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트럼프 핵버튼 발언은 북 핵보유 교묘한 인정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1/14 [04:5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의 미사일, 자동차, 트랙터 

 

지난 해 11월 29일 조선(북한)이 화성- 15형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후, 외국에서는 성능의 성장을 인정하면서도 조선사람들이 자체로 해내지 않았으리라는 오래 된 분석(?)을 또 하였다. 미국의 어느 전문가는 구소련 과학자들이 참가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구소련이 대륙간미사일들을 보유했다지만 당시 전자기술수준과 지금의 전자기술, 전자환경은 하늘과 땅 차이다. 게다가 구소련은 1991년 말에 해체되었고, 러시아는 조선에 미사일 기술이 유입되지 않도록 신경쓴다고 알려졌으며 구소련에 속했던 다른 나라들은 그동안 미사일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니, 구소련 과학자, 기술자들이란 27년 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요, 27년 동안 새로운 지식은 어떻게 얻어볼 수 있어도 새로운 기술을 배울 기회도, 실천할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미사일연구에 기여했다? 상식적으로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조선이 일단 뭘 만들어냈다고 “자력갱생의 성과”를 공포하면 외부에서는 외부의 전문가가 도와줬거나 외부제품을 베꼈으리라는 분석이 나오는 게 고정된 프로라고 할 지경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7년 11월에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고 새 형의 화물자동차생산을 치하한 다음 12월 7일에는 새 《승리》호화물자동차와 《천리마-804》호 뜨락또르(트랙터), 《충성-122》호 뜨락또르 진출식이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되었다. 

박봉주 내각총리가 참석한 진출식은 자체의 윤전기재 생산능력을 과시하는 외에, 휘발유를 쓰는 자동차도 디젤유를 쓰는 트랙터도 많이 굴릴 수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기름 제재에 조선이 끄떡하지 않는다고 과시하는 성격도 다분하다. 

 

트랙터에 대해서는 아직 별 소리를 접하지 못했는데, 신형 5톤급 화물자동차는 일본 닛산회사의 아틀라스 F24와 디자인이 아주 비슷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필자는 자동차맹이라 어떻게 비슷한지 모른다만, 북의 표절혐의를 확실하게 찍으려면 “승리”호 자동차 운전실 내부사진도 몇 장 찍은 다음 조종과 동력부분들도 닛산제품을 빼닮았더라고 말해야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겠나 생각된다. “북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들이 그처럼 빈번히 한국과 일본 언론들에 등장하면서도 필요한 사진을 제공한 경우가 몇 번이나 되던지 손으로 꼽으면 손가락이 남아돈다. 

 

조선의 트랙터는 원래 1950년대에 소련 트랙터를 분해하여 부품들을 일일이 재고 도면을 떠서 부품들을 만들어 조립했다는 게 널리 알려졌다. 그로부터 “역설계”라는 전통이 조선에서 생겨났는데 정말 뭘 모방했다면 굳이 감추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 중국의 고급승용차 훙치의 운명 

 

중국은 조선과 달리 1950년대에 소련과 계약을 맺고 기술을 들여다가 트랙터를 만들었다. 창춘(장춘)의 제1자동차제조공장이 만든 “해방”표 자동차도 소련의 설계와 기술을 인입했다. 4톤급 국산화물차를 대량생산하게 되면서 자동차인들은 국산승용차 그것도 고급승용차를 만들 야심을 품게 되었으나 참고할 만한 자료마저 없었다. 곤경을 알게 된 중앙 지도자들이 자신의 차를 보내주어 제1자동차는 벤츠, 크라이슬러 등을 해체하고 분석한 뒤 디자인에는 중국 특색을 보태서 1958년에 우선 수공작업으로 둥펑(东风, 동풍) 승용차를 만들어냈고 뒤이어 훙치(红旗, 붉은기) 고급승용차를 제작했다. 

