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5] “중공 제3인자”로 불렸으나 변절 후 별 볼일 없던 장궈타오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01/01 [02:3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역사상 수많은 변절자들의 변절전후를 살펴보면 영향력 혹은 파괴력을 기준으로 삼을 때 4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는 변절 전에 별 볼일 없다가 변절 후에 유명해진 경우이니 본 시리즈의 1편에서 다룬 바이씬(白鑫)이 여기에 속한다. 중공의 고위지도자들을 물어먹어 죽음으로 몰아간 다음 상금을 소화하기도 전에 처단되어 굉장히 보도되었으니까.
둘째로는 변절 전이나 후에 모두 유명한 경우이니 시리즈의 2편에서 다룬 꾸순장(顾顺章)이 여기에 속한다. 4편에서 소개한 꿍추(龚楚) 역시 변절 전후 다 유명한 셈인데, 후에 명성이 더 높아졌다고 보아야겠다.  
셋째로는 제일 많은 부류로서 변절 전이나 후에 모두 이름을 크게 날리지 못한 경우이니 거개 급이 낮은 변절자들이다.
넷째로는 가장 흥미로운 현상으로서 변절 전에 굉장히 유명했으나 변절 한 뒤에는 별 볼일 없어진 사람들이 있다. 전날 명성에 힘입어 어느 정도 유명세는 누리더라도 내막을 캐어보면 실질적인 영향력이나 파괴력을 발휘하지 못한 변절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1938년 중국국민당의 특무기관 책임자가 “중공 제3인자”가 넘어왔다면서 반겼던 장궈타오(张国焘, 장국도, 1897~ 1979, 사진)가 바로 이 넷째 부류에 속한다. 중국공산당을 잘 안다는 이 사람의 변절로 중공에 대한 침투와 중공전복이 쉬울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침투도 전복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 장궈타오     © 자주시보

 

아무개가 “제*인자”라는 식 표현이 인기 끌기 딱이여서인지 자본주의사회나 자본주의정당에서 곧잘 써먹는데, 공산주의정당의 경우 첫째로는 이런 표현을 별로 쓰지 않고 둘째로는 누가 “제*인자”라고 가르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으며 외부에서 내부의 실제상황을 빗보는 경우는 더구나 많다.

 

시리즈의 3편에서 중국공산당의 총서기 직함을 가졌으나 실제로는 최고수뇌가 아니었던 샹충파(向忠发)를 소개했는데, 95년 남짓한 중국공산당 역사에는 총서기나 주석이 실질적인 제1인자가 아니었던 시기가 꽤나 긴 바, 필자의 계산법에 따른다면 근 절반을 차지한다. 덩샤오핑(邓小平)이 최고직무를 맡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중공을 좌우지한 근 20년이 바로 그런 시기이다.

 

1935년 1월에 진행된 준이(遵义)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중공의 영수로 부상했다는 게 통설인데, 엄격히 따지면 군사지휘권을 어느 정도 되찾은 셈이었고 형식상에서는 중공의 수뇌로 되지 않았다. 그 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오쩌둥의 영수지위가 확정된 뒤에야 1943년 3월에 공식적으로 중공의 주석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그 몇 해 동안 형식상에서는 장원턘(张闻天, 장문천)이라는 인물이 총서기 역할을 했었다. 준이회의와 그 후에 마오쩌둥은 순 국내파인 자신이 최고직무를 가지면 중국혁명을 실패의 변두리로 몰아간 소련유학파 교조주의자들이 반대하겠지만 같은 소련유학파인 장원턘은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간파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장궈타오가 변절한 1938년에 마오쩌둥이 형식상 최고직무를 맡지 않았고 장원턘은 최고영향력이 없었으며 소련에서 돌아온 왕밍(王明, 왕명)은 소련활동경력과 국제공산당의 후광을 업고 수령으로 자처하면서 마오쩌둥의 결정을 무시하는 등 중공이 상당히 미묘한 상태에 처했었다.  때문에 당시 누가 중공의 제1인자냐를 확정하기 어렵고 그 아래 순위는 더구나 따질 수 없다.

 

헌데 숱한 내부자료들이 공개된 지금 학자들이나 역사애호가들이  당시 수령이 누구였느냐를 놓고 벌이는 말씨름, 글씨름과 달리 당년의 적수 겸 임시동반자였던 국민당의 판단은 간단했다. 최고영수 쟝제스는 이름마저 귀에 선 장원턘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쓰지 않았고, 오랜 세월 소련에 있다가 귀국하여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서”라는 국민당의 구미에 어울리는 구호를 외치는 왕밍은 만나 본 뒤에도 별로 눈에 차하지 않았으나, 1920년대부터 이름과 얼굴을 알고 최대의 소베트구역을 만들고 국민당 권력의 심장부근에서 홍군을 거느리고 위협을 주던 마오쩌둥을 최대의 적수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국민당통치구역에서 공산당통치구역으로 찾아간 중국인들이나 에드가 스노우를 비롯한 외국기자들도 예전부터 명성이 드높았고 대화에서도 높은 식견을 보여준 마오쩌둥을 중공의 수령으로 간주했다.
 
