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연재55]처창즈 유격근거지 반토벌, 반민생단, 기아와의 투쟁에서 승리
항일독립주투쟁의 성지 연변조서족자치주를 가다(55)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10/19 [06: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사진1.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

▲ 외부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봉쇄와 고립압살책동과 토벌, 내부의 적인 극단적 중국민족주의자들과 교조와 종파사대주의 좌경모험주의에 찌든 조선공산주의자들(엠엘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일제의 민족이간책동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일어난 반민생단투쟁, 그로 인한 벌어진 처절한 기아와를 극복하기 위해 벌인 투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처창즈 유격근거지의 역사를 전해주는 전적지 비석과 답사자 이송덕 선생, 이창기 기자, 노길남 박사     © 이용섭 역사연구가

 

청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해서 지난 장에서 북측자료만 인용해서 올려주고 분석을 하지 못했다. 이번 회에는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북측 자료를 분석한다. 그리고 처창즈 유격근거지 창설과 유격근거지에서 진행된 처절한 투쟁과정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도 함께 인용하여 분석하도록 한다. 또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민생단 혐의자로 몰려 희생을 당한 화룡현당 서기 김일환 항일투사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홍왜회의에 대해서는 개략적인 것만 인용하여 분석하도록 한다. 다홍왜회의는 반민생단 투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지만 반민생단 투쟁에 대해서는 한두 편으로 다룰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에 이번 회에는 다루지 않고 추후 반민생단 투쟁만 몇 회에 걸쳐서 심층 분석하도록 한다.

 

그럼 지난 주 인용만 하고 분석하지 못한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북측자료를 분석하도록 한다.

 


1)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북측 자료 분석

 

항일혁명투사들과 유격구민들의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생(生)과 사(死)의 분기점에서 서서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건 피어린 투쟁이었다. 이미 앞 선 회차에서 처창즈 유격근거지가 어떻게 창설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1933년대 말과 1934년에 유격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괴뢰군인 위만군 그리고 악질 조선인 주구들로 조직된 신선대 등을 동원한 대토벌을 피하고 유격구 주민과 유격대를 보존하여 조국광복과 혁명을 위한 투쟁을 계속 벌이기 위한 전략적 조치에 의해 창설되었다.

 

지난 회에서 보았듯이 처창즈 유격근거지로 이전하여 생활한 유격근거지 주민들과 유격대원들의 삶은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투쟁과정이었다. 그럼 처창즈 유격근거지의 유격대원과 인민들이어찌하여 매일 매일 생과 사의 기로에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그 지난하고 처참한 고난의 행군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리하였는지 북측 자료를 기초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처창즈 유격근거지 창설에 대해 북측 자료를 보자. 처창즈 유격근거지 창설에 대해 북측 자료에서도 동만유격근거지들을 해산하고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로 결정한 요영구 회의 결과에 의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연길, 화룡, 안도지역에 있었던 유격근거지들을 해산하고 처창즈 유격근거지로 이전해왔다고 이송덕 선생의 자료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처창즈가 유격근거지로 선정된 과정에 대해 북측자료는 아래와 같다.

 

“명월구회의에서 유격구후보지를 선정할 때 처창즈를 적지라고 제일 강하게 주장한 사람들은 화룡현출신들이였다. 안도현대표 김정룡도 처창즈가 명당자리라고 하였다. 토지가 비옥하고 산림이 울창하고 산세가 험한 이 고장이야말로 적아가 다같이 눈독을 들이는 리상적인 천연요새였다. 간도의 다른 고장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쓸쓸한 산골이였으나 유격전쟁을 하는 과정에 군사물계를 좀 아는 신식풍수쟁이들의 덕으로 처창즈의 금새가 부쩍 올라갔다.”

 

인용문을 보면 처창즈가 유격근거지로 선정되게 된 것은 동만 각 지역의 유격근거지를 해산하게 되자 갑자기 선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이미 1931년 12월 16일 안도현(당시 연길현) 명월구(본 이름 옹성라자)에서 있었던 《겨울명월구 회의》에서부터 처창즈가 유격근거지로서 대단히 유리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1년 12월 16일부터 10일간 진행된 《겨울명월구 회의》에서는 동만 각 지역에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기로 토의 결정을 하였다. 그런데 처창즈가 유격근거지로서 적지라는 의견이 이미 그때 제시되었다.

 

처창즈가 유격근거지로서 왜 유리한가에 대해서는 인용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유격근거지로서의 명당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적들의 공격에 방어가 유리해야 한다. 또 적들로부터 봉쇄가 악랄하게 감행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적들의 장기간 봉쇄속에서도 살아남아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식량생산을 위한 토지가 넉넉하고 비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유격근거지로서의 장점을 처창즈가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겨울명월구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동만 각지역에 있던 유격근거지를 해산하고 처창즈로 이전을 하기로 결정을 한 것은 이미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창즈가 유격근거지로서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어떻게 유리한 가를 주장했던 항일투사들의 의견에 대해 북측 자료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를 들어보아도 군사와 관련된 신비한것은 아니였다. 그 고장 토배기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처창즈란 달구지를 거는곳이라는 뜻을 담고있다고 하였다. 화룡사람들은 처창즈가 유격대의 군사요충지로 될수 있다는것을 증명하느라고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을 고동하기슭으로 유인하여다가 청산리에서 소멸한것도 이 지대가 가지고있는 특이한 매력때문이였을것이라고 하였다.”