 

디자인이 좀씩 변화하고 성능도 꾸준히 제고되면서 훙치 승용차는 성급 이상 영도자들이 타는 간부 차량으로 인정되었고 외국귀빈들도 태우게 되었다. 하여 1970년대에는 외국 수반들이 훙치 승용차를 타고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고 만리장성에 오르고 베이징 구운오리를 먹어야만 중국을 제대로 방문한 셈이라는 말이 나왔다. 훙치 차는 친선국가들에도 나갔으니 조선에 나간 40대가 최고량을 기록했다. 

 

헌데 이 국가를 대표하는 차가 1981년에 생산금지령을 받고 무대에서 물러났다. 국무원의 전기절약, 기름절약 지령을 내걸고 훙치표 고급승용차는 기름소모가 비교적 많으므로 6월부터 생산을 정지한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다. 

훙치가 물러남에 따라 외국제 고급승용차가 중국의 고급간부차로 되었고 상당기간 아우디가 중국 영도자들과 외국귀빈들을 싣고 다녔다. 1995년부터 아우디에 기초한 새 훙치가 나오기는 했으나 훙치의 확실한 재생은 시진핑 첫 임기 두 번째 해에 이뤄졌으니 고급간부들의 국산차사용이 권장되면서 정부 측 시장이 커졌고 덩달아 개인승용차 시장에서도 훙치선호도가 높아진 덕이다. 제1자동차는 훙치 차에 힘을 기울이고 국가대표급 차의 부흥에 흥분하는 중국인들 또한 많다. 

 

훙치차가 다시 나타나면서 당년에 생산정지된 내막에 대한 설들도 다시 퍼졌다. 

수공으로 만든 훙치 차가 사용과정에서 엄중한 품질문제들이 속속 일어났다는 것. 

고급간부들이 외국차를 타보게 되면서 훙치차가 너무 무겁고 고속도로에서의 가속성능이 떨어지는 걸 망신스럽게 여겼다는 것. 사실 훙치 승용차는 안전부터 중시하다나니 튼튼하게 만들었는 바, 4톤급 해방표 화물차와 부딪치면 이긴다고까지 알려졌고, 당시 중국의 길들에서는 차들이 통상 수십 킬로미터 시속으로 달렸으니까 고속도운행에서 훙치 차가 뒤떨어졌다는 설은 믿어진다.  

 

제1자동차의 공장장이었던 사람의 아들이 2016년 6월 7일 개인블로그에 올린 글은 그 나름의 내막을 털어놓았다. 

기름소모가 심하다는 것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건 구실에 불과하다. 몇 톤 무게의 훙치가 100킬로미터에 휘발유 19리터를 소모했는데 당시 수입한 호화차들보도 별로 많지 않다.  진짜 원인은 당시 일부 관원들이 더 편안한 수입제 승용차를 타고 싶어한 데 있다. 

이는 에어컨 부재도 훙치차 혐오의 이유로 되었으리라 필자의 개인적인 짐작과 일치된다. 

이밖에 국산승용차의 생산량이 너무 적어 일본승용차를 대량 수입하다나니 고급간부들이 국산차를 타고 중급간부들이 외국차를 타는 기이한 현상도 훙치 생산정지의 중요한 원인으로 되었다 한다. 

 

훙치 승용차가 물러난 후 중앙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중급, 고급승용차를 대량 사용하다나니, 1982~ 1986년에 17. 34만 대를 수입하여 그전 32년 수입량-1950~ 1981년까지 7. 38만 대-의 2배를 윗돌았고, 그중 1985년에만 해도 10. 6만 대를 수입하여 외화 29. 5억 달러를 썼다. 

30여 년 동안 중국이 고급차 수입에 들인 천문학 수자의 돈을 훙치 차를 대표로 하는 국산차의 개진에 투입했더라면 국산차가 정부와 민간의 수요를 만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을 텐데, 이른바 “시장으로 기술을 바꾼다”는 설에 현혹되어 외국과의 합작회사들을 많이 세우거나 수입을 하다다니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들이나 가졌을 뿐, 첨단기술도 시장도 얻지 못했다. 2010년대에야 뒤늦게 국산차지지정책을 실시하는데,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이기려면 갈 길이 멀다. 

