병학교에 가서 공부했으니 우슈쵄의 회억에 따르면 1928년 여름까지 300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샹중파가 소동을 신속히 해결한 건 다양한 사람들의 내재적인 수요를 판단하고 만족시키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이에 비춰보면 그가 계속 실무를 맡았더라면 역사에 아름다운 명성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샹중파는 1928년 말에 귀국하여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최고지위를 가지기는 했으나 자체의 이론이나 주장은 없었고 또 당시 중공이 공산국제의 지부 중 하나였던 상황에서 사업에서 남에게 의지했다 한다. 초기에는 저우언라이와 리리산(李立三, 이립삼, 1899~ 1967)에 의거하고 후기에는 공산국제의 새 총아로 부상한 왕밍(王明, 왕명, 1904~ 1974)의 말을 따랐다는데, 리리산과 왕밍의 주장을 중공 역사에서는 “좌경노선”이라고 부른다.
좌경과 우경에 대해 이러저러한 정의가 많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판단한 적 있다. 임신 칠팔 개월에 아이를 낳겠다면 좌경이고 열달 넘어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우경이라고 말이다. 좌경은 형세를 오판하여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주장하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6차 대회 기간에 중국혁명에 대한 분석을 많이 했는데, 리리산은 혁명이 고조기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나름대로의 근거를 댔다. 스탈린은 종이에 파도를 그리고 큰 파도의 밑굽에 잔물결을 그린 다음 저조기에도 물보라는 일어난다고 알려주었다. 당장에서는 스탈린의 판단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귀국한 뒤 중공 중앙 내부에서 실권을 잡은 리리산은 여전히 중국혁명이 고조에서 새로운 고조에로 발전한다는 그릇된 판단에 근거하여 1930년 6월부터 좌경모험주의를 추진했으니 “우한에서 부대들이 만나 군마가 창강의 물을 마시게 하자(会师武汉、饮马长江)”는 현란한 구호를 내걸고 진공계획을 추진했다. 도회지 공격을 통해 한 성(省)이나 몇 개 성의 혁명부터 성공시킨 다음 전국의 혁명승리를 안아온다는 게 리리산의 낭만적인 꿈이었고 그 주장을 “리산노선(立三路线, 입삼노선)”이라고 불렀다.
샹중파는 당의 주요책임자로서 리산노선에 동조해 오점을 남겼다. 이에 대해 그는 1930년 말에 변명했으니 나는 이론이 부족하여 예전에 리산이 잘못할 때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고 그와 변론할 수 없었다, 나는 글을 쓸 줄 모르고 조수도 없어서 리산이 그르다고 생각하더라도 반항할 수 없었다 등등 이었다. 수십 년 뒤의 독자들마저 쓴 웃음을 짓게 하는 말들이다.

 

그때까지 국제공산주의운동사에서 유일한 집권사례는 소련공산당이 한 차례의 도시폭동을 성공시켜 정권을 잡은 것이었다. 하여 중공도 초기에는 도시폭동으로 성공을 복제해보려고 애쓰다나니 1927년에 난창기의와 광저우(广州, 광주)기의를 조직했으나 작은 성공, 큰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길이 통하지 않음을 확실히 인식한 건 아니었고, 대도시에서의 폭동성공으로 지역정권을 잡거나 전국봉기를 유발한다는 건 아직도 상당히 매력적인 방안이었다. 여러 나라의 세력이 얽힌 상하이에서의 폭동을 준비하기 위해 특과에서 정부수집을 맡은 천겅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상하이의 국민당군대와 다국 군대 정보를 낱낱이 수집한 적 있는데 단 후에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다른 편으로 마오쩌둥과 주덕을 대표로 하는 홍군무장이 생겨나고 여러 고장에 근거지들이 생겨나면서 자체능력을 과대평가한 사람들이 중공 내부에 수두룩했으니, 리리산은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이었을 따름이다. 내일아침에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대중의 심리에 부응하여 나온 게 리산노선이었고 샹중파의 동조도 그런 차원에서는 남보다 특별히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기 어렵다. 좌경모험주의의 산생과 확장은 중국혁명의 복잡성과 장기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탓인데 중국문제를 가장 깊이 있게 파악한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 단 농촌에 발붙인다는 그의 방식으로는 언제나 혁명이 성공할지 모른다는 막연함 때문에 아직은 당내 다수 동지들의 찬성과 지지를 받지 못했을 따름이다.