 

처창즈가 유격근거지로서 적들의 방어에 어떻게 유리한가를 주장했던 항일혁명투사들은 홍범도의 청산리전투승리까지 예로 들면서 설명하였다고 한다. 히지만 북측 자료는 “지명의 유래를 들어보아도 군사와 관련된 신비한것은 아니였다.”라고 하여 그 지역이 군사전략상 방어에 그리 큰 유리한 점은 없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1933년 말에서 1934년 초 사이 있었던 동만 유격근거지를 해산하고 딱히 처창즈 지역보다 유리한 지역이 다른 곳에는 없었기에 선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2 청산리전투 승리기념탑, 입체모형도, 패주하는 일본군 토벌대

▲ 청산리전투 항일독립유적지 기념탑.     © 이용섭 역사연구가
▲ 청산리대첩 어랑촌전투기념 입체모형도     ©이용섭 역사연구가
▲ 청산리전투는 소위 홍범도 · 김좌진 장군이 연합하여 일본군 아즈마와 이이노, 가노 토벌대를 화룡현 청산리, 백안평, 완구류.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망개골(맹가구), 천보산, 고동하에서 벌인 전투를 통 틀어서 이른다. 홍범도, 김좌진 항일독립군 지도자(장군)들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걸쳐 청산리전역에서 일본 토벌부대에 맞선 반복된 10여차의 전투를 슬기롭게 이끌어 대승리로 마무리하고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완전히 좌절시켰다.     ©이용섭 역사연구가

 

둘째. 처창즈 유격근거지 창설과정이다. 이미 전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처창즈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최현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대전자 전투를 하여 그 곳에 있었던 만주 괴뢰군인 위만군을 물리치고 항일유격대가 장악하였다. 즉 처창즈 근처에 있는 적을 소멸함으로서 유격근거지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전투가 바로 대전자전투였다고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중 대전자전투, 최현편》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이에 대한 북측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는 처창즈유격구역 건설을 무력으로 뒤받침해주기 위하여 1934년 봄에 독립련대를 안도지방에 파견하였다. 김일환, 김일을 비롯한 정치공작원들도 처창즈로 들어갔다.
독립련대는 처창즈근처에 주둔하고있던 위만군 1개 중대를 손쉽게 쫓아버리고 이고장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북측 자료에서 언급하고 있는 처창즈 근처란 안도현 대전자(현 만보)를 말한다. 그리고 위만군 1개 중대를 손쉽게 쫓아버렸다고 하였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전자전투는 근 두 달여에 걸쳐서 벌어졌으며, 특히 7월에 벌어졌던 전투는 무려 16일이나 걸렸을 정도로 치열했었다.

 

인용문을 보면 “김일환, 김일을 비롯한 정치공작원들도 처창즈로 들어갔다.”라고 하여 처창즈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대전자전투를 조직함과 동시에 정치공작원들도 동시에 파견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국가적 지원이나 후방 그리고 측면 지원이 없는 적수공권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도 새로운 작전이나 제도를 내올 때를 보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실천하고 진행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 창설을 위하여 벌인 대전자전투와 정치공작원을 미리 파견하여 사전 정리를 한 것 역시 항일혁명투쟁을 이끌던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완벽한 전략 · 전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한 사례이다.

 

셋째. 처창즈 유격근거지로 이전해온 동만 지역의 유격구민들과 유격대원들에 대한 것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처창즈 유격근거지로 이전(移轉)해온 이전(以前) 동만의 연길, 화룡, 안도에 있던 유격근거지들 이었다. 이에 대한 북측 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이 무력을 배경으로 어랑촌유격구의 주민들이 처창즈에 쓸어들어와 고동하건너편에 화룡현인민혁명정부건물을 세웠고 뒤미처 왕우구와 삼도만의 주민들이 신선동을 거쳐 이곳에 연줄연줄 나타나 동남차골짜기입구에 연길현인민혁명정부기발을 게양하였다. 그리하여 처창즈에는 두개의 현에서 온 인민혁명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이 1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처창즈유격구역은 마치 두개의 발동기를 가진 자동차나 두필의 청총말을 메운 쌍두마차와도 같이 기세충천하여 돌진하였다. 초기에는 식량형편도 그다지 궁색하지 않았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어랑총 유격구는 화룡현에 있었다. 왕우구와 삼도만은 연길현(현 연길시)에 있었던 유격구이다. 신선동은 안도현에 있었던 유격구이다. 이와 같이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연길, 화룡, 안도에 있었던 유격근거지들이 해산되고 이전해 와서 창설되었다. 북측 자료나 연변조선족자치주 반일 · 항일투쟁사 전문가인 이송덕 선생의 자료가 동일하다.

 

인용문을 보면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의 초기 삶은 식량사정도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후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악랄하고 집요한 봉쇄정책에 의해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식량부족으로 처참한 삶을 살면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분석하기로 한다.

 

넷째. 종파사대주의에 물들고 좌경모험주의에 찌들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중국 민족주의에 젖어있는 동만특위 일부 중국인 간부들에 의해서 벌어진 반민생단 투쟁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또 이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추동하고 이용을 한 일본의 간교한 모략에 의해 반민생단 투쟁은 더욱더 확대되었다. 다음 회에서 화룡현 처창즈에서 벌어졌던 반민생단 투쟁의 가장 큰 희생자인 화룡현당 서기인 김일환 항일혁명투사에 대해 살펴보면서 당시 조선인 혁명투사들을 대상으로 벌인 반민생단 투쟁이 얼마나 악랄하고 집요했으며 잔인하게 벌어졌는지 보기로 한다.

