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2. 첫 사랑
김련희 북녘동포
기사입력: 2016/09/16 [00:2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이앙기가 먼저 논밭에 모들을 꽂으며 앞으로 나가면 3명씩 조를 무어 교대로 그 기계 뒤를 따라가며 빈 포기들에 모를 꼽아주는 작업을 사람들이 하게 된다. 모내기는 제철 적기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도시 사람들도 한 달씩 농촌지원활동을 나가서 이런 일을 함께 한다.   ©자주시보

 

해마다 5월이면 전국적으로 모내기전투가 벌어진다.

 

대학에서도 평양시 강남군으로 농촌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우리 양복점에는 총 인원 12명중 2명이 처녀였는데 당시 21살이었던 나와 29살인 선옥언니가 가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교직원들을 20명 정도씩 3개조로 편성하였는데 한조는 60대의 박사선생님들로 꾸려진 박사팀, 또 한팀은 40~50대의 교수들로 무어진 교원팀, 다른 한조는 20대 총각들인 우리 대학 박사원생들이다. 우리 2명은 박사원 24명과 한조가 되었다.

 

항상 부모님의 슬하에서 생활하다가 한 달 동안 외지에 나가 생활한다니 들놀이를 가는 기분이었고 더구나 나이 있는 교수들이 아닌 박사원 총각들 24명과 한조라니 엄청 들떠 있었다.

 

우리는 숙소를 잡고 드디어 한 달 동안의 농촌현실체험을 시작하였다.

 

함께 온 선옥 언니는 식당 집에서 주인아줌마와 함께 우리조의 식사를 보장하게 되었고 작업장에는 나와 박사원 24명만이 나가게 되었다.

 

우리 조는 대학에서 체육교원생활을 하다가 박사논문을 쓰기위해 박사원에 들어온 26살 리 선생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해보지 않던 농촌일이여서 많이 서툴렀지만 총각들 속에 단 1명뿐인 처녀라 매일매일이 즐거웠고 신바람 났다. 모내는 기계가 먼저 논밭에 모들을 꽂으며 앞으로 나가면 3명씩 조를 무어 교대로 그 기계 뒤를 따라가며 빈 포기들에 모를 꼽아주는 작업을 할 때도 박사원생들은 서로 자기들의 조에서 함께 일하자고 싱갱이를 벌려 나는 교대하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며 빈 포기를 메워 나가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 나는 책임자인 리 선생과 점차 가까워졌고 하루일이 끝나도 힘든 줄 모르고 리 선생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빨리 다음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 함경도 순대, 돼지 내장 껍질만 봐도 쫄깃쫄깃한 맛이 절로 느껴진다. 북은 내장을 내포라고 부른다.


휴식일에 우리는 순대를 만들어 먹기로 하였다.

 

식당일을 맡아하는 선옥 언니와 나, 리 선생, 이렇게 3명에서 식당집 식구들까지 포함한 30명분의 량을 보장해야 했다.

 

돼지 밸을 깨끗이 씻고 그 속에 쌀과 잘게 썬 배추, 돼지내장 탕친 것을 피에 섞어놓은 순대속을 한참 넣고 있노라니 시간이 어느새 자정이 넘어 선옥언니가 피곤해 하였다.

 

여러 번 들어가라고 했지만 미안하다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우리 마음을 몰라주는 선옥언니가 참 야속하고 안타까웠다.

 

마침내 우리는 떠밀다시피 하여 선옥언니를 들여보내고 리 선생과 나만 남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을 꼬박 새고 새벽 5시까지 순대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다음날 박사원 선생들이 순대를 맛있게 드시며 밤새껏 수고 많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평안도 냉면     ©

 

어느 날 오전에 모내기를 마치고 박사원 선생들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집에 들어오니 주인아줌마는 자기 집식구들은 점심에 국수를 먹기로 했다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국수를 한 그릇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너무 반가웠지만 우리 선생님들은 모두 밥을 먹는데 나 혼자 시원한 국수를 먹는 것이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안에서 식사 중인 선생들을 피해 부엌에서 몰래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그릇 가득한 국수를 단 두세 젓가락으로 먹어치우던 나는 마지막 한입 가득 물고 이상한 느낌이 있어 머리를 들어 방 쪽을 쳐다보았다.

 

헉! 리 선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말의 뜻을 나는 이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 같다.

