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13] 대장정을 완주한 두 고급 변절자의 운명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1/13 [00: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어려운 고비를 넘었대서 변절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어

 

해외동포들이 북에 가서 만나는 학자들 중에 철학을 전공하는 모 대학 정기풍 교수가 있으니, 그 학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낸다. 단 여러 해 전 재미언론인과의 대담에서 항일무장투쟁시기 “고난의 행군” 뒤에는 변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 건 실수였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100여 일 동안 김일성 장군이 부대를 거느리고 난파이즈(남패자)로부터 베이따딩즈(북대정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적들의  포위와 추격을 파탄시키면서 진행한 행군은 뒷날 “고난의 행군”이라고 이름지어졌고, 20세기 90년대 중후반에 조선(북한)이 전에 없는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도 그 이름이 붙여져, 이제는 이중의미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정 교수는 고난의 행군을 치른 부대가 갖은 시련을 다 이겨냈기에 사람들이 단련되어 변절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얘기했는데, 1939년 봄 이후에도 항일무장대오에는 변절자들이 여럿 나타났고 김일성 장군 친솔부대에서도 혁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생겨났으니,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에서도 언급했다. 

 

“1941년의 시련은 누가 진짜배기혁명가이고 누가 가짜였는가를 가른 시금석이였습니다. 

이런 시련과 검열은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였습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항일투사들은 다 시련속에서 백번천번 검열된 귀중한 사람들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지갑룡의 도주를 특별히 지적했는데, 지갑룡 본인이 “고난의 행군”에 참가했던지 하지 않았던지 10년 가까이 총을 메고 싸웠던 사람이 혁명을 포기하고 달아난 사실는 변절, 도주가 결코 한 차례 행군으로 근절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 대장정을 완수했던 변절자 쉬멍츄

 

조선 항일무장투쟁사에 “고난의 행군”이 있다면 중국 혁명사에는 “2만 5천 리 장정(两万五千里长征)”이 있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부터 시작하여 다른 부대들도 이동하고 1936년 10월에 3대 주력부대의 모임으로 마무리했는바, 작은 범위로는 1935월 10월 중앙홍군의 싼베이(陕北, 섬북)근거지 도착까지를 장정으로 친다. “2만 5천 리 장정”을 한국에서는 흔히 “대장정”이라고 부르는데, 장정에서 제일 극적이고 어려운 경력들은 중앙홍군이 만들어냈다. 

 

근년에 장정길(중국어로 창정루长征路)를 다시 걷는 중국인과 외국인들이 꽤나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현대의 도로를 따라 걸어보고는 거리가 2만 5천 리(12, 500킬로미터)에 훨씬 미치지 못하더라면서 중국의 역사기재를 의심하고 중공군대의 기적을 폄하했다. 사실 1930년대의 중국 내지에는 변변한 길이 별로 없었고 일부 고장에 흙을 다진 도로가 있더라도 홍군은 안전을 위해 산발을 타야 했다. 2만 5천 리란 중앙홍군에서 가장 먼 길을 걸은 부대의 행군일지에 근거해 계산해낸 수치로서, 정찰병들은 훨씬 더 먼 길을 걸었다 한다. 적게 걸은 사람들은 1만 8천 리 정도 걸었으리라 추산된다. 

 

대장정의 어려움은 흔히 설산을 넘고 초지를 지났다(爬雪山过草地)로 함축된다. 남방사람이 절대다수였던 홍군이 해발 수천 미터로서 눈이 뒤덮인 산을 여름에 넘는다는 건 엔간한 용기로 해낼 수 없는 일이었고, 초지란 북의 항일회상기에 나오는 흔들레판과 비슷한 바, 풀과 물이 뒤섞여 자칫하면 빠져죽는 위험한 곳인데다가 풀을 내놓고는 먹을 것을 얻을 길이 없어서 한결 어려웠다. 뒤따라가는 부대는 앞선 부대의 사람과 짐승이 눈 똥에서 채 소화되지 않은 밀알 따위를 골라내서 씻어 먹으면서 10여 일 고생 끝에 초지를 벗어났다. 그런 것도 없으면 어떤 사람들은 신이나 허리띠의 가죽을 거듭거듭 우려서 허기를 면했다 한다. 