 

인용문을 보면 당시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벌어진 반민생단 투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따라 처창즈유격구역해산사업에 대한 지도는 안도에서 파견된 당지도부가 하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이 성원들은 군대와 인민에게 유격구해산방침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지어 처창즈에 있던 특파원을 《민생단》으로 몰아 처형하려고까지 하였다. 후에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처창즈는 간도의 혁명군중, 특히는 연길, 화룡, 안도 지방의 혁명군중이 마지막으로 의지하고있던 최후의 지탱점이였다. 최후의 지탱점이라는데로부터 이 지구의 해산을 책임진 일군들이 우유부단한 립장을 취했을수도 있다.
……
앞에서도 얼마간 말한바가 있지만 당시의 처창즈는 공기가 평온치 못하였다. 좌경이 반《민생단》투쟁을 코에 걸고 유격구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놓은데다가 기아로 하여 수많은 혁명군중이 곡경을 치르었다.”

 

인용문을 보면 좌경모험주의자들이 항일혁명무장투쟁에 끼친 해독이 얼마나 막대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이미 앞 선 장들에서 조선의 전세대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주의, 종파사대주의, 좌경모험주의의 해독성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벌인 교조, 종파사대, 좌경모험주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것도 진정한 공산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자신의 사적 권력욕과 성취욕을 달성하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벌인 반민족적 반혁명적 행위였을 뿐이다. 그 과정에 그들이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위한 투쟁에 끼친 해독은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가 미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강했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반민생단 투쟁을 다루면서 상세히 분석하도록 한다.

 

교조주의, 종파사대주의, 좌경모험주의자들의 해독행위는 처창즈 유격근거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인용문에도 간단히 언급되어있지만 그들은 혁명성이 강하고 조국해방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진 혁명투사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수없이 학살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김일환 화룡현당 서기의 예를 통해서 분석한다.

 

다섯째.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아와의 투쟁이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 주민들이 벌인 기아와의 투쟁에 대해서는 인용문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 주민들과 유격대원들이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위해 바친 피와 땀 목숨을 바친 역사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필자는 기아와의 싸움은 혁명의 길에 필수적으로 주어진 숙명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한다. 사실 조국해방과 혁명투쟁과정에 있어서 기아와의 싸움 즉 고난의 행군은 항일혁명투쟁 전 과정에 어느 하루도 멈춘 적이 없다. 물론 인용문을 포함한 기록들은 그 과정에서 더욱더 극심한 투쟁과정만을 언급했을 뿐이지 항일무장투쟁과정 내내 모든 유격대원들은 식량부족으로 인한 기아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멈춘 적이 없었다.

 

또 해방이 되어 벌어진 한국전쟁 중에 북측의 인민군들이나 인민들이 겪은 기아문제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혹심하였다. 그러다 전쟁 후 1953년부터 천리마 대고조시기를 지나고 본격적인 산업기반이 튼튼하게 건설되어 공업생산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고, 농촌의 협동화를 이루고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주체농법에 의해 농업에서 과학농사가 본격적으로 도입됨으로서 식량자급을 이루어 1990년대 초반까지 약 30여년 정도의 기간에는 기아와 주민들 삶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동구 사회주의권이 모두 붕괴하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혈맹이라던 중국마저 명목상 사회주의는 고수한다고 하였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체제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북에 대한 배신행위를 하여 대외 교역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994년 7월 9일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고 모든 제국주의 연합세력들이 벌인 극단적인 고립압살정책에 의해 북의 모든 공업생산은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특히 에너지분야에 심각한 장애가 조성됨으로서 교통, 통신, 공업, 전력 등 대부분의 생산시설들이 가동을 멈추게 되었다. 결국 북은 공업생산 뿐 아니라 농업분야에까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에너지자원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모든 생산 즉 1차, 2차 산업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올 뿐 아니라 결국 3차 산업까지도 함께 붕괴되게 되어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1995년부터 몰아닥친 3년간의 대홍수피해로 인해 농경지의 33%정도가 사라지고 곡물생산에서 75%가 타격을 입을 정도였으니 세상·천상·천하·천지에 그 정도 피해를 입고 멀쩡할 나라나 사회는 오로지 북 이외에 인간이 존재 해왔던 과거에나 현재 미래에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북이 지켜온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피 눈이 되어 날뛴 제국주의 연합세력들의 고립압살정책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악랄하게 감행되었다. 공업생산제품은 고사하고 곡물 한 줌 쌀 한 톨도 북으로 들어가는 것도 철저하게 봉쇄를 하였으며 공업제품 역시 볼펜 한 자루도 북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은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시기 못지않은 기아와의 투쟁을 해야 했다. 또 거의 모든 공업생산시설이 멈추어버린 탓에 인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생사(生死)의 경계를 넘어서는 간고한 투쟁을 해야 했다. 소위 말하는 1995년부터 2001년까지의 기간에 있었던 극단적인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이다. 현재까지 북의 혁명과정에 있었던 기아와의 투쟁 고난의 행군에 대해 아주 짧게 살펴보았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벌였던 기아와의 투쟁, 고난의 행군 역시 위에서 언급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벌인 기아와의 투쟁을 연상하게 하는 간고한 나날이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기아로 인한 고난의 행군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용문을 통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숨막히는 봉쇄속에서 처창즈인민들이 군대와 함께 1935년 11월까지 유격구를 지켜낸것은 참으로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 기아로 하여 수많은 혁명군중이 곡경을 치르었다.”

