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연재56]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
항일독립주투쟁의 성지 연변조서족자치주를 가다(56)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11/02 [06: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1930년 이후 가열처절하게 항일무장투쟁을 굴함없이 전개하였다. 그 중에는 16살 정도의 앳된 소녀들도 총을 들고 싸웠으며 항일의 여 투사들 대부분의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였다. 그 처럼 애어린 처녀들이 한 목숨 서슴없이 바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굴하지 않고 악랄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연변박물관의 소왕청 유격근거지 방어전투 모형, 유격근거지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일본 관동군 토벌대를 유격근거지 유격대는 물론 주민들과 아이들까지 손에 돌을 들고 나와 맞서 싸워 물리쳤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도 이런 방어전투가 완강하게 진행되었는데 이 방어전 못지 않게 기아와 반민생단 투쟁도 힘든 과제였다.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2)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

 

지난 회에서는 청창즈 유격구에서 삶며 투쟁하던 유격대원들과 유격구 인민들에 대해서 당시를 기록하여 전해준 북측자료를 상세하게 분석하였다.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과 유격대원들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토벌작전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었다. 일제의 악랄하고 악착같은 고립과 봉쇄작전으로 인한 처참한 기아를 극복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제의 음모와 모략, 좌경모험주의자들과 유격구 일꾼 중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의 국수적인 중국민족주의자들의 《반민생단투쟁》으로 신념이 투철한 조선인 항일혁명가들의 희생 등 이중, 삼중의 고난과 시련을 극복해야하였다.

 

처창즈 유격구에서 머물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외부의 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직접적인 토벌과 간접적인 고립과 봉쇄로 인한 기아극복 그리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음모와 모략, 극단적 중국민족주의자들인 동만특위 간부들의 조선인에 대한 제거작전, 교조, 종파사대주의에 물젖은 조선인 좌경모험주의자들의 망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벌어진 반민생단투쟁 등 닥쳐오는 난관과 위험 등 간고했던 고난의 행군을 기어기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럼 처창즈 유격근거지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겪은 고난과 그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와 이송덕 선생의 자료를 살펴보도록 하자.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겪은 고난과 극복과정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와 이송덕 선생의 자료를 세 부분으로 갈라서 보도록 한다.

 


(1)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의 건설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

 

❝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군민이 혼연일체 되어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일제의 봉쇄 분쇄》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①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건설


❛동만특위의 파견을 받은 화룡현위 서기 김일환과 박덕산(김일)은 1933년 11월 처창즈에 가 유격구개척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그들은 처창즈에 온후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군중을 조직하여 반일회, 농민협회 등 반일혁명단체를 묶어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하여 산림대를 쟁취하여 그들로부터 식량, 군복,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받아 처창즈유격근거지개척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1935년 1월, 연길현, 화룡현, 안도현 각 근거지의 군민 1000여명이 처창즈에 집중되여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정식 건립하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잡았으며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공산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


근거지군민들은 나무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귀틀집을 지었고 정부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적점령구의 인민들을 통해 종자와 부림소를 얻어왔다. 한편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여 오동앙파, 쓰치개, 송강 등 방면으로 쳐들어올 적들을 밤낮으로 경계했다.


근거지에서는 또 서남차의 고동하지류 량안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앉히기도 했다. 병기공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건설에 대해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길, 화룡, 안도에 있던 항일유격근거지가 해산을 하고 처창즈 유격근거지로 이전해왔다는 기록은 북측 자료와 동일하다. 해산된 3개현의 해산된 유격구 인민들 1,000여 명이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로 이전해와 정착을 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는 김일환, 박덕산(김일, 조국이 해방되고 귀환하여 북에서 부수상까지 하였다.) 등이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1933년 11월 미리 파견되어 정치공작을 하였다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치공작원으로 선발 파견된 김일환, 박덕산 항일혁명투사들은 처창즈 주민들을 대상으로 반일회, 농민협회 등 반일혁명단체를 조직하여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유격구 창설을 위한 토대를 튼튼하게 마련을 하였다.