당년 국민당이 중공 지도자 순위를 어떤 기준으로 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누구를 제2인자로 간주했는지도 필자는 보지 못했다. 단 어느 자료에서 국민당 특무두목 따이리(戴笠, 대립, 1897~ 1946, 사진)가 변절한 장궈타오를 “중공 제3인자”라면서 남들에게 소개했다는 내용을 보았는데, 나름 일리가 있다고 보인다. 장궈타오는 여러 성을 돌면서 싸운 중국노농홍군 제4방면군의 최고지휘자로서 전성기에는 약 8만 명 군대를 거느렸는바, 여러 해 동안 신문에 오르내린 명인이었으니까.

  

▲ 따이리     © 자주시보

 

안정된 시대에는 8만 명 군대가 별 거 아닐 수도 있겠다만, 1920년대 중후반 남방의 몇 개성을 차지했던 국민당이 북방의 북양군벌정권을 소멸하여 전국정권을 가지게 된 북벌전쟁이 시작될 때 국민당이 긁어모은 부대가 고작 10만 명 정도였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1930년대 중반 8만 명을 거느린 게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후에 많이 줄어들기는 했다만, 1938년 장궈타오의 부하들이 중공부대 팔로군의 1/3이상을 차지하였고 국민당이 군벌들과 싸운 경험대로는 일단 우두머리가 넘어오면 부하들이 다 따라나오게 됐으므로 장궈타오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장궈타오는 변절 후 자신이 예상했거나 국민당이 기대했던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직접 전날의 적군을 이끌고 홍군 소멸에 나섰던 꿍추와 비교하면서 장궈타오는 그렇게 얄미운 짓을 하지 않았다고 괜찮게 평했으나, 사실 장궈타오는 직접 일선에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국민당 특무기관을 위해 꾀를 내고 교재를 편찬하고 특무들을 훈련시키는 등 할 짓은 다 했다. 그러나 옌안(延安)을 비롯한 중공통치구역에 특무들을 들여보내는 작전들의 결과가 신통치 못했고 옛 부하들을 국민당 쪽으로 끌어내오는 행동들도 실패로 끝났을 따름이다.

 

장궈타오 관련 자료들이 하도 많고 엇갈리는 주장들도 많기에 이 인물을 제대로 다루려면 책 몇 권으로도 부족하다. 여기서는 될수록 간추려서 소개해야겠다.

 

장궈타오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한 12명 대표 중의 하나로서 중국공산당 창시자들에 끼인다. 자질구레한 비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궈타오가 베이징에서 대학생일 때 마오쩌둥은 베이징대학 도서관의 사서였다, 장궈타오가 중공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사회자로 되었을 때 마오쩌둥은 발언들을 기록하는 서기였을 따름이다는 식으로 장을 올리춘다. 또한 근년에는 마오쩌둥을 싫어하고 지어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마오쩌둥에 대한 장의 판단이 옳았다느니 전날 중공이 장을 비판한 주장들이 엉터리라느니 하면서 장을 미화하려 든다. 허나 아무리 미화하려고 애쓰더라도 장궈타오의 변절은 부인할 수 없으니 장을 반마오쩌둥의 무기로 삼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1897년 쟝시성(江西省) 핑샹현(萍乡县, 지금은 핑샹시 쌍리현萍乡市上栗县)에서 태어난 장궈타오는 1916년에 베이징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1919년에 벌어진 54운동에서 활약하였고, 1920년 10월 베이징의 공산당초기조직창건에 가담, 1921년 7월에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했다. 규모가 작았던 초기 중공에서 중앙국 3인단 성원, 중앙조직부장 등 직을 맡으면서 지위가 상당히 높았는데 처사는 별로 인기가 없어 일찍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고 1927년 8월 1일에 진행된 난창기의를 반대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소련에도 가보았으나 유학파는 아니었고 왕밍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배 100% 볼세비크그룹의 배척을 받는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소련에서 밀려나서 귀국했는데 오랜 경력과 지위가 인정되어 1931년에 각 소베트구역을 강화한다는 중공의 새 방침에 따라 어위완소베트구역(鄂豫皖苏区)으로 갔다. 당시 그와 천창하오(陈昌浩, 진창호)라는 간부를 소베트구역부근까지 호송해간 사람이 바로 2편에서 소개했던 꾸순장이다.

