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4] 추접하기 그지없으나 천수를 누린 꿍추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6/09/08 [16:48]  최종편집: ⓒ 자주시보

인간은 살다나면 생각이 바뀔 수 있으니 개종이나 신념변화를 덮어놓고 나쁘다고 하기는 어렵다. 틀린 걸 믿다가 옳은 걸 믿는 경우도 많은 법이라, 원 소속단체에서의 시각으로는 나쁜 일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좋은 일이 되기도 한다. 물론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 또한 주관적 성향이 강한 만큼 어느 사람의 변화를 놓고 쟁론이 벌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헌데 어떤 사람들이 개종하거나 신념을 버린 다음 갖은 말과 글로 변명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미화하는 행위는 너그럽게 봐주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런 미화에는 거짓말과 과장이 수두룩하기에 허점들을 남기고 따라서 의문을 자아낸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강철서신”의 저자로 이름을 날렸고 “주사파의 대부” 칭호가 지금까지 붙여지는 김영환씨는 밀입북하여 조선(북한) 관료들의 경직된 모습에 실망했고 김일성 주석과 만나서 대화하고는 김일성 주석이 주체사상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는데, 남으로 돌아간 다음 여전히 학생운동의 지도자노릇을 하다가 몇 해 지나 체포되었고 전향했다. 그러면 북과 김일성 주석에 실망한 뒤에 왜 남에 돌아가자마자 자수, 전향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만약 돌아가자마자 자수하고 전향했는데 학생조직을 뿌리 뽑기 위해서 원래 신분으로 위장활동을 전개했다면 이치에 맞겠다만, 그렇지 않고 자신이 무척 실망했다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동지와 부하들에게 몇 해 동안이나 이러저러한 교육과 호소를 했다면, 그가 이중인격자였단 말인가? 선천적으로 문제점이 없다면, 뒷날 그가 내놓은 실망과 무지 관련주장자체가 신빙성이 약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본인이 말하거나 쓰지 않는 한 남들이 알기 어렵지만 검증하는 방법은 있다. 그 사람의 다른 시기 행위와 대조해보는 것이다. 이건 역사연구에서 중요한 방법으로서 종종 진위를 가려낸다.

 

▲ 꿍추     © 자주시보, 중국시민

 

이번 편에서 다루는 꿍추(?楚, 1901~ 1995)라는 인물은 변절 후 책을 2권이나 써서 크게 불어댔다.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경력과 지위 등을 그대로 믿는 사람도 있지만, 반론들도 많으므로 연구에 어려움을 조성한다. 단 그가 변절하기 직전의 신분에는 이의가 없으니 중앙군구 참모장이었다. 홍군이 대장정을 떠났고 중앙소베트구역이 파괴된 뒤이므로 병력이 많지 않았고 실권도 크지 않았으나 내부지위와 대외명성은 상당했다. 그런데 꿍추는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하기 위해 책에서 1933년 중앙소베트구역에서 진행된 “지주소멸”운동에 반대했고 불만을 품었노라고 썼는데, 그때에는 변절하지 않았다. 1933년 가을부터 1년 남짓이 진행된 제5차 반포위토벌(反?剿)에서 마오쩌둥의 전법을 배척한 당지도자들이 그릇된 전략전술을 내리먹여 패전이 거듭되면서 소베트구역이 자꾸만 줄어들 떼에도, 1934년 10월에 8만 대군이 대장정을 떠나고 일부 간부와 부대, 적위대가 소베트구역에 남아 대군의 포위에 들었을 때에도 변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5년 2월 소베트구역에 남은 최고기관인 중앙분국(分局)이 당과 군대가 9갈래로 갈라져서 포위를 돌파한다고 결정한 다음, 한 갈래의 부대를 거느리고 이동하여 작전을 진행하다가 적들의 포위망을 뚫은 다음 5월에 변절했다. 그러면 실망해서부터 2년 남짓이 왜 계속 홍군에서 싸웠느냐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신은 5월 2일에 슬그머니 부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노라고 책에 썼지만, 중국공산당의 기록에 의하면 후난(湖南, 호남)성 천(?, 침)현의 황마오(?茅, 황모)촌에서 함께 포위를 뚫고 나온 홍 24사(사단) 71단(연대) 정치위원 스헝중(石衡中, 석형중)을 쏴죽이고 변절했다.

뒤이어 적군에 몸을 담았는데 그가 광둥성의 대군벌 천지탕(??棠, 진제당, 1890~ 1954)에게 붙었느냐 아니면 그보다 지위가 낮은 위한머우(余??, 여한모, 1896~ 1981)에게 붙었느냐는 두 가지 설이 병존하지만, 광둥의 군사와 정치를 다 맡은 천지탕과 단순히 군대만 거느렸던 위한머우는 모두 웨쥔( ??, 광둥군대)의 두목이니까 크게 말하면 천지탕에게 붙었다고 보는 게 맞다.

