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12] 중공정보조직 최대피해사건과 왕스잰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1/06 [04:5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지하당과 정보조직의 차이 

 

중국에서는 중공 지하당을 묘사한 영화와 드라마들을 많이 제작했고 흥행성공한 작품들도 많다. 관중들은 좋다는데 진짜 지하당 출신들과 그 후대 및 지하당 연구자들은 불만이 가득하다. 저게 어디 지하당인가? 지하당이 어디 저런 일들을 했는가? 지하당이 무슨 정보를 저렇게 수집했는가?... 

 

현대 중국의 문예환경에서 지하당은 확실히 엉뚱하게 해석된다. 중공 역사에서 지하당은 지하당이고 정보조직은 정보조직으로서 많이 달랐고 특히 1940년대 중후반의 해방전쟁기간에는 분공이 상당히 엄격했다. 지하당은 장기적으로 은폐하면서 힘을 기르는 게 목적이었기에 각지 지하당은 내부 분공에 따라 노동자, 학생, 상공인, 소시민 등을 상대로 특별히 튀지 않는 선전을 진행하여 민심을 중공 쪽으로 끌어오는 게 주요 업무였다. 물론 우연히 정보를 얻게 되면 조직선을 통해 전달했으나 주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지는 않았다. 변절의 추학 11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240)에 나오는 스촨성의 지하당원들은 모두 정보와 상관이 없었다. 

 

정보조직은 정보수집과 전달이 목적이었으므로 지하당의 선전과 민심쟁취 업무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정해졌다. 오히려 공산당을 욕하면 욕할수록 신분위장과 정보수집에 유리했다. 

때문에 지하당의 일은 자질구레하고 따분하며 눈에 뜨이는 성과도 별로 없었으나 해방군이 하나하나의 지방들을 해방한 뒤에 정권을 굳히는 면에서는 굉장히 중요했다. 단 극성이 부족하여 소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는 재미가 덜하다. 

 

반대로 정보조직의 일들이 극적이므로 수십 년 동안 숱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보지직과 지하당의 개념을 혼동하여 “지하당”이라 몰밀어 불렀고, 또한 뒤로 갈수록 외래 영화, 드라마들과 경쟁하기 위해 제멋대로 엮다나니 비판이 많아졌다. 

 

영화, 드라마에서는 “지하당”(실제는 정보일꾼)이 좋은 집에서 살고 멋지게 차려입고 스용차를 몰고 돈을 팍팍 쓰는데, 어디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중공이 얼마나 가난했는데 그렇게 꾸며내는가? 

주인공이 걸핏하면 미녀와 팔짱을 끼고 고급 요리점, 댄스홀을 드나드는데 예전에 실제로는 그럴 돈도 없었거니와 그런 짓을 한다면 자결이다. 미녀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게 아주 중요한 교훈이다. 미녀는 눈여겨보는 사람이 많으므로 그 곁에 있는 사람들도 뭇사람의 눈길 속에 들게 되고 따라서 특무나 변절자들에게 발견될 위험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주요배역들이 걸핏하면 총으로 누군가를 쏴죽이는데 살인은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워낙 가급적으로 피해야 하거니와 중공은 특별히 살인을 통제했다. 상하이 특과(特科)시절에 훙뚜이(红队홍대)도 진압대상을 아주 신중하게 골랐고 평소에는 무기를 휴대하지 않다가 임무를 집행할 때에만 총을 썼고 사후에 곧 바쳤다. 그 후에는 더구나 총칼사용을 삼갔다. 

대체로 이러루한 비판들이 나온다. 007시리즈 따위와 경쟁하기 위해 허구한 작품들이 역사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2009년에 상영되어 널리 호평을 받은 30부 드라마 《잠복(潜伏)》은 뒷날 조선(북한)에서도 인기를 끌었다는데, 여자주인공 왕추이핑(王翠平왕취평) 캐릭터는 옛 중공 정보계통 사람들의 지적을 받았다. 그런 성격이 급한 막말달인은 아예 선발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우연한 발견과 필연적인 변절 

 

작가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엮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성공한다면 주로 극성과 역전 덕분이다. 헌데 현실은 극보다 더 극다운 경우가 많다. 