 

특히 두 항일혁명투사 정치공작원은 산림대를 혁명군의 우군으로 돌려세움으로서 든든한 지원세력을 확보하였다고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이전 자료들에서도 항일혁명투사들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산림대를 혁명에 협조자로 돌려세워 함께 항일무장투쟁의 대오에 서서 싸웠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처창즈에 선무 파견된 정치공작원 김일환, 박덕산 항일혁명투사들 역시 그 곳에 있었던 산림대를 돌려세워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길에 함께 싸울 수 있도록 돌려세움으로서 처창즈에 항일유격구를 건설하는데 튼튼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인용문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잡았으며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공산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라는 기록은 처창즈에 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된 초기 두 개의 인민혁명정부가 동시에 존재를 했었다고 한 북측자료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에 대한 북측 자료를 다시 한 번 보면 아래와 같다.

 

“독립련대는 처창즈근처에 주둔하고있던 위만군 1개 중대를 손쉽게 쫓아버리고 이고장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이 무력을 배경으로 어랑촌유격구의 주민들이 처창즈에 쓸어들어와 고동하건너편에 화룡현인민혁명정부건물을 세웠고 뒤미처 왕우구와 삼도만의 주민들이 신선동을 거쳐 이곳에 연줄연줄 나타나 동남차골짜기입구에 연길현인민혁명정부기발을 게양하였다. 그리하여 처창즈에는 두개의 현에서 온 인민혁명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이 1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두 개의 자료를 동시에 놓고 보니 초기 처창즈 유격구에 존재했던 두 개의 인민혁명정부에 대해 명확해졌다. 특히 북측 자료를 보면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보다도 더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처창즈에 대한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야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정황을 안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아니 솔직히 어지간히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     © 자주시보
▲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 뒤면 설명글,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여기서 고동하를 따라 더 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두 자료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잡았다”는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의 내용은 “이 무력을 배경으로 어랑촌유격구의 주민들이 처창즈에 쓸어들어와 고동하건너편에 화룡현인민혁명정부건물을 세웠다.”는 기록과 같은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공산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는 기록은 북측자료 “왕우구와 삼도만의 주민들이 신선동을 거쳐 이곳에 연줄연줄 나타나 동남차골짜기입구에 연길현인민혁명정부기발을 게양하였다.”는 내용과 같은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두 자료에 나오는 《고동하》라는 물길은 백두산 동북부지역에 있는 시내(市渿)로서 동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간다. 따라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남차 골안의 묘령 북측이라는 것은 어랑촌 유격구 인민들이 자리 잡은 마을을 남향이다. 또 그 서쪽이라고 언급된 팔구구정부는 북향이면서 어랑촌 유격구가 자리잡은 서쪽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항일무장투쟁사를 읽는 독자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안도, 화룡현은 백두산자락이며 백두산 천지를 기준으로 동북부에 위치해 있음을 항상 잊지 말기 바란다. 그래야 항일무장투쟁시기 전투사(戰鬪史)나 유격활동 등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창설에 있어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가 전해주는 주요한 내용은

 

“근거지에서는 또 서남차의 고동하지류 량안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앉히기도 했다. 병기공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다는 자료이다. 처창즈에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면서도 병기공장(兵器工場-무기만드는 곳), 피복공장(被服工場-옷 만드는 곳), 병원을 꾸렸다니 그 신속성과 치밀성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밖에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다. 솔직히 연길, 화룡, 안도 등 동만지방의 유격근거지를 해산한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이 침략자들이 벌인 토벌에 쫓겨 간다는 말과 같다. 물론 유격투쟁의 지속성과 효율성을 가지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유격구를 해산하였다고는 하지만 일제의 가혹하고 무자비한 토벌이 없었다면 굳이 해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유격구를 해산한다는 것은 토벌을 피해 쫓겨 간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 인민들이 거주할 공간만 마련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울텐데 짧은 시간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 등을 갖추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토벌과 기아, 반민생단투쟁에 의한 생명의 위협 등 유격구의 유격대원들이나 인민들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 자체가 삶의 모든 것을 좌우했을 것임에도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다니 당시 처창즈에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반일 · 항일의 의지와 혁명신념이 얼마나 투철하였었는지 실로 놀라울 뿐이다. 아마도 현 남쪽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본 자료를 보는 남쪽 구성원들은 아마도 위 인용문의 내용이 꾸며진 가상의 세상 또는 거짓으로 일관한 허위자료라고 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의 신념과 의지가 대단했었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이다.

