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중국인들의 추종불허 밀수실력과 대북제재 전망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09/25 [22:0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수십 만 톤 유류도 기적을 낳는다 

 

유엔 안보리가 9월 11일(미국 현지시간) 만장일치로 채택한 새 대북제재 결의 2375호에서 가장 주목 받은 것이 유류공급제한조치였다. 원유공급을 연간 400만 배럴로 동결하고 정유제품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게 골자였다. 

 

원유는 배럴, 갤런, 톤 등 단위가 복잡해서 톤 단위를 통용하는 중국에서 나서 자란 필자는 항상 헷갈리고 톤으로 환산해야 가늠한다. 산지에 따라 원유 1배럴의 무게가 달라지는데 1톤은 6점 몇 배럴이거나 7점 몇 배럴에 담을 수 있다. 계산해보면 400만 배럴은 원유 50여만 톤에 해당된다.

 

400만 배럴이던 50몇 만 톤이던 한국이 1년에 수입하는 원유와는 비길 나위가 없겠다만(한국의 2016년 원유 수입량은 9억2천여만 배럴, 약 1억천6백만-16,455,696톤) 역사를 돌이켜보면 몇 십 만톤이 큰 일을 해낸 사례들이 적지 않다. 

 

단적인 실례로 1950년대 초반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시기 중국은 약 3년 동안 반도로 유류 26.1만 톤을 실어날랐다. 항미원조전쟁 기간에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은 압록강 북안의 비행장에서 이착륙했으므로 사용한 유류가 반도에 들어간 유류에 끼이지 못했다만, 그 양을 보태더라도 중국은 고작 수십 만 톤 유류를 사용하여 항미원조의 승리를 거뒀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당년에 사용한 유류가 얼마인지는 집계를 보지 못했으나 아마도 천문학적 수자일 것이다. 허나 중국과 조선이 사용한 유류보다 엄청 더 많은 유류를 쓰고도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가 이기지 못한 협정서에 서명한 첫 미국장군이라는 남부러워하지 않을 명성을 얻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유류도 쓰기 나름이라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적은 유류로도 기적을 낳는다. 

 

갖가지 유류를 펑펑 쓰는 현시대에 26.1만 톤은 우스운 숫자일 텐데, 당년의 중국으로서는 큰 결심을 내려야만 사용가능한 숫자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던 1949년에 중국의 석유 생산량은 고작 12만 톤으로서 그중 원유가 7만 톤, 인조유가 5만 톤이었다. 다시 말해 26.1만 톤이란 건국초기 연간생산량의 2배를 넘는 엄청난 수자였다. 

 

미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지질조사를 한 다음 석유가 매장된 곳이 적고 양도 보잘 것 없다는 결론을 내려 “중국빈유론(中国贫油论)”이 수십 년 활개쳤고, 이미 개발된 몇 개 안되는 유전에서 나오는 원유가 많지 않았으며 석탄에서 뽑아내는 인조유는 원가가 만만찮았다. 

소련에서 일부 유류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절대부족을 느꼈던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 일어난 뒤 유류사용제한조치를 취했다. 예컨대 남부의 광둥성(广东省, 광동성)에서는 모든 자동차들이 기름을 쓰지 못한다고 규정하면서 목탄 따위 대용연료를 쓰도록 권장했다. 한편 갖은 방법을 대여 유류를 들여왔으니, 그때 무척 활발한 입수경로가 영국 치하의 홍콩과 포르투갈 치하의 마카오였다. 포장이 제대로 된 유류는 물론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선창에 싣고 온 유류도 모조리 사들였던 것이다. 당년에 수입한 유류량이 얼마냐는 아직까지 공개된 수자를 보지 못했는데, 홍콩의 기업들과 사람들이 도저히 사용하지 못할 양의 유류가 홍콩으로 수입되어 다시 마카오를 거치거나 직접 중국대륙으로 들어왔음은 뭇사람이 공인하는 바이다. 