해방전쟁시기 중공 정보계통의 최대 손실이라고 평가되는 대사건의 시초는 아주 시시했다. 

 

1947년 9월의 어느 날 밤, 베이핑행원(北平行辕북평행원) 제2처 전기신호검사과 정측실(第二处电讯检查科侦测室) 야간근무를 하던 특무들이 리시버를 벗어놓고 끄덕끄덕 졸 때, 특무 하나만은 낮에 시시껄렁한 일로 여편네와 크게 다퉈 기분을 잡친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해 계속 리시버를 끼고 근무했다. 자정이 다가왔을 때 등록하지 않은 무전기의 신호가 잡혔다. 

 

당시 국민당 정권은 도시들마다에 무전신호를 전문 검사하는 부서를 설치하여 중공의 무전기를 정찰했는데, 담당 특무들은 공개된 무전기의 데이터들을 모두 등록한 다음 일단 미등록신호를 발견하면 방향을 정하여 차차 목표에 다가갔다. 24시간 감시가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되었고 특히 밤에는 일분도 공백이 없어야 한다고 엄격한 규정이 만들어졌으나 실제로 특무들은 야밤에 땡땡이를 치기가 일쑤였다. 중공의 무전기들은 일정한 시간대에 연락하지 않고 한 번 연락을 마치면서 다음 연락시간을 약정했으므로 국민당이 아무리 미국제 최신장비를 쓰더라도 중공 전파의 정확한 발견, 무전기 위치 확인, 무전수 체포는 아주 어려웠다. 

 

그런데 그날 우연히 리시버를 끼고 있던 특무가 이상한 신호를 발견해 과장 자오룽더(赵容德조용덕)에게 보고했고 경험 많은 특무 자오룽더는 달려가서 리시버를 끼고 10여 분 들어보더니 베이핑에 있는 무전기이고 그것도 십중팔구 중공 소속이라고 판단했다. 공로를 세울 기회라고 선언한 자오룽더의 지시에 따라 특무들은 실내 감청 외에 미국제 무선전정찰기기를 지프차에 싣고 여러 날 동, 서, 남, 북 방향에 4개 거점을 설치하여 감청하면서 차차 범위를 좁혀갔다. 

 

9월 24일 징자오둥제(京兆东街경조동가) 24호에 들이닥친 특무, 경찰, 헌병들은 무전수 리쩡쉬안(李政宣리정선)과 멍량위(孟良玉맹양옥), 변신원 장허우페이(张厚佩장후패, 리쩡쉬안의 아내), 리위핑(李毓萍이육평, 멍량위의 아내)를 체포했다. 당시 리쩡쉬안은 산베이(陕北섬북)에 있는 중공중앙 전방위원회 무전기에 전문을 발송하는 중이었다. 

1946년에 설치된 이 무전기는 베이핑에서 수집된 정치, 군사, 경제 등 정보들을 마오쩌둥(모택동), 저우언라이(주은래) 등 중앙 영도자들에게 직접 발송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는데, 체포 당시 보내던 것은 베이핑의 물가가 연일 폭등한다는 정보였다. 

 

발송 중의 무전기를 덮쳐서 무전수를 잡은 것도 성과지만 특무들로서는 더 큰 수확이 있었다. 리쩡쉬안 침대 밑의 버들고리상자에서 대량의 정보원고를 찾아낸 것이다. 상당수는 베이핑의 정보일꾼들의 손글씨원고였다. 