 

너무나 부끄러워 차마 리 선생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후에 모내기를 하다가 잠간 휴식시간이었는데 리 선생이 나에게 알아맞히기를 하자고 하면서 지는 사람이 농촌지원 끝나고 대학에 들어가면 옥류관 냉면을 내기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련희 동무. 많이 배고파?”

 

가뜩이나 부끄러워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는 정말 숨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이게 웬 망신이야...

 

리 선생은 내가 힘들세라 항상 신경 써주었고 자상하게 일일이 나를 챙겨주었지만 어떤 때는 일을 하다가도 내가 다른 남선생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 눈을 꼿꼿하게 세웠고 한참을 나와 얘기 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철학부의 한 선생과 이야기를 하며 논 김매기를 하다나니 다른 선생들보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가고 있었다.

 

갑자기 리 선생이 나를 찾더니 “련희 동무는 오후부터 박사팀에 가서 일하시오”라는 것이다,

 

박사팀이라 하면 대학의 박사, 교수님들로 나이가 많은 선생님들로 무어진 노인조로서 크게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조직적으로 그런 조치가 취해졌겠지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박사팀에 가서 내가 이조에서 일하게 되었냐고 물으니 그 선생님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련희 동무가 여기 와서 할 일이 뭐가 있냐고 다시 가라는 것이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리 선생이 질투심에 나를 골려준 것임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 하루 종일 그와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싸움이라고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화해하군 하였다.

 

농촌에서의 한 달 간은 나에게 이성의 아름다운 감정의 싹을 틔워주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맺어준 참으로 소중한 나날이었다.

 

▲ 대동강 보트놀이     © 진보여리, http://blog.daum.net/mychosun/15857009


 대학에 돌아와서도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내가 있는 청사에 자주 찾아왔고 강연회 때는 언제나 강당에서 내 옆자리에 앉군 하였다.

 

우리는 항상 대학정문에서 만나 함께 퇴근하였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 너무 빨리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대동교를 걸어서 건너다니군 하였고 비가 오는 날이면 퇴근시간에 우산을 가지고 우리 청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군 하였는데 꼭 우산을 한 개 가져오군 하였다.

 

주말이면 식당이나 영화관. 대동강 가에서 보트를 타군 하였고 함께 체육경기 구경도 많이 다녔다.

 

속담에 첫사랑은 깨지기 쉽고 대신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영원할 것 같던 우리의 사랑도 그만 끝을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소중한 추억으로, 잊을 수 없는 아픈 상처로 깊게 자리 잡고 있다.

 

▲ 결혼식을 올리고 만수대언덕 동상을 찾아 인사를 하러 가는 북의 인민군 신혼부부들  ©자주시보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호케이(하키)선수와 7년 동안을 연애하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의 결혼식장에 초대되어 가서 사랑의 성공작품을 바라보느라니 왠지 마음이 허전해졌고 그 세계에 다시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리 선생과 같은 사람은 내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북쪽에 “금강산은 녀성적이고 묘향산은 남성적이다”는 말이 있다.

 

금강산은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하늘아래 숨김없이 다 내비치고 있지만 묘향산은 그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을 깊이 숨기고 있어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절묘하고 아름답다.

 

흔히 녀자는 아량이 있어야 하고 남자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여 녀자는 너그러운 이해심이 기본이고 남자는 폭과 깊이가 기본이라는 말 같다.

 

묘향산처럼 웅심깊고 도량있는 사람을 한번 만나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어느 외국소설을 보니 70살 되는 할머니가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 “처녀  때 좋아했던 첫 사랑 남자가 있었는데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나도 그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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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뭉클한 사연 다같은 한민족 16/09/16 [23:34] 수정 삭제
  젊었던 시절 비슷한 추억을 가진 사람으로서 70이 다 되어가는 나이지만 새삼 울컥 눈물이 흐를 것 같소이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사람의 강정은 똑같을 터...어떤 못된 자들이 우리의 고운 심성을 가르고 분열시키며 적대시하게 하는지...
깨진것보니 대한국민 16/10/30 [11:35] 수정 삭제
  김동무가 금강산처럼 여성적이고 아량이 없었는가 보네. 아님 리선생이 바람둥이 였거나. 내통밥으론 리선생이 바람둥이 였다는데 1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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