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 성장과정
김련희 북녘동포
기사입력: 2016/09/12 [01:45]  최종편집: ⓒ 자주시보

[편집자 주: 병치료 차 중국 친척집에 나왔다가 탈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그저 한국에 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탈북자 대열에 들어섰다가 아니다 싶어 한국에 들어온 날 바로 북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해오고 있는 김련희 씨가 장문의 수기, '따뜻한 내나라'를 본지에 보내왔다. 그는 수기에서 오직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다시 만나 단란하게 살고 싶은 자신의 소박한 소원을 하루 빨리 남측 당국에서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사실 수기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고난의 행군 시절 북에서 매우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런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온 가족들이 그래서 더욱 그립다는 것이다. 특히 생활을 자세히 그린 김련희 씨의 글을 통해 남과 북 차이점과 공통점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이후 통일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인 상호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자세를 갖추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다.
사실 이 수기에 담긴 시절 북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기 때문에 특별히 북을 찬양할래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안법에 저촉될 만한 내용은 최대한 다듬어서 소개한 점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란다.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일부는 북의 어법을 살렸고 다른 것들은 남측에 맞게 다듬었다.]

 

▲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선 김련희 씨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1. 성장과정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아버지 (김세환), 어머니(조원희)의, 1남 2녀 중 장녀로 1969년 11월 21일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대동강 텔레비죤수상기공장 부문당비서로, 어머니는 평양시 동대원구역병원 의사로 일하셨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세분만이 계시던 집에 첫 손녀가 태어난 것은 온 가정의 큰 경사였고 기쁨이었다. 불면 날아갈세라, 놓치면 잃을세라,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고 행복 속에 평양시 동대원구역 삼마동에서 나의 첫 삶은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단층주택였는데 본채는 방2칸과 부엌으로 되어있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3형제가 살고 본채에 잇닿인 사랑채에서는 할머니가 계셨다. 집주변에 60평(북녘 평방수) 정도의 텃밭이 있어 할머니는 항상 여러 가지 작물과 남새를 가꾸는 일을 제일 좋아하셨다. 이른 아침에 부엌문을 열고 밖을 나서면 나보다 더 높은 키를 자랑하며 무성하게 뻗은 오이넝쿨에 매달려 있는 파아란 오이들이 아침이슬을 함뿍 담고 나를 제일 먼저 맞아주었다.

 

그 사이를 지나면 상추, 가지, 고추, 도마도, 찰강냉이가 분열행진을 하둣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있었고 요것들이 바람에 흔들릴까봐 걱정스러운지 그 둘레에는 왕당콩넝쿨이 든든하게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특히 상추와 오이 가꾸기를 즐겨했는데 그것은 제일 좋아하는 야채이기 때문이다.

 

왕당콩이 건강에 제일 좋다며 텃밭에서 수확한 콩을 넣어 해주시던 밤같이 구수한 밥맛은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밥그릇이 들어오면 먼저 왕당콩을 골라먹고 당콩을 안 좋아하는 동생이 끄집어 내놓은 콩까지 내가 다 모아 먹군 하였다. 막내 녀동생이 키가 제일 작은데 할머니는 막내가 왕당콩을 싫어해서 키가 작다고 항상 꾸지람하군 하셨다. 

 

