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7] 변질이 변절로 이어진 싱런푸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08/27 [10: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10년 내전”이 마무리할 무렵에 중국공산당의 당원수와 중공 산하의 군인수는 전성기의 10분의 1정도였다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챠오사변(卢沟桥事变, 노구교사변, 77사변)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시작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창당 16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와 정부가 인정하는 정당 및 군대로 되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중공 중앙이 민족대의를 앞세우고 항일의 기치를 추켜들면서 간부들과 군대를 적후로 들여보내 발전시킨 결과 단 몇 해 동안에 당원과 군인수가 전성기를 초월하여 각기 수 십 만을 확보하게 되었다. 항일전쟁이 끝난 1945년 8~9월에는 군대 수가 백만을 넘겼고 1억 가량 인구에 영향을 끼쳤으니 당시 중국인구의 4분의 1에 좀 못 미치는 수자였다.

 

대오의 급격한 확대는 필연적으로 재빠른 승진 및 인사변동을 동반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 적응한 사람들은 성공을 거두었고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서 탈락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실패했다.

 

중공 산하의 여장(여단장)과 군구사령원까지 했던 싱런푸(邢仁甫, 1910~ 1950)는 팔로군 계통의 최고위 변절자로서 바로 전형적인 실패자이다.

 


몇 해 안에 여단장과 사령원으로

 

싱런푸는 허베이성(河北省) 옌산현(盐山县) 사람이다. 지주가정 출신인데 토비 및 조폭출신인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품어 다른 길을 찾았다 한다. 19살 나던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지하병운(兵运)을 책임졌다. 병운의 목표는 주로 군벌부대의 기의였는 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중국공산당은 적군의 기의를 여러 번 조직했는데 때로는 “폭동”이라고도 불렀다. 당년의 폭동은 뒷날의 의미와 달라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기의나 폭동 혹은 “빙바오(兵暴, 병사폭동, 군인폭동)“라고도 불린 행동들은 성공사례가 실패사례보다 훨씬 적다.
싱런푸는 군벌부대에서 활동했으나 폭동을 조직하지는 못했고 병사, 참모, 부관으로 있었다.
1937년 77사변 직후에 고향에서 항일연설을 발표하고 삐라를 뿌렸던 그는 7월 15일 중공이 주도한 화베이(华北, 화북, 중국 북부, 조선의 친일파문인들이 일본군 위문차로 갔던 ‘북지[北支]’가 여기다) 민중항일구국회와 민중항일구국전 성립대회에 참가하고 구국군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국민당정부의 통치가 붕괴되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이러저런 명목의 군대들이 생겨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른바 사령이 솜털같이 많다는 게 항일초기에 생겨난 말이다. 자발적인 민간무장들이 있나 하면 토비무리도 있었고 중국공산당이 조직했거나 배후에서 조종한 무장단체들도 있었다. 몇 해 지나니 적후에 남은 건 거의 다 중국공산당의 무장단체였다. 나머지 집단들은 버틸 수 없어 해산했거나 중공의 산하에 들어왔거나 적에게 소멸되었거나 적에게 항복하여 괴뢰군으로 되고 말았다.

 

때문에 싱런푸가 지방의 구국군 두령으로 된 건 별로 희한하지 않다. 남의 대오를 개편하여 구국군의 특무퇀(特务团)으로 만들고 직접 퇀장(团长, 연대장)으로 된 것도 별로 대단치 않다.
10월에 중공의 지방조직이 싱런푸가 구국군 사령으로 된다고 결정했는데 12월에는 합법화 목적으로 부대명칭을 “국민혁명군 별동총대 제31유격지대(国民革命军别动总队第三十一游击支队)”로 바꾸었다.

 

당시 허베이성에서 일본군, 국민당군, 지주무장, 토비들이 득실거렸는데, 항일무장단체들은 자칫하면 소멸될 판이었다.
싱런푸는 고향과 우디현(无棣县), 난피현(南皮县), 경운현(庆云县), 러링현(乐陵县) 등지에서 전투를 벌려 여러 번 승리했고 1938년 5월 말에는 3,000여 명의 병력을 갖추었으며 무기장비도 개선되었다.