 

앞에 쓰다시피 리산노선은 대도시공격으로 혁명의 고조를 만들어낸다는 게 핵심이지만, 우리 민족 혁명사에서는 음의 와전으로 우스운 결과를 자아냈다. 지금의 옌볜(延边, 연변)지역에 리산노선이라는 말이 전해졌을 때 조선어한자음에 따라 “입삼노선”이라고 불렸는데, 어쩌다가 “입산노선”으로 바뀌어 조선인 혁명가들 가운데서는 산으로 들어가는 노선으로 알려져 해프닝을 꽤나 만들었던 것이다.
리산노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천의 실패로 하여 역사에서 물러났으나, 리리산의 자리를 메운 사람들은 소련유학파 왕밍과 그 지지자들이었고 리산노선을 대체한 것은 그보다 더 좌적인 왕밍노선으로서 중국혁명에서 제일 오래 지속되었고 제일 큰 위해를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명한 대장정이 바로 왕밍노선의 추진 탓으로 근거지를 잃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고, 왕밍노선의 4년 남짓한 실시결과는 전국 절대다수 근거지의 상실 및 전국 당원과 홍군의 90% 감소였다.

 

왕밍의 득세는 유학시절의 스승으로서 모스크바 중산대학의 교장이었던 미프(米夫, 러시아어 표기는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바웰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1901~ 1938 혹은 1939)와 갈라놓을 수 없다. 미프는 1930년 12월 공산국제 대표의 신분으로 상하이에 와서 왕밍을 강력 지지하여 1월에 진행된 중공 6기 4중전회에서 왕밍과 그 일파가 정치국위원, 상무위원으로 되도록 도와줬다. 미프가 중국혁명에 끼친 해악이 하도 크기에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에서 그가 죽은 데 대해 필자는 쌤통이라고 생각한다. 1938년 혹은 1939년에 비밀처형당한 미프는 소련에서 1976년에 명예를 회복했는데 그가 숙청 당시 몰린 반혁명분자나 트로츠키 분자는 아니었을 테지만, 그가 끼친 해악은 그 어떤 반혁명분자도 트로츠기분자도 훨씬 능가한다. 미프 같은 인물은 공산주의운동사에 수두룩하다. 나름대로는 신념을 바꾸지 않았으나 오판과 고집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변절자에 대한 평가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 미프     © 자주시보, 중국시민


샹중파는 미프의 비판을 받았고 사직을 제기했으나 누구의 찬성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취츄바이로부터 일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왕밍 일파가 득세한 뒤에도 여전히 당의 최고영도지위를 차지했으나 실권은 남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편에 쓰다시피 4월에 꾸순장의 변절로 중공중앙이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으므로 그가 대권을 잃은 기간도 사실 길지는 않다.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6차 4중전회는 왕밍 일파의 부상이라는 직접적인 결과를 낳은 외에 중공 역사에서 유례가 드문 분열결과를 낳았다. 회의의 소집과 진행에 불만을 품은 노조출신 25명 간부들이 4중전회를 반대하는 회의를 열다가 밀고로 체포되어 전부 희생되었고, 뒤이어 다른 노조출신 간부들이 따로 중앙을 세웠다. 중공은 90여 년 역사에서 실질적인 분열이 없었다는 게 특징인데, 중앙의 명의로 활동한 사례는 2번 있었다. 첫 번이 바로 4중전회에서의 왕밍 일파 득세를 반대하여 후난사람 뤄장룽(罗章龙, 나장룡, 1896~ 1995)이 나서서 중앙위원 30여 명으로 조직한 “중공중앙비상위원회(中共中央非常委员会)”였으니 곧 밀고, 체포와 숙청으로 이어져 산산이 흩어졌고, 두 번째는 이제 다른 편에서 다루게 될 쟝시 사람 장궈타오(张国焘, 장국도, 1897~ 1979)가 대장정 기간에 만든 가짜중앙이다.