 

10년가량 하던 혁명을 배반하고 제발로 적군을 찾아간 꿍추는 썅잉(?英, 항영, 1898~ 1941)과 천이(?毅, 진의, 1901~ 1972) 등을 유인, 체포할 수 있다고 불어댔다. 꾸순장의 중공중앙 일망타진 장담보다는 격이 좀 낮지만, 썅잉과 천이가 홍군장정 이후 소베트구역에 남은 최고급 지도자들이었으므로 그의 호언이 적군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곧 소장(少?)유격사령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욕심이 만족될 리는 없는 법. 천지탕은 썅잉, 천이를 소멸한 뒤에 벼슬을 올려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권총과 보총으로 무장한 3, 40명 경위부대를 붙여주었다. 꿍추는 광둥성 북부의 난슝(南雄, 남웅)에 있는 베이산(北山, 북산)일대에 이르러 룽시스(?西石, 용서석)이란 고장에서 광둥 군벌이 파견한 저우원산(周文山, 주문산)의 토비무장과 거짓전투를 벌려 상대방을 격퇴했다. 꿍 참모장이 거느린 “홍군유격대”가 곧 유명해졌다.

 

중국혁명사에는 “**변(?)”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당년의 중국에서는 군벌들의 할거(割据, 갈라서 차지함)와 행정책임자들의 구역담당의식 때문에 성이든 현이든 변두리의 통치가 약한 고리로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이 점을 파고들어 성과 현들의 접경지대에 근거지를 세우거나 유격구를 설정하여 “**변”이라고 부르곤 했다. 역시 중국혁명사에 늘 등장하는 “*동”, “*서”, “*남”, “*북”도 마찬가지 이치로 어느 성이나 현의 변두리 지역에서 혁명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중앙소베트구역은 주로 쟝시(江西, 강서)성에 위치했었는데, 대장정 개시 후 남은 사람들이 포위를 돌파한 다음 몇 개 유격구로 갈라져갔는데, 썅잉, 천이는 깐웨(??, 감월, 쟝시성과 광둥성의 약자)변 특위(特委, 특별위원회)를 거느리고 광둥성 북부의 베이산 유격구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리고 꿍추의 임무는 썅난(湘南, 상남, 후난성 남부)로 가서 유격활동을 벌리는 것이었는데, 썅잉, 천이의 소재를 확실히는 모르지만 베이산 일대의 유격전 상황은 국민당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므로 일단 거기로 가서 활약해서 썅잉네와 줄을 닿으려 노렸던 것이다.

 

당시 베이산에는 많은 부서가 있어서 각자의 분공에 따라 움직였는바, 특위 후방판사처(后方?事?) 주임 허창린(何?林, 하장림)과 룽시스 교통참(交通站) 책임자 라이원타이(?文泰, 뢰문태), 베이산홍군유격대 대대장 허민쉐(?敏?, 하민학) 등이 소문을 듣고 꿍추와 접촉했다. 꿍추는 썅난의 형세가 어떻게 좋다고 불어대면서 썅잉, 천이를 모셔다가 영도를 강화하련다고 꼬였다. 그 설에 넘어간 허창린은 썅잉, 천이가 바로 베이산에 있다고, 단 유격대나 후방과 연계를 하지 않고 편지로 비밀연락을 유지한다고 알려주었다.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온 격이라 꿍추는 대단히 기뻐 곧 썅잉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허창린에게 부탁했다. 중화소베트공화국의 부주석이었던 썅잉은 1931년에 중앙소베트구역에 들어가 정부활동에 종사하다나니 꿍추와 접촉이 적었으므로 편지를 받고 무척 반가워했다. 포위를 돌파한 후 처음으로 다른 지역 유격대의 소식을 알게 되어서였다. 그런데 처음엔 역시 기뻐하던 천이는 의문이 생겼다. 꿍추는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라 징강산 시절에 마오쩌둥을 내놓고는 눈에 차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떻게 지금 이처럼 겸손하게 영도해달라는가? 그리고 2월의 결정에 의하면 꿍추는 썅난지역의 주요책임자인데 어떻게 형세가 좋다면서도 유격대와 유격구를 내버리고 먼 길을 달려와 “회보”할 수 있는가? 하여 천이는 한동안 관찰하면서 꿍추의 다음 행동을 파악한 다음에 보자고 극력 주장했다. 홍군 장정 이래 급변을 많이 겪은 썅잉도 천이의 견해에 찬성했다.

 

며칠 기다리던 꿍추는 회답을 받지 못하니 불안해났다. 폭로될까 겁이 난 그는 선손을 쓰기로 작심하고 허창린을 통해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썅잉, 천이를 잡지 못하더라도 중하층 간부들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허창린은 당의 규정을 어기고 특위에 보고하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룽시스에서 작은 유격대의 대장 이상 간부회의를 열었다. 참가자는 5, 60명. 회의가 시작된 후 꿍추는 위장을 벗어버리고 떠벌여댔다. 공산당이 끝장났다, 중앙소베트가 망했다, 투쟁을 견지해보았자 전도가 없으니 나를 따라 투항하는 게 낫다 등등.