 

인용문을 보면 처창즈 유격근거지 인민들이 왜 기아의 참상을 겪었는지 그 원인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건 바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유격대를 말살하고 유격대와 연계를 가지고 지원하는 유격구 인민들을 고사시키기 위해서 고립과 봉쇄작전을 악랄하게 펼쳤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처창즈 유격근거지가 창설되던 초기만 해도 식량사정이 매우 좋았었다. 그러나 유격구가 창설되고 시간이 얼마 지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처창즈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봉쇄를 시작한 것이다. 유격근거지와 바깥 세상이 교류를 할 수 없게되니 자연스레 식량사정도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식량부족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중된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백두산지구에서 대부대련합작전을 벌리기 시작했을 때 김평, 류경수, 오백룡, 박영순이들은 처창즈에서 겪은 그 기아에 대하여 자주 회상하였다. 김명화, 김정숙, 황순희,김철호,전희와 같은 녀성동무들은 해방후에도 음식상앞에 마주 앉으면 처창즈시절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군하였다. 김명화와 김정숙은 그 당시 군부에서 작식대공작을 하였다.”

 

인용문을 보면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반일혁명활동을 했던 항일투사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국이 해방 된 후 받은 음식상 앞에서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겪은 기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니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겪은 배고픔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그리고 그 어려움을 극복한 항일혁명투사들의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가 있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조상들의 반일 · 항일혁명투쟁사였다.

 

송기떡이 가장 일등 음식이었다니 솔직히 상상이 안간다. 필자가 어린 시절이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쪽도 가난한 집은 제법 굶는 날도 있었다. 특히 소위 보릿고개라고 하는 양력 3월 초부터 5월 초 사이 두 달 간은 때를 거르는 집이 꽤나 있었다. 필자의 집안 역시 대단히 가난하였기에 1968년 3월 중순경에 하루 한 나절 정확히 4끼를 굶은 적이 있었다. 하루를 꼬박 굶고 나니 다음날 아침에 힘이 빠져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어디서 보리쌀 한 되 정도 얻어다가 보리죽을 해 먹고서야 일어날 수가 있었다. 배고픔이란 그 정도로 사람에게 즉시적인 영향을 미친다.

 

필자 어린 시절의 배고픔을 이야기 한 것은 처창즈 유격근거지의 기아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 배고픔을 겪었고 또 부모세대들로부터 일제강점기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송기떡(松,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있는 얇고 부드러운 껍지를 벗겨내어 3~4일 정도 담그어 독기를 빼낸 후 메로 쳐서 가루를 내어 만든 떡)을 해 먹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솔직히 60년대에는 송기떡을 해먹은 적은 고사하고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은 송기떡이 음식 중에 으뜸이었다니 당시 기아의 삶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가 있다. 송기떡을 해드신 부모세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말이 떡이지 죽지 않기 위해서 먹었을 뿐이라고 한다. 아무리 독기를 빼내고 메로 쳐서 가루를 내었다고는 하지만 극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송기떡은 산과 들에 나물이 나기 전에 해먹었다고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산과 들에 푸릇푸릇 풀이 돋아나고 들나물 산나물이 나기 시작하면 그 나물들을 캐고 뜯어다가 약간 있는 곡물들과 함께 죽을 쑤어먹었는데 그 나물죽은 송기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고 한다. 필자도 어린 시절 양식을 아끼기 위해 어머니나 누님이 나물을 캐다가 죽을 쑤어 자주 먹었다. 그런데 나물죽은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맛은 있었다. 지금도 그 시절 먹었던 음식을 해 먹어보면 정말 맛이 있다. 어쨌건 나물죽이건 씨레기 죽이건 거기에는 곡물이 약간이라도 들어간다. 사람은 곡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특히 우리민족은 곡물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민족이다.

 

북측자료에는 송기떡을 해먹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이 유격구의 정상은 군부의 식탁에도 그대로 반영되였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콩단만큼한 송기 두단을 해와야 군부의 하루식량이 되였다. 매운재물에 송기를 넣고 3시간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후 돌우에다 놓고 방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섞어 죽을 쑤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창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송기떡을 먹으면 홍문이 메였다. 아이들이 그때 뒤를 보느라고 여간만 고생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들이 울면서 꼬챙이로 뒤를 파주었다. 어른들도 홍문이 메여서 고통을 자주 겪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송기음식을 먹었다.”

