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화 가꿔가기16] 남북공동 천문기록연구로 우주해명 큰 성과 기대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10/01 [01: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10. 4선언 발표가 사흘 뒤면 10돌이 된다. 워낙 크게 기념해야 할 정상회담과 중요선언이 특별한 행사조차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남 당국은 북이 견딜 수 없는 제재를 가하여 도발을 멈추고 대화에 나오게 해야 된다는 전략답지 못한 전략에 큰 기대를 거는 모양인데, 봉쇄와 제재에 매달릴수록 막힌 골목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꼴이다. 계속 그렇게 나가면, 북의 취할 수 있는 모든 유화제스처(대화제의를 포함)가 제재에 대한 굴복으로 해석되겠으니, 북이 그런 굴욕을 당하면서 협상테이블에 나오겠는가?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제일 나쁘던 1960~1980년대에도 정기열차는 계속 통했고 무역의 유무상통도 이어졌으며(규모가 작고 서로 저질물품을 제공한다고 나무랐지만) 상대방의 학술견해들에도 주목을 돌리면서 논전을 벌이곤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상대방 언어를 아는 전문가들의 대가 끊어지지 않았고, 1980년대 후반에 화해를 꽤나 빨리 할 수 있었다. 

 

헌데 지금 이남 당국은 대북 봉쇄와 제재만이 정답이라는 식으로 나오니 곁 사람이 보기에도 답답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정부관계자들이 북한 정권교체, 제도전복 의도가 없다는 미국의 말만 따라 외우는데, 딴에는 상대방에게 진정을 보여주어 안심시킨다고 여기겠지만, 상대방의 감수는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국이 조선(북한)제도를 전복하고 정권을 교체하며 흡수통일할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리지 않겠는가? 들을수록 황당하고 화가 나기 십상이다. 

 

9월 28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건군 69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환수를 목표로 하는데, 독자적 방위력을 토대로 한 전작권 환수는 우리 군의 체질과 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라며 "우리가 전작권을 가져야 북한이 우리를 더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작전통제권이 없으면 국가체통도 갖추지 못하니까 환수는 당연히 추진해야 된다. 헌데 남이 전작권을 가져야 북이 남을 더 두려워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어떤 네티즌들은 문 대통령의 기념사에 찬탄을 보냈으나,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조금만 분석해보면 논리의 황당함이 대번에 드러난다. 

북은 수십 년 동안 미국과 맞서면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만약 북이 뭔가를 두려워한다고 설정할 때 그 힘은 미국보다 훨씬 강한 국력과 군력이어야 말이 된다. 그런데 한국이 암만 군력을 늘여보았자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미국의 군사력을 초월할 수 있을까? 

북 사람들이 들으면 문재인이 무슨 새빠진 소리를 하느냐고 비웃기 십상이다. 

 

워낙 일이 제대로 되자면 북이 제일 관심하고 강조해온 식당여종업원들과 김연희 씨 귀환 문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태도를 표시하고 만나서 협상해결하자는 제스처라도 취해야 북이 이남 당국의 진정성을 좀이나마 인정할 것이다. 

그게 국정원과 보수층을 발칵 뒤집는 거대사건이 될까바 걱정이라면 경제와 관계되지 않는 다른 방면의 교류라도 하자고 나서야 할 것이다. 남북이 손잡고 편찬하다가 중단된 《겨레말대사전》을 포함해, 핵과 미사일, 돈줄이라는 걸림돌을 피하면서 진행할 수 있는 교류종목이 얼마나 많은가! 

현재 한국 정부에는 수완이 좋은 인재들은 둘째 치고 수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인간들마저 부족해보여 기가 막히다. 

 

이런 얘기를 하려면 끝이 없기에, 일단 끊고 현재 정치, 경제와 상관없는 옛날 천문기록을 다뤄본다. 