 

근거지로 불리던 소베트구역에 들어간 장궈타오는 곧 실질적 영도자로 되었고 그해 11월에 중화소베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中华苏维埃共和国临时中央政府)가 성립될 때 성립현장에 없었으나 중앙집행위원회 부주석으로 선거되었는데, 주석은 마오쩌둥이었고 그때부터 마오주석이라는 호칭이 굳어졌다. 장궈타오는 지방소베트정부의 주석으로서 근거지와 군대에서 장주석으로 불리면서 나름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다. 그가 권력을 잡아서부터 내놓기까지 5년 남짓한 동안 뒷날 제4방면군으로 불린 홍군부대가 최대 8만까지 강화되는데 기여도 했으나 근거지들을 연거푸 포기하고 피비린 내부숙청을 이어간 등 나쁜 짓을 엄청 많이 했다. 본인이 인텔리면서도 인텔리를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스파이로 의심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4방면군에서는 시력 나쁜 사람이 감히 안경을 쓰지 못하고, 글을 아는 사람이 무식쟁이로 둔갑하는 웃지 못할 희비극들이 일어났다. 어위완소베트구역을 포기하고 스촨성(四川省)과 싼시성(陕西省)인접지대로 가서 촨싼근거지(川陕根据地)를 세웠던 장궈타오와 4방면군은 대장정을 진행하던 중앙홍군(혹은 제1방면군으로 불림)에 배합하기 위해 장정을 시작, 6월에 마오궁(懋功)에서 만난 다음 야심이 악성팽창했다.

 

당시 8만대군이란 절정기에 이르렀던 4방면군은 근거지를 떠난지 오래지 않아 옷차림이나 무기들이 상당히 좋았다. 반대로 1935년 10월에 쟝시성의 근거지를 떠날 때 8만 여 명이었던 중앙홍군은 8개월 동안 행군과 전투를 거듭하면서 대량 감원되었고 옷차림도 무기도 볼품없었다. 군대들의 만남을 전문술어로 “후이쓰(会师, 회사)”라고 부르는데, 회사 전에 4방면군에서는 이제 강대한 중앙홍군과 만나게 된다, 라오따거(老大哥, 큰 형님)부대가 아주 대단하다는 식으로 내부선전을 진행했다. 헌데 현실이 상상과 다르니 보통 관병들이 수군거렸을 뿐아니라 장궈타오도 생각이 달라졌다.

 

두 부대의 지도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장궈타오가 저우언라이에게 당신네 부대인원수가 얼마냐고 물었다. 어찌 보면 복장 따위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수자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꼽을 수 있겠다만, 예전부터 장궈타오와 잘 알고 난창기의 문제 때문에 쟁론도 벌렸던 저우언라이는 물음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간파하고 3만 쯤 된다고 응대했다. 장궈타오 또한 간단한 인물이 아니라 길옆에 쪽걸상을 놓고 앉아서 지나가는 중앙홍군들을 세여보더니 낯색이 변해 2만도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장궈타오는 곧 자신과 부하들에게 벼슬을 달라는 요구를 내놓았다. 군대수자 비례에 걸맞게라는 황당한 이유도 나왔다. 중국식 정치에 밝지 못한 장원턘은 자기의 직무를 양보하겠다고 나섰으나 마오쩌둥이 즉각 반대했다. 당의 총책임자 자리를 지금 장궈타오가 눈에 차하지도 않거니와 만약 그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일이 복잡해진다고. 결국 저우언라이가 자신의 홍군 총정치위원직무를 장궈타오에게 넘겨주어 장궈타오의 야심이 일단 만족되었고, 그의 핵심부하들도 이러저런 직무들을 갖게 되었다.

 

두 부대의 강화와 발전을 위해 일부 부대들을 혼합편성하는 등 한동한 그럭저럭 괜찮게 보냈으나, 차후 향방을 놓고 고위층에서 모순이 생겼다. 중공중앙 성원들이 토론 끝에 북상항일이라는 결정을 통과했는데 장궈타오는 북상의 불리한 점들과 위험한 점들을 열거하면서 남하를 고집한 것이다. 심지어 4방면군의 지휘자들인 천창하오와 쉬썅첀(徐向前, 서향전)에게 비밀전보를 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억류를 불사하라고 지시했다. 이 비밀전보를 예쨴잉(叶剑英, 엽검영)이란 사람이 먼저 보게 되어 마오쩌둥에게 급히 보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은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가만히 길을 떠났다. 비밀전보가 존재하느냐, 구체적인 내용이 뭐냐를 놓고 오랜 세월 쟁론들이 많고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당시 전보를 맡았던 사람들의 회억 등을 참고해보면 밀령은 확실히 존재한다. 일생에 수많은 위험을 겪었던 마오쩌둥이 장궈타오의 위협을 겪은 1935년 9월 9일을 내 일생에 제일 어두운 날이었다고 평한데는 충분한 원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1방면군의 부대들이 가만히 출발하고 4방면군 쪽에 경계인원들까지 배치했다는 정보가 4방면군 지휘부에 올라간 다음 무력으로 저지하느냐 마느냐는 물음이 나왔는데 총지휘 쉬샹첀이 “어디에 홍군이 홍군을 치는 도리가 있느냐”면서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결국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은 펑더화이(彭德怀, 팽덕회), 린뱌오(林彪, 임표)네가 거느린 1만 명 미만의 핵심부대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다가 그 다음 달에 싼시성 북부에 근거지가 존재함을 알게 되어 싼베이(陕北)로 목적지를 삼아 대장정을 끝냈다.