 

아마도 지난 회를 읽어본 독자들 중에 극히 일부는 위 인용문의 내용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읽고 지나갔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현 남측 사회에서 더구나 산골마을에 살았던 시골출신들 중에 배고픔을 겪어본 독자들은 아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삶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그러려니 할 뿐이지 가슴 속 깊이 공감하지는 못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필자는 위 인용문을 보고 본 분석을 하면서 당시 처창즈에서 유격구 인민들이 겪었을 기아와 고난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인용문과 같이 처창즈 유격구에 주둔하고 있던 유격대원들이나 인민들이 도대체 왜 저리도 간고한 배고픔의 나날을 보냈는가. 생과 사가 바로 동시에 나에게 존재하는 삶을 왜 살았는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나>의 출세를 위해서, 아니면 우리 집안의 재부를 긁어모으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혁명을 하여 우리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부터 해방을 이루고 해방된 조국 땅에서 마음 편히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처창즈에서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겪었던 간고한 기아로 인한 고난의 행군은 바로 당시를 살았던 우리겨레 모두를 위한 것이었으며, 후세에 오게 될 민족의 후손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처창즈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겪었던 또 하나의 고통은 소금이 부족한 것이었다. 요즈음 남쪽의 언론들을 보면 가관이 아니다. 소위 의사들이라는 사람들 특히 양의사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노라면 우리 인간에게 소금이 왜 필요한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무조건 싱겁게 먹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1930년대를 관통하여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항일투사들에게는 배고픔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이 소금이 부족하거나 없었다는 것이었다. 사람에게는 일정정도의 염분이 있어야 살아갈 수가 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의 신체활동을 보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염분섭취라는 것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량(量)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차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요즈음 의사나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소금의 섭취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아주 적은 량만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오도(誤導)하고 있다. 하지만 소금을 먹는 양도 사람의 성격이 다 다르듯이 신체의 성질 또한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중요한 소금이 부족하여 처창즈의 유격대원들이나 인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북측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소금도 없어서 싱거운 음식을 그대로 먹었다. 죽이나 떡 같은것은 싱거운대로 참고 먹을수 있었지만 산채나 나물국 같은것은 소금이 없으면 먹기가 곤난하였다. 간혹 통신원들이 이따금씩 처창즈에 들려서는 괴춤에 차고다니는 자그마한 주머니에서 소금알을 몇알씩 꺼내주고 가군하였다. 소금알 한알을 여럿이 순번으로 한번씩 혀끝에 살짝 대보고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군하였는데 그야말로 목안에 털이 날 지경이였다.”

 

참으로 눈물겨운 인고의 나날이 아닐 수가 없다. 소금이 얼마나 귀중했으면 소금 한 알을 혼자 먹지 못하고 그저 혀끝에 대기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겠는가. 이는 당시 처창즈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지애로 똘똘 뭉쳐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또 그게 그 시기를 알 수 없을 먼 옛날부터 내려오던 우리민족만이 가지는 인간애이기도 하다.

 

인용문을 보면 송기떡도 부족하였다고 하니 현대사회를 사는 남쪽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인용문을 읽으면서 아무런 감흥도 없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런 삶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감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현재 남쪽 사회를 살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처창즈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우리민족의 수난사를 절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후세들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켜 이 땅이 이민족의 식민지로 우리겨레가 다시는 식민지 노예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각성시켜야 한다.

 

처창즈 유격구의 인민들이 얼마나 기아의 고통에서 시달렸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지난 회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9798&section=sc46&section2=

 

이제 처창즈 유격구의 유객대원들과 인민들이 그토록 처참했던 기아와 좌경모험주의자들이 벌인 반민생단투쟁에 어떻게 맞서서 싸워 승리하였는지를 보도록 하자.

 

먼저 기아가 발생하게 된 근본 이유와 그 기아를 어떻게 극복 했는지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기아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악랄한 봉쇄작저에 의해서이다. 이에 대한 인용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처창즈에서 유격구해산사업이 다른 고장보다 반년 정도 뒤늦게 진행된것은 우선 이 근거지주변에 이중삼중의 포위망을 형성하고 모든 주민들이 굶어죽기를 고대하고있던 적들의 집요한 봉쇄작전의 결과였다.
……
처창즈가 당한 기아의 책임은 전적으로 이 구역을 봉쇄하고 야수적인 《토벌》을 거듭한 일본침략군에 있었다.”

 

고 말해

 

당시 처창즈 유격구의 기아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토벌과 봉쇄전략에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공격을 통한 토벌작전과 동시에 악랄한 봉쇄작전을 벌임으로서 유격구에 있는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고사되어 붕괴되리라고 타산을 하고 벌인 비열하고 악랄한 화전양면전술책동이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악랄한 봉쇄와 고립압살정책 그리고 군사적 압박전략을 보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북에 대한 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고립압살정책과 군사적 압박전략을 보는 듯 하여 역사란 반복의 역사요, 이어짐의 역사이며, 제국주의의 비열하고 악랄한 본질적 속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봉쇄와 고립압살책동과 동시에 당시 동북만과 남만에 거주하던 인민들에게 가했을 선전선동 또한 현 시대와 판박이였을 것이라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똑같았을 것이다. 지금도 끈임 없이 《북 붕괴설》을 유포하고 있다. 그 《북 붕괴설》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북 주민아사 설》이다. 이와 같은 선전선동은 필자가 어린 시절이었던 1960년대에도 똑 같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북 아사설이 얼마나 황당한 선전선동이었는지 우습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와 같이 똑같은 내용의 선전선동이 오늘 날에도 계속 되고 있으며 남쪽 사람들 99%는 이를 철썩 같이 믿고 있다. 참으로 황당하고 한심스럽기까지 한 남쪽 백성들에 대한 세뇌의 연속이며 또 그 긴 세월 똑 같은 선전선동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필자는 답을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북에 대한 선전선동의 일환인 《북 아사설(餓死說)》 《북 붕괴설》이 70여 년이나 계속됨에도 남쪽 백성들이 계속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초등학교시절 책에서 배웠던 서양의 우화 《늑대 소년》을 연상한다. 남쪽 사람들은 그 늑대소년에 속은 마을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참으로 대단한 남쪽의 백성들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의 기아의 고난은 또 다른 원인은 유격근거지를 이끌고 있던 일꾼들에게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고 북측 자료는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북측 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이 구역의 생활을 책임진 일군들의 무책임성과 무능성이 낳은 귀결이였다.
……
유격구를 책임진 일군들도 인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지휘부에 기여든 반동들과 불순분자들은 덮어놓고 《배고파도 견뎌내야 한다. 절대로 굴복하지 말라! 죽는것은 투항이다!》라는 초혁명적인 언사로 대중을 우롱하였다.”