 

열악한 자연조건보다 더 위험한 건 적군의 포위, 추격과 공격이었다. 대장정을 말할 때 흔히 8만 명으로 행군을 시작한 중앙홍군이 싼베이에 도착했을 때 8천 여 명이었다면서 90% 감원율을 강조하는데, 중앙홍군의 일부 부대가 변절의 추학 5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1038)에서 다룬 장궈타오(장국도)가 거느린 4방면군에 남았으므로 중앙홍군의 90% 감원설은 맞지 않다. 전국 범위에서 홍군과 당원이 모두 90% 줄었다고 얘기하는 건 정확하지만. 

 

중국에서 “라오훙쥔(老红军, 노홍군)”이라 하면 바로 1937년 7월 7일 전면적인 항일전쟁 발발 전에 홍군부대에서 싸웠던 사람들을 가리키고 특히는 대장정을 겪었던 사람들을 말하니, 항일전쟁기간에 팔로군이 적후로 들어갈 때 한낱 취사원도 선전선동으로 100여 명 청년들을 모아 한 개 연(连, 중대) 새 부대를 만드는 등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후에는 굉장히 높은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바로 대장정의 그처럼 어려운 고비들을 다 넘어온 사람들 중에서도 변절자들이 생겨났다. 쉬멍츄(徐梦秋서몽추)는 선전과 교육을 담당했던 사람이었기에 한결 충격을 준다. 

 

▲ 홍군시기의 쉬멍츄

 

1895년에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 써우현(寿县, 수현)에서 태어난 쉬멍츄는 20대 후반에 상하이대학(上海大学, 상해대학)에 입학했고 중공 명인  취츄바이(瞿秋白구추백), 윈따이잉(恽代英운대영, 변절의 추학 2편에서 다룬 꾸쑨장의 고발로 희생됨) 등의 가르침을 받아 중국공산당에 참가했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한 북벌전쟁(北伐战争)에도 참여했다. 1927년에 소련으로 파견되어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던 그는 1930년 8월에 귀국하여 쟝시성(江西省, 강서성)의 소베트구역으로 가서 군사위원회 비서, 비서장, 1방면군 정치부주임, 홍군 총정치부 선전부 부장, 중국공농홍군대학(中国工农红军大学)의 대리 정치위원, 정치부 주임 등을 역임했다. 홍군대학출신에서 건국 후 상장이 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1934년 10월에 대장정에 참가했고 《홍군장정기(红军长征记)를 편찬했는데, 워낙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저작들을 통달하고 혁명경력도 오래며 글솜씨도 괜찮아 역사연구책자들을 출간했기에 중공과 홍군에서 “붉은 역사학자(红色历史学家)”로 불렸다. 

설산을 넘을 때 동상을 입은 그는 옌안(延安, 연안)에서 두 다리를 절단했으니 수술한 의사는 에드가 스노와 함께 중공 근거지에 들어간 미국의사 마하이더(马海德, 1910~1988,본명은 George Hatem으로서 1950년에 중국국적을 얻었음)였다. 

 

역사정리, 문화활동 등에서 활약했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주은래) 등 지도자들의 각별한 관심을 받언 쉬멍츄는 1937년 11월 병을 치료하려고 소련으로 가던 도중 신쟝성(新疆省, 신강성)의 수부 디화(迪化, 적화, 지금의 우루무치乌鲁木齐)에서 신쟝을 통치하던 군벌 썽쓰차이(盛世才성세재)의 초청으로 남아서 멍이밍(孟一鸣맹일명)이라는 가명으로 교육청 부청장 겸 신쟝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썽쓰차이는 소련 및 중공과 친하게 보냈으니, 정부에서 활동한 중공당원들도 여럿이었다. 마오쩌둥 주석의 큰 동생 마오저민(毛泽民 모택민)이 바로 저우빈(周彬주빈)이라는 가명으로 신쟝성 정부의 재정청 부청장, 민정청 청장으로 일했었다. 

한때는 소련공산당에 가입신청까지 냈던 썽쓰차이는 원래 신념이 없고 변덕이 많은 인간이라 1941년 6월 독일의 불의공격으로 소련이 어려운 처지에 처하니 정책을 바꾸어 중국국민당에 달라붙었다. 쟝제스(蒋介石장개석)에게 잘 보이기 위해 1942년에 신쟝에 있는 중공당원들과 그 가족들을 모조리 감옥에 잡아넣었고 이듬해 마오저민과 중공 창시자의 한 사람인 천탄츄(陈潭秋진담추) 등 여러 사람을 학살했다. 