 

경험자들의 회억에 의하면 9월의 그 밤에 가만히 빠져나올 때 누군가 마오쩌둥에게 4방면군이 강제로 저지하면 어찌겠는가고 물으니, 마오쩌둥은 그러면 그들을 따라서 남하할 수밖에 없다, 같이 다니면서 설득해야 된다, 그들도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튿날 낮에 4방면군의 리터(李特, 리특)라는 간부가 일부 인원들을 이끌고 쫓아와서 북상은 도주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 남으로 가자고 선동하여 일부 4방면군 성원들은 되돌아갈 때에도 마오쩌둥운 정 가겠으면 가라, 그러나 남하는 죽을 길이다, 우리는 1년쯤 지나면 다시 만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국 그 예언이 맞아떨어져 상당수 4방면군 성원들이 1936년 말에 마오쩌둥과 다시 만났다.

 

중국공산당은 당이 총을 지휘해야지 총이 당을 지휘해서는 안 된다고 꾸준히 강조하는데, 1935년 9월 9일 밤에 4방면군이 무력을 사용해 마오쩌둥을 포함한 전원이 남하했더라면 총이 당을 지휘한 유일한 사례로 될 뻔 했다.

 

장궈타오와 그의 추종자들이 반대한 이유도 나름대로 충분하다. 살기 좋다고 “턘푸즈궈(天府之国, 천부지국)”로 불리던 스촨성과 달리 그 북방의 깐수성(甘肃省)이나 산시성은 가난하기 그지없는 고장이라 먹을 알이 없었으니까. 허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사람들은 일본의 야심이 팽창되는 정세를 파악하였기에 지난 해부터 내걸던 “북상항일”이라는 기치를 계속 들고 북방으로 가서 항일일선에 접근해야만 홍군이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궈타오네는 남쪽의 살기 좋은 고장에 가는 게 발전에 이롭다면서 “마오, 저우, 장(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원턘) 도망주의(逃跑主义)”를 반대한다고 선전했다. 급기야 10월 5일 줘우댜오(卓木碉)라는 곳에서 스스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만들고 스스로 주석이 되어 마오쩌둥 등의 당적을 취소하는 등 기괴한 행위들을 했다. 중공 역사에서 이를 이른바 “제2중앙(第二中央)”이라고 부른다. 비합법적인 이 중앙위원회에 어떤 사람들이 포함되었느냐는 지금까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뒷날 일을 잘한 사람들의 명성에 누가 되는 걸 피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보인다. 중공 역사는 고위층에서 여러 가지 우려가 많아 정보들을 충분히 공개하지 않기에 역사애호자들은 물론 학자들도 헷갈리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당년에 4방면군과 혼합편성된 1방면군 부대들이 남하하면서 내건 구호가 뒷날 보면 꽤나 우습다. “따따오청두츠따미(打到成都吃大米)”인데 스촨성의 성소재지인 청두시까지 쳐들어가서 쌀밥을 먹자는 뜻이다. 뒷날 국가주석이 된 양쌍쿤(杨尚昆, 양상곤)의 부인으로서 1방면군의 유명한 문예활동가였던 리버자오(李伯钊, 이백소)가 노래까지 만들어 보급했단다. 장병들이 공산혁명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느냐 마느냐는 둘째 치고 글쎄 혁명을 하겠다고 나선 혁명군대가 고작 쌀밥을 먹자는 걸 목표로 내건다는 게 얼마나 격에 떨어지는가!

 

혼합편성 당시 4방면군 쪽에 가있던 홍군 총사령 주더(朱德, 주덕)과 총참모장 류버청(刘伯承, 유백승)은 부득이 같이 남하하면서 활동했는데, 그들을 눈에 든 가시로 여긴 장궈타오는 여러 모로 못살게 굴고 회의에서 모욕까지 주었으나, 주더는 마오쩌둥과 관계를 끊고 비판하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주마오(朱毛, 주더와 마오쩌둥)는 전국이 다 알고 세계가 안다. 숱한 사람들이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주가 어떻게 마오를 반대하겠는가!” 뒷날 마오쩌둥이 주더를 칭송하여 “도량이 바다처럼 넓고 의지는 강철처럼 억세다(度量大如海,意志坚如钢)”이라는 시구를 썼는데 주더의 이 두 가지 특징이 장궈타오의 협박을 받을 때 가장 두드러졌다.