 

1938년 7월에 부대가 “팔로군 지루변구 유격지대(八路军冀鲁边区游击支队)”로 개편되면서 사령으로 임명되어 팔로군 계통에 정식 편입되었고, 그 후 부대명칭과 직무가 여러 번 바뀌다가 1941년 2월에 부대가 팔로군 115사 교도 제6여(一一五师教导第六旅)로 승격하면서 여장(여단장)으로 된 게 군대 내에서의 최고 직무이다.
1941년 3월에는 지루변군구(冀鲁边军区)가 성립되면서 31살 난 싱런푸가 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었으니 일생 최고 지위에 올랐다.

 


교만해지면서 변질하기 시작

 

홍군경력이 없이 군벌부대에서 참모로나 있었던 사람이 몇 달 사이에 연대장으로 변신하고 몇 해 만에 여단장, 사령원으로 된 건 시대와 지역이 만들어준 변화이다.
그런데 싱런푸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로 여긴 모양이다. 남들이 하찮게 보였고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싸움판에도 직접 나가지 않았고 아내가 있고 딸 셋이 있는데도 부대 선전대의 처녀 쑹쿠이링(宋魁玲)과 눈이 맞아서 친하게 보내다가 아예 첩으로 삼아버렸다.

 

일본군이 전쟁 초기에는 진격의 성공에 눈이 멀어 정면전선에서 밀고 나가다나니 북방의 유격전은 얼마 안 되는 공산당원들의 장난이라고 여겼다. 방심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숱한 고장들에 유격근거지가 생겨나고 근거지들이 가득했다. 하여 부대를 중부에서 북부로 돌리고 집중하여 토벌했는데, 허베이성에서는 1942년 5월 1일에 시작되어 “5· 1대소탕(五一大扫荡)”이라고 불리는 작전이 유명하다. 허베이성 중부평원의 근거지들은 상당수 파괴되어 일본군이 한때 “치안확보”를 자랑했고, 중공은 정규부대를 일단 산악지대로 옮긴 다음 소규모의 무장공작대들을 평원으로 보내 교란작전을 벌렸으니 일제가 “치안명랑지대”라고 선포했던 고장들이 차차 중공의 세력범위로 다시 들어왔고 1944년부터 중공 정규부대들이 대반격전을 개시하여 현성(현소재지)을 여러 개 빼앗았다.

 

지루변군구는 약자가 지(冀)인 허베이성과 약자가 루(鲁)인 산둥성(山东省) 접경지대에 있었다. 접경지대가 적통치의 약한 고리이므로 중공은 항상 그런 곳들에서 발판을 만들었다. 지루변군구가 일본군 공격의 중점대상은 아니었으나 역시 대규모 “소탕”을 거듭 당했고 편안치 못했다.

 

마오쩌둥의 지구전(持久战)이론에 따르면 항일전쟁은 적의 진공, 쌍방의 대치, 우리의 반공격 이 3단계를 거치게 된다. 일본의 진공은 1938년 10월의 우한(武汉)점령으로 정면전장의 진공이 일단 그쳤고, 적아 쌍방이 전략적인 대치단계에 들어섰다. 전반적으로는 대치이지만 국부적으로는 공방이 엇갈리기 마련인데, 화베이에서의 일본군의 대소탕은 국부적인 공격이었고, 중공으로서는 국부적인 방어단계에 처했다. 대치단계가 길고 어렵다, 하지만 참고 견디면 국내, 국제 역량 변화가 우리에게 이롭고 적에게 불리하므로 반공격 단계가 반드시 오게 된다. 이것이 마오쩌둥이 1938년에 내놓은 《지구전을 논함(论持久战)》의 예언이다.

