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8] 빼앗은 재물을 써보지도 못한 류허우중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10/08 [06:17]  최종편집: ⓒ 자주시보

변절의 추학 7편 “변질이 변절로 이어진 싱런푸”(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5345)에서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이 몇 해 사이에 10배 이상으로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일시 풍운아로 이름을 날렸던 싱런푸가 부화, 타락하다가 변절해버린 경력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항일전쟁시기 중공의 다른 큰 부대인 신사군 및 신사군에서 생긴 변절자를 다루겠다. 싱런푸보다 지위나 직급은 훨씬 낮으나 위해는 훨씬 컸고 또 싱런푸처럼 잘 먹고 잘 놀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가 사라진 류허우중(刘厚总, 류후총)이다. 

 

✦신사군 

 

중공혁명사에서 팔로군, 신사군(新四军)이 항상 병기되지만 그 실력과 전적은 크게 차이난다. 전면적인 항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대장정 이후 남방의 8개 성에 남았던 유격대들을 정규군에 편입시키는 문제가 부각되었는데, 공산당은 국민당과 어려운 담판을 거쳐 국민혁명군 육군 신편 제사군(国民革命军陆军新编第四军)으로 편성하기로  10월 12일에 합의했다. 이 신편제4군을 줄여서 신사군이라 부른다. 

 

1938년 1월에 4개 지대로 이뤄진 신사군의 병력은 1만여 명에 총 5천여 자루였다. 전해 여름에 팔로군이 생겨날 때와 비기면 3분의 1정도 실력이다. 그런데 몇 해 지나 팔로군이 10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산둥성, 허베이성, 산시성 등 넓은 지역에서 수많은 근거지를 만들어낸 변화와 달리 신사군은 고작 몇 배 늘어났고 그나마 팔로군의 간부들 지어는 부대가 통째로 신사군에 편입되어서야 몇 만 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1945년 항일전쟁이 끝날 때 신사군의 총병력은 28만으로 집계됐는데 팔로군보다 훨씬 약했고 유명한 전투들도 팔로군보다 적었다. 신사군의 실력이 충분히 늘어나지 못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많은 논자들은 신사군의 부군장이며 실질적으로 정치위원이었던 샹잉(项英 항영, 1898~1941)의 탓이라고 판단한다. 

 

▲ 신사군 부군장 시절의 샹잉     © 자주시보, 중국시민



✦신사군의 실제 제1인자였던 샹잉 

 

전날 변절의 추학에서 언급했다시피 샹잉은 중공중앙이 대장정을 떠나면서 중앙소베트구역에 남겨둔 최고위 간부였다. 천이(陈毅 진의)와 함께 간고한 3년 유격전을 이끌었고 남방유격대들을 정규군으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제1인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공산당과 쟝제스(蒋介石, 장개석)가 이 부대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데 있었다. 쟝제스는 남방에 중공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부대로 만들려고 애썼다. 하여 그는 공산당원의 당성이 투철한 반면에 군사적 명망이 부족한 샹잉이나 다른 유격대 지휘원이 부대장으로 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부대장 후보를 놓고 줄다리기 하던 끝에 북벌전쟁시기의 명장 예팅(叶挺 엽정, 1896~ 1946)을 군장으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쟝제스의 입장에서는 예팅이 원래 군벌부대 출신이고 1920년대 말에 중공을 이탈했으니까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중공중앙은 당의 통제능력과 예팅의 충성에 자신감이 있었다. 

 

예팅은 2017년 여름에 개봉된 영화 《건군대업(建军大业)》에서 주요배역으로 나오는바, 8월의 난칭봉기(南昌起义, 남창기의)와 12월의 광저우봉기(广州起义, 광주기의)에서 모두 지휘원이었다. 두 봉기가 실패로 끝난 다음 중공이 이듬해 소련에서 회의를 열고 검토하던 과정에서 과분한 비난을 받은 예팅은 홧김에 중공에서 탈당하고 1937년 가을까지 야인생활을 했다.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북벌전쟁시기의 명장 명성으로 하여 예팅을 끌어당기는 세력들이 적잖았는데, 예팅은 중공의 부름에 기꺼이 응했고 당의 지휘를 받겠다고 다짐했다. 