 

라고 하여

 

당시 처창즈 유격구를 이끌고 있던 일꾼들이게도 그 책임이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로 근거지를 옮겨 유격투쟁을 벌이던 시기에는 동만에서 반민생단투쟁이 혹심하게 벌어지던 시기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벌어진 반민생단 투쟁으로 조선의 열혈 항일혁명투사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당시 화룡현당 서기인 김일환 항일혁명투사의 예를 들어 당시 상황을 분석해보기로 한다.

 

당시 처창즈 유격근거지의 일꾼들은 유격구에 있는 유격대원들이나 인민들의 생활을 보살펴주고 유격투쟁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보다 자신들 개인의 공명주의와 출세를 위한 교조와 종파사대주의에 물들어 오히려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을 탄압하는데 몰두를 하였다. 일꾼들의 이러한 반역적 유격구 내부에서의 파괴행태는 외부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유격구 말살을 위한 악랄한 봉쇄책동과 군사를 동원한 토벌로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의 삶을 더욱더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유격대의 반일혁명투쟁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여섯째. 외부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악랄한 봉쇄와 고립압살책동 그리고 군사를 동원한 토벌에 맞선 어려움, 그로인한 생사를 넘나드는 기아, 내부의 적들에 의한 반민생단 투쟁에 의한 조국해방과 혁명의 길에서 신념이 투철했던 항일투사들의 연이은 희생 등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처창즈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에 대해서 이다.

 

이에 대해서 인용된 북측 자료를 통해 분석해보기로 한다.

 

먼저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의 기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을 했는지 보도록 한다.

 

“이런 기아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땅을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지라지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두알 입에 따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인용문을 보면 당시 처창즈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기아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은 실로 눈물겹다고 단순하게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간고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흘 굶어 도둑 강도가 안 될 놈이 없다.”는 우리 옛 말이자 진리가 있다. 요즈음 현대 사회는 사흘 굶는 정도가 아니라 배 터지게 먹고 살면서도 절도, 강도, 사기, 협잡, 기만, 왜곡, 조작 등 이루 그 범죄의 가지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만연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은 사흘 굶은 정도가 아닌 매일 매일 굶어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 그들은 도덕적으로 얼마나 깨끗하고 순결했는가를 잘 알 수가 있다. 그야말로 선계(仙界)에 살았던 신선(神仙)이요 선녀(仙女)들이라고밖에 더 이상 표현 할 말이 없다. 그렇다 바로 처창즈 유격구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바로 신선이요 선녀들이었다.

 

인용된 북측 자료를 보면 아래와 당시 처창즈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남자들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의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차례졌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들을 관도 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하였다.”

 

인용문을 분석하면서 당시 처창즈 인민들의 처참한 상황을 연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글을 쓰려 해도 당시 처창즈 유격구에 살면서 당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온갖 시련과 고난, 그리고 그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벌인 우리 조상들의 투쟁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옴을 어쩔 수가 없다.

 

어린 아이들은 몸이 채 성숙되지 못했기에 생리적 어려움에 쉽게 목숨을 잃게 된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성숙하고 건장한 남자들이 먼저 희생을 당했다니 오늘을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그렇다. 바로 굶어 죽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몸이 건장한 남자들은 어린 아이들과 육체적으로 연약한 여자들을 위해 약간이나마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포기하고 먼저 희생을 당하였던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이 인간세계에서 벌어질 수 있겠는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우리조상들의 깨끗하고 순결한 도덕성과 인간성에 대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반면 먼저 간 자신들의 아이들과 남편이요 동생들을 땅 속에 묻는 여인네들 또한 어떠했겠는가. 이에 대해 인용문은

 

“자기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의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차례졌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들을 관도 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하였다.”

 

라고 하여

 