 

 

특이한 목적에 쓰인 검은 양철 밀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본주의세력은 가혹한 제재와 봉쇄를 수십 년 가했다. 중국은 제재와 봉쇄를 뚫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1950년대 초반에는 홍콩을 통해 항미원조전쟁에 필요한 물품들을 많이 들여왔다. 홍콩의 법을 어기는 노릇이므로 미국, 영국과 홍콩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밀수였고,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운수금지(禁运)”를 반대하는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그런 일에 종사한 홍콩인들 가운데는 그 덕에 “첫 통의 금(第一桶金 창업과정에 처음으로 모은 자금)”을 벌어서 뒷날 대기업가로 성장한 사람들이 있다. 밀수로 시작했다는 오명을 수십 년 들쓰고 미국과 영국의 “블랙리스트”에 등록된 기업인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람은 부동산으로 대성공했고 체육사업에서 활약했던 훠잉둥(霍英东, 곽영동)이고, 그 가족은 지금도 홍콩과 대륙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오래전부터 중국공산당과 신임관계를 쌓아온 덕이다. 

 

▲ 중국 전국정치협상위원회 부주석까지 되었던 훠잉둥(1923~ 2006)     © 자주시보, 중국시민

 

훠잉둥은 자기의 선단을 활용하여 대량 물자를 대륙으로 실어날랐는데, 뒷날 홍콩-대륙 부분의 운수만 맡았음을 강조했다. 물품은 대륙이 홍콩에 설치한 회사들이거나 홍콩 현지 기업들이 서방국가를 통해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수입했고, 그 다음 대륙으로 날라가는 문제를 훠잉둥 같은 사람들의 기업이나 단체가 맡았다. 대륙에 물자들이 들어가면 대륙의 담당회사 사람들이 맞이하여 부렸고 인력, 물력을 조직해 내지로 날라갔다. 

훠잉둥은 영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배를 바다에 띄우는 한편 관료들과 직원들을 매수하여 그들이 적재와 운수행위를 눈감아주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배가 해경의 단속선에 충돌, 침몰되는 아픔도 겪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상당히 성공한 셈이란다. 

 

홍콩당국의 운수금지조치는 6. 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에 완화되었는데, 전쟁기간 훠잉둥이 운수한 물품들은 약품, 고무호스, 금속제품 등 다양했다. 그 가운데서 인상 깊은 건 1951년 가을의 2주일 사이에 긴급히 6천 톤을 나른 검정양철(黑铁皮)이었다. 당시 운수자들에게 대륙회사들이 후한 운임을 지불했는데, 운수자들은 약품, 면화 따위 운송이 편한 물품들을 선호했지 검정양철 같이 무겁고도 불편하며 이윤이 적은 물품은 꺼렸다 한다. 

허나 훠잉둥은 중국이 급히 요구하는 검정양철이 항미원조에 쓰일 걸 알아채고 결연히 운수를 결정했다. 그 시기의 행위에 대해 국민당, 타이완 편에 선 사람들은 비난했고, 공산당, 대륙 편에 선 사람들은 찬양했는데, 훠잉둥 자신은 “일종 자각과 비자각 사이의 행위(一种自觉与不自觉之间的行为)”였다고 해석했다. 

 

“만약 당시 내가 항미원조를 지지하기 위해 운수금지령을 깨뜨렸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그렇게 높이 인식하지 못했다. 허나 전혀 인식이 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면 그 역시 사실이 아니다. 물 위에서 사는 사람들은 항일전쟁기간에서 정치적 밀수를 한 전통이 있는데, 나라와 백성에 이로운 일에서 무슨 위험을 두려워하겠는가?(如果说当时我是为了支持抗美援朝、打破封锁禁运,那是骗人的,我没有那么高的认识。但说当时我一点认识、一点想法也没有,也不是事实。”这水上人家在抗日战争就有政治走私的传统,利国利民怕什么风险?)” 