신사군의 설립 초기 군장은 예팅, 부군장은 샹잉, 참모장은 장윈이(张云逸, 장운일, 1955년에 중국인민해방군 대장 군사칭호를 수여받음), 정치부주임은 위안궈핑(袁国平), 부주임은 덩즈후이(邓子恢)로서 예팅을 내놓고는 모두 10년 내전에서 꾸준히 싸워온 중공간부들이었다. 1955년에 중화인민궁화국 원수칭호를 수여받은 천이는 제1지대장으로서 일선에 나가 싸웠다. 

그리고 중공의 당조직으로서 중앙군사위원회 분회(分会)가 만들어져 샹잉이 서기로 천이가 부서기로 되었다. 워낙 예팅은 복당을 바랐으나 중공이 국민당과의 합작문제를 고려하다나니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예팅은 신사군의 군장으로서 명의상 제1인자이면서도 당원이 아니라 당내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게 되어 실제 권력을 샹잉이 쥐고 흔드는 이상한 국면이 생겨났다. 

 

샹잉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일찍 스탈린의 접견을 받고 권총을 선물로 받은 것이 굉장한 자랑거리였다. 워낙 인텔리들이 많았던 중공은 대혁명의 실패를 검토하면서 노동자출신을 굉장히 강조했고 한때는 순 노동자였던 샹중파(向忠发, 향충발)를 총서기로 선거했으며 중앙핵심에도 노동자출신들이 적잖이 들어갔다. 유감스럽게도 샹중파는 체포되자 변절해버렸고 다른 노동자출신 간부들도 지조를 지키지 못한 사례들이 많이 만들었다.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노동자 출신 혁명가들 가운데서 1955년에 대장 칭호를 수여받은 쉬하이둥(徐海东, 서해동)을 내놓고는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샹잉이나 꼽을 수 있는 정도다. 

 

샹잉은 인격이나 도덕은 훌륭했으나 정세판단과 전략전술에는 약했던 인물이다. 중앙소베트구역 시절부터 부주석으로서 주석 마오쩌둥(모택동)과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고 정견이 달랐던 그는 대장정에서 중공중앙과 홍군부대가 겪은 위험, 마오쩌둥의 구원 등을 몸으로 느끼지 못하다나니 마오쩌둥이 중공의 수령으로 부상된 게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그와 구미가 맞는 왕밍(王明, 왕명)이 소련에서 귀국하여 공산국제의 흠차대신 격으로 우쭐대면서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거쳐야”라는 구호를 내걸고 국민당과의 합작을 강조하니 그쪽으로 넘어가버렸다. 

항일전쟁 초기에 왕밍은 남방의 중공조직을 책임지는 창쟝쥐(长江局, 장강국)의 책임자로서 가끔 중공중앙을 대신하여 명령을 내리기도 했는데, 그의 말에 제일 동조한 인물이 바로 신사군의 군권을 잡은 샹잉이었다. 

샹잉은 국민당이 그어놓은 활동지역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신사군 부대들에게 강요했고 국민당과의 마찰과 충돌을 피하라고 강조했다. 천이와 그 부하들이 꼼수까지 써가면서 그 틀을 깨지 않았더라면 신사군의 병력이 몇 배로마저도 늘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전략의 부족을 내놓고도 구체적으로 심각한 모순은 샹잉과 예팅 사이에서 생겨났고 커졌다. 샹잉이 생활과 전투에서 고생을 많이 해보아 소박한 본보기로 꼽히는 것과 정반대로 예팅은 충분히 개조되지 않은 군벌부대들을 지휘한 경험이 있을 뿐 인민의 군대에서 활동한 경력이 없고 생활습관 또한 조금 과장하면 귀족풍이었다. 

천이는 예팅을 충분히 존중하고 여러 모로 말이 통했으나, 샹잉은 생각도 언어도 생활도 전투도 예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여 예팅은 시집살이를 어렵사리 하다가 아예 군부를 떠나기도 했는데, 저우언라이(주은래)가 직접 예팅을 데리고 신사군 군부에 돌아갔고 예팅과 다른 간부들의 단결을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각자 자아비판을 하고 겉으로는 화해했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물과 기름이었다. 