 

 

당내와 군내에서는 물론 백성들에게도 지구전의 이론과 특성을 많이 선전했으므로 항일군민들은 일본군의 “대소탕”들로 손해를 많이 보았지만 이를 악물고 곤난을 극복하여 항일의 반공격단계를 기다리자는 당중앙의 호소에 호응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헌데 여색과 편안한 생활에 맛을 들인 싱런푸는 슬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군구 사령원으로서 전장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기는 커녕 신하이현(新海县) 앞바다에서 무인도 왕즈다오(望子岛, 망자도)를 골라 “후방기지”라는 명목으로 군민을 동원해 집과 방어공사를 만들게 했다. 한 겨울과 한 봄 품을 들여 완공된 다음에는 첩과 경위부대를 데리고 섬에 진주하여 먹고 마셨다. 또한 적점령구역인 톈진시(天津市)에 사람을 보내 사치품들을 사오게 해서 썼고, 공금 3만 7천 원을 횡령하여 써버렸는데 당시 물가로 알곡 70만 근에 상당했다.
싱런푸가 왕즈다오를 고른 데는 원인이 있다. 워낙 옌산현의 해적들이 활동하던 곳인데 해적들은 지루변군구 해상독립퇀(海上独立团)으로 개편되었고 두목 첸얼후(陈二虎)가 퇀장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보다시피 지루변군구의 부대성분은 단순하지 않았다. 복잡한 군대를 다루는 중공의 방법은 개조였다. 31지대 시절부터 중공은 홍군간부와 팔로군 간부들을 부대에 보내 사상정치사업을 강화했는데, 중공 산하의 모든 부대에서 통용하는 이 방법을 싱런푸는 불만스러워했다. 자기가 싸워서 얻은 세상에 팔로군이 끼어들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는 홍군, 팔로군간부들을 반대했고 사처에 심복들을 끼워넣어 세력을 키웠으며 팔로군 출신들을 비방했다.

 

1941년 4월에 상부에서는 황화(黄骅, 황화)를 지루변군구 부사령원 겸 115사 교도 6여 부여장으로 임명했다. 싱런푸보다 한 살 아래인 황화는 대장정을 거친 홍군출신으로서 홍군시절에는 퇀장, 퇀 정위였고 항일전쟁기간에는 부지대장, 군구 부사령원, 사령원을 역임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하며 당성이 강한 간부였는데 몸이 약해서 당시 규정에 의하면 “보건밥(保健饭)”, “보건요리(保健菜)”를 먹을 수 있었으나 사양하고 전사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다. 하여 재빨리 간부와 군중들 사이에서 위신이 높아졌는데, 이런 작풍과 이런 우세가 싱런푸와 어울리지 않은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싱런푸는 황화를 눈에 든 가시로 여기면서 쩍하면 남들 앞에서 황화를 “난만즈(南蛮子, 남방놈)”라고 욕하면서 남방놈들이 지방간부를 배척하여 세력범위를 넓히려 한다고 비방했다.

 

1943년 봄에 상부에서는 싱런푸에게 옌안(延安, 연안)의 당학교로 가서 공부하라는 결정을 지었다. 당년에 북방과 남방의 수많은 고급장령, 고급간부들이 혹은 재7차 당대표대회에 참가하라는 명목으로 혹은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옌안에 갔고, 거기에서 당의 역사를 다시 연구하고 사상의식수준을 제고했다. 항일전쟁 종결 전후 그런 장령들과 간부들이 사면팔방으로 퍼져나가 항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였고 뒤이어 규모가 훨씬 커진 해방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에는 고위직에 올랐다.

 

“혁명의 성지”로 불리는 옌안에 가라니 영광으로 여긴 사람들이 절대다수였지만, 싱런푸는 군구사령원직을 황화가 맡게 된다는 걸 알게 되니 황화가 자기의 군권을 빼앗으려고 꼼수를 부렸다고 지레짐작했다. 한결 앙심을 품은 싱런푸는 결정에 따르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내건 구실은 병에 걸렸다와 청사장(青纱帐)이 아직 일어서지 않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 청사장이란 북방의 수수 따위 키 높은 작물이 자라나면 푸른 비단 장막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북방유격전에서 한 여름의 곡식은 아군을 가려주는 중요한 엄폐물이었다.

