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6] 돈 때문에 혁명을 포기한 저우쿤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08/06 [01: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7년초에 변절의 추학 5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1038)에서 거물급 장궈타오의 곡절 많은 인생을 소개하고 평가한 다음, 어느덧 일곱 달이 지나갔다. 다른 일, 다른 소재들에 밀려서 변절문제를 뒤로 미뤄놓았다가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0돌을 기념하는 8월 1일 덕분에 다시 떠올렸다.

 

전국, 전군이 건군 90돌을 기념하는 열기 속에서 혁명역사상 유명한 아무개, 아무개가 건국 후까지 살았더라면 어떤 군사칭호(军衔, 계급)를 받고 어떤 지위를 가졌겠느냐는 해묵은 논쟁이 다시 벌어졌고, 그로 하여 필자는 저우쿤(周昆, 주곤)이라는 인물을 상기했다.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군대가 겪은 대규모전쟁으로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토지혁명전쟁), 항일전쟁, 제3차국내혁명전쟁(해방전쟁), 항미원조(6. 25전쟁의 일부) 등 4차례를 꼽는다. 20여 년 싸우면서 4차례 대전을 다 겪고 대전들에서 모두 활약한 사람들이 있나 하면, 일부만 겪은 사람들도 있다. 희생된 경우가 많은가 하면 앞의 전쟁에서는 굉장히 유명했으나 새로운 전쟁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된 사람들도 있고, 새로운 변화와 유혹을 이기지 못해 물러나거나 변절한 사람들도 있다. 토지혁명전쟁에서 활약했던 저우쿤은 항일전쟁의 일부만 겪은 사람으로서 마지막 부류에 속한다.

 

 

중국공농홍군의 비장한 역사

 

1927년 8월 1일 일어난 난창기의(南昌起义, 남창봉기)는 중국공산당이 처음 군대를 지휘하여 반동파를 반대하는 첫 총을 쏘았다는 평가를 받는데, 당시 국민당의 탈을 벗지 못하고 국민당이 쓰던 “국민혁명군”의 명의를 이어 썼다. 남창봉기와 그 뒤의 100여 차 봉기들에서 중국공산당이 내건 군대의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후에 중국공농홍군(中国工农红军, 중국노농홍군)이라는 이름이 제일 많이 쓰였고 정규부대들은 중앙홍군(혹은 제1방면군), 제2방면군, 제4방면군, 제**군단, 제*군, 제*사 등으로 불렸으며 유격대들도 “홍군 **(지명을 따는 경우가 많았음) 유격대”식으로 불리곤 했다.

 