비밀유지규정에 의하면 무전수는 정보일꾼이 보내온 정보를 받은 다음 베껴 쓰면서 말투도 바꿔야 하고 무전을 날린 다음 원고와 베낀 종이를 몽땅 없애야 한다. 그런데 베이핑의 무전수는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지 않았다. 

리쩡쉬안이 원고들을 보관했고 체포 후 술술 분데 근거해 그가 미리 체포에 대비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발을 예상했던 안했던 리쩡쉬안이라는 인물이 폭탄으로 되어 숱한 사람들의 체포와 희생을 유발한 건 필연이었다. 아내와 다퉜던 특무가 신호를 잡은 건 우연이지만. 

 

당시 중공에 무전인재가 결핍했으므로 공산당원이 아닌 리쩡쉬안이 기술 하나로 무전기의 책임자로 되었다. 그를 선발, 파견한 왕스잰(王石坚왕석견)이 지도하는 정보소조가 베이핑에 3개 있었는데 서로 연계하지 않았다. 허나 세 소조의 정보들이 모두 리쩡쉬안의 무전기에 모여 발송됐기에 러쩡쉬안은 뭐나 다 알았다. 하기에 왕스잰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대의 손실에 처벌은 없었다 

 

리쩡쉬안의 무전기로 시작된 사건을 역사에서는 “베이핑뎨안(北平谍案베이핑간첩사건)”이라고 부른다. 베이핑, 난징(南京남경), 선양(沈阳심양), 시안(西安서안), 란저우(兰州란주) 등 고장에서 중공당원, 국민당군 장교, 민주인사 등등이 연달아 체포되었다. 

세쓰얜(谢士炎사사염, 1912~1948), 주잰궈(朱建国주건국, 1918~1948), 자오량장(赵良璋조양장, 1921~1948), 딩싱(丁行정행, 1908~1948), 스춘(石淳석순, 본명은 쿵판루이孔繁蕤공번유, 1918~1948)등 국민당 장교 5명이 이듬해 11월 19일 난징에서 총살당해 “베이핑 5열사”로 불린다. 

 

▲ 유명한 “베이핑 5열사” 중의 작전처장 세스얜 소장과 군법처 부처장 딩싱 소장     © 자주시보, 중국시민

 

이밖에 쟝제스 명의의 글을 전담해 쓰는 비서 천부레이(陈布雷진포뢰, 1890~ 1948)의 딸 천랜(陈琏진련, 1919~1967)과 사위 위안융시(袁永熙원영희, 1917~1999)도 있었으니 쟝제스가 기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딸과 사위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석방되었다만 이듬해 말 쟝제스와 국민당에 절망한 천부레이는 자결했다. 

 

▲ 쟝제스 비서의 딸과 사위     © 자주시보, 중국시민

 

당시 체포자들의 정확한 수자를 집계할 수 없으나, 적어도 800명이라고 추산하는 사람이 있다. 곁불에 맞아 잡힌 사람들도 꽤나 되었고 정말 억울한 놈들도 끼었다. 예를 들어 란저우에서 서북통신사 분사 사장으로 일하면서 공개적으로 등록한 무전기와 비밀무전기를 동시에 운영하던 중공 당원 인빙(尹冰윤병)은 체포되어 동지들을 대라는 강요를 받으니 “가짜 자수(假自首“ 수법으로 칭하이성(青海省청해성)의 국민당 당부 주임위원 등 두목, 간부, 정객, 악당들을 숱해 공산당이라고 찍어서 감옥으로 끌어들였다. 

 

국민당 특무조직은 쟝제스의 높은 표창을 받았고 보밀국(保密局) 두목들은 “중공 정보공작의 절반 천하를 파괴했다(搞垮了中共情工半壁天下)”고 자랑했다. 

그 말은 심한 과장이었고 그번 대검거가 국민당의 전반적인 실패를 만회하지도 못했으며 계속 활동한 무전기들이 아주 많았으나, 해방전쟁시기 중공 정보조직으로서는 최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 시기 전반적으로는 중공 정보조직이 국민당의 특무기관을 압승했는데, 베이핑공산간첩사건에서는 크게 당했다. 