 

장미빛 환상으로 가득찼던 남하는 스촨성 군벌들의 필사적인 항거에 부딪쳐 좌절에 좌절을 이어갔고 홍군부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 만 명이 줄어들었다. 티베트족들이 사는 시골까지 밀려가 궁지에 빠졌던 장궈타오는 1936년 6월 6일에 부득이 “중앙”을 취소했고, 7월 2일 제2방면군과 회사한 뒤 함께 북상하여 1936년 10월 22일 제1방면군과 만나 3대 주력홍군의 대회사가 이뤄졌다. 

 

▲ 옌안에서의 마오쩌둥과 장궈타오     © 자주시보, 중국시민

 

중공의 새로운 중심지인 옌안으로 간 장궈타오는 싼간닝(陕甘宁) 변구(边区)의 부주석으로 주석직무를 대행했는데, 전날의 착오가 엄중하여 1937년 3월 정치국확대회의를 비롯한 회의들에서 비판을 받았고 4방면군 간부들에게서 장궈타오의 영향을 없애는 작업이 지속되었다. 이래저래 불만이 많던 장궈타오는 1938년 4월 5일 민족의 시조로 불리는 황제의 능(黄帝陵)에 제사를 지내는 기회를 빌어 변구를 벗어났다. 당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에 국민당도 공산당도 다 합쳐서 옌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황제능에서 제사를 치렀는데 중공과 변구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게 된 장궈타오가 제사 뒤에 돌아가지 않고 국민당 통치구역으로 뺑소니쳤던 것이다. 당시 국민당정권이 물러가 있던 우한(武汉, 무한)으로 간 장궈타오는 저우언라이와 다른 간부들의 권고를 거듭 물리쳤다. 정식 변절하기 전에 저우언라이와 함께 쟝제스를 만난 자리에서 “제가 바깥에서 여러 해 동안 얼떨떨했습니다(兄弟在外多年糊涂)”라고 말하자 저우언라이가 “당신은 떨떨했더라도 나는 얼떨떨한 적 없었다(你糊涂我可不糊涂)”고 반박했는데, 그런 대화를 보더라도 장궈타오의 변질을 알 수 있다.

 

장궈타오의 변절은 가장 복잡하게 이뤄졌는바, 우선 싼시성의 수부인 시안(西安, 서안)으로 갔다가 4월 11일 우한에 도착했을 때 중공의 유명한 정보책임자 리커눙(李克农)에 의해 통제되었고, 그 뒤 거듭 탈출을 시도한 끝에 국민당 군통(军统, 군사통계국의 줄임말로서 국민당 3대 특무조직의 하나이다. 우리글 역사자료들에서는 “남의사(蓝衣社)”라는 이름으로 나오곤 한다)특무들의 도움을 받아 여관에 온 차를 타고 달아났다. 당시 우한에서 조선의용대 성원으로 활동했던 조선족 작가 김학철은 만년에 자기가 동료와 함께 어느 부두가에서 저우언라이와 다른 사람을 보았고, 저우언라이가 누군가와 마주쳐 한훤수작을 하는 동안에 저우의 동행자가 슬그머니 배에 올라가서 달아나니 뒤늦게 발견한 저우가 놀라더라, 뒷날 저우가 의용대에 와서 연설하다가 장궈타오 도주경과를 말하기에 자기와 동료는 그때 본 괴상한 사람이 유명한 장궈타오인 걸 알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회상기와 장편소설 《격정시대》에 썼고 죽을 때까지 그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장궈타오의 변절과정에는 장이 가만히 배에 올라 도망쳐 변절에 성공했다는 내용이 없다. 기억력이 비상하다고 알려진 김학철이지만 소설가의 주장은 소설 정도로 치부해야겠다.

 

장궈타오가 국민당에 붙은 게 확실해지자 중국공산당은 4월 18일에 그의 당적을 취소해버렸다. 얼마 후 장궈타오는 군통조직에 가입하여 반공특무활동을 벌였는데, 군통 두목 따이리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이다. 장궈타오로서는 장담과 달리 그를 따라 변절한 사람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좌절이었다. 황제능 제사에 참가하기 전부터 장궈타오의 신변에서 경위와 근무를 맡았던 젊은 경위원(당시는 ‘터우위안特务员특무원’이라고 불렀다)의 이름은 장하이(张海, 장해, 1915~ 2006)인데 장궈타오가 그럴듯한 이유들을 내걸면서 시안과 우한으로 이동할 때까지는 계속 따라다녔다. 허나 장이 국민당에게 넘어갈 때에는 따라가지 않았다. 장궈타오가 곡절 끝에 탈주한 뒤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 행장을 보내달라면서 장하이도 보내달라고 요구하기에, 저우언라이가 장궈타오의 의견을 물을 때, 장하이는 그가 혁명하지 않더라도 나는 혁명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여 저우언라이는 장궈타오가 변절, 탈주하면서 특무원 하나도 데려가지 못했다면서 장하이를 칭찬했고, 마오쩌둥도 장하이의 당성과 견정함을 찬양했다. 뒷날 장하이는 후베이성(湖北省) 군구의 부사령원자리에서 은퇴했다. 