1927년부터 1937년(논자에 따라 1936년까지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다)에 이르는 시기를 줄잡아 십년으로 계산하는데, 홍군의 10년 역사에서 수많은 전투들이 벌어졌다. 총이 모자라서 상당수가 창과 칼을 지녀야 했던 보잘 것 없는 실력으로 시작하여, 중앙정권을 차지한 국민당부대 혹은 지방군벌들과 싸워야 했으니 그 어려움은 이루다 형언하기 어려웠다. 또한 군사학교의 지식이나 외국의 군사규정에 매이어 공연한 손실을 입기도 하고 군사경험이 전혀 없어서 황당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국민당이 쟝시성(江西省, 강서성)의 붉은 근거지와 중앙소베트 구역을 없애려고 5차례 대규모진공을 했는데 역사상 5차 포위토벌(围剿)이라 부르고, 반격전을 “판웨이쟈오(反围剿, 반포위토벌)”라고 한다. 1차부터 3차까지는 마오쩌둥(모택동)이 지휘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두면서 소베트구역들을 확대했고, 4차는 마오쩌둥이 밀려났으나 저우언라이(주은래)와 주더(주덕)가 마오쩌둥의 전법을 따랐기에 이겼는데, 제5차 반포위토벌에서는 교조주의자들이 외국고문의 말을 따랐기에 참패했다. 당시 중공이 중화소베트공화국을 성립했더니, 교조주의자들은 예전처럼 먼저 물러났다가 기회를 노려서 적군을 섬멸하는 마오쩌둥 방식이 낡았다고 비웃었다. 그들은 “국가 대 국가 전쟁”을 부르짖고 “적을 국문의 밖에서 막아내자(御敌于国门之外)”는 구호를 내걸었으며 진지 대 진지, 보루 대 보루라는 전법을 고집했다. 1년가량 싸웠으나 근거지가 갈수록 좁아져서 중앙홍군은 1934년 10월에 대장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8만으로 출발한 대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포위환을 뚫는 샹쟝(湘江, 상강)혈전을 거쳐 3만으로 급감했고, 이렇게 나가서는 안 되겠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이듬해 초 준이회의(遵义会议, 준의회의)에서 격렬한 쟁론 끝에 마오쩌둥이 군사지휘의 일선에 다시 나오게 되었으며, 이는 중국혁명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마오쩌둥은 대군의 포위 속에서 대장정을 성공시키면서 전당적인 권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준이회의에서 군사문제가 주요쟁점이었는데, 교조주의자들은 전략전술의 오류를 시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위토벌에 달려든 적군이 50만인데 비해 아군은 5만으로 시작했기에 질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상식적으로는 어느 나라 군대든지 1대 10의 비례로 싸워서 졌다면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홍군 장령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마오쩌둥이 지휘할 때에는 2만 대 20만, 3만 대 30만으로도 대승을 거듭했다. 영활한 전략전술을 썼기 때문이다. 제5차 반포위토벌의 실패는 경직된 전략전술 탓이다....

 

돌이켜보면 홍군의 자그마한 성장들은 모두 피와 땀으로 바꿔왔고, 크고 작은 손실들은 생명들의 대가를 치렀다. 홍군시대에는 교묘한 전투들도 많았지만, 무모한 혈전들도 많았으니 그 시기를 가리켜 “비장하다”고 평한 학자가 있다. 군단장, 군장, 사장들이 희생된 수자가 너무나도 많으니 홍군시기 혁명사나 그 시기를 다룬 문예작품들을 보고 듣노라면 가슴 아플 때가 많다.

 

참혹성은 홍군의 전성기에 30만 가량 되었으나 대장정을 마치고 1937년에 산베이(陕北, 섬북, 산시성陕西省의 북부)에 모인 사람들이 3만 정도, 남방 14개 성에 남은 유격대들을 다 합쳐서 1만 명을 좀 웃돌았다는 점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팔로군에서 요직을 맡았던 저우쿤

 

1936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시안사변(西安事变, 서안사변)을 계기로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이 정식으로 합작을 목적으로 하는 담판과 협상을 하다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일으킨 루거우챠오사변(卢沟桥事变, 노구교사변)으로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터지면서 국공합작이 급격히 진척됐다. 북방에 모인 3만 명 정도의 홍군은 주력이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고, 일부가 현지에 남았으며 남방의 유격대들은 신사군(新四军)으로 개편되었다.

 

8로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당정부가 제18집단군으로 이름을 바꿔줬는데, 그 새 편제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드물어 당년의 중국군인들도 중국백성들도 일본군들도 괴뢰군들도 지금 사람들도 “빠루(八路, 팔로)”라고 부르는데 습관되었다. 항일전쟁시기부터 “라오빠루(老八路, 자격이 오랜 팔로군)”은 굉장한 경력을 가진 유능한 인물의 대명사로 되었다.