 

국민당이 일련의 기만수단을 취했기에 중공이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랐으나 베이핑, 시안, 란저우, 선양 등 도시의 비밀무전기 5대가 파괴되었으므로 중공 수뇌부가 받는 전보수량은 퍽 줄어들었다. 비정상적인 현상에 마오쩌둥 주석이 지정된 기일 내에 정황을 밝혀내라는 지시를 내렸고, 사회부와 정보부의 책임자 리커눙(李克农이극농, 1899~1962)이 잠도 자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자원을 동원해 진상을 대체로 알아내어 조치들을 취했다. 

 

▲ 1955년에 상장 계급을 수여받은 리커눙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 사건 때문에 심장병이 발작하여 심하게 앓았던 리커눙은 상부에 자신을 처벌해달라고 요구했는데, 당중앙에서 정보계통을 맡은 저우언라이(周恩来주은래) 부주석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투도 이길 때와 질 때가 있거늘 비밀전선에서 어찌 다 이기겠느냐고, 손실 지어 희생은 피할 수 없다면서 교훈을 섭취하면 된다고, 처벌은 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당시 받아들인 교훈의 하나는 인원들을 제때에 교체하지 않았다는 것. 저우언라이의 말대로는 자동차가 몇 만 킬로미터를 달린 것처럼 정비를 해야 계속 짐을 싣고 달릴 수 있는데 그 방면의 일을 제때에 잘 하지 못했다. 

 

 

중공 정보계통 “후삼걸”의 윗선 왕스잰 

 

이 사건에서 관건적인 인물은 왕스잰이다. 본명이 자오야오빈(赵耀斌조요빈)인 그는 오랜 세월 중국 대륙에서 거들어지지 않았으나 굉장한 거물이었다. 

변절의 추학 2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9257)에서 소개했던 챈쫭페이와 리커눙, 그리고 후디(胡底호저) 세 사람이 국민당 특무조직 중통에 깊숙이 잠복하여 큰 일을 해냈다 하여 저우언라이가 “챈싼제(前三杰전삼걸, 앞의 세 영걸)”이라고 평하면서 후에는 “허우산제(后三杰후삼걸, 뒤의 삼걸)”가 있었다고 말했다. “뒤의 삼걸“이란 산시성(陕西省섬서성) 일대를 차지해 수십 만 대군을 거느리고 정부도 장악했던 후중난(胡宗南호종남) 수하에 잠입했던 세 사람을 가리키니, 슝썅후이(熊向晖웅향휘, 1919~ 2005), 천쭝징(陈忠经진충경, 1915~2014), 썬잰(申健신건, 1915~1992)이다. 이들은 건국 이후 모두 외교와 대외연락부문에서 활약했다. 

 

▲ 중공 정보계통의 후삼걸, 왼쪽으로부터 슝썅후이, 천쭝징, 썬잰     © 자주시보, 중국시민


“후삼걸”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슝썅후이로서 회고록 《나의 정보와 외교생애(我的情报与外交生涯)》는 위의 사진에 나온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신통한 국민당 장교 역을 했느냐면, 해방 이후 저우언라이 부주석이 전직 국민당 고관들을 청할 때 부름을 받고 갔더니 늙은 장쯔중(张治中장치중)이 “아우, 자네도 기의했나?”라고 물었다는데서 알 수 있다. 저우언라이가 웃으면서 이 사람은 기의가 아니라 귀대했다고, 1936년에 입당한 공산당원으로서 중공이 후중난부대에 파견해 활동하게 했다고 설명하니, 전직 고관들은 깜짝 놀랐다. 국방부 차장이었던 류페이(刘斐류비)가 그렇기에 후중난이 패전을 거듭했지 하고 감탄하니, 저우언라이는 쟝제스의 작전명령이 군장(군단장)들에게 하달되기 전에 마오 주석이 먼저 보셨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저우언라이의 이 말이 굉장히 유명해져, 마오쩌둥의 귀신같은 용병술이란 순전히 슝썅후이의 정보 덕분이라는 해석도 나왔는데, 후중난 부대와 해방군이 산베이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벌린 건 슝썅후이와 천쭝징, 썬잰이 모두 후중난 신변을 떠나 미국유학한 뒤라, 사실과 맞지 않다. 