4중전회가 공산국제의 의견에 따라 사업의 중점을 소베트구역으로 옮기기로 정한 데다가(바로 이런 결의가 있었기에 장궈타오가 소베트구역으로 이동했고, 따라서 꾸순장의 변절 때문에 중공이 도시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근거와 설득력이 부족하다), 노조출신 간부들의 이탈로 상하이와 다른 도시들에서 노동운동의 영향력도 대폭 약화되었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샹중파의 입지도 당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론은 왕밍을 비롯한 소련유학파들이 세고 실무는 저우언라이 같은 사람들이 맡은 상황에서 샹중파는 일주일에 한 번 씩 공산국제 극동국에 사업보고를 하고 중앙정치국 회의나 상무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게 고작이었다 한다. 그와 왕밍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작정 찬성했다는 설과 걸핏하면 다투었다는 설이 있어 진실을 가늠하기 어려운데, 그의 타락은 증거들이 분명하다. 당의 경비로 좋은 층집에 들고 첩을 두어서(동거라는 설과 결혼했다는 설 2가지가 있다) 그의 안전과 생활을 책임진 저우언라이 등 사람들이 긴장해났다는 것이다.

만약 꾸순장의 변절이 없었더라면 샹중파는 그럭저럭 지위를 유지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리를 내줬을 가능성이 높다. 헌데 꾸순장의 변절은 급변을 자아냈다. 꾸순장이 저우언라이 체포에는 실패했으나 샹중파 체포에는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졌다. 상대방의 습성과 동선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당시 샹중파는 부유한 골동품상인으로 분장하여 기생이었던 양슈전(杨秀贞, 양수정)과 함께 프랑스 조계지의 싼중(善钟, 선종)로 부근의 3층집에서 부부 명의로 동거했는데, 양슈전은 당원이 아니었고 초기에는 샹중파의 진짜 신분도 몰라 그저 돈 많은 장사꾼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 여자를 샹중파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꾸순장이었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하녀도 꾸순장이 소개해준 터였다.


꾸순장의 변절을 확인한 저우언라이는 즉시 샹중파에게 알려 어느 층집으로 이사시켰는데, 샹중파와 양슈전이 1층에 들고 이미 소베트구역으로 간 중공 영도자 런삐스(任弼时, 임필시, 1904~ 1950)의 아내 천중잉(陈琮英, 진종영, 1902~ 2003)과 딸 런왠즈(任远志, 임원지, 1931~)가 2층에 들었다. 뒤이어 당중앙이 샹중파를 쟝시성의 중앙소베트구역으로 전이시킨다는 결정을 지으니, 도시생활에 습관된 샹중파는 떠나기 싫어했으나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는 불편했다. 저우언라이는 샹중파가 쟝시로 갈 노선을 짜는 한편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샹중파 한 사람만 자신과 아내 덩잉차오의 집으로 이사시키고 함부로 외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노선을 다 정하고 호송인원들도 선발한 저우언라이가 샹중파에게 즉시 출발을 요구했는데, 샹중파가 고집을 부려 말썽을 일으켰다. 떠나기 전에 양슈전과 꼭 만나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 꾸순장이 소개해준 하녀는 이미 내보냈으나, 꾸순장은 그녀를 찾아서 샹중파와 양슈전을 감시하라고 일렀다. 양슈전이 한 복장점에서 주문한 옷이 완성되지 않아 틀림없이 그 옷을 찾으러 갈 걸 짐작한 하녀는 날마다 복장점에서 버티다가 양슈전을 발견하고 미행하여 저우언라이가 샹중파, 천중잉네를 들게 한 층집까지 따라갔다. 다행히도 샹중파가 이미 저우언라이의 숙소로 옮겼고, 그 미행이 중공 당원에게 발견되어 저우언라이에게 보고되었기에, 저우언라이는 즉시 비서처 일꾼인 황졔란(黄玠然, 황개연, 1901~ 2004) 에게 지시하여 천중잉 모녀와 양슈전을 징안쓰(静安寺, 정안사)부근의 여관으로 옮겨다가 들게 했다. 당시 양슈전의 양딸인 예닐곱살 난 소녀도 있었는데 이름이 거즈(鸽子, 비둘기)였다 한다.