 

3만으로 시작한 팔로군은 초기에 3개 사(사단)로 이뤄졌다. 115사는 제1방면군을 위주로, 120사는 제2방면군을 위주로, 129사는 제4방면군을 위주로 편성되었다. 군대 규모가 줄어들다나니 홍군 간부들은 보편적으로 급이 낮아졌다. 3개 사의 사장(师长)을 보면 115사 사장은 중앙홍군 제1군단장이었던 린뱌오(林彪, 임표), 120사 사장은 제2방면군 총지휘였던 허룽(贺龙, 하룡), 129사 사장은 홍군 총참모장이었던 류버청(刘伯承, 유백승)이고, 홍군시기의 군단장, 군장들이 여장(旅长, 여단장), 사장들이 퇀장(团长, 연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어떤 사람은 3급이나 낮아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력 중의 주력이고 마오쩌둥의 직계라고 꼽을 수 있는 115사의 참모장으로 당년 35세의 저우쿤이라는 인물이 임명되었으니 그 지위와 능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다. 저우쿤이 그때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23명 위원 중의 하나였다는 것도 그의 지위를 말해준다.

 

▲ 115사 참모장 시절의 저우쿤, 너무 영리했을 인물     © 자주시보, 중국시민

 

저우쿤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혁명대오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라 옛 전우들이 거들기도 싫어해서인지 군대에서의 경력은 알려졌어도 성격특징이나 일화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자료에 의하면 그는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핑쟝현(平江县, 평강현)사람으로서 1927년 9월 마오쩌둥이 영도한 추수기의(秋收起义)에 참가했다가 중국공산당이 건립한 첫 혁명근거지 징강산(井冈山, 정강산)에 올라갔고 뒷날 중앙소베트구역에서 활동했다.
토지혁명전쟁기간에 그는 4군 31퇀 연장(중대장), 제2종대 제5지대 부지대장과 지대장, 1군단(군단장은 린뱌오) 12군 34사 사장, 4군 11사 사장, 4군 군장, 1군단 10사 사장, 3사 사장, 21사 사장, 중국공농홍군대학 대리교장, 8군단 군단장, 1방면군 참모장을 맡았다.

 

역사상 군인들을 가리켜 무식하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토비나 마적무리의 두령출신 군인들은 무식한 사람들이 다수였고 홍군지휘관들도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글을 모르고 문화지식이 부족하다 해서 싸움을 잘못한다는 법은 없다. 글자로만 따진다면 “세계의 정복자”로 불린 징기스칸도 문맹이 아닌가.
허나 참모장은 무식한 사람이 없다. 중국에서 참모장이란 개념이 없을 때에 정규군 혹은 비정규부대 그리고 토비무리라도 군사(军师)라는 배역이 존재했으니 역사상 첫 손 꼽히는 군사는 삼국시기의 제갈량이다. 전통적인 군사도 근현대 개념인 참모장도 풍부한 지식과 높은 지적능력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
더욱이 저우쿤이 참모장으로 있을 때의 지휘관은 군사천재로 꼽히는 린뱌오였으니 린뱌오가 그를 믿고 쓰고 의지했다는 사실은 저우쿤의 재능에 대한 유력한 방증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1938년 3월 군대에서 도망쳐버렸다. 그것도 군비를 갖고 달아났다. 게다가 부대가 곤경, 절경에 처했을 때 변절자가 나오는 상례와 달리 부대가 한창 잘 나가던 무렵에 스스로 물러났으니 희한한 사례로 꼽히지 않을 수 없다.

 

홍군은 팔로군으로 개편된 뒤 곧 전선으로 나갔으니 9월 하순 115사가 산시성(山西省)에서 치른 첫 싸움 핑싱관(平型关)전투가 팔로군의 명성을 전국에 날렸다. 당년에는 대외전적을 부풀리는 전통과 전국 규정에 따라 3천 명을 소멸했다고 선전했는데 실제는 1천 명 정도 소멸했다 한다. 절대수자는 썩 많지 않더라도 중국군이 연전연패하고 일본군 무적 신화가 퍼지던 시절에 일본군 부대를 유인, 포위, 섬멸한 전적은 민심을 크게 흥분시켰고 팔로군의 위상을 높였다. 단 115사의 주력부대를 전부 동원한 대규모 전투에서 수백 명이 희생되거나 다치면서 일본군의 실력을 잘 알게 되었고 정규전투는 득보다 실이 너무 크다는 결론이 내려져, 팔로군은 마오쩌둥이 전쟁 전부터 강조했으나 뭇사람이 달가워하지 않았던 유격전 전략을 받아들여 부대를 쪼개어 적후로 들여보내 소규모 유격전들을 벌림으로써 적은 손실로 짭짤한 전과들을 얻어내기 시작했으니 이는 좀 뒤의 일이다.