당시 베이산홍군유격대 대대장이었던 허민쉐는 마오쩌둥의 두 번째 부인 허즈전(?子珍, 하자진, 1909~ 1984)의 오빠인데, 엄혹한 투쟁에서 경각성을 잃지 않고 회의에 참가하면서도 권총에 탄알을 재워놓았다. 그와 일부 동지들이 간계에 걸린 걸 발견하자 분노하여 총을 들어 사격했으나, 꿍추가 미리 기관총으로 회의장의 통로들을 봉쇄했기에 빠져나간 사람은 허민쉐와 “멍장페이(猛??, 용맹한 장비)”라는 별명을 가진 류룽꾸(??? 유롱고) 등 몇 사람 뿐이었다. 두 사람은 부상당한 몸으로 언덕을 굴러내려갔다. 몸에 총알 3발을 맞은 류룽꾸는 기고 구르면서 며칠 동안 애를 써서 살아났고, 특위에 줄을 닿아 상황을 보고했다. 역시 몸에 3발의 맞고 별도로 탈출한 허민쉐(1904?1988)는 한동안 휴양했는데, 뒷날 신사군(新四?)과 해방군에서 요직을 맡았는바, 군대 내의 최고직위는 1949년 창강(?江, 양주강)도강작전 시의 제3야전군 27군(군단)의 부군장이었으니, 이 27군은 1950년 겨울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의 한 개 연대를 전멸시킨 강한 부대로서 제27집단군으로 불린다. 허민쉐의 건국 후 최고직위는 부부장(차관), 부성장이었는바, 혁명에 참가한 시기나 세운 공로에 비해 직위가 낮았다는 평을 받는다.

 

▲ 허민쉐와 허즈전 오누이     © 자주시보, 중국시민


꿍추가 만들어낸 베이산사건으로 중국공산당은 수십 명 희생, 수십 명 체포라는 심각한 손실을 보았는데, 기막히게도 허창린은 그 자리에서 변절해버렸다. 이 사건이 분명 일어났지만 언제 일어났느냐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니 10월 13일, 10월 20일 두 가지 설이 존재하는바, 필자는 20일 설을 찬성한다.

 

꿍추의 변절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류룽꾸가 특위에 이르기 전에 일어났다. 원시삼림이 우거진 베이산 일대에는 워낙 버섯재배움막 따위들이 있었는데 특위가 들어온 다음 창고, 수리소, 피복공장 등을 밀림 속에 은폐시키고 특위는 따로 움직였다. 예전에 있던 고장보다는 안전했으나 식량이 부족하여 특위의 정찰패(?察排, 정찰소대)가 산 밖의 백색구역에 가서 쌀을 사오는 일을 전담했다. 어느 날, 소대장 우싸오화(?少?, 오소화)가 4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쌀을 사가기고 돌아오는 길에서 멜대로 짐을 지고 맨 앞에서 걸어가던 우싸오화의 눈에 밀림 속 저만치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은폐를 명령하고 권총을 뽑아든 우싸오화가 홀로 나아가는데, 수풀에서 두 사람이 나와서 수군거리더니 뒤쪽을 향해 손을 젓자 30여 명이 나타나 총을 들고 다가왔다. 옷을 잘 차려입고 똑같은 권총들을 쥐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댄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에, 우싸오화가 나무 곁으로 몸을 옮기고 관찰할 때, 앞장선 사람이 우 패장인가고 말을 걸었다. 보니 허창린이었고, 그 곁에 선 사람이 눈에 익어 잘 살펴보니 중앙군구 참모장 꿍추였다. 예전보다 얼굴이 좀 희어지고 몸이 좀 났으나 알아볼 수는 있었다. 자기편이라 마음을 놓으면서 맞다고 대답하니, 허창린이 쌀을 사러 갔느냐고 물었다. 헌데 어딘가 이상스러운 냄새가 풍겼다. 허나 특별한 증거가 없어 우싸오화가 산으로 돌아간다면서 대답하는데, 꿍추가 다가오면서 허허 웃어대면서 자기편이라고 거듭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30여 명도 바싹 따라왔다.
“섯, 움직이지 마시오!”
숱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이상하여 우싸오화가 습관적으로 한 말이었다. 상대방은 멍해났다. 우싸오화가 작은 비탈에서 내려가 허창린, 꿍추에게 차렷하고 경례를 붙이면서 살펴보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눈빛 또한 괴상했다. 후방사무처 주임이 왜 내가 아는 통신원을 하나라도 데려오지 않았을까?

 

꿍추는 군복매무시를 바로잡더니 웃으면서 잘 만났다고 특위에 보고할 요긴한 일이 있으니 길을 안내하라고 말했다. 이때 우싸오화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했다. 꿍추 곁의 사람들이 모두 총을 꼬나들고 자기를 사격목표로 삼는 모양이었다. 꿍추는 눈치를 챘는지 “이 형제들은 모두 방금 국민당 군대에서 투항해 넘어왔다(?些弟兄,都是???民???投降??的).”라고 설명했다. 우싸오화는 오히려 바짝 경각성을 높이게 되었다. 혁명군대에서는 서로 “동지, 전사, 전투원”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니 꿍추가 바싹 다가붙으면서 우싸오화의 손을 붙들고 특위가 어디 있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우싸오화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암만 음모궤계가 있더라도 나야 고작 패장일 따름인데 어째볼 수 있겠는가? 하여 특위가 전에는 여기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옮겨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꿍추가 실망스런 눈길로 허창린을 보니 허창린이 나서서 특위의 파견에 따라 쌀을 얻으러 간 게 아니냐고 물었다. 우싸오화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오히려 바로 당신을 찾아가던 길이라고, 특위의 연락소를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허창린이 할 말을 잃으니, 꿍추가 벌컥 성을 내면서 꾸짖었으나, 우싸오화는 계속 정말 모른다고 고집했다. 뒤이어 꿍추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총살하겠다 위협하고, 허창린이 또 나서서 슬슬 얼리는데, 수행자 하나가 나서서 우싸오화의 총을 빼앗자, 다른 몇 놈이 몰려들어 총구로 우싸오화를 겨냥했다. 꿍추가 욕하면서 총을 돌려주라고 명령하여, 우싸오화는 총을 되찾았지만 격침이 빠져 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이제는 꿍추와 허창린이 변절했음이 확실해졌다. 몸을 빼기는 어려우니 우선 끌고 가다가 길에서 빠져나가야 할 판이다. 이렇게 생각한 우싸오화는 특위로 데려가겠다고 응답했으나, 우물쭈물하면서 두 가지를 얘기했다. 첫째로 위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지 못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는데 탓하면 어쩌는가? 꿍추는 자기들이 책임진다고 장담했다. 둘째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올라갈 수 없으니 책임자 두 분만 갈 수 있다고 말하니, 꿍추는 거야 물론이라고 응대했다.