지난 8월 31일 《조선일보》가 미국 과학자들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연구하여 얻어낸 결론을 소개했다. 그에 의하면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미카엘 샤라 박사 연구진은 8월 30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옛날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1437년 3월 11일 관측한 밝은 별이 전갈자리에서 일어난 신성(新星) 현상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한다. 

신문은 고대 천문학 연구결과를 전하면서 조선시대 천문학의 우수성이 또 입증되었다고 평했다. 

《조선일보》가 극우보수의 대표로 불리기는 하나, 아무래도 한국 제1신문이고 정보들이 풍부한바, 정치견해와 관계없는 글들은 볼만한 내용이 꽤나 있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의 설명을 보기로 하자. 

 

“신성은 주변에 있는 별에서 수소를 흡수해 핵융합반응을 일으켜 엄청난 빛을 내는 현상이다. 그보다 더 급격하게 밝아지면 초신성이라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객성(客星)이 처음에 미수(尾宿·전갈자리에 해당)의 둘째 별과 셋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셋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 무릇 14일 동안이나 나타났다"고 기록돼 있다. 객성은 동양 전통 천문학에서 그전까지 없던 별이 돌연 나타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1920~1930년대 하버드 천문대는 페루에서 과거 조선에서 객성이 나타났다고 기록한 곳의 별들을 관측했다. 샤라 박사는 당시 하버드 천문대가 촬영한 천문 사진을 분석해 1437년 객성이 나타난 곳에서 1934년에 다시 신성보다는 밝기가 덜한 왜소(矮小) 신성 현상이 일어났음을 알아냈다.

샤라 박사는 "신성이 발생한 다음 에너지가 약해져 왜소 신성으로 축소됐다가 나중에 다시 신성으로 발전하는 순환 주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천문연구원 김상철 박사는 "조선의 뛰어난 천문 관측 능력과 하버드대의 현대 천문학이 만나 신성의 주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역사서에 남은 천문 관측 기록이 새로운 과학 발견으로 이어진 예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5년 천문연구원 양홍진 박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1073~1074년의 객성 기록을 토대로 당시 물병자리에서 신성이 발생했음을 밝혀냈다. 양 박사는 "당시 논문에서 1437년 조선에서 관측한 객성도 신성일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이번에 입증됐다"고 말했다.” 

 

▲ 세종실록에 나오는 객성(갑자기 새로 나타난 별) 관측 기록, 기록을 살펴보면 매우 정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현대 우주과학자들도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 민족의 기록문화유산은 세계적 수준이다. 남북공동연구가 절실하다.  © 자주시보, 중국시민

 

신문은 객성을 “전에 없던 별”이라고 설명하면서 《세종실록》의 해당 폐이지 사진까지 덧붙였다. 1437년은 세종 19년으로서 명나라 연호로는 정통(正統) 2년이고 3월 11일이 음력으로는 2월 5일이며, 위 기록은 《세종실록》 76권에 나온다. 

원문과 역문은 다음과 같다. 

 

“乙丑 流星出自天中, 向東北入, 尾長四五尺。 日暈, 兩珥。 客星始見尾第二三星間, 近第三星, 隔半尺許, 凡十四日。

을축 유성이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서 동북쪽으로 향하여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가 4, 5척이나 되었다. 햇무리를 하였는데 양쪽에 귀고리를 하였고, 객성(客星)이 처음에 미수(尾宿)의 둘째 별과 세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세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 무릇 14일 동안이나 나타났다.”

 

이 기록과 미국 과학자들의 주장이 필자의 흥미를 자아냈다. 같은 시기 중국의 명나라에는 그 천문현상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명나라 역사 하면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게 청나라 때 편찬된 총 332권인 《명사(明史)》이다. 고대 중국의 정사들은 반드시 천문현상을 기록했으니, 《명사》도 25부터 27까지 3권이 “천문”이다. 별(밤에 관찰한 별과 낮에 보인 별), 달, 해무리, 달무리, 구름 등등 특이상황들을 숱해 기록했는데, “객성(客星)”은 27권의 한 꼭지를 차지한다. 