당시 여성들이 겪었을 고통과 고난이 어떠했겠는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인용문과 같은 처창즈의 참상과 이를 이겨내는 유격구 인민들의 투쟁이 솔직히 필자로서는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 시신 앞에서 슬프게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삭여야만 하는 여인네들의 고통과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오늘 날 남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꾸며낸 거짓말이라느니, 소설을 쓴다느니 하면서 일축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반쪽 겨레들은 지금도 처창즈 유격근거지 인민들이 간직하였던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깨끗하고 무한히 순수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바로 항일혁명투쟁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부단히 발전 공고화 시켰기에 가능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겪었던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고 오늘 날의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문화예술강국으로 우뚝 솟아있으며 오늘의 현 시점에는 경제강국까지 이루기 직전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북의 인민들의 깨끗하고 순결무구한 도덕품성과 <내>가 아닌 <우리>라는 숭고한 사상을 계승, 발전, 공고화 시켰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난의 행군을 걷고 있던 시기 북에서도 이웃을 위해 식량을 양보하고 자신들은 희생을 당하였던 예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 고난의 행군을 잘 묘사한 극(㘌)이 있는데 2011년에 무대에 올라 북 사회에서 절찬을 받았던 바로 《오늘을 추억하리》라는 연극이다. 연극속에는 당 행정위원장(소위 남쪽에서 말 하는 당간부요 특권층)의 딸이 배고픔에 쓰러지기 직전에 있으면서도 학급동무들이 굶주리는 것을 볼 수 없어 얼마 안되는 강냉이 가루를 양보하고 자신은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해당 연극에서의 주요한 주제는 아니나 북 사회의 깨끗하고 순결한 도덕품성을 볼 수 있는 소재이다. 바로 이와 같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있는 사회와 집단이기에 지난했던 고난의 행군시기를 승리적으로 잘 극복하고 오늘이 있는 것이다.

 

처창즈 유격구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자신들이 먼저 희생을 하면서 아내와 자식 이웃들을 위해 투쟁을 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내, 나》가 아닌 《우리》라는 숭고한 사상정신이 있었기에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은 그 간고한 고난과 시련을 이겨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북측 자료는 아래와 같이 그 정황을 전해주고 있다.

 

“처창즈사람들이 이런 아사지경에서도 순수한 인간으로 그냥 남아있을수 있은것은 여러해동안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온 공산주의적리념, 집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킬줄 아는 공산주의적도덕이 간도의 모든 혁명군중을 성인군자로 만들어준 덕이였다고 할수 있다. 사람이 사람의 팔다리를 삶아 먹는것과 같은 비인륜적인 현상이 처창즈에서는 감히 자기의 무대를 가질수가 없었다.”

 

참으로 고상하고 높은 도덕품성과 깨끗하고 순결무구한 얼과 넋을 간직한 우리 조상들이었다는 것을 자부심과 긍지 높이 새기게 되는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의 고난과 시련 극복 이야기이다.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이 사람의 팔다리를 삶아 먹는것과 같은 비인륜적인 현상이 처창즈에서는 감히 자기의 무대를 가질수가 없었다.”라고 한 내용은 바로 1945년 일제가 패망을 하기 직전 태평양상에 있는 남양군도(북마리아나 제도. 괌, 사이판 등이 속한 섬들)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인들이 패전에 몰려 식량부족이 닥쳐오자 강제 징용 및 징병이 된 우리 조상들을 잡아다가 죽이고 그 살점을 도려내 고래 고기라고 속이면서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본 내용은 절대 허위 사실이 아니며, 당시 상황을 기록하 근거 자료가 존재한다.

 

위와 같은 일본식인종들의 야만적인 행태에 비하면 처창즈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 즉 우리 조상들의 고상하고 높디높으며 깨끗하고 순결한 도덕품성은 그야말로 인용문에서도 말 했듯이 모두 성인군자 아니 선계의 신선들이요 선녀들인 것이다. 아마도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와 같은 혹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북에서 겪었던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민족은 지구상에 우리겨레 말고는 없다고 단정해도 된다.

 

이번에는 처창즈 유격구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반민생단 투쟁은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북측 자료를 통해 보기로 하자.

 

”유격구해산문제가 일정에 올랐던 1935년 10월에 김일네 집안, 남창수네 집안, 리계순네 집안, 권일수네 집안을 비롯한 20여명에 달하는 《민생단》련루자가족들은 단합살림이라는것을 뭇고 동남차골짜기 막바지에서 1936년 여름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민생단》루명을 벗어던지자는것이였다. 단합살림이라는것은 여러 세대가 하나의 살림으로 합치여 생활도 유지해가고 투쟁도 해가는 그런 특이한 생활방식을 말한다. 그들은 귀틀집 한채에 세간들을 합치고 책임자도 정하고 매일, 매주, 매달 각자에게 알맞는 분공도 주고 그 분공수행정형을 총화도 하면서 조직적인 생활을 하였다.
단합살림에 망라된 그 가정들은 마지막까지 처창즈를 지킨 최후의 방위자들이였다.”

 

아마도 인용문과 같은 삶은 다른 민족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고난이 닥쳐온 극한 상황이라 해도 그들 민족의 유전자가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민족은 수수만년 뼈속 깊이 유전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고상하고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에 인용문과 같은 삶이 가능한 것이다.

 

고대 이전 선사시기부터 우리민족이 인용문과 같은 삶을 살아왔고 또 그런 삶이 가능할 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지녔다는 것은 우리조상들이 남긴 사서와 자료들 뿐 아니라 화하족들이 남긴 수많은 사서나 자료들이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물론 인용문에서와 같이 당시 새로운 사조였던 서양의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인 부분도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필자가 끝도 없이 강조하지만 《우리》라는 말 자체가 서양식 공산주의사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철학 사상적으로 뛰어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바로 《울+이(사람)=울이》가 연음(連音)이 된 말로서 “울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는 하나”라는 인간 철학, 사상적으로 고매하고 고상하며 뛰어난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우리》는 절대 복수형(複數形)의 단어가 아니다. 단수(單手)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말 속에는 한 가정, 집단, 사회, 나라라는 울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라는 의미도 가진다. 현재 북에서 항상 주장하고 있는 바로 그 《일심동체, 일심단결》 《하나의 대 가정》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의미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 바로 《우리》이다.