 

우싸오화는 뒤쪽에 남은 정찰병들에게 손짓한 다음 꿍추와 허창린을 데리고 다른 길로 걸어갔다. 30여 명이 멀찍이 뒤로 따라오는 게 보였다. 사태는 더욱 분명해졌다. 길에서 꿍추는 웃음을 짓고 방금 권총몰수는 오해라고 해석하더니 화제를 차차 특위로 돌렸다. 그의 관심사는 특위기관과 같이 있는 사람들의 수자였다. 정찰패가 나간 다음 특위에는 썅잉, 천이, 리러톈, 양쌍쿠이, 첸피셴 등 다섯 사람과 근무원 몇 뿐이고 무장을 갖추지 못했음을 잘 아는 우싸오화지만, 꿍추의 심보를 꿰뚫어보았기에 일부러 무심히 말하는 척 아마 예순 남짓할 거라고 대답했다. 꿍추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부하 30여 명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머뭇거리다가 몇 걸음 다그쳐 다시 캐물었다.
“무기장비는 좋은가?”
“별로 좋지 않아요. 보총 30여 자루, 기관총 3정에다가 손기관총(手提机?) 2자루지요.”
손기관총(手提机?)이란 당시 바닥에 내려놓고 쏘는 기관총과 달리 손에 쥐고 쏘기 편리한 자동총을 가리키는바 뒷날 중국에서는 충펑챵(???, 돌격총, Submachine gun)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꿍추는 불안해나 걸음이 늦어졌다. 한참 가다가 꿍추가 산 위쪽 높은 곳에 서있는 특위의 보초병 한 사람을 발견하고 놀란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 특위 사람이 있을 줄은 우싸오화도 몰랐던지라 무척 놀랐다. 특위기관이 방금 옮겨왔다고 판단한 그는 급한 김에 꿍추의 앞길을 막으면서 “올라가지 마십시오. 제가 먼저 올라가서 연락할게요. 그렇잖다가 보초병이 오해하면 제가 책임지지 못해요.” 말한 다음 꿍추가 반응하기 전에 잽싸게 산꼭대기로 달려 올라가 아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랜 제기랄 반혁명이야!(下面,他?的,是反革命)”
보초병이 즉시 총을 세 방 쏘아 경보를 올렸고, 두 사람은 곧 가로 뻗은 오솔길로 달아났다.

 

중국혁명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3가지 활동으로 홍군의 대장정과 동북의 항일투쟁, 그리고 남방에서의 3년 유격전을 꼽는다. 썅잉과 천이 등은 그 시절 갖은 고난과 위험을 많이 겪었으나 수뇌들이 동시에 몰살당할 뻔 한 경우는 꿍추의 습격을 내놓고는 예를 찾기 어렵다.

당시 특위에 있었던 5명 간부들 가운데서 리러톈(李?天, 이락천, 1905~ 1937)과 썅잉이 뒷날 희생된(이제 다른 편에서 이 사람을 다루게 된다) 외에 천이는 1편에서 설명했듯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되었고 외교부장으로도 활약했다. 양쌍쿠이(??奎 양상규, 1905~ 1986)는 건국 후에 쟝시성의 지도자로 사업했고 첸피셴(?丕?, 진비현, 1916~ 1995)은 문화대혁명 초기에 상하이의 지도자였기에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났었다. 꿍추의 습격이 성공했더라면 이들의 뒷날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1937년 여름에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터진 다음 남방의 유격대들을 모은 신사군이라는 부대가 생겨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요, 중국의 혁명사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 첸피셴     © 자주시보, 중국시민

 

 

▲ 양쌍쿠이     © 자주시보, 중국시민

 

이 사건에 대해 1950년대에 제일 상세하게 회억한 사람은 양쌍쿠이다. 당시 천이와 썅잉이 장기를 두는데 경보소리가 나기에 모두 급히 전이했다. 물건도 챙길 새가 없이 급히 갈라져서 피했다가 이튿날에야 예정한 지점 몇 군데에서 특위사람들과 정찰패의 쌀 사러 갔던 사람들 그리고 우싸오화와 연락이 닿았다. 쌀들은 잃어버렸지만 사람들은 안전했다. 상황을 분석해보니 변절자들이 산 위의 실력이 두려워 올라가지 못하고 물러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원래 주둔지로 사람을 파견하여 정찰해보니 과연 모든 게 원래 그대로였다....