 

1938년 3월은 국공합작이 그나마 괜찮게 되어 뒷날 같은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고 팔로군 또한 고전에 시달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바로 이런 때 저우쿤은 국민당 장교들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고 한탄했다.
남들의 참모장은 승용차를 타고 공관에서 살고 식당을 드나드는데, 우리는 왜놈들만 치고 돈 몇 푼도 없다. 팔로군 판사처에 가서 용돈을 달라니까 고작 2원을 주더라. 쿵샹시(孔祥熙, 공상희, 쟝제스-장개석의 동서, 산시성山西省사람, 은행가)는 115사가 자기 고향을 보위했다면서 대범하게 은화 3만을 주더라.
그런 불평에 팔로군 부총사령 펑더화이(彭德怀)가 대노하여 욕했다는 설이 있는데, 구체적인 말이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만, 저우쿤이 처우에 불만을 품은 건 진실로 보인다. 115사가 진시(晋西, 산시성 서부)에 근거지를 건립하던 무렵 그가 거금을 갖고 달아난 건 엄연한 역사사실이니까.

 

국공합작의 합의에 따라 국민당은 한동안 팔로군에게 월 50만 위안씩 경비를 발급하다가 국제모순이 약해지고 국내모순이 상승하니 비용을 끊어버렸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은 잠시 곤경에 빠졌으나 마오쩌둥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흩어지겠는가? 자신의 손으로 살아나가겠는가? 결국 우리의 손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문제를 풀자는 결론이 나왔고(중국어표현으로는 “自己动手,丰衣足食(자기의 손을 놀려 잘 입고 잘 먹자)”), 숱한 사람들이 도처에서 황무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고 생필품들도 만들었으니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자력갱생” 역사의 시초이고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후에도 제국주의 봉쇄 속 국력, 군력강화의 기초이며, 핵무기, 미사일, 우주항공 등 분야에서 거둔 성공의 뿌리로 된다. 이는 물론 뒷일이고 1938년에는 군비가 제대로 지불되었다.

 

저우쿤의 도주행적은 설들이 몇 가지 있는데, 연구자들은 당시 저우쿤이 팔로군 총부에 가서 115사가 쓸 6만 위안을 받았다가 그중에서 3만 위안을 경위원에게 맡겨 부대에 보내고 나머지 3만 위안을 갖고 달아났다는 게 가장 믿을 만 하다고 인정한다. 1만여 명 사단의 1개월 비용의 절반을 떼먹었다면 5천 명의 월급을 갖고 도망간 사장에 비길 수 있을까?

 

그 뒤의 행적은 애매하다. 3만 위안을 갖고 고향에 돌아가 살았다. 건국 후에 조사했으나 반혁명조직에 가담하지 않았고 반혁명행위도 하지 않았더라, 도주에 정치적 동기가 없었음이 실증되었다는 설이 있나 하면 외국으로 이민했다는 설, 문화대혁명 때 맞아죽었다는 설 등이 있다.
어쨌든 저우쿤이 다시는 확실한 역사기록에서 등장하지 않고 역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 돈을 갖고 잘 먹고 잘 살았는지? 양심에 거리껴서 쓸쓸하게 살다가 죽었는지? 소설가가 이 인물을 쓴다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럴 듯하게 엮을 수 있겠다.

 

저우쿤의 도주 동기에 대해서도 재물을 탐내서다, 죽음이 두려워서다, 혁명에 대한 신심을 잃어서이다 등 설들이 적잖은데, 확정할 방법은 없다. 그나마 문자로 기록된 국민당 장교들과의 비교로 인한 불평불만이 비교적 믿을만 하다.