 

 

✦ 매국이라 말해도 좋다던 자오즈양 

 

훙치 승용차의 생산정지는 “자력갱생”을 부정하고 “만드는 게 사는 것보다 못하고 사는 게 세내는 것보다 못하다“는 논리가 성행하게 된 1980년대 초중반의 중국 상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어느 한두 사람이 아니라 상당수 간부들을 포함하여 숱한 중국인들이 외국(주로 서방나라들)의 발전수준에 놀라고 부끄러워하였기에 투박한 국산은 믿기 어렵고 싫다는 분위기가 이뤄졌다. 

 

외국숭배를 중국어로 “충양메이와이(崇洋媚外)”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1980년대 초중반의 총리였고 1989년 여름에 중공 총서기직에서 해임된 자오즈양(赵紫阳, 1919~ 2005, 조자양)이다. 

  

▲ 자오즈양

 

중국의 핵과 미사일 프로젝트를 일선에서 지휘했던 상장 장아이핑(张爱萍, 1910~ 2003, 장애평)은 당시 국무원 부총리로 일했는데, 만년에 아들과의 대화에서 내막들을 털어놓았으니 책 제목은 《전쟁 중에서 걸어온 두 세대 군인의 대화(从战争中走来两代军人的对话)》이다. 

 

중국의 국방과학기술공업은 마오쩌둥(모택동)시대에 철저히 전쟁에 대비하다나니 산골과 사막 등 험한 고장들에 공장과 연구시설들이 세워졌고, 중국이 1980년 5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태평양에 발사하여 성공한 다음, 덩샤오핑(등소평)이 30년 쯤은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국방에 쓰던 비용을 대량 민용으로 돌리면서 군대가 통째로 사가던 물품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면서 국방과학기술공업계통의 공장과 연구소들은 어떻게 생존해야 되느냐는 난제에 부딪쳤다. 중국의 제1세대 민간용세탁기를 선양(심양)비행기제조공장이 만들어내서 판 게 전형적인 실례이다. 

비행기공장의 세탁기제조는 그나마 전환이 어렵지 않았으나, 핵연구소와 핵공장의 전환은 복잡했다. 

 

▲ 장아이핑 

 

1981년 10월 중남해에서 열린 국무원 상무회의 마지막 의제는 광둥성(광동성) 남쪽에 세울 따야만(大亚湾) 핵발전소 문제였다. 뒷날 중국의 첫 핵발전소로 되었는데, 건설과정에서 홍콩사람들은 홍콩과 가까운 곳에 세운다고 아우성치면서 반대했고, 중공의 일은 사사건건 반대해온 타이완(대만)이 오히려 침묵을 지켰다. 타이완의 핵발전소가 대도시와 더 가까운데 위치했기에 반대명분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 1994년에 사용을 시작한 중국의 첫 핵발전소 따야만 핵발전소

 

당시 자오즈양은 따야만 핵발전소의 프랑스기술 인입을 확정하자고 했는데, 장아이핑은 친산(秦山, 진산)핵발전소는 어떻게 하겠는가고 가급적으로 빨리 공사를 시작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자오즈양은 여러 부서의 의견이 같지 않음을 이유로 토의를 미루려 했고, 장아이핑은 먼저 원자탄, 수소탄, 미사일, 위성들은 만들어냈으나 원자탄을 밥 삼아 먹을 수 없다고 지적한 뒤, 핵공업이 아주 어려우니 도와주면서 출로를 찾아줘야 한다고, 늦으면 인재와 기술, 설비들이 흩어지고 노화된다고 위험성을 까밝혔다. 급선무는 핵탄을 만든 기초를 이용하여 빨리 전환하여 우리나라 자체의 핵발전공업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제2기계공업부(二机部)이자 국방공업의 이후의 출로인 동시에 국가의 에너지전략과도 관계된다고, 우리는 원유대국이 아니고 석탄의 과잉은 잠시현상이므로 핵발전이 하나의 힘으로서 특히 남방에서 그러한데 핵발전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하겠는가? 역시 오랜 경험대로 자력갱생하여야 된다고, 외국인들에게 코를 꿰여서는 절대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국무원이 그런 결심을 내려야 하고 그것도 지금 당장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뒤이어 친산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작은 규모의 핵발전소가 중국에 필요하고 친산의 자체건설과 따야완의 인입이 서로 배척되지 않는다고, 인입하더라도 자체로 해보았으면 담판에서 지위가 퍽 달라지고 소화에도 이롭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장아이핑은 친산 핵발전소공사를 시작하면 전반적인 핵공업의 전환을 이끌고 사기를 돋우는 효과를 거둔다면서 자오즈양에게 고려해주기를 요청한 다음, 한 가지 보충했다. 그것 또한 주요한 문제였으니 세트로 인입하면 중국 자체로 핵연료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다는 점. 