 

▲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병기창이 있던 자리에 세운 기념비     © 자주시보

 

▲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병기공장 기념비 앞에 선 리송덕(왼쪽) 역사학자와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②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기아와의 투쟁

 

❛ 처창즈유격근거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여 적들의 “토벌”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2퇀 전사들은 근거지인민들의 지지속에서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어놓으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근거지에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봉쇄로 말미암아 초봄부터 기아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의 정경을 《준엄한 시련속에서》(려영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하여 송피를 벗겨먹고 우묵우묵 패인 물구뎅이에 가서 개구리알까지 떠다가 삶아먹으며 일하였다. 햇풀이 땅우로 봉긋이 솟아오르면서부터 남녀로소가 산과 들에 널려서 숨위나물, 삽지, 고사리, 기름고비, 물고비, 더덕, 도라지, 참나물, 절나무, 개암나무, 한충, 메마늘, 세투리, 메뿌리, 씀바귀, 냉이, 산미나리, 산시금치, 참나리, 개나리 등 먹을수 있는 풀은 죄다 캐들였다. 이런 산나물은 송피보다 먹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산나물을 먹을 때 기름 한방울 놓지 못하였다. 간장, 된장, 소금마저 없어서 맹물에 삶아먹거나 생나물을 그대로 씹어먹다보니 나중엔 사람의 몸에 풀독이 오르고 병이 나서 선후 100여명 군중이 사망되였다...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도 그때의 간고했던 상황을 쓰고 있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매운 재불에 송기를 넣고 3시간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 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후 돌우에다 놓고 망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넣어 죽을 쓰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장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뱀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쥐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씨붙임을 할 때 신고 일하던 도로기도 작식가마에 들어갔다. 도로기를 우린 즙쯔레한 물을 한공기씩 마시고 병사들이 포복전진을 하듯 매밀이를 해가며 봄파종을 하였다. 오늘 씨를 뿌리고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기도전에 그 씨를 파먹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대중단체들에서는 씨붙임이 끝난 밭들에 보초를 세우고 종자를 파먹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보초들마저도 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씨앗을 파먹었다...


이런 기아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지라지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두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은 남자들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임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차례졌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을 관도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흩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 

 

 

인용문의 내용은 처창즈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겪은 고난의 행군을 분석하면서 상세히 다루었다. 본 내용 역시 북측자료와 동일하다.


당시 처창즈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참혹한 기아에 직면하게 된 이유에 대해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는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처창즈유격근거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여 적들의 “토벌”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2퇀 전사들은 근거지인민들의 지지속에서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어놓으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근거지에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봉쇄로 말미암아 초봄부터 기아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창즈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기아에 직면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토벌과 악랄한 고립과 봉쇄책동에 있었다는 것을 말 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는 북측자료에서 언급한 두 번째 원인인 처창즈 유격근거지 일꾼들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않고 오히려 혁명가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가기 여념이 없었기에 벌어진 것도 커다란 이유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참고할 수만 있다면 모든 자료들은 동시에 놓고 분석을 해야 역사의 진실을 고증하고 논증할 수가 있다.

 

인용문은 “간장, 된장, 소금마저 없어서 맹물에 삶아먹거나 생나물을 그대로 씹어먹다보니 나중엔 사람의 몸에 풀독이 오르고 병이 나서 선후 100여명 군중이 사망되였다”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북측자료에서는 언급이 없었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본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처창즈에 거주하던 인민들이 약 1,000여 명이라고 하였는데 전체 인민들의 1/10(10%)가 풀독에 걸려 희생을 당하였다니 당시 기아가 얼마나 혹심하고도 처참하였는지를 짐작은 하지만 솔직히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나머지 송기떡을 해먹고, 웅덩이에 있던 개구리 알을 떠다가 삶아 먹었으며 소금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내용들은 지난 장에서 분석한 북측자료와 동일하다. 북측자료와 연변조선족학술자료 모두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1934년부터 1935년 11월 해산이 될 때까지 약 2년여에 걸친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극한의 기아상태에서 투쟁을 해왔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가 있다.