 

신사군이 몇 배 늘어나면서 활동구역도 국민당의 제한을 벗어났는데, 주변 환경이 굉장히 복잡했다. 일본군, 괴뢰군, 국민당 정규군, 국민당 지방부대, 토비 등등이 주위에 있거나 아예 한 고장에 엉켜서 치열한 싸움을 벌렸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 중앙과 마오쩌둥은 신사군 군부가 창쟝(长江, 장강, 양즈쟝)을 건너 북상해야만 활무대를 확보한다고 판단하여 신사군 군부와 직속부대의 북상을 거듭 명령했다. 나름 타산과 고려가 있던 샹잉은 질질 끌다가 1941년 1월에야 군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부대는 국민당 수만 명의 포위에 들어 참패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중공혁명사에서 “3대패전”의 하나로 꼽히는 완난사변(皖南事变, 완남사변)이다. 다른 2차례 패전은 대장정 초기의 샹장전투(湘江之战, 상강전투, 1935년 말)과 서로군(西路军)의 실패(1936~ 1937년)이다. 

 

✦신사군이 큰 손실을 본 완난사변 

 

항일전쟁 초기에 국민당도 일본군도 중공의 부대를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규군 수십 만을 단위로 싸우는 판국에서 고작 수만 명이 유격전을 해보았자 무슨 수가 있겠느냐고.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고 팔로군, 신사군이 급팽창하더니 1940년에는 전국을 놀래는 싸움들을 벌렸다. 

특히 팔로군은 100여 개 퇀(团, 연대)를 동원하여 8월부터 12월까지 대규모 습격전, 파괴전을 진행했으니 역사상 “바이퇀대전(百团大战, 백퇀대전)”이라고 불린다. 일본이 확실히 먹었다고 믿던 화베이(화북, 중국 북부)지역에서 전투력이 강한 중공의 정규부대가 10여만 명이나 모여 전투했고 그 바람에 교통선이 끊어지고 운수가 망태기로 됐으며 인원들도 숱한 손실을 입었다는데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주력을 화베이로 돌려 치안확보전을 벌리기 시작했고 그로 하여 중공과 팔로군, 유격대, 민병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신사군은 그 일부가 천이의 지휘 하에 쟝수성(江苏省,강소성)에서 항일을 방해하는 군벌 부대 1.1만 여명을 소멸하는 황챠오전역(黄桥战役, 황교전역)을 10월에 진행하여 세력범위를 넓히고 입지를 굳혔다. 

이 두 전역이 이듬해 1월에 일어난 “완난사변”의 도화선으로 꼽히곤 하는데, 특히 바이퇀대전은 중공의 실력을 너무 일찍 드러냈고 부대손실이 상당하며 국민당과 일본군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중공중앙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등 비난을 받았고 전역을 지휘한 펑더화이(彭德怀, 팽덕회)가 죽을 때까지 누명을 벗지 못했다. 

결과를 볼 때 팔로군과 신사군의 대활약은 국민당 특히 쟝제스의 불안을 자아냈고 보복을 꾸미게 하였으니 신사군이 그 과녁으로 되었다. 

 

신사군 군부는 활동에 따라 옮기다가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에 상당기간 머물렀는데 안후이성의 약칭이 완(皖)이고 그 남부를 “완난(皖南)”이라고 부른다. 

군부가 주둔지 윈링(云岭)에서 창쟝(장강)을 건너려면 길이 3갈래가 있었다. 언제 어느 길을 가는 게 유리하고 안전하냐를 놓고 쟁론이 많았었고 지금까지도 쟁론이 그치지 않는다. 마오쩌둥의 주장대로 일찌감치 어느 길로 북상했더라면 손실을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과 샹잉이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주장이 맞서고, 심지어 모든 것이 마오쩌둥의 음모라는 주장도 나왔다. 

 

아무튼 신사군 군부와 소속 지대 9, 000여명은 1941년 1월 4일에 윈링을 떠나 북으로 가다가 6일 완난 징현(泾县, 경현) 마오린촌(茂林时, 무림촌)에서 국민당군 8만 여명의 매복에 걸렸다. 7주야 전투 끝에 2, 000명 가량 포위를 돌파했을 뿐 대다수 전사하거나 사로잡혔다. 샹잉과 일부 고급간부들은 중도에 부대를 버리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위신이 떨어졌고, 예팅은 옛 친구였던 적군 지휘관과 담판하다가 억류되었다. 