우리집 마당 한옆에는 몇십년은 넘었을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우아한 잎새를 드리우고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그 높은 가지에 해마다 겨울이면 많은 명태들이 쇠줄을 입에 물고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 겨울 내내 여러 차례 눈비를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 명태들은 제김에 꼿꼿하게 말라버린다. 그러면 우리 3형제는 심심하면 버드나무에 기어올라가 명태를 하나씩 챙기고 망치로 여러 번 두드려 먼저 눈알을 파먹고 다음 몸통을 뜯어먹군 하였다. 그 맛 또한 별맛이여서 어린 시절 우리 남매가 제일 즐겨 먹던 간식거리였다.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 할머니로부터 해방 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시다 일제놈들에게 학살당하신 할아버지에 대한 투쟁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민족주의 량세봉사령과 함께 투쟁하시다가 1941년 일제놈들에게 붙잡혀 희생되셨고 할머니는 그분들과 생사를 함께 하며 밥도 해드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아들 3남매 중 팔로군에 가있는 두 아들은 중국에 두고 당시 9살이었던 막내인 나의 아버지만 데리고 조선으로 나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직장생활 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서 우리 3형제 손자들을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는데 그래도 맏손녀인 나를 제일 예뻐해 주셨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대군인들이시다. 아버지는 무용으로. 어머니는 독창가수로 “전국군무자축전”에 참가하여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정다감 하면서도 섬세하고 철저하며 강하신분이셨다. 담배는 안 피우셨으나 술은 즐기셨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술에 취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고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하고 생각해보군 한다. 아버지는 직총(직업총동맹)에서 진행되는 전국로동자예술축전 집행을 책임지고 참가자들을 인솔하고 백두산도 여러 번 다녀오셨다. 

 

어머니는 제대 후 신의주의학대학을 나오고 병원의사로 일하시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구역의 초청을 받아 방송차를 타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시군 하셨다 어릴 때 방송차를 함께 타고 다니며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듣던 생각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중에서도 초소의 꾀꼴새, 평북연변가, 도라지, 고사리, 등의 노래가 기억에 생생하다. 

 

어머니는 나를 딸로, 때로는 친구로 다정히 대해주셨고 무슨 일이 생겨도 아버지보다 맏딸인 나와 함께 의논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셨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만성간염으로 가정에 가장 큰 걱정거리여서 부모님은 간에 좋다는 소의 눈알을 포함한 소고기, 산청을 나에게 자주 먹여주셨고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이렇게 온 가정의 따뜻한 사랑 속에 우리 3남매는 유달리 서로 우애가 깊었고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자랐다. 

 

▲ 소학교 입학식-7     ©민족통신

 

▲ 소학교 입학식-7 상급학생들이 환영하는 모습     ©민족통신

 

나는 1976년 9월 1일 7살에 드디어 소(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어린 때를 벗은 당당한 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국가로부터 공급받은 예쁜 교복을 입고 학교 첫 등교를 했던 그때의 날아갈듯 기쁜 마음은 지금도 심장을 다시 높뛰게 한다.

 

우리는 소학교 입학할 때부터 고등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2년에 한번 씩 국가로부터 교복을 무상으로 공급받는다.

 

여자 소학교로써 학급인원은 총 25명이였는데 모두 우리 집 동네에 사는 애들이라 함께 소꿉놀이 하며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이였다. 

 

하루는 오전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음악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우리들에게 손뼉을 쳐보아라, 소리를 내 보아라, 하시더니 나를 포함한 12명의 친구들을 음악소조실로 데리고 가셨다. 나머지 친구들은 체육선생님과 미술선생님이 들어오셔서 각기 자신들의 소조로 데러갔다. 이렇게 학교에 입학하면 각 분야 선생님들이 매 학급마다 돌면서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골라 소조에서 재능을 키워주신다. 선생님들에게 선발되지 못한 애들은 그들의 선택에 맡겨 본인들이 가고 싶다는 소조에 가게 된다. 

 

이렇게 모든 학생들은 오전에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각자 소조들에 가서 과외활동을 한다. 우리가 들어간 음악소조실은 삼면이 악기로 꽉 차있었는데 처음 보는 이상하게 생긴 악기들도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해보고 싶은 악기를 하나씩 골라보라고 하셨다. 나는 한쪽 옆에 듬직하게 있는 드럼이 좋아보여 그것을 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그 악기는 경음악 기악중주를 할 때 기본 중심이여서 좀 예쁜 애가 했으면 좋겠다 라며 나에게 바이올린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쁜아이 측에 끼울 수 없는 그야말로 정말 안전하게 생긴 얼굴이다. 우리 3남매 중에서도 내가 제일 못생겨서 늘 예쁜 동생들의 미모가 부러웠다.
이렇게 하여 나는 소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고, 우리는 자신들이 선택한 악기를 하나씩 배정받고 매일 오후마다 음악소조실에 가서 악기연습을 하였다. 