직접 공격은 꺼렸으나 썅잉네의 위치를 안 이상 꿍추가 쉽사리 물러갈 리 없었다. 열흘 안에 썅잉, 천이 등을 사로잡고 베이산의 공산당, 유격대를 몰살시키겠다고 나선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밤낮으로 수색하고 길목들을 봉쇄했으며 허창린을 통해 유격대와 연락했던 백성들을 참아 고문하고 살해했다. 홍군의 전법과 행동습관을 잘 아는 꿍추였기에 끼친 손실이 엄청났다. 허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썅잉과 천이 등이 변화된 형세에 비추어 투쟁방식을 바꾸는 등 유력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큰 공로를 세우지 못한 꿍추는 초공유격사령(剿共游?司令)으로부터 웨샹(?湘, 월상, 광둥성과 후남성)변구초비(??剿匪) 지휘관으로 변했다가 웨베이(?北, 월북, 광둥성 북부) 5현연방주임(五??防主任) 직무를 맡았는데, 명칭에서 알 수 있다시피 지위는 점점 내려갔다.
뒷날 꿍추는 국민당군대와 정부에서 이러저런 직무를 맡았다는데, 그 본인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허나 뒤로 갈수록 밀려나서 실권이 없는 일들을 하다가, 국민당군 어느 중장의 아래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 1949년 3월에는 한 현의 현장으로, 5월에는 고향인 광둥성 제4구(北江地?, 베이쟝지구, 북강지구)의 행정독찰전원(行政督察?? 겸 보안사령으로 되었다. 그해 10월 해방군이 광둥성에 쳐들어가니 치안부대인 보안부대의 한 개 단을 이끌고 러창(?昌)현의 야오산(?山)으로 도망쳤다. 중공 간부가 편지를 써서 “터우청(投?, 귀순)”를 권하니, 국민당이 망한 줄을 아는 꿍추는 11월 상순에 부하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와 러창현 인민정부에 귀순했다. 부대를 이끌고고 원래 적대 편으로 넘어가는 이런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되느냐는 쟁론이 많은바, 중국혁명사에서 공산당 편으로 넘어오는 걸 “치이(起?, 기의)”라고 부른다. 당시 광둥을 해방한 주력부대인 제4야전군의 사령원은 린뱌오(林彪, 임표)였는데, 중국의 학자 진이난(金一南, 1952~)은 징강산 시절에 고급지휘관이었던 꿍추가 한낱 연장(??, 중대장)에 지나지 않았던 린뱌오를 만나려 했으나, 린뱌오가 만나주지 않고 사장(??, 사단장) 한 사람을 파견해 일을 처리해버리는 바람에, 꿍추는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하여 홍콩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역사인물의 행동을 개인의 심경변화 식으로 해석하면 위험하다.

 

 

▲ 진이난     © 자주시보, 중국시민

 

다른 설로는 중공이 당시 국민당군이 점령한 하이난(海南, 해남)도를 해방하기 위해 당지 지휘관과 고향이 같은 꿍추를 파견하여 설득작업을 진행하려 했으나, 꿍추가 홍콩으로 가서 주저앉았다는데, 이 역시 신빙성이 약하다. 3년 유격전을 겪었고, 1957년에 깐난(?南, 감남, 쟝시성 남부)구 당위원회 부서기였던 류졘화(?建?, 유건화, 1916~ 2014)가 왕하오(王昊, 왕호, 1927~ 2016)에게 한 말이 가장 믿을 만하다.

 

▲ 류졘화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때 왕하오가 어떻게 꿍추가 홍콩으로 갔느냐고 물으니, 류졘화는 “대진군 시기에 꿍추가 싸오관(韶?, 소관, 광둥성의 북부에 있고 지금은 러창이 소관시에 속함)에서 웨베이보안부대를 거느리고 기의했고 우리는 기의인원정책에 따라 배치를 했다, 사실 나는 그를 알았고, 그 역시 꿍꿍이를 품었다. 반혁명진압운동 전야에 그 녀석이 홍콩으로 도망가버렸다.(大???,?楚在韶??着?北保安部?起?,我?根据起?人?政策做了安排。其?我是知道他的,他也是心?鬼胎的。?反??前夕,?家?jiiu逃到香港去了。)”(《한 노병 마음 속의 천이 원수(一?老兵心目中的?毅元?)》 96쪽에서, 왕하오 지음, 상하이문예출판사 1996년 4월 출판발행, 도합 488쪽)
반혁명 진압운동은 1950년 12월에 시작되어 1951년 10월에 끝났다. 그 전야라면 1950년 가을이나 겨울 쯤이다. 광둥성의 해방은 1949년 10월의 일이요, 린뱌오가 만나주지 않아 체면이 깎이어 떠났다고 보기에는 1년 세월이 너무 길고, 하이난도는 1950년 5월에 해방되었으니 꿍추가 그 무슨 설득을 위해 떠났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신사군 출신으로서 천이 및 남방혁명사를 많이 연구한 왕하오가 꿍추에게 대린 결론은 “인류에 끼이지 못할 개똥(不?于人?的狗屎堆)”(위의 책 같은 쪽)이다. 필자는 이 결론을 찬성한다.