저우언라이는 양슈전이 이미 적들에게 미행당했는데도 만나러 가겠다면 너무 위험하지 않느냐고 엄숙하게 질문했으나, 샹중파는 그래도 뻔뻔스레 기어이 만냐야겠다면서 만나지 못하면 출발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덩잉차오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나와 언라이는 몇 번이나 갈라졌는지 모르지만 그는 항상 간다면 갔다고, 당신 같은 책임동지를 본적이 없다면서 조직에서 상하이를 떠난다는 결정을 지었는데 말이 너무 많다고 문제점을 지적하니 샹중파는 얼굴을 붉히고 당분간 말을 하지 않았다.
샹중파는 저우언라의 숙소에서 사나흘 지냈다. 6월 21일 밤에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샹중파에게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샹중파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양슈전네가 든 여관으로 갔다. 그러면 샹중파가 혼자 집에 있었을까? 그건 아니다. 단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말릴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제 아래에서 소개하게 된다. 샹충파는 천중잉에게 잠깐만 있겠노라고 말했으나 12시가 되어 천중잉이 문을 두드리며 떠나기를 재촉하니 그는 내일 아침에 가겠다고 떼를 썼고 결국 22일 아침에야 여관을 떠났다.
그보다 앞서 꾸순장은 샹중파의 육체적 특징, 즉 왼손의 손가락 하나가 반쯤 잘린 점을 국민당 특무들에게 알려주었다. 역사자료라는 게 좀 웃겨서 구체적으로 어느 손가락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아무튼 선명한 특징은 지하활동에서 굉장히 불리한 요소이다.
샹중파의 체포에 대해 인터넷상의 어떤 자료는 꾸순장이 샹중파의 종적을 알아냈기에 국민당 쑹후(松沪, 송호) 경비사령 양후(杨虎, 양호)가 샹중파가 양슈전과 작별하려면 꼭 거치게 될 “탄러(探勒)”자동차점(汽车行)에 사람을 매복시켜 6월 22일 오전 9시에 체포했다고 썼다.
저우언라이가 샹중파를 위해 취한 조치들을 살펴보면 위의 주장에 허점이 존재한다. 인민출판사가 1993년 3월에 펴낸 《덩잉차오전(邓颖超传)》(진펑金凤 지음)의 설명이 훨씬 믿음직하다. 그에 의하면 샹중파는 평소에 징안쓰 부근의 영국인이 경영하는 탄러자동차점에 가서 택시를 타곤 했는데, 그 가게의 회계 예륭썽(叶荣生, 엽영생)이 상하이 호제회(互济会)에서 일한 적 있어 샹중파를 알았다. 서로 돕는다는 의미인 호제회는 실제로 공산당이 영도하는 조직으로서 예는 샹중파의 연설을 들은 적 있었다. 그는 매형과 함께 국민당 쑹후 경비부사령(사령이 아니고 인터넷 자료에서도 뒤이어 사령의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 표기했다) 수하의 특무두목 저우롄허(邹练和, 추련화)를 찾아가 샹중파를 찾을 수 있다고 얘기했고 양후는 그에게 거액상금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6월 22일 새벽에 샹중파는 또다시 탄러 자동차점에 가서 차를 요구했다. 잘린 손가락을 통해 대번에 샹을 알아본 예룽성이 휘파람을 부니 기다린지 오랜 특무들이 달려들어 샹을 자동차 안으로 끌어들여 싼중로의 순포방으로 끌고 갔다. 여기는 조계지의 경찰기관이었다. 샹중파는 당장 변절하여 천중잉과 양슈전이 든 여관을 털어놓아 두 여인과 생후 100일 미만인 런왠즈가 체포되었고, 뒤이어 고든로(戈登路,영국 장군 고든의 이름으로 명명한 길, 지금 이름은 쟝닝로江宁路강녕로) 헝지리(恒吉里 항길리) 1141호의 중앙비서처 기관을 털어놓아 기요주임(机要主任) 장지언(张纪恩, 장기은, 1907~ 2008)과 아내 장웨샤(张越霞, 장월하, 1910~1979)가 체포되었다.