 

이와 같은 우리겨레의 철학, 사상적인 유전형질이 있기에 인용문과 같은 반민생단투쟁을 위한 《단합살림》이 가능한 것이다. 또 서양식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공산주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사회주의가 성공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서양식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높은 사상 · 정신적으로 고매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도덕품성을 우리겨레가 가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북의 사회제도를 서양식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요즈음 북에서 주장하는 바로 《우리식 사회주의》로 받아들인다. 결코 서양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회주의가 아니고 우리식대로 발전시켜온 사회주의 인 것이다. 따라서 북의 사회주의는 완벽한 《우리식 사회주의》인 것이다.

 

사진3.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반일자위대 창설

▲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은 반일자위대를 창설하고 처창즈 유격구 토벌을 위해 악랄하게 달려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와 그 주구들로 이루어진 토벌대를 번번이 물리치고 승리를 이루어 유격구를 잘 사수해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1935년 11월 《유격구 해산방침》에 따라 맨 마지막으로 해산을 하고 안도현 내도산으로 이전하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내부의 적인 좌경모험주의자들과 배타적 중국 민족주의에 찌든 중국인들에게 《단합살림》을 내오고 투쟁을 함으로서 자신들과 희생된 조선인들의 깨끗한 양심에 대해 시위를 한 것이다. 말이 그렇지 외부의 적인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의 토벌공세와 내부의 적인 일꾼(당 간부)들의 살해 위협 등 안팎으로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인용문과 같은 투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대단한 우리 조상들인 처창즈 유격구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투쟁에 대해 북측 자료에서도 “단합살림에 망라된 그 가정들은 마지막까지 처창즈를 지킨 최후의 방위자들이였다.”라고 하여 높게 평가하고 있다.

 

결국 처창즈 유격구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일치단결된 투쟁은 내 · 외부의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대해 인용한 북측 자료는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적들은 수천명병력을 동원하여 군경들에 의한 종전의 초토화식 《토벌》일변도의 전술로부터 군사,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치는 종합적인 대봉쇄전술로 이행하여 처창즈를 완전히 압살해버리려고 《토벌》에 《토벌》을 거듭하였지만 그때마다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1935년 10월의 대《토벌》에는 수천명의 적이 투입되였다. 처창즈의 용감한 방위자들은 이번에도 적들의 침공을 영웅적으로 격퇴하였다. 그들은 저격무기로 유격구를 공습하는 비행기까지 쏴떨구는 전공을 기록하였다.”

 

라고 하여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 외부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엄청나게 동원한 토벌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를 거두어 유격구를 방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의 반일 · 항일혁명투쟁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겨우 소총 정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임에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동원한 전투기를 격추시켰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가 있다. 참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투쟁의지이다.

 

일곱째. 내 · 외부의 적들과의 싸움 그리고 도서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기아 등 그렇게도 간고한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을 해왔으며 결국 승리를 거둔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결국 약 2년여에 걸친 활동을 마치고 1935년 11월 해산을 하고 안도현 내도(두)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에 대한 인용문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1935년 5월에 시작된 유격구해산사업은 그해 11월초에 결속된 처창즈유격구역의 해산을 마감으로 하여 완료되였다.
……
그해 11월 처창즈인민들은 유격구를 해산하고 군대와 함께 대부분 내도산쪽으로 이동하였다.”

1935년 11월 내도산으로 이전한 유격대원들과 인민들 그곳에서도 간고한 시련과 투쟁을 겪어야 했다. 내도산에서 벌인 가열 처절한 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다. 혹 보지 못한 독자들이나 필요하다고 여기는 분들은 아래를 참고하기 바란다.

 

“[항일연재10] 일본군 동기대토벌대 내두산 유격대에 참패를 당하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671&section=sc46&section2=

 

여덟째.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의 간고했던 고난극복 투쟁에 대해서 회고이다. 이에 대해 북측 자료는 당시 처창즈 유격근거지의 삶이 얼마나 간고한 시련의 연속이었는지 아래와 같이 전해주고 있다.

 

“적의 봉쇄속에서도 오래동안 인민들과 함께 굶어도 보고 앓아도 보고 싸워도 본 처창즈방위자들중의 한사람인 백학림은 지금도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처창즈사람들이 겪어온 항일전쟁시기의 참상을 모른다면 그 무슨 생활난에 대해서 감히 입밖에 내지도 말라. 처창즈의 군민이 봉쇄속에서 어떻게 기아를 이겨내고 추위를 이겨내고 적의 〈토벌〉을 이겨냈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어떤 곤난극복에 대해서도 감히 자랑하지 말라!》”

 

위 인용문이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벌인 투쟁에 대한 모든 것을 간결하게 대변해주고 있다. 참으로 위대한 우리 조상들의 반일 · 항일혁명투쟁사의 한 일단이 처창즈 유격근거지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투쟁이다.

 


☞☞☞ 글이 길어져서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와 화룡현당 서기인 김일환에 대한 반민생단 투쟁과정에서의 희생 그리고 다홍왜 회의와 요영구 회의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 연재를 한다. 지금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항일무장투쟁사와 현 북의 현실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자세히 다룰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이 점 잊지 말기를 바란다. ☜☜☜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6년 10월 18일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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