예팅은 5년 가량 국민당의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항일전쟁 승리 후 풀려났는데 첫 번째 요구가 복당이었다. 유감스럽게도 1946년 4월 8일 충칭(重庆, 중경)을 떠나 중공중앙이 소재한 옌안(延安, 연안)으로 가던 도중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세상을 떴다. 그가 살아남았더라면 틀림없이 원수로 될 텐데, 뒷날 신사군의 대표자로서 천이가 원수칭호를 받았다. 

예팅은 전투경력이 풍부하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등 부족점들이 많지만 절개는 굳셌다. 

그가 감방의 벽에 쓴 시 《수인의 노래(囚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후 교과서에 실려 여러 세대 사람들을 교양했다. 

 

사람 나드는 문은 꼭 잠겨져있고, 

개가 드나드는 구멍만 활짝 열렸는데 

높이 외치는 소리—— 

기어나오라, 자유를 줄 테니! 

내 자유를 갈망하기만 

깊이 아노니

인간의 몸이 어찌 개구멍으로 기어나갈소냐? 

나는 바라나니, 어느 날엔가 

지하의 열화가 

나와 이 살아있는 관을 함께 불타버리기를 

나는 열화와 열혈 속에서 영생하리라! 

(为人进出的门紧锁着,

为狗爬出的洞敞开着,

一个声音高叫着:

爬出来吧,给你自由!

我渴望自由,

但我深深地知道——

人的身躯怎能从狗洞子里爬出!

我希望有一天,

地下的烈火,

将我连这活棺材一起烧掉,

我应该在烈火与热血中得到永生!) 

 

이 시 때문에 변절자를 가리켜 “개구멍으로 빠져나왔다”는 표현이 생겨났고, 절개를 지킨 혁명가들이 열화 속에서 영생한다는 말도 널리 쓰였다. 

이 시는 조선어로도 번역되어 중국에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조선에도 전해져 어느 비전향장기수 선생이 한국의 교도소에서 읊었다 한다. 

 

 

✦류허우중의 등장과 살인 

 

완난사변 발생 후 쟝제스는 중공을 맹공격하면서 신사군 번호를 취소해버렸다. 그에 맞서서 중공중앙 군사위원회는 1월 20일과 22일에 선후하여 명령과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여 신사군 군부를 재건했으니, 대리군장으로 천이, 부군장으로 장윈이, 정치위원으로 류사오치(刘少奇, 류소기), 참모장으로 라이촨주(赖传珠, 뢰전주), 정치부주임으로 덩즈후이가 임명되었다. 당시 7개 사(사단)과 학교, 특무퇀까지 합쳐서 약 9만 명이던 신사군은 이때로부터 국민당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활개치며 발전해 4년 뒤에 정규부대 28만 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완난사변에서 포위를 뚫은 사람들의 경력은 각이하다. 어떤 사람은 직접 북으로 가서 창쟝을 넘어 새 신사군에 들어섰고 어떤 사람들은 사로잡혔다가 신분을 속이고 거짓말하여 풀려나서 좀 에돌다가 북상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방랑하여 상하이(上海, 상해)까지 갔다가 어렵사리 부대로 돌아갔다. 

예팅의 경력과 결말이 분명했던 것과 달리, 샹잉과 다른 고위간부들은 오랫동안 뭉뚱그려 희생되었다거나 전사했다고 알려졌었는데,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 

정치부주임 위안궈핑(袁国平, 1906~1941)은 포위돌파과정에 심한 부상을 입으니 동지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1월 15일에 권총으로 자결했다. 

샹잉과 신사군 부참모장 겸 신사군 교도총대(教导总队) 총대장 저우즈쿤(周子昆, 주자곤1901~1941)은 포위를 성공적으로 뚫고 나갔으나 둬 달째 적들이 봉쇄한 창쟝을 건너지 못하고 맴돌다가 변절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 변절자의 총에 맞아 희생된 저우즈쿤     © 자주시보, 중국시민

 

떠도는 과정에서 샹잉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면서 아직도 수십 명이 있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잘 싸우자고 동지들을 격려했다. 그러다가 3월 14일에 징현 미펑둥(蜜蜂洞, 밀봉동)에서 변절자의 총에 맞아 희생되었으니, 흉수는 류허우중이라는 인물이다. 