 

 

1980년 9월 1일, 드디어 4년간의 소학교과정을 졸업하고 평양랭천고등중학교 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유치원 높은 반부터 소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 이렇게 11년제 의무무료교육제도이다. 7살에 소학교에 입학하여 17살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군대나 대학, 사회현장에 나가게 된다.

 

나는 소학교에서 배운 바이올린을 고등중학교에 가서도 꾸준히 연습하여 음악소조 언니들과 함께 전국학생예술축전이나 유치원종합반주를 비롯한 전국공연들에 관현악이나 경음악기악중주로 참가하였다.

 

해마다 진행되는 학생소년들의 설맞이공연과 4.15축전 때마다 종합반주는 늘 우리학교가 맡아 놓고 하군 하였다. 모든 소조원들은 본인이 악기를 준비할 필요가 없고 학교에 입학해서 배정받은 악기를 졸업할 때까지 정히 쓴다. 

 

체육소조에 들어간 다른 친구들은 배구, 농구, 축구종목으로 나뉘어져 훈련하였는데 전국적인 체육경기에 자주 나가군 하였다. 우리학과목의 체육수업에는 수영시간이 있는데 전국의 모든 학교들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학교수영장에서 일주일에 2번 정도 수영을 하게 된다.

 

또한 녀학생실습과목이 있는데 녀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매 학교마다에 꾸려져있는 녀학생실습 료리실에서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재봉실에서는 재봉기의 구조와 원리, 옷 설계, 재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료리시간에는 모두가 하얀 머리수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하게 되는데 집에서도 해 본적 없는 맛있는 음식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즐거움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5명씩 조를 이루어 료리를 하는데 수업이 끝나면 매 조에서 만든 음식들을 품평회하고 선생님의 평가도 받는다. 

 

재봉실에는 가운데에 넓고 큰 재단상이 놓여있고 그 둘레에 벽을 마주하고 십여대의 재봉기가 놓여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재봉코 형성원리를 배울 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다. 제손으로 설계를 해서 자기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어린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해주었고 간단한 속옷을 만들어 완성했을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코바느질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학급동무들이 장난을 치다가 한 친구가 넘어지면서 그만 손에 쥐고 있던 코바늘이 자신의 다리 종아리에 꽃히게 되었다. 우리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자 선생님이 달려와 그 친구를 업고 학교꼬마병원으로 뛰어가셨다. 친구는 며칠 후에야 학교에 다시 등교할 수 있었다. 지금도 코바늘을 보면 그때의 일이 먼저 생각나군 한다. 

 

남학생들은 자동차실습실과 목공실에서 자동차구조와 원리, 운전방법, 그리고 목공기초를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 예체능 교육도 하지만 기본은 학습제일주의이다. 과목별로 담임선생님들의 주관 아래 자주 시험을 보며, 전교적으로도 학기말시험, 학년말시험을 본다.  

 