 

나라와 백성을 돕는 한편 돈도 벌겠다는 인식을 갖고 훠잉둥은 비합법운수에 적극 참여했는 바, 전성기에 1000여 명을 거느렸다. 홍콩에 들어간 검정양철은 1장의 무게가 1톤이고 너무 커서 운수에 쓰이는 작은 배에 싣기부터 불편했다. 하여 훠잉둥은 1장을 10개로 쪼갰는데, 선적은 전부 인력에 의거했으니, 인부들이 100킬로그램 무게의 검정양철을 등에 지고 조심스레 배에 실었다. 얼핏 듣기에는 허황한 얘기지만 당년에 실제로 벌어진 사실이다. 

 

검정양철의 용도는 무엇이었던가? 뒷날 어떤 사람들은 훠잉둥이 용도를 알았으리라고 짐작했지만, 그런 군사비밀은 홍콩에서 물품을 주문하고 수입한 사람들이나, 대륙에서 물품을 받아서 나른 사람들도 알 가능성이 희박하거늘 일개 홍콩운수상이 알리 있겠는가. 

그 시기 훠잉둥의 행동과 영향을 연구한 어느 사람이 얻어낸 결론은 검정양철이 드럼통 제작에 쓰였다는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의 후근부문(后勤部门, 후방부서)은 현대화전쟁을 처음 겪으면서 유류의 필요성을 절감했는데, 기름을 나를 물건이 절대 부족했다. 하여 유류를 담는 드럼통을 만들 검정양철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심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에는 국산으로 해결하지 못하여 외국 양(洋)자가 붙은 물건들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 양철(洋铁, 중국어로 양톄)이 외국에서 들어왔기에 생겨난 이름이고, 쇠못도 “양띵(洋钉, 양정)이며 성냥마저 얼마 안 되는 국산이 수요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민간에서 ”양훠(洋火 양화)“로 불렸다. 

중국의 제조능력이 이런 수준이었으니까 양철은 서방의 운수금지명단에서 중요한 물품으로 끼었다. 

 

검정양철은 단기일 운수로 끝났는데, 중국인민지원군의 기록에는 드럼통을 아껴쓴 내용들이 있다. 운전사가 휘발유를 창고로 날라갔으면 반드시 빈 통을 싣고 돌아와야 된다고 규정했고, 군관과 병사들이 빈 드럼통을 뜯어서 다른데 쓰면 안 되며 어긴 자는 처벌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훠잉둥의 손을 거친 검정양철로 만든 드럼통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요를 만족시켰는지 아니면 중국에서 국산양철제조에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발한 타이어 밀수와 운반 

 

훠잉둥이 다룬 물품들 가운데서 타이어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다. 그는 별의별 타이어들이 다 있었는데 큰 놈은 세워놓으면 사람 키를 넘었다고 이야기했다. 직경이 사람 키를 초과하는 타이어가 반도의 전장에서 활약한 장비들에 쓰였다는 기록은 필자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으니 아마 국내의 어느 곳에서 쓰인 모양인데, 훠잉둥이 나른 타이어 들 중 상당수가 반도의 북반부에서 굴렀으리라는 것 또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당년에 중국은 원유산량이 적고 유류정제공업과 유류관련화학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인조고무를 전혀 생산하지 못했고, 천연고무도 하이난도(海南岛, 해남도)에 갓 고무나루를 재배하기 시작했기에 여러 해 지나야 덕을 볼 수 있었다. 하여 튼튼한 고무로 만드는 타이어는 전량 수입에 의거해야 했다. 

 

훠잉둥 같은 운송업자를 통해 들여오는 외에 중국은 기발한 밀수방법도 고안해냈다. 잘 알려졌다시피 자그마한 홍콩이 먹고 살고 굴러가려면 대륙과 장사를 해야 한다. 간단한 예로 닭, 오리, 야채 등등이 대륙에서 나가지 않으면 홍콩사람들이 먹을 것조차 떨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홍콩은 운수금지품목에 끼이지 않은 물건들을 대륙에 들여보내야 무역수지를 맞출 수 있다. 