 

자오즈양은 오랫동안 침묵하더니 당신들은 핵연료과잉이라고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장아이핑은 과잉한 건 원자탄제조용 고농축우라늄이고 지금 말한 건 저농축우라늄이라고 설명했다. 연료를 공급하지 못하면 남들에게서 사야하고 그러면 필연코 남들에게 압제당한다고. 

 

자오즈양은 또다시 침묵하다가 몇 번이라 토론한 일인데 결정을 지을 무렵에 또 숱한 의견을 제기하곤 하니 어떻게 일하겠느냐고 푸념했다. 

분위기가 나빠지면서 다른 회의참가자와 장아이핑이 책상을 치면서 다퉜고 자오즈양과 장아이핑도 서류보고 여부를 놓고 쟁론을 벌렸다. 

 

또다시 오랫동안 침묵한 끝에 자오즈양이 한 마디 했다. 

“이렇게 정합시다. 나를 매국주의라고 말하면 매국주의라지 뭐!(就这样决定了。说我卖国主义就卖国主义吧)” 

“총리, 이렇게 이해한다면 난 이제부터 말하지 않겠습니다!(总理,如果你是这样理解的话,那我从此就再不说话了)” 

 

다른 부총리가 식사시간이 됐다면서 화제를 돌려 더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중국의 핵발전속도는 핵무기연구에 비해 너무나도 늦었다. 원자탄 시험 3년 미만에 수소탄을 성공시킨 세계기록을 세웠던 중국이었건만 핵발전소는 첫 원자로건설 뒤 33년 만에야 세워졌던 것이다. 그에 비해 소련은 8년, 영국은 9년, 미국은 15년이었다. 

핵발전소의 발전방향도 굽은 길을 걸은 끝에 중국이 지적재산권을 가진 남들보다 안전한 기술을 확보하여 외국에 수출까지 하게 되었는데, 치른 대가가 너무나도 크다. 

 

외국의 어떤 사람들은 자오즈양을 찬미하면서 그가 인민을 대표한 듯이 묘사한다. 허나 자오즈양이 집권하던 시기에 물가파동이 일어나고 생활과 사업이 여러 모로 불편했으므로 그를 존경하거나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더욱이 1989년 여름에 권력을 잃기 직전 톈안먼(천안문)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시위자들을 만나는 바람에 강한 정치인을 선호하는 중국인들의 구미를 거슬렸다. 뒷날 장아이핑처럼 자오즈양이 한 말, 한 일들을 공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의 이미지는 한결 흐려졌다. 이런 대중이미지는 그의 구술 자서전이 홍콩에서 출판되어 퍼진다 해서 고쳐질 수 없는 법이다. 수십 년 동안 필자가 만난 그 숱한 사람들 가운데 자오즈양을 존경한 사람은 하나 밖에 없었다. 

 

 

✦ 북 군수공업진로는? 

 