 

구체적 세부야 어떠하든 홍콩에 간 꿍추는 뒷날 타이완을 초청방문하여 쟝제스와 만났고 쟝제스가 그에게 홍콩에서 잔여부대를 긁어모아 비밀리에 ”반공구국군(反共救??)”을 만들어 대륙반공을 노리라고 했으나, 완곡히 사절했다지만, 이 역시 허풍끼가 심한 그의 주장이라 믿어주기 어렵다. 이름을 꿍쑹안(?松庵, 공송암)으로 바꾸고 홍콩에서 장사를 하면서 살았고 한때 미국에도 가서 살았으나 적응하기 어려워 되돌아 왔다. 사실 별 볼일 없었는데, 실패자는 추억에 산다던가, 옛 경력을 팔아먹느라고 《나와 홍군(我和??)》과 《꿍추장군회억록(?楚??回??)》이라는 책들을 출판하여 아무개는 당년에 자기와 동급이었고 아무개는 자기의 하급이었다고 자랑을 늘여놓았다. 허나 변절한 뒤의 경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피를 묻힌 경력을 불기는 아무래도 부담을 느꼈나 보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바뀌면서 1990년에 고향인 러창으로 돌아와 거주했는데, 당시 중국의 실질적인 지도자 덩샤오핑(?小平, 등소평)의 전화를 받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다. 오래 전 두 사람은 전우였던 것이다.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꿍추는 군대에도 있었고 농민운동도 하였는 바, 1927년 8월 중국공산당이 영도한 첫 봉기인 난창기의(南昌起?)에 참가했다가 실패 후 부대를 떠나 고향에 가있다가, 몇 달 뒤 당조직의 명을 받들어 주더, 천이가 거느린 잔여부대에 들어갔고, 이듬해 4월 주더 부대가 마오쩌둥이 개척한 중국혁명의 첫 근거지인 징강산에 가서 합친 다음 전방위원회 성원으로서 마오쩌둥, 주더와 이름을 나란히 했노라고 크게 자랑하지만, 지위가 제3인자였던 건 아니다. 1928년 8월 역사적으로 유명한 “8월 실패(八月失?)”에서 29단의 당대표(뒷날의 정치위원)였던 꿍추는 대오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달아나 살다가(그 자신은 이 경력을 미화했다), 다시 공산당과 줄이 닿아 홍콩을 통해 광시(?西, 광서)성에 가서 1929년 12월에 일어난 바이써(百色, 백색)기의에 참가했다. 이 기의의 결과로 홍7군(?7?)이 탄생했는데 정치위원이 덩샤오핑이었고 꿍추는 꿍허춘(??村, 공학촌)이라는 이름으로 참모장이 되었다. 뒷날 홍7군이 쟝시 소베트구역으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핑계로 대오를 떠나 고향에 가있다가 소베트구역이 확장되던 1931년 8월에 다시 소베트 구역에 들어가 이러저런 직무를 맡았다. 진이난은 꿍추와 덩샤오핑이 군장과 정치위원의 관계였다고 말하지만 오류다. 덩샤오핑이 홍7군 정치위원으로 있은 건 1929~ 1930년의 일부 시기였고, 꿍추가 홍7군 군장으로 된건 1931년 여름의 일로서 그때 덩샤오핑은 지방에서 사업했기 때문이다. 꿍추는 군장자리에 얼마 앉지 못했으니 제3차 반포위토벌에서 지휘를 잘못하여 소베트구역에 큰 손실을 입혀 단장으로 강직되었다가 한동안 지나 사장으로 올라갔고 1934년 9월에 깐난군구 사령원으로, 10월 22일에 신설된 중앙군구의 참모장으로 되었는데,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홍군주력부대가 떠나갔고 남은 부대가 많지 않았으므로 중앙군구가 이름은 요란하지만 실력은 별로였으니 따라서 꿍추의 실권도 크지 않았다. 

 

중국혁명사의 2대 기의에 참가했고 2대 수령(마오쩌둥, 덩샤오핑)과 초기에 인연을 맺었다는 특이한 경력을 가진 꿍추는 마오쩌둥 시대에는 대륙에 얼씬도 못하다가 덩샤오핑 시대에 개혁개방이라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지방마다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는 게 치적으로 꼽히는 바람이 부니 그 덕을 보았다.
꿍추의 친척들이 홍콩에서 돈깨나 벌었고 러창동향회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는 걸 알게 된 러창의 간부들은 지방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돌아와 보라고 꿍추를 자주 요청하면서 그 호감을 사려고 꿍추의 집을 복원하는 놀음까지 벌렸다. 꿍씨 가문의 옛집은 도로를 닦으면서 헐린지 옛날인데 지방정부가 7만 위안(1980년대에 인민폐와 한화의 공식환율이 없었으나 1990년대의 환율에 비춰보면 한화 700만원 정도이고, 중국의 평균노임이 몇 십 위안이던 시절이었으므로 7만 위안은 거금이다)을 들여 다른 곳에 원래 면적, 원래 모양대로 다시 지었다. 부지 320여 평방미터, 건평 170여 평방미터로 호화롭게 장식했고 가전제품들도 다 갖춰놓았다.
마음이 동한 꿍추가 귀향을 결정하니, 현지 정부에서 그를 어떻게 대해야 되느냐 위에 청시했고, 광둥성 통전부(??部, 통일전선공작부)는 나중에 꿍추의 귀향정착을 인민내부문제로 처리하되, 원래 국민당의 중급 군정(?政, 군대와 정부)인원을 대하는 규격으로 접대, 거래하라고 답복했다.