나는 공부도 별로 잘하지 못했는데 수업자세도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수학시간을 제일 좋아 했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적어놓고 자체로 풀어보라고 시간을 주면 빨리 풀어버리고 옆의 친구들과 장난을 치거나 뒤로 돌아앉아 잡담을 하군 하였다. 보다 못해 선생님이 칠판에 다른 어려운 문제를 적어놓고는 나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와서 풀어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제시된 문제를 순간에 풀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더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련희학생은 공부를 좀 하는 학생들 중에 제일 건방져요” 라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너무 부끄러워 얼마동안은 그 선생님을 피해다녔지만 그 대신 수업자세가 좋아졌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더욱 폭넓게 학습하기 위해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마다 한 학급씩 평양학생소년궁전의 과외소조에 한 달씩 교대로 다니면서 더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된다.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은 1963년 9월에 건립되었고 10층의 탑식건물과 5층의 본관건물로 되어있다. 과학기술, 예능, 체육, 농업부분의 재봉반, 자수반, 외국어실습실, 기악반, 공작반, 서예반, 운동반, 무용반, 연극반, 가야금반 등의 소조실과 활동실 200여개를 비롯하여 총 500여개의 방이 있고 10층 건물옥상에는 천문대가 설치되어있다. 소년궁전 안에는 1100석 규모의 극장, 수용능력 500명의 체육관이 있다.

 

소학교, 중학교학생들의 과외활동을 기본으로 하며 공훈교원, 공훈예술가, 공훈체육인 등의 능력있는 지도교원들이 학생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며 이곳에서 과외활동을 지도받는 학생 수는 하루 평균 1만여 명에 이른다. 

 

학생소년궁전은 1961년 개성에 건립된 개성학생소년궁전이 최초이다. 이후 각지에 140여 곳의 소년궁전 및 소년회관이 건립되었다. 우리 학급은 한 달 동안 평양학생소년궁전 화학소조에 다니게 되었는데 학교화학실험실보다 엄청나게 크고 멋졌다. 학교에서는 보지 못했던 희환한 실험기구들과 설비들이 우리들의 정신을 쏙 뽑아 놓았다. 내가 제일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시간은 내손으로 세수비누와 성냥가치를 만들고 기뻐했던 순간인 것 같다. 휴식시간이면 학급동무들과 소년궁전의 매 층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군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집에 가져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아주 좋아 하셨다.

 

▲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자주시보
▲ 새롭게 개건 완성 된 만경대학생소년 궁전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2013년 설맞이 공연을 하고 있는 만수대학생궁전 소조원들     ©

 

나는 고등중학교 3학년 시절 1983년 1월 1일 전국학생소년들의 설맞이 공연에 참가하였다. 해마다 설날이면 전국에서 뽑혀온 학생들과 재일조총련학생들의 기악과 노래, 춤과 동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종목들이 무대에 오르군 하였다, 

 

12월 평양체육관에 설맞이공연 연습을 다닐 때 선생님은 감기에 걸릴세라 매 학생들의 목에 짓찧은 마늘을 넣은 페니실린병을 매달아 주고 소금물로 함수를 시켜주시군 하셨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저녘에 하루연습이 끝나면 행사버스를 타고 평양시 봉화산려관에서 숙식하였다.

 

우리 평양랭천고등중학교 음악선생님은 이름 있는 전문가이셨고 우리학교 음악소조원들은 평양에서 진행되는 모든 예술축전들에 빠질 수 없는 능력있는 집단이었다.

 

해마다 진행되는 학생소년들의 설맞이공연과 4.15축전, 때마다 종합반주는 우리학교가 맡아놓고 하군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학교를 마지막까지 다니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우리집이 국가로부터 더 크고 좋은 새집을 배정받아 1985년 평양시 동대원구역 삼마동 단층주택에서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 새로 지은 현대적인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 미래과학자거리 아파트 살림집 내부     ©자주시보

 

새집은 큰 거실과 방3칸, 부엌, 위생실, 창고로 되어 있었고 매 방마다 고급가구들이 들어있었다. 거실에는 신발장이 놓여있었고, 방들마다 양복장, 이불장, 편수책상, 팔걸이의자, 부엌에는 찬장과 식탁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차례진 것들이었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돈 한 푼 내지 않고 살림에 필요한 고급가구들이 들어있는 새집을 배정받는다. 우리 아파트 정면에는 평양고려호텔과 윤이상음악당이 있고 왼쪽에는 평양역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평양대극장이 바라보이고 뒤쪽에는 대동강이 흐른다.