 


③ 반민생단투쟁과의 투쟁

 

❛ 기아와 공포는 무서웠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기아보다 더 무서운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반“민생단”투쟁이였다. 기아마저도 꺼꾸러뜨리지 못했던 투사들은 반“민생단”투쟁으로 쓰러졌다. 김일환, 주도산, 석봉세 등 근거지의 지도자들은 이번 투쟁으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살해되였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이빨을 악물고 무서운 공포를 이겨냈을뿐만아니라 그해 가을에는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그것은 어찌 그저 곡식이라고 할수 있으랴. 그것은 인민들의 피이며 골수이며 반일정신이며 혁명의지였다. 부대에서는 인민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식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여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식량들을 도로 인민들에게 보내주었다. 이렇듯 인민혁명군과 근거지인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공고히 하였다. ❜ ❞

<(김철수《연변항일사적지연구》 로금창전투 중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를 보면 1934년~1935년 11월까지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서 항일혁명투쟁을 하였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처참한 기아와의 투쟁보다도 반민생단투쟁이 더 무서운 공포였다고 한다. 참으로 기막힌 현실이었다는 것 이외에 더 할 말이 없다.

 

위 인용문에도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반민생단투쟁으로 희생된 조선인 일꾼들의 이름이 세 명이나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기아마저도 꺼꾸러뜨리지 못했던 투사들은 반“민생단”투쟁으로 쓰러졌다. 김일환, 주도산, 석봉세 등 근거지의 지도자들은 이번 투쟁으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살해되였다.”고 하여 당시 반민생단투쟁이 유격구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에게 준 공포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말 해주고 있다. 김일환 항일혁명투사의 희생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상세히 다룰 것이다. 그 외 주도산, 석봉세 항일혁명투사에 대해서는 이송덕 선생의 자료에서도 언급되었다. 이에 대해 이송덕 선생의 자료를 분석하면서 살펴보도록 한다.

 

또 하나의 가슴시린 사실을 연변조선족학술자료는 아래와 같이 전해주고 있다.

 

“그해 가을에는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그것은 어찌 그저 곡식이라고 할수 있으랴. 그것은 인민들의 피이며 골수이며 반일정신이며 혁명의지였다. 부대에서는 인민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식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여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식량들을 도로 인민들에게 보내주었다.”

 

참으로 가슴이 막혀오고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얼마나 고귀한 인격과 품성 그리고 조국해방의 의지 혁명신념을 간직한 인민들인가. 앞선 장에서도 상세히 언급했지만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여를 했던 항일혁명투사들은 물론이고 당시 동북만과 남만에 거주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지원했던 조선인들 즉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가 신선(神仙)이요 선녀(仙女)였다. 참으로 대단히 높은 품격을 지닌 인민들이요 투사들이었다는 것을 인용문을 보면서 가슴에 더욱더 깊이 새겨지게 된다.

 

자신들은 굶어죽어 가면서도 유격대 원호를 위해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상상이 안 간다. 내가, 우리 식구들이 굶어죽는 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얼마 있지도 않은 양식을 유격대원들을 위해 내놓는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러한 상황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시 처창즈 항일유격구 근거지 인민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또 유격구 인민들이 보내온 원호미를 자신들이 받아서 식량으로 사용하지 않고 되돌려 보낸 유격대원들 또한 얼마나 고매한 품성과 도덕성 그리고 인민사랑이 넘쳐났었는지를 감히 상상속에서만 짐작해본다. 참으로 놀랍기만 한 당시 처창즈 유격구 인민들과 유격대원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깨끗하고 고결하며 순결한 품성과 인간사랑이 있었기에 간고한 처창즈 유격구의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고 승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도 “이렇듯 인민혁명군과 근거지인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공고히 하였다.”라고 하여 유격대원들과 유격구 인민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투쟁을 하였고 또 이를 통해 유격근거지를 튼튼히 꾸릴 수가 있었다고 당시 상황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렇다 바로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나와 네’가 아닌 참다운 《우리》가 되었기에 간고했던 처창즈 유격구의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던 것이다.