 

때문에 홍콩과 대륙사이를 오가는 자동차들이 많았는데, 타이어운반을 약속한 차들은 홍콩에서 우선 새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는 낡은 타이어를 적재함에 실었다. 차가 세관을 통과해 대륙에 들어와 짐을 부린 다음에는 새 타이어를 떼내어 대륙의 접수자에게 넘겨주고 낡은 타이어를 부려서 다시 차에 끼워서 홍콩으로 돌아갔다. 이런 수법이 유치하고 황당해보이지만 차들의 수량과 차들의 왕복회수를 감안하면 총수자가 결코 적지 않다. 물론 운전사들이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고, 홍콩세관의 직원들도 뭔가 먹을 알이 있으니까 적당히 눈 감아줬을 것이다. 

 

세관을 속이고 들여온 타이어들은 직접 차량으로 날라 갈 수도 있는데, 훠잉둥 같은 운송업자들이 부두에 날라온 타이어들은 어떻게 날랐을까? 선전(深圳, 심천)이 지금은 유명한 특구이자 대도시지만 물품접수지점으로 쓰이던 당년에는 작은 어항이었고 포장도로는 커녕 변변한 길조차 없었다. 다른 물품접수지점들도 상황이 별로 낫지 못했다. 하여 다수 물품은 인력으로 큰길까지 날라갔다. 작은 타이어는 멜대의 양 끝에 한 개씩 대롱대롱 달고 걸어갔고, 굉장히 큰 타이어는 눕혀놓고 사람이 복판의 구멍에 들어간 다음 줄로 묶어서 멜대로 메고 걸었다 한다. 좁은 보폭으로 바닷가길 지어는 산길을 걸어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겠느냐는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하다. 

 

 

아는 만큼 제재하나 

 

당년의 전쟁에서 중국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물품으로는 양약이 첫손에 꼽힌다. 국산능력이 전혀 없고 소련도 제공해줄 여력이 부족했다. 부상자들이 죽지 않게 하려면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와 다른 양약들이 필수라 홍콩을 통해 들여왔으니 그때 표현을 빌면 페니실린은 황금보다 더 비쌌다. 그렇게 들여와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보내기로 예정된 페니실린의 일부가 상하이시(上海市, 상해시) 시장이며 뒷날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국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을 역임한 천이(陈毅, 진의)의 특명으로 상하이에 운송되어 전 기생들의 성병치료에 쓰였다. 상하이에 욱실거렸던 기생들이 공산당의 기생집 취소운동에 걸려 집중교육을 받으면서 거부감이 심했는데, 천이의 조치에 큰 감동을 받고 자아개조에 열심히 참여하여 제 힘으로 벌어먹고 사는 노동자로 변신했다. 

 

한편 천이는 상하이의 화학전문가에게 부탁하여 페니실린제조를 다그쳤으니 1950년대 초반에 페니실린의 국산화가 실현되었다. 어떤 국산품이 나오면 운수금지반대운동의 품목에서 빠지기 마련이고, 제재와 봉쇄에 매달리는 세력 또한 운수금지품목에서 빼버린다. 1954년부터는 홍콩에서 대규모 밀수 혹은 운수금지반대운동이 사라졌다는데 휴전으로 항미원조전장의 수요가 사라졌다는 원인 외에, 중국의 국산품들이 다양해졌다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제재와 봉쇄는 항상 아는 만큼 진행되는 법이다. 헌데 제재와 봉쇄를 해보기만 했지 당해보지 못한 서방세력들이 거듭 코를 떼이면서도 잘 모르는 게 제재와 봉쇄를 당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그로 인한 노력과 경험, 그리고 성과이다. 