 

1943년 5월에 싱런푸는 심복들인 양징허우(杨静侯, 양정후), 판터(潘特, 반특), 류융성(刘永生, 류영생), 싱차오싱(邢朝兴, 형조흥) 등을 왕즈다오로 불러다가 회의를 열었다. 위에서 나를 데려다가 훈련을 받게 한다지만 실은 내 직무를 빼앗는 거다. 내가 가면 자네들은 어미 없는 아이 꼴이라 얼마나 불상한가. 이게 모두 난만즈 황화가 한 짓이다. 그자가 없으면 우리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아예 그자를 없애치우자. 황화가 없으면 변구에 군사간부가 없으니까 상부에서 나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
이런 논리로 황화암살이 무리들의 호응을 받았고, 암살방안이 기획되었다.

 

1943년 6월 30일 지루변군구 사령부가 신칭현(新青县, 신청현) 양얼좡진(羊二庄镇, 양이장진) 따자오촌(大赵村, 대조촌)에서 정찰회의를 열었는데 목적은 적의 “소탕”에 맞서는 임무의 포치였다. 사회자는 황화였고 사령부 참모장 루청다오(陆成道), 정찰고 부고장(侦察副股长) 추이광화(崔光华, 최광화), 서간과 과장(锄奸科长) 첸윈뱌오(陈云彪, 진운표)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저녁 무렵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6시 경에 회의실 밖에서 저우윈훙(周云洪, 주운홍)이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황화에게 소개신을 내놓았다. 황화가 읽어본 다음 저우윈훙에게 관리고(管理股)에 가서 잠시 휴식하라고 일렀다. 즉시 회장에서 나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던 저우윈훙은 군구 신편권총대(新编手枪队) 대장 펑관쿠이(冯冠奎, 풍관규)라는 사람이 들어오자, 곁으로 휙 몸을 피했다. 펑관쿠이는 저우윈훙의 곁에서 권총을 내들고 쐈다.

 

우선 황화와 루청다오가 총탄에 맞았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이 명중되었다. 암살은 시작부터 결속까지 약 2분 정도 걸렸을 따름이다. 한 경위원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오다가 도망가는 펑관쿠이와 부딪쳐 당장에서 맞아죽었다. 경위련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펑관쿠이네는 이미 마을 밖으로 달아났고 청사장이 사처에 펼쳐져서 추격할 수 없었다.
이 사건에서 황화, 루청다오, 첸윈뱌오 등 8명이 희생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황화를 기념하기 위해 1945년 8월에 신칭현의 이름이 황화현으로 바뀌었고 1989년에는 허베이성 황화시로 변경됐다.

 


잇달은 변절과 사형

 

암살이 성공한 후 싱런푸는 한동안 좋아 난리였다. 섬에서 술을 마시고 장난치면서 군정대권을 움켜쥘 꿈을 꾸었는데, 비밀은 역시 드러나고 말았다. 싱런푸는 무장독립을 결심하고 부대를 끌어가려 했으나, 진상을 알게 된 간부와 전사들은 분분히 통제를 벗어났다. 외톨이 사령으로 된 싱런푸는 첩과 소수 심복들을 데리고 톈진으로 도망가서 일제에게 항복했다.
《천황에게 충성 바쳐(效忠天皇)》, 《공산당토벌, 비적소멸계획(剿共灭匪计划)》등 자료들을 써서 바쳤고 자기가 아는 공산당과 변구의 상황을 죄다 공술하여 그 보수로 진난6혁초공사령(津南六县剿共司令, 톈진 이남 6개 현의 공비토벌사령)관 자리를 꿰찼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망해버렸다. 그러자 싱런푸는 제꺽 이름을 뤄쩐(罗镇, 라진)으로 바꾸고는 국민당의 특무조직에 들어붙어 톈진 군통잠(军统站) 1급 소좌조장(一级少校组长), 허베이성 제3전서(第三专署) 전원(专员) 겸 보안사령(保安司令)직을 맡았다.
또 몇 해 지나 해방전쟁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1949년 1월 5일 톈진해방전투에서 국민당 전원 겸 보안사령 뤄전이 사로잡혔고, 이듬해 9월 7일 옌산현에서 만 명이 모인 공개심판대회가 열렸으며, 총살형이 집행되어 싱런푸는 고향에서 수치스럽게 저승으로 갔다.
싱런푸가 고향땅에서 항일의 풍운아로 소문나서부터 혁명의 변절자로 총살되기까지 고작 13년이 걸렸다.
그의 첩과 심복들의 결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행복할 리는 없다.