시진핑 집권 후 우선 군대의 풍기가 바로잡히면서 금품을 바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짜 유능한 사람들이 승진하게 된다는 희망이 커졌고, 공업에서도 국산 대형비행기를 비롯해 일할 맛이 나고 보람을 느끼는 프로젝트들이 많이 추진되었다. 시진핑 주석은 국산 대형비행기를 제조하는 상하이의 회사에 가서 “예전의 논리는 배를 만드는 게 사는 것보다 못하고 배를 사는 게 세내는 것보다 못하다였는데, 이 논리를 뒤집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까놓고 말하면 자력갱생으로 좋은 제품들을 만들어 국내, 국제시장을 차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 조선은 엄혹한 제재를 받는 상황이라 트럭이나 트랙터들이 국내에서는 잘 퍼지더라도 국제시장에 나가기 어렵고, 한때 효자종목이었다는 미사일도 수출이 금지되었다. 하기에 아직은 국제시장까지 고려하지 못한다만, 군수공업 특히 핵공업의 진로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당장은 핵무기의 질량 제고에 무게를 두더라도 2010년에 상온핵융합실험성공을 선포하는 등 평화용 연구도 추진해왔으니 말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20여 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문제에서 1970년대 초반의 닉슨과 그 부하들은 핵무기를 가진 6억 중국인이 “분노의 고립”을 계속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당시 중국은 원자탄, 수소탄과 위성을 가졌을 뿐,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위에서 썼다시피 1980년에 확보했다. 

 

지금 조선의 핵무기가 어느 정도수준이던지 미사일의 대기층재진입기술을 확실히 가졌던지 일단 조선이 1만 3천 킬로미터 이상의 미국 본토로 미사일을 날릴 정도는 증명되었다. 핵과 미사일이란 개수보다 위력이 훨씬 중요하다. 때문에 상대방을 N번 궤멸시킬 능력이든 1번 궤멸시킬 능력이든 실질적으로 차이가 별로 없다. 하기에 예전의 6억 중국인의 “분노의 고립”과 지금의 2천 수백 만 조선인의 “분노의 고립”이나 미국과 그 추종세력에 대한 위험성 정도도 별로 차이가 없다. 

 

미국에서는 미군이 북진하여 조선의 핵무기들을 확보한 후 38선 아래로 돌아온다고 중국에 보증했다는 설이 나오는데, 첫째로 핵시설과 핵무기들의 장소부터 애매한 상황에서 그런 작전이 가능하겠느냐가 의심스럽고 둘째로 조선이 가만히 앉아 당하기만 하겠느냐를 믿을 수 없으며, 셋째로 구소련 해체 후 자꾸만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시켜 러시아와 충돌을 빚어내는 미국을 보아온 중국이 미국의 보증을 믿겠느냐도 의문이다. 

 

반도 핵문제의 가장 합리한 해결책은 핵연구시설의 민용화 활용이 아니겠나 생각해본다. 즉 핵에너지의 평화적인 이용인데, 요즘 아랍에미리트추장국에서 말썽거리를 만든 이른바 한국식 원전은 정답이 아니고 뭔가 남다른 것이겠다. 

 

 

✦ 트럼프의 핵단추 크기 발언을 이렇게 본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미국본토전역이 우리의 핵타격사정권안에 있으며 핵단추가 내 사무실책상우에 항상 놓여있다는것 이는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니,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의 핵단추가 더 크고 또 작동도 된다고 자랑하는 바람에 숱한 사람들의 우려와 비난을 자아냈다. 핵전쟁에서는 핵무기의 수량이 중요치 않다는 상식에 기초하여 트럼프의 “크기” 발언이 유치하다는 식의 주장이 많았는데, 필자는 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본다. 

 

트럼프가 내 핵단추가 진짜고 작동도 된다고 자랑했더라면 조선의 핵보유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기존입장에 어긋나지 않는 완벽한 발언이 되고 미국의 핵우세를 확실히 과시할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핵단추의 크기를 따짐으로써 결국에는 조선의 핵무기보유를 인정해버렸다. 즉흥적 대응의 실수라고 볼 수도 있겠다만, 수십 년 장사판에서 굴러먹은 트럼프가 즉흥적인 듯 하지만 실제는 계산된 언행들로 실리를 챙기는데 이골이 텄음을 감안하면 그저 실수라고 하기는 어렵다. 

조선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첫 걸음이거나 미국의 자국민 및 동맹국들의 조선핵보유상황 시인을 이끌어내는 첫 시도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트럼프의 자랑 때문에 세계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했으니까. 

이런 트럼프의 변화 또한 북의 높은 자력갱생력을 놓고 보았을 때 인정하지 않을 경우 더욱 더 강한 핵무장력을 과시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은 생각의 틀을 깨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한 해로 되겠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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