샹잉은 포위를 뚫는 과정에서 1월 16일 저녁에 류허우중과 부딪쳤다. 워낙 알지 못하는 사이였으나 군부의 부관처에서 일했다는 말을 듣고 동행을 허락했는데, 13일 낮에 샹잉이 옷을 볕에 쪼이다가 휴대한 금이 드러났다. 전쟁시기 중공의 고급간부들은 경비와 비상금으로 황금을 휴대하는 게 관례였다. 그 금을 류허우중이 탐낸 것이다. 

13일 낮까지만 해도 샹잉과 저우즈쿤은 밀봉동에서 장기도 두고 담소도 하는 등 기분이 좋았는데, 밤 2시경에 사망했다. 미펑동은 “꿀벌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그마해서 샹잉, 저우즈쿤과 류허우중, 샹잉의 경위원 황청(黄诚, 일명 왕청王成왕성) 4명이 자고, 다른 사람들은 아래쪽의 다른 곳에서 잤는데, 허점을 파악한 류허우중이 연거푸 총질하여 살인하고는 금, 은전, 금시계, 만년필과 총들을 모두 챙겨서 달아났다. 

하산하는 과정에서 샹잉의 경위원 리더허(李德和, 이덕화)과 마주친 류허우중은 거짓말로 리더허를 빼돌리고 달아났다. 리더허와 전우들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미펑동으로 달려가 보니 이불을 들쓰고 자다가 목과 손을 다치는데 그친 경위원 황청만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통곡하면서 샹잉과 저우즈쿤을 묻었고 해방 후 난징(南京, 남경)의 위화타이(雨花台, 우화대) 열사능원으로 이장했다. 샹잉, 위안궈핑, 저우즈쿤은 “완난사변 3열사(皖南事变三烈士)”로 불린다. 

 

 

✦류허우중의 경력과 결말 

 

샹잉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중공의 최고위 간부이다. 비록 신사군 부군장 직무를 사실상 잃었고 또 귀대하더라도 비판을 받기 마련이지만,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변절자의 총에 맞아 죽은 건 중공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었다. 샹잉이 오류를 많이 범하기는 했어도 잘한 일도 많으므로 공식평가에서는 걸출한 혁명가로 불린다. 

 

그러면 샹잉과 저우즈쿤을 살해한 류허우중은 어떤 인물인가? 그때 그의 신분은 부관이었다. 

1903년에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차링현(茶陵县, 다릉현)에서 태어난 류허우중은 젊은 시절 유격대에서 싸웠는데 키가 크고 총을 잘 쏘았다 한다. 대대장, 정치위원 등 직을 맡았고 현위원회에서 위원으로도 되는 등 경력은 비교적 화려했다. 

항일전쟁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 다음 1938년 4월에 유격대가 신사군에 편입되었고 9월에 류허우중이 옌안에 파견되어 공부했는데 힘들다고 뺑소니쳐서 고향에 돌아가 다시 유격전을 벌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신사군으로 돌아왔다. 정규부대에서는 연장(중대장), 지도원도 맡을 능력이 부족해 군부 부관처에 배치되어 제3과(第三科)의 부관으로 되었으니 목수반(木工班)과 사양반(饲养班)을 책임졌다. 그는 나무를 깎고 말을 먹이는 후방인원들을 관리하게 한다고 불만을 품었다는데, 아마 자기보다 경력이 짧은 사람들이 연이나 영(대대)을 거느리는 것과 비교하면 체면이 깎였을 것이다. 

 