이와 같이 체포경과가 좀씩 다르고 체포시간이 몇 시간 차이가 나는데, 확실한 역사사실은 샹중파가 22일에 체포되었다가 24일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에 대해 이견이 존재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샹중파의 변절자체를 부정한다.
근거로는 샹중파가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1931년 8월 24일 중화소베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瑞金, 서금)에서 “샹중파 동지 피난 2주월 기념일(向忠发同志被难二周月纪念日)”활동을 벌여 8월 24일부터 30일까지를 “샹중파동지기념주”로 정한다는 긴급통지를 낸 게 거들어진다. 사망 2개월 뒤에도 변절자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데, 당내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는 증거로는 되더라도 샹이 변절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되기는 빈약하다.
그리고 천중잉의 당원신분이 드러나지 않은 것 따위도 샹중파의 변절혐의가 무기력하다는 증거로 거들어지지만, 그러면 왜 천중잉이 체포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주장자들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샹중파만 아는 사람들이 체포되고 샹중파만 아는 지점이 위험에 처했음을 잘 아는 사람들이 여럿인데 가장 발언권이 당당한 사람은 저우언라이였다.
21일 밤 귀가한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샹중파가 남긴 쪽지를 보았다. 양슈전을 잠깐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그날 밤에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저우언라이는 문제가 생기리라 짐작했다. 샹중파 체포 후 특과 성원들은 재빨리 적들 속에 뻗친 줄을 통해 확실한 소식을 알게 되었고 22일 오후에 저우언라이 숙소로 가서 보고했는데 그때 저우언라이가 집에 없어서 보고를 받은 덩잉차오가 곧 외출하여 샹과 관계되는 동지들이 옮기라고 통지했다. 저우언라이의 안전이 걱정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귀가한 덩잉차오는 원래 정한 경보신호가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집에 들어섰다. 한편 샹중파의 체포소식을 접한 저우언라이가 즉시 구원작업을 조직하여 집행할 동지들이 막 출발하는데 변절소식이 전해져 되돌아오고 말았다. 귀가한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와 만나 문건들을 전부 파기하고는 다시 만날 장소를 약속한 다음 급히 갈라져 전이했다. 이때는 22일 깊은 밤, 덩잉차오는 함께 사는 어머니 양전더(杨振德, 양진덕, 1875~1940)와 중공을 위해 엄호사업을 많이 하여 “혁명의 어머니(革命母亲)”샤냥냥(夏娘娘, 1870~1954)에게 자기와 함께 떠나기를 권했다. 당시 나이계산법으로는 노인이던 두 여인은 상황이 급하니까 너만 빨리 가라고, 우리 두 노친네는 가족일 따름이니 적들이 오더라도 어쩌지 않을 거라고 말해, 덩잉차오 혼자서 숙소를 떠났다.