마오쩌둥과 펑더화이(彭德怀팽덕회)가 2만 정도 해방군을 거느리고 후중난의 20만 대군과 맞서 연전연승 할 때 후중난의 소굴 시안에서 날아간 고급정보는 모두 왕스잰이 보낸 것이었으니 그의 능력을 알만하다. 그리고 “후삼걸”이 시안과 산시성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그들의 윗선은 왕스잰이었으니, 그 지위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 

 

1911년 산둥성(山东省산동성) 원덩현(文登县문등현)에서 태어난 왕스잰은 1928년에 둥베이대학(东北大学동북대학)에 입학했다가 1931년에 베이징대학 화학학부로 옮겨가 공부했고 1932년에 중공에 가입했다. 베이핑에서 활동하다가 1933년 5월 18일에 처음 체포된 그는 공산당원의 기개를 과시하면서 수저우군인감옥(苏州军人监狱소주군인감옥)에서 비밀당조직 활동에 적극 참가하다가 변절자의 고발로 1935년 6월 다른 7명 당원과 함께 난징으로 이송되어 모두 8년 이상 가형처분을 받고 난징중앙군인감옥에 갇혔다. 1937년 7월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국공합작이 본격화되면서, 8월에 저우언라이가 각지에 갇힌 공산당 정치범들을 구출하여 자유를 얻은 왕스잰은 옌안으로 가서 중공중앙 당학교에서 공부했다. 

 

▲ 왕스잰으로 알려진 사진     © 자주시보

 

1941년 여름에 중앙사회부와 정보부의 책임자인 캉썽(康生강생, 1898~ 1975)이 파견하여 시안에 간 왕스잰의 임무는 슝샹후이 등이 수집한 정보를 모아서 발송하고 조직을 발전시키는 등이었다. 처음에는 순전히 지하에서 활동하다가 위험에 부딪치니, 천쭝징 등의 도움으로 서점과 신문사를 설립하여 합법적인 신분을 가지고 한결 활발하게 움직였다. 1947년까지 시안을 중심으로 하여 베이핑, 바오띵(保定), 선양, 란저우 등지를 연결하는 방대한 고차원 정보망을 설립했는데, 당시 시안에 중공의 다른 계열 정보조직들도 있었으나 왕스잰 계통의 정보가 제일 훌륭했다 한다. 

 

베이징의 무전기를 덮친 국민당 특무들은 며칠 동안 리쩡쉬안을 이용해 왕스잰과 정상적인 연락을 유지시키면서 속이다가 다른 지방의 비밀, 다른 지방의 사람들도 상당수 확보한 뒤 왕스잰을 체포했다. 두 번째로 체포된 왕스잰은 숱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하고 그와 단선연계하던 사람들도 여럿 체포되었다. 하기에 그가 변절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감옥과 군영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사람들은 그를 깔보고 미워했다. 

 

 

타이완에 가서 남은 왕스잰, 대륙으로 돌아온 인빙 

 

베이핑 공산간첩사건은 수사와 재판이 굉장히 복잡했다. 사형당한 사람들이 있나 하면 친인척관계로 풀려나간 사람들도 있고 증거부족으로 살아난 사람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수감, 이감되다가 1949년 5월 해방군의 도착과 더불어 자유를 되찾았다. 