 

1990년 9월 13일에 선전을 통해 귀향한 꿍추는 러창현 통전부, 현정부 판공실, 교민업무 판공실 간부들의 환영을 받았는데, 접대연회가 끝난 다음 꿍추는 미리 준비한 편지 3통을 덩샤오핑, 국가주석 양쌍쿤(??昆, 양상곤, 1907~ 1998), 부주석 왕쩐(王震, 왕진, 1908~ 1993)에게 보내달라고 한 중공 간부에게 부탁했다. 모두 한때 잘 알던 사람들이다. 문안과 더불어 정착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덩샤오핑에게는 개인명의로 전보를 쳐서 알려달라고까지 부탁했다. 결과 그는 고향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친척들에게 고향에 투자하라고 권고했고 성사시켜 아주 귀빈 대우를 받았다.
꿍추의 귀향은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니, 유명한 변절자를 보자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역사학자들도 숱해 와서 취재했다. 90고령의 꿍추는 머리가 맑고 기억력도 좋아서 말을 잘했으나, 홍군경력까지만 신나서 떠들었지 변절 뒤의 일을 물으면 입을 다물어버리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댔다.
꿍추의 경력을 살펴보면 혁명사에서 보기 드문 특징이 있다. 일단 불리하면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확실한 기록이 있는 것만 해도 3번이다. 우리 민족 속담에 “관청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는 말이 있는데, 혁명가도 고향이 멀수록 더 견정해질 확률이 높다고 하면 과언일까?

 

앞의 편에서 거들었다시피 중국공산당이 변절자들을 대하는 정책은 여러 변 바뀌었다. 변절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부류 인간들을 대하는 정책들도 큰 흐름에 따라 바뀌곤 했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을 지경이었다.
“톈부파, 띠부파, 쮸파꿍찬당쟝콴따(天不?,地不?,就?共????大, 하늘도 땅도 무섭지 않지만, 단 하나 무서운 게 공산당이 관대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국공합작이 이뤄지던 항일전쟁시기나 근 300만 국민당군대가 기의하여 공산당편으로 넘어온 해방전쟁시기 및 건국 후에 공산당과 한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손에 피를 숱해 묻힌 자들을 용서하고 지어는 보호해줬으므로, 혈육을 잃었던 백성들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례가 많았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 우화원(?化文, 오화문, 1904~ 1962)은 워낙 군벌 펑위샹(?玉祥, 풍옥상, 1882~ 1948)의 부하였다가 쟝제스에게로 넘어갔는데, 항일전쟁기간에는 일본에 붙은 한간 왕징워이(汪精?, 왕정위, 1883~ 1944)에게로 넘어가서 괴뢰군으로 활동하다가 항일전쟁승리 후 다시 쟝제스의 수하로 들어갔고, 1949년 9월 산둥(山?, 산동)성의 수부 지난(?南, 제남)시를 해방하는 전역에서 96군 군장의 신분으로 2만 여명 부하를 거느리고 기의하였다. 괴뢰군으로 있을 때 일본군을 따라 토벌하면서 산둥성에서 무인구역들을 만드는 등 엄청난 나쁜 짓들을 했던 그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백성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건국 후에 그가 상하이에 있는 걸 알고 상하이에 대표를 보내 죽이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허나 당시 화둥(??, 화동)군구 사령원 겸 상하이시 시장을 맡았던 천이가 청원을 막고 우화원을 보호해주었다. 우화원의 기의로 지난 해방을 앞당길 수 수 있었고 수많은 인명손실을 줄였다. 우리가 우화원의 기의를 받아들인 이상 그를 지켜줘야 한다는 게 천이의 논리였다. 하여 편안히 지낼 수 있었던 우화원은 기의와 그 뒤의 남하작전에서 세운 공로로 1955년에 중화인민공화국 1급 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산둥성 일부 지역의 백성들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 일생에 4번 주인을 바꿨던 우화원, 이 사람은 워낙 특별한 정치신념이 없었기에 변절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렵다.     © 자주시보, 중국시민


변절자에 대해 천이만큼 심각하게 인식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베이산 사건 이후 천이가 3가지 정책원칙을 내놓아 유격구역에서 실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변절원인을 밝혀내야 하는바 핍박을 받아 변절했는가 자원하여 변절했느냐를 가려야 한다.
둘째, 변절 후의 죄행을 밝혀내야 하는바,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면 일반적으로 관대하게 대하면서 교육하는 정책을 취해야 하고, 위해가 큰 자들을 진압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그 가족에 대해서는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군중이 “반공표어”를 써붙인 건 변절로 치지 않는다.
(第一,弄?叛?起因,是被迫叛??是自愿叛?;
第二,弄?叛?后的罪行,如果?有造成危害,一般采取?大?育的政策;?危害大的,需要???,?其家?也要不予??;
第三,群??“反共??”,不算叛?。)
천이는 공산당의 간부 특히 고급간부의 변절은 보통 군중의 “판수이(反水 변절의 다른 말)“와 동등하게 대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국민당이 유격구 인민들을 도살하고 착취하는 상황에서 인민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남방의 유격전이 어려운 여건에서 견지된 건 이런 정책의 덕과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꿍추의 귀향을 받아들인 게 아무래도 찜찜하다. 아무리 경제건설이 중요하고 해외자금이 그립더라도 변절했고 동지들을 살해했던 자를 별다른 사과나 사죄도 없이 받아들인다는 건 좀 극단적으로 말해 변절을 종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꿍추는 93년 8개월을 살고 1995년 7월에 고향에서 죽었다. 변절자치고는 너무나도 편안히 죽은 셈이다. 이런 추물은 생각만 해도 불쾌해난다.
꿍추와 비슷한 시기에 변절한 홍군 장령과 중공 고급간부들로는 한때 군장이었던 쿵허충(孔荷?, 공하총, 1934년 변절, 1896~1956), 성위서기였던 첸훙스(?洪?, 진홍시, 1904~1940, 1935년 변절), 사장(사단장) 니바오쑤(倪??, 1935년 변절, 생몰연도 미상), 성위위원이었던 펑구(彭祜, 팽호, ?~ 1953, 1935년 변절), 민깐(??)군구 사령원이었던 쑹칭쵄(宋?泉, 송청천, 1907~1938, 1935년 변절), 성위서기였던 쩡훙이(曾洪易, 증홍역, 1905~1951, 1935년 변절) 등이 꼽히고, 일일이 따지자면 너무 길어져 줄인다만, 연도를 보다시피 제명에 산 자가 거의 없다. 그들에 비해 꿍추는 너무나도 편하게 보냈다.