 

홍군에서 군장을 하면서 장궈타오를 추종하던 허워이(何畏, 하외)라는 인물이 장궈타오 변절 후 국민당에 변절했다가 1949년 해방전야에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장궈타오의 변절로 추종자가 하나 생긴 셈이다. 헌데 이 사람이 변절한 게 아니라 혁명대오를 이탈했을 따름이고 해방 후에까지 살아있었다는 주장도 나름 근거가 상당해 사실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엄격히 따지면 장궈타오를 따라간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그의 아내 양즈례(杨子烈, 양자렬, 1902~ 1994)가 6월에 옌안을 떠나 남편을 찾아갔으니까. 장궈타오는 탈주와 변절을 임신한 아내에게도 속였는데, 사실을 알게 된 양즈례는 남편을 데려오겠다, 집에 돌아가 아이를 낳겠다 등 구실을 대면서 옌안을 떠나려고 애썼다. 마오쩌둥이 막자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라, 아무 때나 돌아와도 좋다고 보증했으며, 검사소들에서도 양즈례를 놔주었던 것이다. 장궈타오가 내부적수들을 비밀숙청하던 수단과 비기면 마오쩌둥의 너그러움은 쉬이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양즈례의 회억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에게 말 한 마디를 전하라고 부탁했다 한다.
“우리는 여러 해 생사를 같이한 사이로서 서로 여지를 좀 남겨두자.(我们多年生死之交,彼此都要留点余地。)”
사실 우한에서 설득할 때 저우언라이가 당조직을 대표하여 장궈타오에게 내놓은 3가지 요구도 굉장히 너그러웠다.

 

첫째, 잘못을 시정하고 당에 돌아와 사업한다.
둘째, 당조직에 청가를 신청하여 허락받고 한동안 휴식한다.
셋째, 주동적으로 탈당성명을 발표한 뒤 당에서 당적취소를 선포한다.

 

그에 대해 우물쭈물하면서 고향에 돌아가겠다느니 전날 자기에 대한 비판이 틀렸다느니 궤변을 부리던 장궈타오가 국민당의 손에 들어가서 결코 편하게 보내지 못했다. 쟝제스는 장궈타오의 변절이 “옌안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对延安的致命打击)”이라고 여기면서 따이리에게 맞게 “잘 운용하라(妥善运用)”고 일렀다. 그를 공산당 정보의 보물창고 쯤으로 간주한 특무들은 초기에 비밀지점에서 정보를 짜내기 위한 고압작전을 벌렸으니 장궈타오는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시 변절할 길이 없는 장궈타오로서는 어딘가에 붙어살 수밖에 없어서 국민당을 따라다녔는데, 한때는 군통국이 국민당정권의 임시수도 충칭시(重庆市, 중경시)에서 조직한 특무훈련반에 가서 사상이론적으로 반공하는 강의도 했으나, 무력반공을 믿는 특무들에게 잘 먹혀들지 않았다. 그의 그럴듯한 제의들이 실효를 보지 못한 뒤에는 특무두목들도 그를 우대해줄 리 없었고 종종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살길을 찾아보려고 국민당 조직부장 주쟈화(朱家骅, 주가화)가 베이징대학 졸업생이라는 학연을 이용해 국민당 중앙조직부 산하의 반공설계위원회 위원 겸 주임비서라는 직무를 얻긴 했으나 사무상 하나를 갖고 가끔 회의에 참석할 뿐이라 얼마 후 사직하고 말았다.  뒷날 주쟈화의 추천으로 제2, 3, 4기 국민참정회의 참정원으로 되었는데, 국민당정부의 자문기구로서의 참정회는 워낙 실권이 없는 조직으로서 국민당 당원들이 다수를 차지고 다른 당파인사들이 적으며 무소속인사들은 더구나 소수인데다가 장궈타오는 무소속이자 공산당의 변절자출신이라 말이 설리 없었다.

 

 별 재미 없이 살던 장궈타오는 광복 후인 1946년에 선후구제총서(善后救济总署)의 쟝시성 분서 서장 벼슬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쟝시성 정부주석이 장궈타오가 홍군시절에 참패시켰던 스촨군벌 왕링지(王陵基, 왕능기)라 여러 모로 트집을 잡히어 취직 2개월 미만에 밀려나고 말았다.