 

1960년대 중반에 귀국한 국민당정권의 전 대리총통 리중런(李宗仁, 이종인)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중국을 수십 년 통치했지만 자전거 한 대도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공산당은 10년 만에 원자탄까지 만들어냈으니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리중런의 회억은 정확하다. 그야말로 가난한 백지상태(중국어로 “이츙얼바이(一穷二白)”라고 표현한다)에서 걸음마를 뗀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방세력의 봉쇄를 받으면서 완정한 산업체계를 세웠고, 작은 물품부터 국산화를 시작하여 1950년대 중후반에는 자전거는 물론 자동차, 비행기 등까지 국산화했다. 헌데 새로운 모순이 생겨났다. 자동차들이 내달리고 비행기들이 날자면 유류가 필요하건만 생산량이 부족한데다가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유류공급이 줄어들다가 딱 끊어져버렸다. 

1960년 7월에 소련이 중국과의 계약을 찢어버리고 전문가들을 철수시켜 중소분쟁이 본격화되었는데, 그해 원유수요량이 1,000만 톤이었으나 생산능력은 고작 5,00만 톤이었다. 사실 그전부터 유류부족으로 차들은 몇 해 째 알코올, 목탄, 가스 등 대용연료를 사용하는 판이었다. 

 

마침 1959년 가을에 헤이룽쟝성(黑龙江省, 흑룡강성)에서 대형유전을 발견한 중국은 이듬해부터 전국의 석유기술자와 노동자, 재대군인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중국어로 말하는 “따후이짠(大会战, 대회전)”을 벌렸다. 투입된 5만 여명은 제재와 봉쇄를 우리 힘으로 분쇄하자는 결의를 다지면서 뭐나 다 부족한 상황에서 전력투구하여 따칭(大庆, 대경)유전을 개발해냈고, 1960년 말에 일간 생산량 7,000톤을 실현했다. 

따칭유전의 대성공과 뒤이은 노력으로 하여, 1964년 12월 저우언라이(周恩来, 주은래)총리는 정부사업보고에서 나라의 경제건설, 국방건설과 인민생활에 필요한 석유를 수량도 품종도 기본상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1965년 연말에 이르러 중국의 원유가공량은 처음으로 1, 000만 톤을 돌파했고, 유류가공능력은 1, 423만 톤에 이르렀다. 

또 몇 해 지나 1970년대에는 원유와 유류를 수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년에 중국공산당을 눈에 든 가시로 여겼던 소련공산당은 경제교류중단으로 중국이 망하리라 여겼는데 중국의 실력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조선에 대한 제재와 봉쇄가 효과를 거두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꽤나 된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조선의 수뇌부가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거나 조선 백성들 혹은 지도층의 일부가 들고 일어나 정부를 뒤엎을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필자는 중국의 생생한 실례들을 너무나도 많이 알기 때문에 제재의 역설(정문일침 310편 “제재의 역설은 이어지리니”를 참조하시라.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4947), 봉쇄의 역설(정문일침 327편 “봉쇄의 역설”을 참조하시라.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5493)을 거듭거듭 강조해온다. 

제재와 봉쇄의 강화로 조선사람들의 적개심, 반발심이 한결 강해지면서 그네들이 즐겨 말하는 “정신력”이 폭발되면 외부가 알지 못하던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가 탄생할 가능성이야말로 다분하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조선이 뭔가 선포하고 무슨 행동인가 취한다면 유전확보선포와 유전개발소식이야말로 적대세력들의 허를 찌르는 최대조치가 아니겠는가. 제재의 의미자체를 없애고, 자력갱생의 무진장한 발전 잠재력을 과시하니 말이다. 그쯤 되면 정말이지 외부세력들에게는 대화가 유일한 선택으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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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유전은 4곳으로 무식이 17/09/26 [10:57] 수정 삭제
  당산곳이 유전으로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지요. 호랑이는 세계3대 유전국으로 알려진지 오래지요.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하고 허수아비노릇을 해서 백성들이 바보가 되어 이 모양이지요. 한마디로 바보를 만들어 힘 안 들이고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구요...
호랑이 유전은 5곳이며 무식이 17/09/27 [10:22] 수정 삭제
  당산곳이 아니랄 방산곳이라고 하지요...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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