 

꿍추 일생에서 제일 큰 역할을 할 뻔 했던 베이산사건에 대해 미국기자 솔즈베리(Salisbury,Harrison Evans, 1908~ 1993)가 1980년대에 저서 《장정,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征??前所未?的故事》에서 간단히 언급했다고 기억되는데 수중에 책이 없어 확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극적인 사건에서 핵심으로 되는 인물 특위 정찰패장의 이름이 중국어 자료에서 3가지로 나온다. 우싸오화(?少?), 후샤오화(胡小?), 우샤오화(?小?)이다. 이런 차이에 대해 작가 왕하오는 《한 노병 마음 속의 천이 원수》 169쪽에서 그 원인을 설명했다.
워낙 건군 30돌(1957)을 맞이하면서 1956년에 “해방군 30년” 작품응모활동을 벌일 때 난징군구 정치부에서 일하던 루싼(?山)이라는 사람이 쟝시성 위원회 제1서기 양쌍쿠이를 도와 《‘매’의 눈(”?“的眼睛)》이라는 회상문장을 써냈다. 내용은 바로 우싸오화가 변절자의 허점을 간파하고 슬기롭게 대처하여 고급간부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 글은 응모작품모음집 《붉은 기 펄펄(?旗??) 3》(중국청년 출판사 1957년 8월 출판)의 235~ 239쪽에 실렸는데, 시간을 1936년으로 기억하고 주인공을 반장(班?, 분대장)으로 설명하며, 꿍추의 이름을 ”꿍추(??)“로 표기하는 등 오류를 남겼다.

 

 

이 글이 퍼진 다음 놀라운 소식이 난징군구 정치부로 날아왔다. 전날의 깐웨볜(???)홍색유격대는 1938년에 신사군 로2단(老二?)의 주요부분으로 되었는데 그 단에서 싸웠던 동지들이 1939년 연장(중대장)으로 있던 우싸오화가 쑤난(?南, 쟝수江?강소성 남부)지역에서 변절하여 적들에게로 넘어갔다고 알린 것이다. 난징군구 정치부 성원들이 로2단의 영장(??, 대대장)이었던 똰환찡(段??, 단환경, 1911~1998)에게 문의하니 그 역시 변절설을 확인해주었다.

 

▲ 똰환찡     © 자주시보, 중국시민


하여 1958년에 왕하오를 비롯한 사람들이 회고록을 정리하던 양쌍쿠이에게 그 정황을 알렸더니, 양쌍쿠이는 고려 끝에 이 사람은 변절할 것 같지 않은데 지금 실증하기도 어렵다, 아무튼 “후(胡)”와 “우(?)”를 가리지 않고(중국 남방방언들에서는 발음이 같다), “샤오(小, 작을 소)”와 “싸오(少, 적을 소)”도 통용할 수 있으니 “후샤오화(胡小?)“라고 쓰자고 말해, 1959년에 출판된 양쌍쿠이의 회고록 《훙써깐웨볜(?色???)》에서는 이름을 “후샤오화(胡小?)“로 표기했고 뒷날 ”우샤오화(?小?)“로 나온 책들도 생겼다. 실제 이름은 우싸오화(?少?)로서 왕하오는 그 이유를 상세히 밝혔던 것이다.

 

▲ 왕하오     © 자주시보, 중국시민


우싸오화 덕에 살아난 양쌍쿠이로서는 참으로 아쉽겠지만, 우싸오화가 건국 후의 해방군 군관 명단에도 열사명단에도 끼이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처럼 어려웠던 3년 유격전을 견뎌냈고 하급군관으로서 전도가 양양하던 우싸오화가 썅잉이 신사군 1인자인 정치위원으로, 천이가 신사군 제1지대 사령으로 있던 시기에 적에게로 넘어갔다니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역사는 희한하고 인간은 복잡하다고 표현할까?
이런 사례들을 적잖이 알기에 필자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옛날 화려한 투쟁경력을 쌓았던 사람들이 밀려나거나 비판받거나 지어 목숨을 잃은데 대해 그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단정하거나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물론 평화시기에는 적에게로 넘어가는 변절보다 변질이 더 보편적이지만, 사상적 의미로는 변질이자 변절이 아니겠는가!

 

추접하기 그지없으나 천수를 누린 특이한 변절자 꿍추의 《나와 홍군》에 서문을 쓴 사람은 2편에서 꾸순장이 소베트구역으로 갔서 만났던 장궈타오(???, 장국도)다. 중국공산당의 변절자 역사에서 꼭꼭 거들어지는 인물이다. 다음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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