 

▲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처창즈 유격근거지 안에 구정부 건물이 있던 자리 표식비     ©자주시보


(2)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의 건설에 대한 이송덕 선생의 자료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서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약 2년여에 걸친 투쟁에 대한 이송덕 선생의 자료도 동시에 살펴보도록 하자.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한 이송덕 선생의 자료는 북측자료에서나 연변조선족학술자료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도 있다. 따라서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하여 북측자료, 연변조선족학술자료, 이송덕 선생의 자료를 동시에 비교분석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이송덕 선생은 처창즈를 직접 방문하여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던 처창즈 유격구인민들, 유격대원들과 대담을 하여 기록을 하였기에 더욱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이송덕 선생의 자료 역시 북측자료와 연변조선족학술자료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전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겹친다는 것은 그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걸 반증해주는 것이다. 이송덕 선생의 자료는 처창즈 유격근거지 창설, 기아와의 투쟁, 반민생단투쟁에 맞선 투쟁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관련 부분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인용하고 분석하기로 한다.

 


❝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에서


①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 창설에 관하여

 

❛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고동하상류의 하곡분지에 있는데 이곳은 화룡시와 안도현이 린접한 곳으로서 오늘의 화룡이 와룡향  함안촌이다. 일명 처창즈라고도 불렀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방원이 약 50여리 된다. 그 대부분이 산맥이 기복을 이루어 뻗어졌다. 동남부에는 고동하물이 좁은 협곡을 따라 동으로부터 북으로 흐르고 강 량안의 면적이 그리 크지 않은 산림지대로서 산과 물을 낀 이곳은 항일유격근거지를 세우는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1934년에 이르러 《토벌》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지고 《집단부락》이 늘어남에 따라 항일유격근거지가 날따라 줄어드는 형편에 상급조직에서는 《적극적으로 진공조치를 채취하는 책략을 써서 제 2련대와 독립련대를 안도로 발진시킬》데 대한 임무를 주었다.

 

1933년 초 초겨울 이 산골에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하여 조선족항일투사이며 화룡현위서기였던 김일환동지를 처창즈로 파견하였다. 그는 이곳에 파견되여온 지하공작원 박덕산(김일)동지와 손잡고 이곳에서 군중사업과 반일선전사업을 벌리였다.

 

독립사 제2퇀(단)과 대사하 · 송강(안도현 소재지) 등지를 들이쳐 적들에게 큰 타격을 준 뒤 나중에 처창즈를 점령하였다.

 

1934년 년말부터 1935년 3월까지 연길현 사방대, 삼도만의 능지영에서 싸우던 연길현군민들이 안도현의 신성(선)동을 거쳐 처창즈로 이동해왔다.

 

화룡현 어랑촌의 버섯골, 청수동에서 싸우던 화룡현의 군민과 안도현 각지에서 싸우던 혁명군중들도 선후로 처창즈 동남차에 집결하였다.

 

일제의 발악적인 《위공작전》에 대처하여 백두산원시림지대와 잇대여있는 처창즈에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

 

연길현유격대를 토대로 세워진 제1퇀(련대)과 화룡현 제2퇀은 독립사의 지휘밑에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도처에서 적을 타격하였다.

 

지금 156호 전선대가 있는 곳에 연길현 팔구인민혁명정부가 있었고 그 서쪽 목란툰(목란촌)에 옹구와 왕우구정부자리를 두었다. 149호 전선대에 제2퇀 퇀부가 있었고 강 건너 맞은편 산밑에 제1퇀 퇀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 리종복이 당의 사업을 책임지고 목란툰에는 박철이를 회장으로 하는 왕우구 인민혁명정구가 있었으며 석봉세가 서남차에서 팔구인민혁명정부회장을 맡았다. 김원철을 회장으로 하는 옹구인민혁명정부는 서남차에 있었다. 화룡현에서온 군민들도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최춘산, 리종복, 주도삼 등 동지들이 왕우구, 팔구, 옹구의 당지부서기를 책임졌다. 제1, 제2퇀이 외선작전을 떠나게 되자 반일자위대원, 공청원, 부녀회, 소년선봉대, 아동단월들이 이곳을 보위하는 주요력량으로 되었다.