 

우리 집은 20층짜리 아파트 14층인데 3개의 인민반으로 나누어져 있고 한 층에 4세대씩으로 옆집들과 친척같은 조용하고 화목한 분위기속에서 재미있게 생활하였다.

 

처음으로 해보는 아파트생활은 모르는 것도 많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어린나이에 첨 타보는 승강기여서 필요 없이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하루에도 몇 번을 승강기를 타고 아파트를 오르내렸다. 단층에 살 때는 아침에 자신들이 편한 시간에 자기 집 앞에만 청소하면 그만이었는데 아파트에서는 매일 아침출근시간 전에 인민반 주민들이 함께 아파트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군 하였다.

 

눈이 내린 날에는 많은 아파트사람들이 모여 다 같이 아파트주변의 눈을 치우군하였는데 어른들이 청소를 하는 동안 위층, 아래층 언니 오빠들과 함께 재미있게 놀 수 있어 명절분위기였다.

 

우리아파트에는 각계각층, 별의별 직업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살았는데 온 아파트가 서로 돕고 위해주며 한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냈다.

 

어느 누구네 집 아들이 대학에 입학했다거나 군대에 나간다거나 하면 저저마다 그 집에 가서 축하해 주었고, 어느 누구에 집에 지방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면 서로마다 평양특산물들을 준비해 선물해주군 하였다. 

 

▲ 평양의 명당 중의 명당에 전통 기와지붕으로 지은 인민대학습당, 북 주민들이 책도 빌려가고 열람실에서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으며 모르는 지식은 바로 박사급 학자들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충분한 교수진이 늘 상주하는 도서관이다.     ©자주시보

 

이 새집에 이사온 지 2년만에 할머니의 팔순잔치가 크게 진행되었다. 1987년 중국에 계시는 둘째 큰아버지가 할머니의 팔순잔치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에 오셨는데 나도 그때 처음으로 큰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할머니의 말씀이 3명의 아들이 할아버지가 항일투쟁을 하시던 중국에서 태어났고 나의 아버지는 유복자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고향은 중국 요녕성 철령현 싸트허즈이다. 큰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여나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하셨고 1952년 팔로군시절 헤어졌다가 35년만에야 어머니를 만나뵙는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어머니와 가슴 벅찬 나날을 보냈다.

 

나는 큰아버지에게 평양시 여러 곳을 구경시켜드렸다. 먼저 인민대학습당을 둘러보시고는 너무도 황홀하고 멋지다고, 이런 훌륭한 궁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인민대학습당에는 학생, 로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평양사람들뿐만 아니라 과학지식을 알고 싶어하는 전국의 모든 인민들이 누구나 올수 있으며 필요한 서적을 찾아볼 수도 있고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문답실에서 전문가들과 1;1 질의문답도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1982년에 개관된 인민대학습당은 10층짜리 조선식건물이 특징적인데 건물은 10개의 호동으로 구분되어 있고 크고 작은 조선식 녹색 정기와지붕이 34개, 방수는 600여칸이며 3천만권의 장서능력을 가진 서고를 중심으로 600석의 좌석을 가진 23개의 열람실들과 14개의 강의실들, 여러 개의 통보실들과 문답실, 음악감상실들이 배치되여 있으며 하루에 1만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나는 인민문화궁전, 학생소년궁전, 주체사상탑을 비롯한 평양의 곳곳을 구경시켜드렸고 청년학생들의 집단체조도 함께 관람하였다. 큰아버지는 참으로 대단하다며 중국에서 TV로 볼 때는 배경대의 휘황한 모습을 보며 전광판으로 생각했었는데 조선에 와서 직접 보니 수많은 학생들의 한결같은 단결된 모습이었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35년만에 이루어진 2개월간의 감격적인 상봉이 있은 지 1년만에 할머니와 중국의 큰아버지도 모두 세상을 뜨셨다 그때를 회고할 때마다 아버지는 “내가 죽기 전에 중국에 있는 조카들과 너희들 형제간 연을 이어주어야 할텐데……” 라고 우리들에게 자주 말씀하시군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어 중국에 사는 사촌언니에게 자주 편지를 하였다. 사촌언니는 자신이 가문에서 제일 막내였는데 조선에 동생이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며 언제나 나에게 답장을 해주었다. 언니는 이제는 이 세상에 삼촌 한분만 남으셨다며 너무 보고 싶고 빨리 만나고 싶다고 나의 아버지에게도 편지를 자주 하군하였다.  