류허우중은 산을 내려간 다음 우선 타이핑현(太平县, 태평현)의 거허리(隔河里, 격하리)에 가서 바오장(保长, 보장)을 찾았다. 바오장이란 국민당식 연좌제에서 치안을 맡은 책임자이다. 그자는 류허우중의 몸을 수색하여 무기와 재물을 빼앗았으나 샹잉, 저우즈쿤을 죽였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뒤이어 류허우중은 징현의 마오린진으로 가서 국민당 군정부 제11위생대대의 담가련(担架连)에 소식을 알렸다. 헌데 연장 왕후우쥬(王惠九, 왕혜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류허우중은 징더현(旌德县, 정덕현)의 위핑향(玉屏乡, 옥병향)으로 가서 이름을 리정화(李正华, 이정화)로 바꾸고 제3전구(第三战区)의 특무밀사원(特务密查员)으로 자칭하면서 자기를 제3전구 사령부로 보내달라고 향공소(乡公所, 향의 정부)에 요구했다. 옥병향 공소가 그를 징더현 정부로 압송하여, 현장  리세쿤(李协昆, 이협곤)이 거듭 심문한 끝에 특종공작행동대(特种工作行动队) 대장 천스신(陈思新, 진사신)등을 파견해 류허우중의 안내하에 미펑동으로 가서 조사해보게 했다. 샹잉과 저우즈쿤의 시체가 이미 매장되었고 부상자도 옮겼기에 현장에는 양초, 장기쪽, 빗만 남았다. 중공의 징징타이(泾旌太, 경정태) 중심현위(中心县委) 서기 훙리(洪林, 홍림)가 마을 사람들에게서 류허우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미펑동 부근에서 쏴죽이려 했는데 류허우중이 먼저 낌새를 채고 달아났다. 

이번에는 타이핑현(太平县, 태평현) 소재지로 가서 국민당의 현당부를 찾았다. 현당부는 그를 슈닝현(休宁县, 휴녕현) 마오시진(屯溪镇, 모계진, 지금은 풍경구로 유명한 황산시黄山市에 속함)에 있는 국민당 안후이성 당부 완난판사처로 압송했고, 뒤이어 류허우중은 완난행정공서(行政公署)로 옮겨졌다. 심문이 거듭되었다. 1943년 겨울에 완난행정공서는 류허우중을 전시수도 충칭으로 압송했다. 국민당특무조직인 군통의 자즈동(渣滓洞, 사재동) 간수소에 5년 동안 갇혀있던 류허우중은 1948년에야 풀려났는데 국민당 특무조직은 돈을 좀 주면서 원적지로 돌아가라고 했다. 

1948년 5월 10일에 류허우중은 쟝제스에게 보고서를 올리면서 샹잉을 죽인 공로를 자랑했다. 샹잉의 재능과 지위로 미뤄볼 때 오늘까지 살아남게 했더라면 영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니까 자신이 정부를 위해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느냐도 가늠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러 해 감금되면서 귀, 눈, 발에 모두 중병이 생겼고 나이를 많이 먹었으며 친척이 없는데, 2, 500만원(국민당 통치말기에 인플레가 심해 돈 한 자루로 치약 한 개를 산다는 말이 나돌았으므로 2, 500만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을 받았지만 치료비용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입고  떠돌고 살 비용이 전혀 없다고, 그러니 따로 구제비 혹은 상금을 내려줍시사고 애걸했다. 또한 자수증서와 여권을 발급해달라고 청구했으며 이름을 요즘 류슝(刘雄, 유웅)으로 고쳤다고 알렸다. 

여기까지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뒤의 경력은 설들만 있을 뿐 확실한 자료가 없다. 류허우중이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쟝시성(江西省, 강서성)을 방랑하다가 1952년에 저우즈쿤의 옛 경위원에게 체포되어 8월에 총살당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류허우중이 1949년 12월까지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는데 충칭을 해방하는 군대를 피해 국민당패잔병을 따라 도망가다가 길에서 죽었다는 설도 근거가 부족하다. 

 

하기에 류허우중은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다.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으나 써볼 기회마저 얻지 못했으니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가. 

 

 

✦소설과 드라마 속의 류허우중 

 

류허우중이 변절한 뒤의 경력과 결말이 분명치 않으므로 문학예술인들에게는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겨주었다. 1980년대에 명작가 리루칭(黎汝清, 여여청, 1928~ 2015)이 장편소설 《완난사변》을 발표하면서 많은 허구를 했다. 

 

▲ 중공 전쟁사의 3대패전을 소설화한 작가 리루칭     © 자주시보, 중국시민

 

우선 이름을 한 글자 고쳐 류허우중(刘厚忠)이라고 함으로써 충성 충(忠)자와 변절의 차이를 한결 늘였고, 류허우중이 3년 유격전쟁시기 줄곧 샹잉을 따라다녔다고 설정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실제보다 훨씬 가깝게 만들었다. 충성과 배반의 모순된 심리가 장편소설의 중요한 구성부분인데, 마지막에는 류허우중이 감옥에서 환각과 고통에 시달리다가 벽에 부딪쳐 자결하는 것으로 그렸다. 