27권의 “객성”부분에 정통 2년 2월의 특이상황이 없었다. 내친 김에 천문 3권을 낱낱이 훑었으나 역시 정통 2년 2월(二月)은 고사하고 “일월(一月)”, “삼월(三月)” 등 책 편찬과 유통에서 오류가 생기기 쉬운 부분에도 전혀 기록이 없었다. 

 

정통(正統)이란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그의 이름은 주기진(朱祁镇)이고 1427년에 태어나 1464년에 죽었으며 황제노릇을 2번 한 특이한 경력자이다. 정통 14년(1449)에 원정한답시고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가 몽골족의 한 갈래인 와랄(瓦剌)과 싸우다가 포로로 되었는데, 그 동생 주기옥(朱祁钰)이 북경에서 황제자리에 올라 와랄의 침공을 이겨냈다. 포로로서 급기야 태상황명의를 얻었던 주기진은 뒷날 석방, 귀국하여 7년쯤 연금생활을 하다가 1457년 정월에 주기옥이 중병에 걸린 틈을 타서 복벽해 다시 황제로 되었다. 역사적으로 명성이 아주 나쁜 황제이고, 2차례 황제경력 때문에 중국 정사의 수많은 황제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저 《본기(本纪)》가 아니라 “전기(前纪)”와 “후기(后纪)"로 갈라져 기술된 인물이다. 

《명사》10권 《영종전기(英宗前纪)》를 찾아보았으나 2년에 정월의 사건 뒤에 삼월 사건들이 이월이 아예 빠졌다. 

그러면 혹시 원시기록에 있었으나 정사를 편찬할 때 빠졌나?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여 《명영종실록(明英宗实录)》을 찾아보았다. 정통 2년 2월의 기록들이 꽤나 되었다. 을축일에 일어난 일들도 여러 건 기록됐다. 

 

“○乙丑迤北鞑靼剌儿劄等六人携其家属来归 上命授剌儿劄奴伦帖木儿俱为百户克癿哈阿奔把哈儿歹的舌俱为试所镇抚仍给衣服等物

○行在通政使司左通政陈恭奏山西丁壮发来易州采运柴炭去家远甚贫苦异常今易州逃徙之家所遗地亩颇多比年荒芜请除其租税暂令山西丁壮耕种俟彼复业仍还前主庶野无遗利人得安生从之

○镇守狭西都督同知郑铭奏去岁以甘肃边储馈运之艰请留狭西轮班匠给之今行在工部遣官逮捕逃匠计其家属及械送者不下六七千人臣以西寇未平乞仍留之俟寇平即遣赴工 上从之仍敕狭西布政司阅其名数使皆实运边储毋作奸弊

○行在光禄寺卿郝郁卒

○丁卯释奠先师孔子遣礼部尚书兼翰林院学士杨溥行礼

○戊辰祭 太社 太稷遣卫王瞻埏行礼

○遣顺天府官祭先农之神

○命豊城侯李贤佩征西前将军印充总兵官代都督方政镇守大同仍敕贤俟政巡哨回即交印还京

○巡抚大同宣府右佥都御史李仪下狱先是仪举奏管粮参政刘琏诸违法事琏亦讦仪淫乱等事适参将都指挥石亨欲条奏镇守大同太监郭敬罪恶先以咨仪仪误封咨帖于户部盘粮主事文卷中户部以闻致敬亨亦相奏讦 上以仪等俱任边寄姑令自陈既而敬亨俱蒙赐敕移文戒饬容其改正自新琏以言不尽情复令御史体覆取死罪招停俸二年仪虽输罪自负理直辞颇欠婉于是御史给事中交章劾仪琏请逮治之 上命宥琏俟仪面白听劾至是仪至廷讯狱成竟以瘐死然仪实为琏所诬时议惜之