 

목란툰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약 6리쯤 올라가면 동남차에 옹구인민혁명정부가 있었는데 그 서쪽 등평 림지가 있는 곳에 동남차근거지에 세워진 무리수리고, 재봉소, 병원이 있었다. 무기수리소에서는 작탄을 만들고 총을 수리하였다. 병원에서는 산에서 채집한 초약을 캐여다가 약을 달여서 상병자를 치료했으며 이곳에서 수술도 하였다. 재봉소에서는 밤에 낮을 이어가며 옷을 만들고 깁거나 신발을 만들어 전선에 보내였다. ❜

 

<불굴의 항일녀투사 김정숙동지. 리송덕 강창준 공저. 조선민족문제연구소.1998년 12월 24일>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 창설에 대한 이송덕 선생의 자료 역시 북측자료나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몇 가지 부분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북측자료나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서는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연길, 화룡, 안도등지의 해산한 유격근거지 인민들이 이전해왔다고 개략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송덕 선생은 각 지역에서 해산된 유격근거지들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다른 내용들은 북측자료나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와 같은 내용들이다. 여기서는 처창즈로 이전해온 각 현들에서 해산된 유격구들과 처창즈에서 임무를 맡았던 지도일꾼들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기 기술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처창즈로 이전해온 각 현들의 유격구 및 인민들

 

연길현 - 사방대, 삼도만 능지영 유격근거지, 팔구, 왕우구 인민들
화룡현 - 어랑촌의 버섯골, 청수동 유격근거지 및 화룡현 인민들
안도현 - 신선동 및 안도현 각지 인민들

 

등이다.

 

또 처창즈 유격구에서 각 인민혁명정부 일꾼들에 대해서도 이송덕 선생의 자료에는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반면 각 인민혁명정부가 위치해 있던 장소에 대해서는 세 자료 모두 동일하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각 인민혁명정부를 이끌었던 일꾼들

 

당 사업 최고책임자 - 리종복
목란툰(촌) 왕우구 인민혁명정부 - 회장 박철이
서남차(쪽) 팔구인민혁명정부 - 회장 석봉세
서남차(쪽) 옹구인민혁명정부 - 회장 김원철
왕우구, 팔구, 옹구 - 당지부서기 최춘산, 리종복, 주도삼

 

등이다.

 

이송덕 선생의 자료 중 특별하게 언급된 부분은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가 백두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는 내용이다. 이를 보면 “일제의 발악적인 《위공작전》에 대처하여 백두산원시림지대와 잇대여있는 처창즈에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라고 하여 처창즈가 백두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자료는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는 백두산 동북부지역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이송덕 선생의 자료가운데 처창즈 항일유격근거지에서 인민들이 반일 · 항일투쟁을 벌이는데 있어 “제1, 제2퇀이 외선작전을 떠나게 되자 반일자위대원, 공청원, 부녀회, 소년선봉대, 아동단월들이 이곳을 보위하는 주요력량으로 되었다.”라는 구체적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송덕 선생의 이 자료는 당시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머물던 인민 모두가 반일 ·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이송덕 선생의 아래 자료는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의 내용과 동일하다. 참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인용한다.

 

“목란툰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약 6리쯤 올라가면 동남차에 옹구인민혁명정부가 있었는데 그 서쪽 등평 림지가 있는 곳에 동남차근거지에 세워진 무리수리고, 재봉소, 병원이 있었다. 무기수리소에서는 작탄을 만들고 총을 수리하였다. 병원에서는 산에서 채집한 초약을 캐여다가 약을 달여서 상병자를 치료했으며 이곳에서 수술도 하였다. 재봉소에서는 밤에 낮을 이어가며 옷을 만들고 깁거나 신발을 만들어 전선에 보내였다.”

 

인용문의 내용 역시 처창즈의 모든 인민들이 어떤 직책이나 임무를 맡건 상관없이 모두 떨쳐 일어나 항일무장투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 글이 길어져서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이송덕 선생의 자료와 화룡현당 서기인 김일환에 대한 반민생단 투쟁과정에서의 희생 그리고 다홍왜 회의와 요영구 회의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 계속해서 연재한다. 지금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항일무장투쟁사와 현 북의 현실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자세히 다룰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이 점 잊지 말기를 바란다. ☜☜☜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61118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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