 

당시 갇혔던 다수 사람들은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억세게 버텼고 항일전쟁 승리 후 국공관계가 잠깐 좋아졌을 때 석방되어 싼베이로 돌아왔으니, 일부는 중공국인민해방군 공군의 초창기 핵심들로 되었고 어린이 중에서 특별히 이름난 사람들로는 뒷날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과 결혼한 류스치(刘思齐류사제), 둘째 아들 마오안칭(毛岸青모안청)과 결혼한 싸오화(邵华소화)와 문화대혁명 시기에 동북지역의 “태상황”으로 불렸던 마오저민의 아들 마오위안신(毛远新모원신) 등이다. 

 

그런데 어린이들마저 굽어들지 않은 상황에서 노혁명가인 쉬멍츄가 변절해버렸다. 그보다 앞서 1941년 4월에야 소련으로 들어갔던 쉬멍츄는 두 다리 장애가 심각해 독일에 가서 의족을 장착하려고 국경까지 갔다가 전쟁이 폭발하는 바람에 되돌아서서 1941년 12월에 귀국해 신장에서 체류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체포된 140여 명 중공 당원 가운데서 변절자가 고작 셋이었는데 쉬멍츄가 제일 이름났다.

당중앙과 마오쩌둥 주석은 신쟝에서 체포된 동지들을 구원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마오쩌둥은 “중점으로 쉬멍츄를 구원해야 한다(要重点营救徐梦秋)”고 지시했다. 그들은 마오저민 등의 희생과 쉬멍츄 등의 변절을 몰랐던 것이다. 

 

쉬멍츄는 변절 전의 명성과 지위로 하여 몸값이 남달랐으나 신장을 할거한 군벌 썽스차이 수하에서는 크게 쓰이지 못했다. 썽쓰차이가 실세하여 신장을 떠나고 국민당정부가 정권을 접수한 뒤 쉬멍츄도 접수하여 써주었으니, 그는 국민당특무조직에서 소장 계급을 달고 특연조(特研组특수연구조) 조장으로 활동했다. 한 특무두목의 회억에 의하면 특연조는 특무조직이 중공 변절자들을 수용, 통제하는 기관으로서 특정조(特情组특수정황조)라고도 불렀다. 1945년부터 몇 해 조장노릇을 하던 그는 1947년의 베이핑(北平북평)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시안(西安, 서안)에서 체포된 짜오야오빈(赵耀斌조요빈)(즉 변절의 추학 12편의 주인공 왕즈잰.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405)의 경력과 정보계통에서의 지위로 하여 국민당 특무들은 짜오를 특연조 소장 조장으로 임명해 쉬멍츄는 부조장으로 밀려나 실세했다. 뒤이어 중공이 천하를 얻을 추세가 명확해지니 이름을 숨기고 살던 쉬멍츄는 1949년 6월에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에 언도되어 상하이의 감옥에 갇혔으며 1976년 5월 22일 감옥에서 병사했다. 

 

쉬멍츄를 건국 후 별로 거들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가 죽은 뒤 여러 해 지나 국가주석을 지냈던 양쌍쿤(杨尚昆, 양상곤)이 회억록에서 쉬멍츄가 썽스차이 수하에서 벼슬을 하다가 썽에게 살해되었다고 좋은 뜻으로 썼으니까 유명 변절자가 사후에도 웃음거리를 남긴 셈이다. 

쉬멍츄가 남긴 글들은 오늘은 물론 이후에도 역사적 가치를 가지지만, 그의 경력은 비웃음을 자아내게 되었다. 

 

✦ 유일한 타이완 출신 장정간부 차이샤오챈 

 

쉬멍츄가 감옥에서 변절하였기에 다른 당원들을 물어먹을 기회가 없었던 것과 달리 차이샤오챈(蔡孝乾채효건)이라는 장정간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해쳐 타이완(대만)의 중공 지하당을 일시 붕괴시켰다. 타이완에서의 중공 최고책임자의 변절과 고발은 두고두고 중공의 수치다. 

 

1908년 일제 치하의 타이완 짱화현(彰化县창화현) 화탄향(花坛乡화단향)에서 태어난 차이샤오챈은 차이챈(蔡乾채건), 차이챈(蔡前채전), 양밍산(杨明山양명산) 등 이름을 썼는데 한때는 가장 유명하고 지위가 높은 타이완출신 중공간부였다. 