왕스잰 등 13명은 특별히 1948년 11월에 난징에서 상하이로 이동되었다가 미군 상륙함에 실려 타이완으로 가서 타이베이시(台北市대북시) 쓰린진(士林镇사림진)의 옛 일본 군영에 갇혔다. 그 가운데서 대륙으로 돌아온 사람은 란저우에서 잡혔다가 국민당 내부에 개싸움을 붙였던 인빙 하나 뿐이다. 

 

1949년 초에 쟝제스가 패전 책임을 지고 하야하고 리중런(李宗仁이종인)이 대리총통이 되어 평화담판을 주장하면서 타이완에 있는 특무들의 심리도 크게 변했다. 공산당과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대륙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정신적으로 전처럼 긴장하지 않으니 경계와 감시가 훨씬 느슨해졌다. 왕스잰 등은 처음에는 군영 안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다가 후에는 밖으로 나가도 괜찮았다. 타이완이 섬이라는 점도 이런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끽해봤자 어디로 뛰겠는가? 특무들의 이런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특무들의 눈에는 왕스잰 등이 모두 철저히 굴복했으나 인빙은 항상 바다를 넘을 방법을 연구하다가 끝내 기회를 잡았다. 신문에서 “푸저우호(福州号복주호) 선박이 3월 13일 상하이를 떠나 15일 타이완의 지룽(基隆기륭)항구에 도착했다가 홍콩으로 간다는 소식을 본 것이다. 

 

3월 14일 일요일 직일 군인들을 내놓고 다수 감시자들이 놀러 나간 틈을 타서 인빙은 집안에서 파리 수십 마리를 잡아 억지로 삼켰다. 격렬한 구토가 이어졌다. 저녁 무렵 감시자들이 돌아오자 왕스잰 등이 즉시 인빙이 급병에 걸렸다고 보고했다. 

이튿날 인빙은 병이 중한 척 하면서 왕스잰에게 병보러 가겠다 말했고 왕스잰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하여 인빙은 군영을 떠났다. 버스를 타고 지룽으로 향한 그가 12시에 항구에 이르렀을 때 “푸저우호”가 마침 들어왔다. 숱한 사람들이 내리고 오르는 혼란한 틈을 타서 배에 오른 인빙은 빈 나무상자에 숨어 4시 출항까지 억지로 버텼다. 배가 떠난 뒤 상자에서 나온 그는 표를 살 리 없는 패잔병들의 무리에 끼어들어 검표라는 난관을 벗어났고, 이튿날 홍콩에 도착한 다음에는 배가 멎기 전에 부두에 뛰어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신화통신사의 홍콩분사를 찾아갔더니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낮에는 시가지에서 밥을 먹고 밤에는 산에 올라가 잠을 자면서 버틴 뒤 다시 찾아가니 차이(蔡채)씨 라는 주임이 인동지가 고생했다고, 조직에서 이미 동무의 상황을 요해했다는 말했다. “동지” 칭호를 다시 듣게 된 인빙은 그만 통곡했다. 분사의 배치로 어느 중학교에 가서 머무르던 그는 5월 초에 분사가 전세 낸 배에 앉아 중공당원들 및 민주인사들과 함께 텐진(天津천진)으로 갔고 다시 기차로 베이핑에 가서 중앙사회부에 복귀했다. 

 

 

그치지 않은 쟁의 

 

타이완 잡지 《전기문학(传记文学)》은 1991년에 왕스잰이 투항하고 타이완에 가서 본명 자오야오빈을 회복하고 결혼했으며 국방부 정보국 전문위원으로 일했는데 이미 병사했다고 주장했다. 

왕스잰은 확실히 국민당의 소장으로 되어 오래 살았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표준변절자다. 그런데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수십 년 뒤에도 명인들 사이에서 쟁론을 불러일으켰다. 