 

나는 고등학교시절 때 앞으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어머니가 일하시 는 병원에 가보면 하얀 위생복을 입고 환자들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아픈 이들의 이야기를 성의껏 들어주시던 나의 어머니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멋져보였다. 

 

어머니의 넙적다리에는 3곳의 허물자리가 있다. 병원에 실려온 심한 화상환자에게 의사들이 제일 먼저 수술대에 올라 자신들의 피부를 떼주었는데 어머니는 환자들에게 3차례의 피부이식과 피도 수혈해주셨다.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피와 살도 서슴없이 바치는 어머니의 높은 정신세계를 보며 나도 꼭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참 아쉽게도 3년간의 평양고등방직피복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양복사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양복사의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김형직사범대학 양복점에서 사회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우리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2정류장 거리인 나의 직장출근길은 언제나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침 일찍 일아나면 출근준비로 바쁜 속에서도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식사는 꼭 챙겨 먹군 하였다.

 

아마 잠자리에서 일어나 집문을 나서는 시간은 불과 1시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형제라고 해도 성격과 취향이 너무도 다른 것 같다. 나의 여동생은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밥을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거울 앞에서 1시간 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아침시간은 온 가족이 모두 자신들의 출근준비로 분주하다. 집 문을 나서기 전에 각자는 거울 앞에서 자신들의 출근 옷차림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거리에 나선다. 거리의 곳곳에서는 출근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학생소년 취주악대의 힘찬 연주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대동교를 건너 김형직사범내학 정문에 들어서면 정문안에서 대학 음악학부학생들의 취주악소리가 제일 먼저 출근하는 대학 교직원, 학생들을 반겨맞는다.

 

우리 양복점은 대학안의 교원, 연구사들과 대학생들의 옷을 책임지고 제작해주는 일을 한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점심식사시간 1시간 제외)가 우리의 행정시간이다.

 

직업이 너무 재미있고 이제는 직업의식이 있어서인지 거리를 오가면서도 사람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쳐다보군 해서 무안을 당할 때도 있다.

 

대학안에는 양복점, 식당, 미용실, 리발소, 상점, 구두수리소, 시계수리소, 사진관, 세탁소, 등 교직원, 학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부 갖추어져 있다.

 

교원들은 해마다.국가에서 양복지를 공급받는데 우리 양복점에서 자신들의 기호에 맞게 옷을 만들어 입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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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애국투사의 자손 김삿갓 16/09/12 [04:52] 수정 삭제
  가족과 조국을 잊지않고 사랑하는 김련희씨...여늬 탈북쓰래기들과는 다르군....조부님이 양세봉장군과 함께 싸운 항일애국투사였다니 과연....백성을 개.돼지취급하며 갑질을 일삼는 남한지배층은 거의가 친일.종미의 잡놈들 후손이니....
국정원 공작에 조심하시고... 김삿갓 16/09/12 [05:35] 수정 삭제
  청와대에 독사가있는한 어려울테니 참고 견디며 건강유지에 힘쓰세요....선생의 존재만으로도 통일.애국운동에 힘이됨니다....
조선족인 큰아버지 대한국민 16/10/30 [11:23] 수정 삭제
  중국 요령성 시골에서 얼마나 못살았으면 평양을 보고 황홀하다는 표현을 하냐. 해방후 남한으로 왔으면 팔자가 달라 졌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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