 

1919년에 일본이 운영하는 공립학교 짱화공학교(彰化公学校)에 입학해 1922년 졸업 후 학교에 남아 1년 동안 대리교원으로 일했고,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중공이 세운 상하이대학 사회과학학부(社会科学系)에서 공부했으니 시기를 따져보면 쉬멍츄의 동창생으로서 쉬멍츄와 마찬가지로 중공 명인 취츄바이 등의 영향을 받았다. 진보적인 상하이타이완청년회(上海台湾青年会)회에 참가했고 타이완동향회를 새로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리다가 1926년 7월 타이완으로 돌아가 혁명을 선전하면서 문화분야에서 자문역을 맡기도 하고 글도 썼다. 

 

1928년에는 타이완공산당 창건에 참여했고  4월에 타이완공산당(일본공산당 타이완민족지부日本共产党台湾民族支部였음)중앙위원, 상임위원 겸 선전고동부장으로 당선되어 선전을 담당하면서 곧이어 지부들을 설립했다. 8월 일제 당국의 검거를 피해 해협을 넘어 푸젠성(福建省복건성) 장저우(漳州장주)에 잠복했는데, 1932년 4월 마오쩌둥이 거느린 홍군이 장저우를 함락한 다음 홍1군단 정치부 주임 뤄룽환(罗荣桓라영환)의 배치로 차이샤오챈은 푸젠성 서부 소베트구역을 거쳐 쟝시성의 중앙혁명근거지로 옮겨가 공청단의 학교인 레닌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2년 6월 소베트구역 반제총동맹(苏区反帝总同盟) 제1차 대표대회에서 총동맹 주임으로 당선된 차이샤오챈은 동료들인 마오저탄(毛泽覃모택담, 마오쩌둥의 작은 동생),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뒷날 뤄룽환은 중국인민해방군의 10대 원수 중 하나로 되었고 마오저탄은 유명한 열사이며 후야오방은 중공 총서기로 되었으니 차이샤오챈의 인맥을 가늠할 수 있겠다. 

 

1934년 1월 중화소베트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타이완 대표로서 참가해 주석단 성원 중화소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당년의 중화소베트 전국대표대회들에 조선인 투사들도 조선대표로서 참가하였으니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생존한 분이 있다. 

차이샤오챈이 10월에는 장정에 참가해 완주했으니 유일한 타이완적 공산당원 장정간부였다. 1935년 10월 중앙홍군이 산베이에 도착한 다음에 차이샤오챈은 반제연맹(후에는 항일연맹으로 고침)주석으로 되었다. 

 

1937년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터진 후 차이샤오챈은 팔로군 총부에 가서 전선으로 향했으니 1938년 상반년부터 1939년까지 팔로군 총부 야전정치부 부장 겸 적공부(敌工部) 부장으로 일했다. 적공부란 적군상대사업을 담당한 부서로서 차이샤오챈이 일본어에 능통한 장점을 살리기 딱이었다. 일본군 포로관리와 대적선전을 책임졌던 차이샤오챈은 후에 옌안으로 전근하여 《군중(群众)》, 《팔로군군정잡지(八路军军政杂志)》 등에 《적군공작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怎样进行敌军工作)》등 글을 발표했다. 

 

▲ 팔로군 시절의 차이샤오챈 

 

1941년 10월에는 옌안에서 열린 동방 각민족 반파쇼 대표대회(东方各民族反法西斯代表大会)에 참가해 각민족 반파쇼대연맹집행위원회(各民族反法西斯大联盟执行委员会) 위원으로 선거되었고, 12월에는 그 대연맹 제1차 회의에서 동맹상무위원이 되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중공 제7차 전국대표대회를 방청한 그는 일제가 패망한 뒤인 9월에 중공 타이완 공작위원회 서기(中共台湾省工委书记)로 임명되어 연말에 상하이로 갔다가 이듬해 7월 비밀리에 타이완으로 돌아가 활동을 전개했다. 

고향인 짱화현 융칭향(永靖乡영청향)의 농민소작료삭감운동, 타이베이철도노동자운동 등을 지도하고 당조직을 확대하는 등 나름 활약하던 그는 1949년 9월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화둥군정위원회(华东军政委员会화동군정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었다. 

 

 

✦ 타이완의 정세변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던 지하당 

 

1946년에 전면내전이 터질 때 숱한 미국제 장비들을 갖춘 수백 만 국민당군은 낡은 보총 따위나 가진 100여 만 중공 군대를 3개월이면 소멸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반대로 중공중앙은 5년 쯤 걸려야 전국승리를 거두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뜨리고 3년 만에 중공이 수백 만 국민당군을 타승하면서 전국의 대부분을 해방하여 당내외, 국내외에 낙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쟝제스가 50만 가량 패잔병을 끌고 타이완과 작은 섬들로 도망갔지만 그까짓 부대는 얼마 견디지 못한다는 게 보편적인 견해였다. 