이 샤냥냥은 혁명을 위해 3번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고생을 했는데 사후에야 그의 소망에 따라 중공당원으로 추인된 특이한 인물이다.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이 진짜 공산당원보다 더 높은 지조를 보여준 사례는 수두룩하며 연구할 가치가 있다. 1956년에 제작된 예술영화 《어머니(母亲)》는 샤냥냥을 원형으로 삼은 작품으로서 주인공과 그의 자녀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는 라오떵(老邓, 등 동무) 역은 1930년대 중국영화계에서 “영화황제”로 불리던 우리 민족 배우 김염(金焰, 본명 김덕린金德麟, 1910~ 1983)이 맡았다.

 

▲ 예술영화 《어머니(母亲)》 포스트와 김염의 사진, 영화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작은 사진들 가운데 오른쪽 위와 왼쪽 아래의 2장에서 나온다.     © 자주시보, 중국시민

 

6월 23일 샹중파는 조계지 당국으로부터 국민당 쑹후 경비사령부로 인도되었다. 그는 즉시 저우언라이네가 사는 곳을 불고는 특무들을 데리고 저우언라이를 체포하러 달려갔다. 여기까지 본 이들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왜 샹중파가 체포 직후에 저우언라이의 주소를 털어놓아 잡히게 하지 않았는가고. 사실 그가 누설했더라면 시간과 거리 관계로 저우언라이에게 꾸순장의 변절보다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을 수 있다. 샹중파의 변절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 역시 변절하지 않은 근거로 삼을 수 있다만, 당시 상하이의 특수상황을 알게 되면 의문이 성립되지 않는다. 앞의 글과 이 글에서 거듭 언급했다시피 당시 상하이에는 조계지들이 존재했다. 반봉건반식민지상태였다고 평가되는 당년의 중국에는 전국 여러 도시에 외국인들이 차지한 조계지들이 있었고 그런 조계지에서는 치외법권이 시행되었다. 상하이는 유달리 조계지가 많아 프랑스 조계지, 공공조계지(미국과 영국), 그리고 일본 조계지가 있었다. 앞에서 쓰다시피 샹중파는 우선 조계지의 순포방에 잡혀갔고 조계지 안에 있는 중앙비서처 성원들을 불어 체포되게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지하활동 기간에 조계지를 늘 드나들고 조계지 안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으나 1931년 6월 당시에는 공공조계지에서 약간 떨어진 속칭 화졔(华界, 중국계, 중국지역)에 속한 샤오싸두로(小沙渡路, 소사도로, 지금의 시캉로西康路서강로)에 위치한 집에 머물렀던 것이다. 따라서 조계지의 순포들은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잡을 권한이 없었는데, 샹중파가 당시 저우언라이의 주소를 댔더라면 순포들이 국민당 당국에 알려 저우언라이를 잡을 수도 있겠다만, 샹중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튿날 국민당 당국에 인도된 다음에 저우의 주소를 말하고 직접 잡으러 갔다. 원인은 간단하다. 공로를 직접 세우려는 것이다. 변절자의 심리란 이처럼 비루하다.

 

집열쇠가 있는 샹중파가 문을 열어 특무들이 저우언라의 집으로 들어가보니 노인 둘 뿐이었다. 특무 가운데는 전에 감옥살이를 한 적 있는 샤냥냥을 알아보는 자가 있어서 대뜸 또 만났다고 지껄였는데, 노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들은 두 사람을 한바탕 구타하고는 잡아가지 않고 집에 매복해 저우언라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샹중파의 변절을 차마 믿을 수 없었던 저우언라이는 23일 밤에 샤오싸두로 뒤쪽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 집의 뒤창문을 바라보았다. 커튼이 젖혀져 누르께한 등불빛이 비쳐나오는 게 보였다. 양전더와 샤냥냥이 보내는 신호였다. 집에 일이 생겼음을 알아챈 저우언라이는 분통한 소리를 냈다.
“샹중파가 확실히 변절했구나.(向忠发确实叛变了)”
쑹후 경비사령 슝쓰후이(熊式辉, 웅식휘, 1893~ 1974)는 샹중파의 신병을 확보하자 쟝제스에게 비밀전보를 쳐서 보고했는데, 루산(庐山, 여산)에서 피서하던 쟝제스는 대단히 기뻐하는 동시에 무슨 변고가 생길까봐 현지에서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여 6월 24일에 샹중파가 총살되었는데 사형장에서 샹중파는 꿇어앉아 절을 하며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용서를 받지 못했다. 일설에는 23일 밤이라고 하지만 24일이 정확하다고 보인다.