 


군대의 사유화, 국가화와 정당화

 

싱런푸가 중공의 영도 아래 항일에 나섰을 때에는 몇 달 사이에 수천 명을 모았으나, 도방갈 때에는 소수 심복들만이 따라갔을 뿐이다. 그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부대와 군구를 자기 소유로 여겼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중국은 청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곳곳에서 군벌과 토비들이 활약하면서 수십 년 전란이 그치지 않았는데, 군대의 성격을 놓고 보면 사유화, 국가화, 당화의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토비들과 지주무장, 그리고 지방군벌들은 대체로 부대가 두목의 개인소유였다. 간혹 부족이나 가족소유도 있는데 개인소유와 마찬가지로 사유화 무장이다. 무장력이 두목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므로 두목 하나만 매수하면 부대를 전부 끌어오고, 두목 하나만 죽으면 부대가 무너진 사례가 수없이 많다.
군대의 국가화는 늦어서 1920년대 후반부터 국민당정부가 수십 년 동안 떠들었으나 실제로는 실현하지 못했다. 군벌부대들은 형식적으로 “국민혁명군” 산하에 들어갔더라도 쟝제스(장개석)의 통치 하에서는 쟝제스의 직계들과 다른 자파이쥔(杂牌军, 잡패군)으로서 차별대우를 받았기에 진정한 의미의 국가군대로 되지 못했다.
정당화는 군대가 정당의 이념에 따라 묶어진 경우를 가리킨다. 이 군벌을 이용하여 저 군벌을 치다가 실패의 고배를 거듭 맛본 쑨중산(손중산)이 황푸(黄埔, 황포)군관학교를 세우고 자체의 군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본보기로 삼은 건 소련 붉은 군대였다. 하여 국민혁명군은 초기에 각 군에 당대표들이 있었고 뒷날에도 정훈원(政训员)이나 지도원(指导员) 따위 명의로 부대에서 활동하는 정치장교들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당은 그 정당성격의 애매함과 당부조직의 불완전성, 그리고 쑨중산이 내놓은 삼민주의에 대한 해석차이로 하여 군대의 완전한 정당화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반쪽 정당화라고 할까? 타이완으로 도망간 다음에도 말로는 삼민주의를 선전하고 부대 곳곳에 “정치세포(政治细胞)”를 침투시켜 장병들을 감시하면서 사상통제에 힘썼으나, 타이완군이 진짜 의의에서의 국민당군대로는 되지 못했다. 더욱이 정권이 거듭 교체되면서 타이완군은 정치신념이 불명하고 군사목표가 불명한 이상한 군대로 되었다. 수십 년 동안 대륙을 반공격하여 삼민주의로 중국을 통일하자고 외치던 군대가 이제는 그 목표 자체가 웃음거리로 된 데다가, 민진당 정권이 의도적으로 쟝제스 부자의 흔적을 없애면서 군대도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렸다. 타이완 출신들이 군의 주류를 이루면서 타이완독립을 주장하는 장병들도 생겨났는데, 그 목표의 비현실성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어떻게 무엇으로 싸워야 할지 모르는 군대가 타이완 군대이다. 요즘 전직 군인들이 민진당 정권의 연금개혁에 불만을 품고 시위를 하는 판에 현역 군인들의 사기가 어떠하겠느냐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면서도 정체성을 찾지 못한 게 국민당군대- 타이완 군대라고 해야겠다.