하여 타이완에서도 1940년대 말에는 공산당이 가장 인기 좋은 조직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모았고 급격한 세력확대에 눈이 멀어 반공개, 공개활동을 벌이는 당간부들도 적잖았다.

 

한편 쟝제스는 참패 후에 교훈을 섭취하여 당과 정부, 군대를 개편했으니, 대륙시기의 그 많은 파벌들이 지지기반을 잃었기에 쟝제스에게로 힘을 모으는 개편은 쉬운 편이었다. 이런 개편은 여러 해 품이 걸렸는데, 그보다 먼저 그리고 그보다 효과적으로 진행된 게 특무조직의 강화였다. 

대륙시기에는 국민당 특무조직이 여러 개 있었고 서로 알력과 싸움이 많았다. 타이완으로 패퇴한 뒤 특무조직의 일원화를 실현한 사람이 쟝제스의 아들 쟝징궈(蒋经国장경국)로서 그는 그때 얻은 권력에 의지하여 뒷날 국민당 및 타이완의 최고권좌에 올랐다. 

 

근 천 만 제곱킬로미터인 대륙에서는 효율이 낮던 특무조직과 경찰조직이 수만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타이완섬과 연해의 일부 도서로 물러간 뒤에는 이른바 “압축효과”가 생겨나 인구 속의 특무, 경찰 비례가 높아졌고 내부싸움이 줄다나니 효율도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를 타이완 중공지하당은 제때에 감지하지 못했고 대응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는바, 직접적인 원인은 최고책임자 차이샤오챈이 제공했다. 

 

 

✦ 첫 체포에서는 굴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 체포에 굽어든 차이샤오챈 

 

1949년 말에 천저민(陈泽民진택민)이라는 자가 체포, 변절하면서 고발하여 1950년 1월 29일에 차이샤오챈이 체포되었는데 엄격한 심문에 적당한 대답으로 응부했더니, 특무들은 수법을 바꾸어 회유로 수단을 바꾸었다. 7일간 고려하던 차이샤오챈은 승낙하고는 특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지하일꾼들의 전화번호리스트를 찾아냈다. 리스트를 이용해 무리체포할 꿈에 취한 특무들이 차이샤오챈과 함께 어두운 굽인돌이에 이르렀을 때 차이샤오챈이 재빨리 달아났다. 특무들이 쫓았으나 잡지 못했다. 

 

거물을 놓친 특무들은 우두머리로부터 졸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압력을 받았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 또다시 차이샤오챈을 체포하여 혹형을 가했다. 피투성이가 된 차이샤오챈이 감방에서 처제 마원쥐안(马文娟마문견)의 이름을 부르니, 특무들은 그녀를 데려왔다. 마원쥐안이 이미 항복한 걸 보자 차이샤오챈도 곧 굴복했다 한다. 

그러면 마원쥐안이 왜 차이샤초챈에게 그처럼 큰 영향력을 가졌을까? 둘이 동거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1946년에 타이완으로 돌아갈 때 차이샤오챈은 아내와 처제와 동행했는데 처제는 당년 14살이었다 한다. 아내가 얼마 후 병사하니 차이샤오챈은 전 처제와 동거했다. 이 사실은 뒷날 감방에서 중공 당원들이 차이샤오챈을 비판하는 단골소재로 되었다 한다. 

두 번째 체포 일주일 안에 변절한 차이샤오챈은 아는 자료를 몽땅 털어놓았다. 

 

▲ 국민장군대 제복을 차려입은 차이샤오챈 

 

1950년 6월 1일, 차이샤오챈은 국민당의 지시에 따라 《중앙일보》에 공개성명을 발표했고 《중앙방송국(中央电台)》으로 라디오방송을 하여 활동을 견지하던 중공 타이완 지하당에 엄중한 타격을 가했다. 

그는 성명과 방송에서 자신의 “20여 년 중공경력”을 과시하면서 엄격한 기율 때문에 수없는 고통과 압제를 받았다고 하소연했다.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쳤겠느냐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겠다. 