한편 2003년에 방영한 26부 드라마 《신사군》에서는 워낙 국민당군 출신으로서 샹잉 등을 살해한 다음 주요배역들의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그려졌다. 이는 배역들의 운명을 간소화해야만 되는 드라마의 특성과 관계된다. 

 

▲ 26부 드라마 《신사군》     © 자주시보, 중국시민



✦다른 한 변절자 자오링버 

 

완난사변에서 포로로 된 신사군 장병들 가운데는 집중영과 간수소들에서 여러 해 고생하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사변과정과 그 직후에 변절해버린 자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서 직위가 류허우중보다 훨씬 높았으나 변절의 성과가 별로 없었고 결말도 뚜렷한 인물이 하나 있다. 신사군 군부의 참모처장이었던 자오링버(赵凌波, 조능파, 1908~ 1943)다. 장편소설 《완난사변》에서도 꽤나 무게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스촨성(四川省) 루현(泸县, 노현) 태생인 자오링버는 젊은 시절 지방군벌부대에 참가했다가 홍4방면군이 남하하여 잉산(英山, 영산)에서 싸울 때 사로잡혔다. 나팔을 잘 불었고 군사기술도 좋았으므로 홍군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참군 후에는 용감하게 잘 싸워 입당하고 간부로 되었으며 홍군시기의 최고 직무는 15군단(十五军团) 제75사(第75师) 정치위원이었다. 항일전쟁 초기에 팔로군 115사 344여 687퇀 부퇀장으로 일하던 자오링버는 후에 신사군으로 옮겨가서 제3지대 참모장으로 되었으며 뒷날 신사군 사령부 참모처 처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1월에 신사군 군부가 북으로 철수할 때 자오링버의 직무는 제1종대 부사령원이었는데 완난사변에서 사로잡히니 변절했다. 

예팅에게 항복을 권하다가 코를 떼였고 국군 수정지휘부 반공부전원((国军绥靖指挥部反共副专员)으로 되어 신사군 유격부대포위토벌을 전담했던 자오링버는 1942년 5월에 변장하고 안후이성 판창호(繁昌湖, 번창호) 양충(阳冲)의 신사군 지방부대 주둔지에 잠입하여 국민당 감옥에서 탈출한 사변포로로 자칭하면서 중공 정황을 정찰하려 했으나, 57퇀 2연 지도원 둥상차이(董南才, 동상재)에게 발각되었다. 7사 사장 푸츄타오(傅秋涛)는 자오링버가 57퇀 지휘부로 압송되었다는 전보를 받고 7사 지휘부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57퇀의 정찰반(분대)은 자오링버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그를 묶지 않았고 “호송”의 명의로 움직였다. 우선 7사에 갔다가 기회를 노려 쟝수성 북부의 신사군 군부에 압송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새벽에 스둥부(石涧埠) 부근의 길가에서 휴식할 때 자오링버가 급작스레 국민당군 거점을 향해 달려갔다. 압송책임자 리우번(李务本, 이무본)이 즉시 정찰반을 데리고 추격했다. 

자오링버는 우리는 원수를 지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핍박하느냐고 살길을 내달라고 고아댔고, 리우번은 뛰지 말라고, 뛰면 쏴죽이겠다고 경고했다. 자오링버는 반항하다가 당장에서 사살되었다. 7사 지휘부가 보고를 받고 사람을 보내 현지에서 시체를 검사한 뒤 군부에 보고했다. 

한때 영광스러운 역사를 기록했던 자오링버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변절자들은 대개 스스로 영리하다고 시대의 변화를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결말은 비참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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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염병하고 안자있네 짱꼴라 개새끼 한국청년 17/10/08 [08:31] 수정 삭제
  가서 에미 보지나 입이 불케 빠라라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자민통 17/10/08 [09:45] 수정 삭제
  변절자의 추한 행태를 읽게 되면 쓴물이 넘어옵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동지를 팔고
고문의 고통에 못이겨 동지를 팔고...

어쩌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시 매번 변절의 순간에 맞닥들이고 있습니다.
올바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스스로 신심을 높이지 못하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변절의 길에 들어서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처음부터 작심하고 변절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매번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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