 

정당화가 철저히 실현된 군대는 물론 중국공산당의 군대이다. 홍군이라고 불렀던지 팔로군, 신사군이라고 불렀던지, 동북민주련군, 해방군이라고 불렀던지 모두 군에 대한 당의 영도가 확고하게 보증되니, 그 뿌리는 마오쩌둥이 건군 초기에 내놓은 획기적인 방침-- “당지부를 연(중대)에 세운다(支部建在连上)”에 있다. 이런 제도로 당의 조직이 최하부에까지 침투하여 군대를 하나의 유기체로 통일시켰다. 보통 병사들을 상대로 누구를 위해 총 메고 싸우는 가부터 어떻게 해야 원대한 목표를 실현하느냐까지 알려주기에 대오의 응집력이 굉장히 강하다. 하기에 행군이나 전투에서 탈락한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부대를 찾아 돌아오는 게 일상사로 되었고, 어느 장교가 부대를 끌고 달아나려면 성공하지 못했다.

 

중공 혁명사에서 연, 영(营, 대대) 단위로 변란을 일으키거나 배반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모두 중공이 대오를 확장하거나 개편한 초기에 벌어졌지 한동안 장악하고 교육한 부대에서는 반(班, 분대)이 통째로 달아난 사건조차 없었다. 변절의 추학 5편 “중공 제3인자”로 불렸으나 변절 후 별 볼일 없던 장궈타오”(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1038)에서 지적했듯이 장궈타오가 중공 지도자로서는 최대 8만까지 거느렸으나 변절할 때에는 경위병마저 따라가지 않아 홀몸으로 달아났다. 싱런푸의 변절도 그의 상상에 비해 규모가 너무나도 초라했다. 그리고 장궈타오와 싱런푸의 사례로 알 수 있듯이 혼자 혹은 소수 동조자들이 변절한 중공 출신들은 거의 모두 특무조직에 들어가 먹고 살게 되었다. 군벌들이 부대를 갖고 변절하면 새 주인 수하에서 부대장 직위를 유지하던 것과 정반대이다. 자체 세력이 없는 외톨이나 소수 변절자들은 특무조직, 정보기관에서 사용가치를 찾지 않을 수 없다.

 

정당화된 군대나 조직은 어느 성원의 이탈로 무너지거나 대량 변절이 일어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중국이 1950년대 한동안은 “국방군”이라는 개념을 곧잘 썼으나 “중국인민해방군”의 당의 군대 성격을 지금도 자꾸만 강조하는 데는 역사적, 현실적 원인이 있다. 한 퇴역군관의 표현대로는 당조직이라는 게 평소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유사시에는 거대한 힘을 발휘하니, 중국에서는 국방부장이라도 정변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 현대사에서 생겨난 군사조직이나 준군사조직들을 살펴보면 완전히 사유화된 군대는 거의 없었고 대신 일정한 정치목적으로 뭉친 느슨한 부대들이 있었으니 의병들이나 독립군들이 그러하다.
국가화의 유일한 군대는 한국의 국군을 꼽을 수 있겠다. 단 사조직 논란이 요즘까지도 그치지 않는 걸 보면 완전한 국가화가 이뤄졌는지에는 의문이 좀 남는다.

 

정당화된 군대는 조선인민군을 들 수 있다.
한때 조선에서는 인민군을 “통일전선의 군대”라고 정의한 사람들이 있어서 김일성 수상이 1950년대에 거듭 반박했다. 인민군대는 당의 군대라는 것이다. 특히 김을규라는 사람의 이름을 찍으면서 그런 주장은 당의 영도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뒷날 청년 김정일이 정치사업을 담당하면서 인민군을 “수령의 군대, 당의 군대”라고 정의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에는 “장군님 군대가 되자”는 노래가 나오는 등 수령과 군대의 혼연일체를 강조했다.
정당화된 군대는 현재 중국, 베트남, 쿠바 등 나라들에 있다고 아는데, 조선인민군은 “수령의 군대”로 자처하면서 남다른 색깔을 드러낸다.

 

반도에서 대치하는 군대들은 자체정의가 같지 않다. 정당화된 군대 중에서도 특별히 “수령의 군대”임을 강조하는 인민군, 국가화를 표방하는 한국군, “세계경찰”로 자처하는 미군. 이런 각도에서 말폭탄과 군사대결을 관찰하면 새로운 느낌이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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