 

국가안전부 부부장으로 일했던 왕쥔(王珺왕군, 1920~2016)은 2000년에 모 잡지에 글을 발표하여 왕스잰을 논했다. 왕스잰이 체포된 후 재빨리 자백서를 썼는데 원본은 지금 국가안전부 당안관에 보관되어있다. 긴 자백서에서 자신의 정보사업경과와 수하의 여러 지방 정보조직, 지하일꾼, 영도자들을 상세히 밝혀서 수십 명 정보일꾼이 체포되게 하는 등 공로를 세웠기에 보밀국의 특종문제연구조에 가서 일했고 후에 국민당을 따라 타이완으로 가서 특무조직 “비정연구소(匪情研究所비적정황연구소)의 소장(少将所长, 일설에는 조장)과 국방부 정보국 전문위원이 되었는바, 반공특무두목으로서 수십 년 활동했다 등등. 

 

그 글을 본 슝썅후이는 《저우언라이, 리커눙과 우리 당 정보역사의 가장 빛나는 페이지- 겸하여 ‘왕스잰 사건’에 대한 왕쥔의 헛소리를 까밝힘(周恩来、李克农和我党情报史最辉煌的篇章 ──揭穿王珺对“王石坚事件”的胡言乱语)》이라는 글을 써서 단호히 반박했다. 왕스잰에 대해 조직에서 종래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1949년 7월에 저우언리아 부주석이 나를 만난 자리에서 중공이 잡은 국민당 군통특무두목 하나와 왕스잰을 바꿔오자고 구상했는데 그래 변절자를 찾아오려 하겠는가? 

 

“중앙조사부와 당중앙은 왕스잰에 대해 어떤 성격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린 적 없다. 왜 결론을 내리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나는 해석하지 않겠다(中央调查部和党中央从未给王石坚定性。至于为何不给他定性,我不作解释。)”

 

슝썅후이가 왕스잰을 믿는 근거 중 하나는 왕스잰의 체포로 자신과 천쭝징, 썬잰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이 미국에 가 있기는 했으나 왕스잰이 제대로 다 불면 그들에게도 불똥이 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왕스잰은 자기가 세 사람을 이용했노라고 거짓공술을 했고, 또 후중난과 관계가 좋은 특무조직이 세 사람을 중용했던 후중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그들 문제를 적당히 덮었기에 후중난의 측근들 가운데 공산당원들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쟝제스에게마저 보고되지 않았다. 슝썅후이 등은 공부를 마치고 순조롭게 귀국하여 중요한 부서에서 사업했다. 1949년 7월 저우언라이가 슝썅후이에게 왕스잰이 꾸며낸 말을 언급했으니 어떤 특별한 자료를 보았음이 알려진다. 

저우언라이가 받은 정보들이나 내린 판단들은 절대다수 사람들이 가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법이다. 왕스잰과 관계가 밀접한 슝썅후이에게 저우언라이가 왕스잰을 비판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바꿈으로 찾아오려 했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했을 것이다. 

 

공개된 자료들을 보면 왕스잰이 낮은 차원의 정보들과 정보원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부인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으나, 슝썅후이 같은 차원 높은 인물들은 보호하려 했으니, 그가 한 말, 한 일들을 어떻게 이해할지, 어떻게 해석할지는 확실히 쉽지 않은 난제다. 

필자는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여 이런 생각을 해본다. 왕스잰이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위험한 적지에 들어가기 전에 조직에서 미리 모종의 “공술선”을 그어주지 않았겠느냐고. 즉 어느 정도까지는 “자백”하는 형식을 취해 적들과 “합작”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적들을 기만하여 자신과 중요한 동지들을 보호하도록 말이다. 혹은 “자백서” 따위 문자자료에 특수한 문구를 집어넣기로 약속하였기에 그 문구를 본 저우언라이와 정보조직의 고위 지도자들이 왕스잰의 변절을 단언하지 않았다고. 

 

왕스잰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려면 아직도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혹시 영원히 베일에 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굉장한 인물이다. 단 남들의 본보기로 되기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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