샹중파의 죽음에 대해 그가 더는 중공비밀기관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거나 털어놓지 않았음을 이유로 거드는 사람이 있는데 딱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샹중파의 변절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천중잉, 장지언, 장웨샤의 신분을 아는 샹중파가 그들이 공산당원 신분을 부인하는 허위주장을 까밝히지 않은 점을 이유로 삼지만, 장지언의 회억에 의하면 그들 부부는 24일 국민당 당국에 인도되어 특구법원(特区法院)”을 거쳐 난시(南市) 바이윈관(白云观, 백운관)에 있는 국민당 정집대(侦缉队) 구류소에 이감되었는데, 이때는 샹중파가 이미 처형된 뒤이다.
의심론자들은 또 당시 경비사령부 간수소(看守所)에 갇혔으나 신분이 폭로되지 않은 관샹잉(关向应, 관향응, 1902~ 1946)과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할 방도를 샹중파가 저우언라이와 상의한 적 있기에 두 사람의 정체를 잘 알았지만 두 사람이 나중에 무죄석방된 사실을 근거로 삼는다. 구체적으로 관샹잉은 4월에 체포되었다가 반년 뒤에 구원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반론은 힘이 있다. 핵심은 역시 시간이다. 샹중파가 국민당 당국에 인도된 다음 저우언라이 등 체포에서 실패하여 굉장히 실망한 슝쓰후이는 쟝제스의 전보를 받자 24일에 샹을 총살해버렸으므로 샹이 장지언네와 대질할 수 없었듯이 관샹잉네를 고발하거나 대질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샹중파의 변절문제에 대해서는 피해자인 천중잉, 장지언 같은 사람들이 장수하여 생전에 증명했고, 위기를 벗어나 직접, 간접적으로 확인한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도 말로나 글로 증명한 바이다.

 

중공은 집권 전과 집권 후에 정치투쟁을 많이 벌렸는데 중공 자체를 반대하거나 정치투쟁에서의 사람들의 표현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역사상의 변절자들에게 매력을 느껴서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걸 통해 끝까지 혁명한 지도자들을 깎아내리려고 시도한다. 허나 피로 쓴 역사를 자료 몇 장 뒤적이고 머리 좀 굴려서 의문을 내놓는 행위로 부정하기는 역부족이다. 샹중파 변절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밖에도 몇 가지 이른바 증거를 내놓으면서 샹중파를 견정한 혁명가로 묘사하려고 애쓰는데 한심할 따름이다.
인격수양의 모범이라고 할 저우언라이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한 경우가 드물지만 샹중파에 대해서는 “그의 지조가 기생보다도 못했다(他的节操还不如一个妓女).”고 악평했다.
천중잉, 장지언 네가 공산당원신분을 부정했음은 앞에서 거든 바인데, 백색테러환경에서 공산당활동은 대체로 죽을죄이고 다른 죄는 상대적으로 경하게 판결되므로 공산당원 물증이 없었던 덕에 그들은 결국 얼마 후 구원되거나 유기징역으로 그쳤다. 공산당원이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양슈전은 심문을 받으면서 샹중파의 신분을 부인했다. 특무들이 물을 때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대답했고 고문을 들이대도 모른다고 대답했는데, 변절한 샹중파가 직접 나서서 특무들의 눈앞에서 양슈전에게 저 사람들이 다 안다면서 털어놓으라고 권해서야 양슈전은 샹중파의 신분을 안다고 말했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샹중파가 국민당 당국에 인도돼서부터 죽기까지 제일 길어 26시간 지났다고 분석한다. 체포부터 따지면 48시간 정도나 될까?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최고직무를 맡았던 사람의 체포, 변절과 사망은 너무나도 허망하다. 그리고 샹중파의 변절과 죽음이 중공의 약화를 가져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변절에 대한 멸시만을 자아내어 결과적으로 중공이 더욱 강해졌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변절의 추학은 지금까지 세 편에서 변절 후 오래 살지 못하고 복을 누리지 못한 인물들을 다뤘다. 역사적으로 변절자들 특히 옛 동지들을 팔아먹어 손에 피를 묻힌 자들은 불행하게 최후를 마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변절한 뒤 갖은 얄미운 짓거리를 일삼고도 60년 남짓이 더 살았고 나중에는 중공의 귀빈대접까지 받다가 94살에 죽은 자도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제일 너절하게 보는 꿍추(龚楚, 공초)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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