 

필자 생각에는 저우쿤은 너무 영리해서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했다.

 


저우쿤이 계속 혁명했더라면

 

필자가 변절의 추학 계열을 계획할 때 저우쿤은 예비명단에 끼이지 않았다. 말이나 후이꿔쑤(悔过书, 회과서, 중국식 전향서)를 써서 변절한 다음 적들을 이끌고 전날의 동지, 전우들을 잡아 죽이려고 악착스레 달려든 악인이 아니었고, 혁명을 해치는 언행도 기록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의 여러 시기에 대오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이런 사람들을 중국어로는 “뤄우저(落伍者, 낙오자)”라고 부른다. 허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공산주의위업을 위해 일생을 분투하겠다던 맹세를 저버리고 달아났기에 변절했다고 볼 수도 있다.
옛 동지들을 해치려고 날뛰던 변절자들이 미움을 산 것과 달리, 저우쿤을 거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쉬워한다.

 

팔로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만 대군으로 발전했는바, 허베이성(河北省)에 진출한 팔로군의 화부(伙夫, 취사병)들마저 한바탕 선전으로 100여 명 청년을 대오에 끌어들여 대뜸 연장으로 승진하여 지휘관이 되는 사례들이 있었고, 저우쿤의 부하들이 수천 명, 만 명 거느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항일전쟁부터는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군대들이 마오쩌둥의 전략전술에서 크게 벗어난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전사한 고급지휘관들이 아주 적었다.

 

항일전쟁시기 저우쿤보다 더 급이 놓았던 전사자는 팔로군 부총참모장이었던 줘취안(左权, 좌권) 뿐이니 일본군의 포격에 희생되었고, 저우쿤과 지위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고급지휘관으로는 신사군의 사장 펑쉐펑(彭雪枫, 팽설풍)이 눈먼 탄알에 맞아 희생되었을 뿐이다.

 

해방전쟁시기에는 군대규모가 엄청 커져 수백 만이 되었으나 사급 및 그 이상 간부 전사자수는 오히려 줄어들었으니, 최고 전사자는 동북민주연군 포병사령원 주루이(朱瑞, 주서)로서 1948년 가을 지뢰를 밟고 희생되었다. 그것도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려 전선에 나갔더라면 희생되지 않았을 텐데, 노획한 미국제 유탄포를 처음 써본 다음 그 효력을 빨리 알고 싶어 정리가 잘 되지 않은 전장에 나가다가 잘못 된 것이다.

 

줘취안, 펑쉐펑, 주루이는 항일전쟁과 해방전쟁기간 전사자들 중에서 저우쿤과 지위나 경력을 비길만한 단 3명의 고급지휘관이고, 항미원조기간에는 군급 전사자가 부군장 2명뿐이니 모두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는데, 그 경력과 지위는 저우쿤과의 차이가 아득하다.
다시 말해 뒤로 갈수록 육상 전투에서 고급 지휘관이 다치거나 죽을 확률은 낮아졌고 따라서 저우쿤이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을 확률이 아주 높다.
게다가 그는 마오쩌둥의 직계 중의 직계였으니 마오쩌둥은 의도적으로 자기파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자연스레 지위와 권력을 가질 수도 있었다.

 


정신적 목표를 잃을 때 변절하기 쉬운 법

 