○福建兴化卫奏正统元年九月十七日本卫仓廪火烧毁仓粮二万余石

○有流星大如盏赤光烛地出宗正西南行至浊”

 

허나 객성이나 미수와 관계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쯤 되면 명나라 천문학자들이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혹시 명나라의 민간기록이나 필기소설(筆記小說) 따위에 나타날 수는 있더라도 정부의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고대에 천재이변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거나 일식, 월식을 제때에 기록하지 못하면 천문관측을 맡은 관료들이 엄벌을 받았음을 감안하면, 기록을 빠뜨린 게 아니라 그 현상을 보지 못했다고 여기는 게 합리한 추측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10여 일 동안 밤하늘이 흐려서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만, 이월에 그렇게 되기가 어렵고 또 그렇게 오래 날씨가 나빴다면 기록을 해두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리적 위치 때문에 보지 못했을까? 필자는 천문학을 잘 모르기에 단언하지 못한다만, 언젠가 유흥준 선생의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북 천문학자들이 고구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반도 북부의 어느 지점에서 관측하여 만든 것이라고 얘기하더라는 걸 본 적 있다. 

 

만약 그 객성의 출현과 변화가 근 600여년 전의 서울에서만 관측된 천문현상이거나, 서울에서만 기록된 천문현상이라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타 고전자료들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 

한국 어느 전문가의 개인적인 연구나 미국 어느 집단의 연구가 아니라, 남과 북의 다방면 전문가들이 합쳐서 천문, 지리, 기상, 질병, 식물분포 등등을 연구하면 장점들이 발휘되고 단점들은 보완되면서 얼마나 훌륭한 성과들을 거두겠는가! 

 

천문현상만 해도 다른 나라들의 동시기 기록에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가를 살펴보고 비슷한 기록이 있다면 반도의 기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 등등을 상세히 분석해보면 옛날의 하늘만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도 보다 잘 알 수 있다. 이런 사업은 반드시 대량의 인력과 재력, 물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허나 연구결과가 민족의 자랑으로 되리라는 걸 고려하면 투자를 훨씬 넘는 수익이 나오지 않겠는가.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전망이다. 일류의 학술성과를 얻으려면 꼭 일류의 정치가 있어야만 되는 건 아니지만 삼류나 그보다 더 못한 정치가 일류의 학술성과창조를 방해함은 틀림없다. 수완 있는 정치인들의 가입과 활약으로 한국 당국이 변화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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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성기록은 대륙고려 및 대륙조선의 천문관측 소산 조선은 대륙에 있었다 17/10/06 [14:23] 수정 삭제
  중국시민님께서 올리신 이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다만 1437년 관측기록이 '世宗實錄'에 있는데 반해 '明史'나 '明英宗實錄'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지리상 위치와 관련지어 의아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 짧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明'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왜곡되어 알려진 것과는 달리, 지금의 대륙을 역사무대로 삼고 있던 朝鮮의 제후국 정도였거나 그보다도 실체가 미미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객성관련 기록이 소위 '명사'나 '명영종실록'과 같은 것에 나오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며 당연합니다. 실체가 없거나 있었다해도 그런 현상을 관측하고 기록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밝혀보아야 할 문제이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및 고려와 조선은 모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틀고앉은 대륙을 역사무대로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천문관측에 따른 하나의 방증은 박창범, 라대일 교수가 쓴 '三國時代 天文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한국과학사학회지, 제16권 제2호(1994))이라는 논문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논문에 나타난 검증결과를 보면, 삼국의 독자적인 일식 관측 최적지는 초기신라의 경우 양자강 유역, 백제는 발해만 지역,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보다 더 (대륙의) 고위도 지방으로 나타납니다.)
글의 말미에 '일류의 학술성과를 얻으려면 적어도 삼류나 그보다 못한 정치가 방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신 부분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제 동족을 죽여달라고 해외에 나가서까지 구걸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식민지 남녘땅의 꼭두각시들이 그 무슨 수완을 갖거나 변화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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