 

상하이로 옮겨간 장궈타오는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애썼으니 1948년에 사상반공을 표방하는 주간잡지 《촹찐(创进, 창진)》을 발간한 게 비교적 알려진 바이다. 어느 전문가에 의하면 장궈타오가 그즈음 주식투기에 손을 댔다 한다.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그 시절 장궈타오는 국민당이 몇 해 버틸거라는 판단하에 주식투기에 뛰어들었는데, 예상 밖으로 국민당이 신속히 참패하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경과가 어떻든지 장궈타오는 쟝제스네가 타이완으로 도망하기 훨씬 전인 1948년 11월에 가족들을 데리고 타이완으로 가서 타이베이시에서 세방을 얻고 살았다.

 

쟝제스와 국민당 패잔병들이 1949년부터 타이완으로 대거 철수한 후 세방이 “동남군정장관공서(东南军政长官公署)”의 고관에게 점거되었고 장궈타오의 벼슬과 금전 얻기 활동도 실패로 끝나 1949년 겨울에 그는 홍콩으로 이사했다. 가명을 쓰면서 이른바 좌파나 우파와의 접촉을 거절하고 공산당도 국민당도 반대하는 “제3세력” 활동에 참여하여 “민주전투동맹(民主战斗同盟)” 창립자와 지도자 중의 하나로 되었고 동맹 건립과 동시에 “쭝궈즈성(中国之声, 중국의 소리)”잡지를 발간하여 사장을 맡았다. 
    
중국현대사에는 이것도 저것도 싫다고 이른바 제3의 길을 간다면서 제3세력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과 당파, 조직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허나 큰 세력을 형성한 적 없고 결국에는 공산당이나 국민당에 흡수되지 않으면 스스로 사라져버렸다. 1950년대 홍콩과 해외에서 별도로 활동한 제3의 길, 제3세력들도 그런 운명을 면하지 못했다. 유달리 우스운 건 장궈타오가 전투동맹의 선전부장이자 잡지의 주필인 리워이천(李微尘, 이미진)과 사이가 나빠 1952년에 사장을 사직한 것이다. 조그만 동맹과 조그만 잡지사의 단결도 이루지 못하는 자들이 정국을 뒤집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6. 25전쟁이 발발한 후 국제시장에서 황금가격이 치솟으니 장궈타오는 재산의 전부인 5천 달러를 저당금으로 삼고 홍콩 금융시장에서 황금장사에 손을 댔는데 처음엔 꽤나 벌었으나 뒷날 황금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본전을 몽땅 잃어버렸다. 일가가 맏아들 장하이워이(张海威, 장해위)의 교원 임금에 매달려 간신히 살아갔고 양즈례는 생계를 유지하려고 뛰어다니다가 넘어져서 엉덩이뼈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1966년 경부터 장궈타오는 미국 켄사스대학의 초청에 의해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는데 몇 해 품을 들여 《나의 회억(我的回忆)》라는 책을 내놓았으니 중국어로 백 만 자 정도 된다. 중공 초기지도자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손수 회고록을 쓴 사람으로서 그 주장이 옳던 그르던 연구자들에게는 꽤나 중요한 자료로 된다. 중문판은 1974년 홍콩에서 출판된 외에 중국 대륙에서도 1980년, 1998년 2004년에 3번에 걸쳐 3가지 판본을 내놓았다. 켄사스대학에서는 장궈타오에게 매달 2천 홍콩달러를 생활비로 제공했고 책이 나온 다음 인세를 주었다 한다. 한편 양즈례도 《지나간 일 연기 같어라(往事如烟)》회고록을 한 권 써서 뒷날 《장궈타오부인회억록(张国焘夫人回忆录)》라고 제목을 바꾸었는데, 장씨 부부는 10여 년 동안 책 덕에 살아갔다 한다.     

 

 문화대혁명이 홍콩에 영향을 끼치니 겁을 먹은 장궈타오는 1968년 캐나다로 가버렸다. 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76년에 풍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장궈타오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시리즈 2편에서 등장했던 차이멍쟨(蔡孟坚)이다. 장궈타오와 같은 쟝시성 핑샹 사람인데 장궈타오의 변절 초기부터 그와 교제를 했던 차이멍쟨은 1970년대 후반 장궈타오가 북미에서 어렵사리 지내는 걸 알게 되니 타이완의 통치자 쟝징궈(蒋经国, 장경국)에게 보고해 도와줄 걸 청했다 한다. 1920년 말에 소련에서 유학하던 쟝징궈가 아버지 쟝제스의 혁명배반을 질책했지만 왕밍을 비롯한 교조주의자들에게 트로츠키분자로 찍히어 시베리아에 고역을 치르러 가게 되었을 때, 당시 모스크바에서 중공의 대표로 있던 장궈타오가 도와주어 레닌그라드의 군정학원에 옮겨갔다가 어느 공장에 가서 노동을 하게 됐다 한다. 하여 쟝징궈가 보은차원에서 장궈타오에게 보조금을 주었다는 것이다. 차이멍쟨이 타이완에 전보를 쳤더니 쟝징궈가 1만 달러 지표를 장궈타오에게 보내주었다.   