1955년에 중국인민해방군이 처음으로 군사칭호제도를 실시했다. 경력, 공로, 지위, 직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여러 해 연구한 끝에 군사칭호들을 수여했는바, 원수는 10명, 대장 10명, 상장 55명, 중장 176명에 소장이 1천 명을 넘겼다. 절대다수가 수많은 싸움을 거친 노장들이었고 1천 회 이상 전투를 겪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저우쿤의 홍군시절과 팔로군 시절 부하들이 다수 1955년에 상장 군사칭호를 받았으니까, 그가 혁명대오에 남아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적어도 상장으로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이 1965년에 군사칭호를 취소했다가 1988년에 새로운 제도를 실시한 다음 평화시기 최고군사칭호를 상장으로 제한하였는데, 제1차 상장은 고작 17명으로서 홍군출신, 팔로군출신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우리 민족의 조남기 상장은 해방전쟁기간에 혁명에 참가하여 경력이 아주 짧았으나 이례적으로 17명 상장의 하나로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새 군사칭호 실시 후 상장들이 많이 생겨났고 중장, 소장들은 더 많지만, 다수가 경력을 쌓아서 한걸음한걸음 승진했고 근년에는 심지어 뇌물을 주고 승진했다가 시진핑 주석의 반부패청산에 걸려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적잖으므로 뒷날의 장군들은 1955년의 장군들과 비기지 못한다. 1955년의 장군들을 중국어로 흔히 “카이궈쟝쥔(开国将军, 개국장군)”이라고 부르니 아직도 생존하는 소장들이 좀 있다.

 

저우쿤이 뛰지 않았더라면 개국상장 쯤 될 수 있겠다만, 건국 후의 평화로운 환경에서 남들과 지위와 대우(待遇, 처우)를 비기면서 변질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사실 무장혁명시기에는 용감하게 잘 싸웠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 부패한 사례들이 많다. 부패까지는 아니더라도 풍파를 좀 겪은 다음 의기소침해져 불평불만이 가득해진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근년에 적발된 중국공산당의 부패분자들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로서 경제건설에서 오가는 거액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는데, 상당수 탐관들이 삼킨 돈을 감히 쓰지 못하고 감춰뒀다는 건 필경 그런 돈이 깨끗하지 못함을 의식했음을 말해준다. 그런 사람들도 입당할 때에는 오른손을 들고 주먹을 부르쥐고 맹세를 다졌을 것이다. 그런데 왜 변질했는가? 정신적 목표가 너무 묘망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겠다.

 

인간이란 정신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잃을 때, 목표실현에 대한 신심을 잃을 때 변질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변절하기도 쉽다. 꼭 원래의 적대진영에 들어가서 옛 동지들을 해치는 것만 변절이 아니다. 신념을 버리고 절개를 꺾는 자체가 변절이다.

 

변화가 심한 시대일수록 입장을 바꿀 구실은 풍부해진다. 양심을 아끼는 사람들은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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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자민통 17/08/06 [03:29] 수정 삭제
  이번에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엇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신적 목표를 잃는다...
그 당시에는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목표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10월 쏘비에트 혁명 후 발생한 수많은 오류나 1989년 동구권의 좌절은
미성숙된 혁명관에 의한 결과일 것입니다.

개개인의 양심, 계급성의 한계 탓도 있겠지만,
올바른 철학과 사상이 뒷받침되지 못했던 이유가 더 크다고 봅니다.
혁명을 더럽게 논하지 말거라. 자주시보 미친놈들은.. 바른말씀 17/08/06 [14:25] 수정 삭제
  혁명은 인민을 잘 살게 하기위한거다. 그런데...너희는 북한 주민 2천만명을 굶겨죽이는 김정은 놈을 찬양하챦어 ??? 더러운 자주시보 놈들... 니덜은 혁명을 거론하지 말거라. 내입이 다 더러워진다.
바른말씀 빙신아 고려 17/08/06 [15:35] 수정 삭제
  이천만명 굶겨죽였다는 증거 있냐? 증거 없으면 나한테 갈비뼈 부러질 준비 해라
애구 병신아... 별 ..ㅎㅎㅎ 바른말씀 17/08/06 [21:34] 수정 삭제
  지금도 죽이고 있챦어.. 병신 색햐.. 2천만명 채운다음에 알려주랴 ?? 미친 색히
죽이긴 누굴 죽이냐 고려 17/08/07 [03:24] 수정 삭제
  너를 죽여야지 십창 호로색 희야 너같은 개색휘는 처단하는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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