 

몇 해 감금되었다가 살아난 공산당원들은 예전의 영도자 차이샤오챈과 그의 가명 “라오쩡(老郑노정, 우리말로는 ”정동무“, ”정서방“ 쯤 되겠다)”을 거들면 모두 분개하고 깔보는 한편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변절했는지 의문을 갖는다 한다. 연구자들은 상부의 직접 지휘와 떨어져서 섬에서 왕노릇을 하던 상황이 그의 부화타락과 해이함을 불러왔고 결국 변절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적게는 400여 명, 많이는 1800여 명을 고발해 체포되게 하고 그중 여러 사람이 사형되게 한 차이샤오챈은 그 공로로 국민당에 가입해 “국방부” 보밀국(保密局) 설계위원회 위원으로 되었고, 1956년에는 “국방부정보국” 비정(匪情비적정황, 비적은 국민당이 중공을 비하하는 말) 연구실로 옮겨갔으며 후에는 연구실의 소장 부주임 겸 “사법행정부 조사국” 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차이샤오챈은 다른 변절요인들과 마찬가지로 장기간 엄밀한 경호를 받으면서 출입을 삼갔다는데 1982년 10월 타이완에서 병사햇다. 

 

차이샤오챈의 저서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타이완(日本帝国主义的殖民地台湾)》, 《마오쩌둥군사사상연구(毛泽东军事思想研究)》, 《쟝시 소베트구역· 홍군이 서쪽으로 도망친데 대한 회억(江西苏区·红军西窜回忆)》등이 있으니 후자는 1970년 타이완중공연구잡지사에서 출판했다 한다. 책들을 남긴 외에 차이샤오챈의 생활과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게 없다. 

중공역사의 수치인 차이샤오챈은 두고두고 화제를 낳을 것이다. 

 

 

✦ 차이샤오챈과 대조되는 혁명가 세한광 

 

조직적으로는 붕괴되었으나 타이완에서 지조를 지키면서 활동을 벌인 중공 당원들은 적잖다. 확실한 기록이 있는 범위에서 투쟁시간에 가장 긴 사람은 세한광(谢汉光사한광)이다. 

 

▲ 지조를 지킨 세한광     ©

 

광둥성(广东省) 펑쑨현(丰顺县풍순현)태생으로서 21살 나던 1942년에 광시대학(广西大学광서대학) 농학원 삼림학부를 졸업하고 농업시험장과 철도농장에서 일하던 세한광은 항전 승리 후 중공 지하당에 가입하여 타이완으로 파견되었다. 

 

1949년 9월 하순에 타이중(台中대중)지구 지하당이 타격을 입었는데, 1950년에 타이완성 공작위윈회가 파괴되면서 타이중에서도 경찰이 많은 사람들을 체포했다. 세한광은 요행 그물에서 벗어났으나 “공비 화동국 타이완잠복조직 량쩡칭 등 반란사건(匪华东局潜台组织梁铮卿等叛乱案)”의 주요범인으로 지목되어 수배당했다. 

세한광은 타이둥(台东대동)의 험한 산골 마을로 달아나 촌장의 도움으로 실종된지 오랜 원주민 농민 예이쿠이(叶依奎엽의규)의 호적을 얻어 일하면서 어렵사리 38년을 보냈다. 1987년 7월 15일에 타이완 당국이 38년 시행한 “계엄”을 해제해서야 세한광은 산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1988년 12월 8일,일흔을 바라보는 백발노인이 된 세한광은 예이쿠이의 신분증을 갖고 타이완 당국의 “친척방문개방(开放探亲)”기회를 빌어 고향으로 돌아와 50여 년 갈라졌던 아내와 아들, 손자들과 만났다. 

 

6년 뒤인 1994년,중공중앙 조직부는 엄밀한 심사를 거쳐 세한광의 당원신분을 확인해 당적을 회복시켰고 이직휴양(1949년 건국 전에 혁명사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퇴직휴양退休이 아니라 이직휴양离休하는 바, 대우가 퇴직자들보다 훨씬 높다)수속을 보충했고, 이직휴양간부의 생활대우를 받았다. 

또 2년이 지나 1996년에 세한광은 집에서 전설적인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 75세.

 

차이샤오챈이 국민당 소장으로서 대도시에서 거들먹거리던 시절, 세한광은 시골에서 이름을 숨기고 험한 일을 했다. 그러나 74살에 죽은 차이샤오챈을 존경하는 사람도 기념하는 사람도 없는 지금, 세한광은 이념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어느 삶이 더 나았는가? 판단은 각자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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