 

▲ 만년의 장궈타오     © 자주시보

 

그래도 문제가 다 풀리지는 않은 모양, 장궈타오는 캐나다의 노인복지정책에 따라 정부가 운영하는 무료노인병원에 들어갔고 양즈례는 정부양로원에 들어갔다. 병자가 많고 간호원과 의사가 적은 무료병원에서는 하루 세 끼를 제공하는 외에 엔간해서는 병자들이 초인종을 눌러도 응대가 없었다 한다. 다른 외국노인과 함께 6, 7제곱미터 쯤 되는 병실에 든 장궈타오는 종일 좁은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겨울에 병원의 스팀이 꺼질 때가 있어 추워 덜덜 떨다고 토하곤 했다 한다. 1979년 12월 초 토론토에 강추위가 몰려와 큰 눈이 내렸는데, 3일에 장궈타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추론해보면 2일 밤 몸을 뒤집다가 이불과 담요가 땅에 떨어졌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다나니 3일 세벽에 얼어죽었다는 것이다. 장궈타오의 주검은 5일 토론토의 공공묘지에 묻혔는데 차이멍쟨이 타이완에 사망소식을 알렸더니 3, 500달러 송금되었단다. 결국 장궈타오는 국민당의 돈으로 묻힌 셈이다.
  
장궈타오 사후에 양즈례는 비분에 차서 우리가 40년 반공했으나 일생동안 조금도 복을 누리지 못했으니 하늘이 정말 공평하지 않다(我们……反共四十年,一生未享到半点福, 天道真不平啊)고 아우성쳤다. 양즈례도 1920년대 초반에 입당했던 중공의 노당원이었는데 부부가 10여년 공산당으로 있다가 40여 년 반공했는데 죽을 때까지 변절자 딱지를 떼지 못했고 죽은 뒤에도 변절자로 불리니 역사를 무정하다고 할까 공정하다고 할까?

 

양즈례가 회억록을 쓸 때나 불평을 부릴 때에는 장궈타오의 손에서 죽어간 혁명가들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공산주의이념을 떠나서 동양전통의 인과응보설로 보더라도 내부숙청으로 숱한 사람들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이 비참하게 살고 비참하게 죽는 거야말로 당연하지 않겠는가.

 


 또한 양즈례는 반공을 할 때에도 공산당의 덕을 본 일을 의도적으로 망각한 모양이다. 1950년대에 장궈타오가 홍콩에게 어렵사리 지내면서 아들의 대학공부를 걱정해 대륙에 메시지를 보냈더니 둘째 아들 장샹추(张湘楚, 장상초)가 총리 저우언라이의 특별허가를 받고  광저우시(广州市, 광주시)에 있는 중산의학원(中山医学院)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중공중앙은 장궈타오에게 잘못을 시인하면 돌아와 사업하는 걸 허락하겠다고 전했으나, 장궈타오는 후배들에게 비판을 받기 싫다는 따위 이유를 내걸면서 두 번이나 기회를 놓쳤다. 물론 돌아왔더라면 모든 역사문제들이 불거진 문화대혁명에서 편안할 리 없겠다만, 이국타향에서 얼어죽는 결말보다야 낫지 않았을까?

 

장궈타오 부부는 1924년 5월 11일에 베이징에서 군벌정부에게 체포되어 여러 달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왔는데, 회고록에서는 아무 것도 실토하지 않았노라고 주장했으나, 1949년 정권을 잡은 중국공산당은 베이징의 낡은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장궈타오가 그때 변절한 문자자료들을 확보했다. 당시 장궈타오는 베이징의 공산당원 명단을 전부 털어놓았고 철도계통에 있는 공산당원 명단도 불었던 것이다. 그는 그 경력을 숨기고 당에서 계속 고위직을 맡았는데, 그런 변절자가 1931년부터 5년 가량 변절자와 스파이 혐의로 숱한 혁명가들을 죽인 거야말로 아이러니다. 또한 그런 자료를 확보한 상황에서도 중공이 장궈타오에게 잘못만 시인하면 돌아와 일할 수 있다고 허락한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제 와서 마오쩌둥을 비하하기 위해 장궈타오를 미화하는 인간들이 있고, 역사를 존중하고 보존하는 차원에서 장궈타오와 관계되는 집을 보존하거나 홍군기념시설에 장궈타오 조각상도 만들어졌지만 변절자가 영웅으로 둔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장궈타오의 자손들이 조용히 살고 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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