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15] 1990년대의 두 고급변절자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1/27 [15:55]  최종편집: ⓒ 자주시보

 

1990년대 초의 어느 날 《조선일보》가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이었던 쉬쟈툰(许家屯허가둔, 1916~ 2016)의 미국망명 소식을 보도하면서 “제2차 임표사건”이라는 외신의 호들갑도 전했다. 임표-린뱌오(林彪)는 한때 중국공산당이 명문으로 표시한 계승자로서 명실상부한 2인자였는데 1917년 9월 13일 소련으로 망명하다가 비행기가 몽골에 추락해 죽었다. 성급 지도자에 그쳤던 쉬쟈툰은 만년에 홍콩에서 활동했기에 이름과 얼굴이 언론들에 비교적 많이 등장했으나 지위와 영향력이 린뱌오와는 천양지차였으니 외신의 표현은 지나친 과장이었다. 

 

▲ 늘그막 망명으로 소문냈던 쉬쟈툰  

 

이 글을 쓰면서 쉬쟈툰의 망명시기를 확인해보니 1990년 4월이었으니까 기사도 그달에 실렸을 것이다. 그 무렵의 국제정세를 음미하면 외신의 호들갑이 이해되기도 한다. 1989년 6월 중국이 텐안문 사태(중국에서는 “류쓰六四”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를 진압한 이후 서방세력들이 중국을 제재봉쇄하면서 반중국여론이 극에 이르렀고, 서방으로 망명한 이른바 민주투사(民主斗士, 근년에 중국어사이트들에서는 세 번째 글자와 음이 같으나 웃긴다는 뜻을 가진 떠우逗를 넣어 민주떠우쓰民主逗士라고 풍자한다. 웃기는 놈들이라는 뜻이 된다)들은 중공정권이 길어야 몇 해만에 붕괴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중국과 중공이 전에 없이 강대해진 이제 와서는 참으로 웃기지만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이 저조기에 처하고 소련과 동유럽이 흔들렸기에 그런 믿음도 나름 근거는 있었다. 

 

섣부른 “민주투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의존하다나니 서방 언론들과 정치인들도 중국붕괴설을 믿고 날랐기에 쉬쟈툰의 망명이 망명붐을 일으켜 중공이 무너지기를 기대했다. 

허나 2018년 현재까지 근 30년이 지나도록 성급과 그 이상 영도자들 가운데서 망명객은 하나도 늘어나지 않았다. 기자와 “중국문제전문가”들이 예전의 글을 돌이켜볼 용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쉬쟈툰 본인은 101살까지 살았으나 행복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 같다. 

본명은 쉬위안원(许元文허원문)인 쉬쟈툰은 쟝수성(江苏省) 루가오현(如皋县)에서 태어나 22살 나던 193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변절의 추학 전편들에서 설명했다시피 1937년 전면적인 항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중공이 합법적인 지위를 가지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렸고 항일의 기치 밑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 당원수와 군대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중에는 공산주의이론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도 있지만 견결히 항일하는 공산당에 반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고 투기목적으로 끼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당원대오의 빠른 장성은 뒷날 후유증들을 드러냈고 중공이 거듭 정치운동을 별려 당원대로를 순결화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항일전쟁기간에 쉬쟈툰은 지방에서 죽 일했는데 진급이 빠른 편이어서 몇 해 후 루시현(如西县여서현) 위원회 서기, 타이저우현(泰州县태주현) 위원회 서기 등을 역임했으니 여기서 타이저우는 신사군이 개척한 근거지들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 혁명사에 늘 나온다. 

1945년에 쑤중구(苏中区소중구) 제3지방위원회(第三地方委员会) 서기로 승진했다가 중공이 국민당과의 협의에 따라 남방의 일부 근거지들을 포기하고 부대들을 북방으로 철수시키면서 군으로 자리를 옮겨 정치사업을 맡았으니 1948년 4월에 화둥야전군(华东野战军화동야전군) 11종대 33여(旅여단) 부정치위원(副政治委员)< 1949년 3월 화둥야전군 29군 87사(师사단) 정치위원으로 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가을에 건립된 후 그는 지방으로 돌아와 중공 쟝수성 위원회 상무위원으로 되었고 이듬해 7월에 성위원회 서기로 승진했다. 빠른 승진은 그의 능력이 인정받았음을 말해준다. 그 뒤 죽 쟝수성에서 일하던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한동안 고생했으나 다시 간부로 되었고 1979년부터 1983년까지는 쟝수성 위원회 제1서기로서 쟝수성 제5기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도 겸임했으며, 중공 11차, 12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거되었다. 

 

쉬쟈툰이 미국에서 쓴 《쉬쟈툰샹강후이이루(许家屯香港回忆录허가둔홍콩회고록)》에서는 1980년대 초반 자신이 쟝수성에서 이른바 늙은 “보수주의자”들과 모순이 심했다고 주장한다. 항일전쟁시기부터의 상관들이었는데 그의 눈에는 시대에 뒤떨어져 발목을 잡는 한심한 영감태기들로 비친 모양이다. 쟝수성에서 별로 즐겁지 못하게 보냈다는 그는 중공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과 다른 사람들 덕에 중공의 통신사 신화사로 자리를 옮겨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신화사 홍콩분사 사장으로 활동했다. 

홍콩이 영국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신화통신사의 분사 사장은 중공을 대변하여 홍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니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분사 사장은 쉬쟈툰의 공개직무이고 당내 직무는 중국공산당 강아오공작위원회(港澳工作委员会, 홍콩마카오 공작위원회) 서기였으니 줄여서 강아오꿍워이(港澳工委)라고 부르는 이 위원회는 홍콩과 마카오의 공개, 반공개, 비공개 중공 조직들 및 중공과 협조하는 민간단체, 민간인사들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그런 내막을 외신들도 알기에 “제2차 임표사건”을 운운하면서 큼직큼직한 내막들이 터져서 중국이 홍콩을 되찾는 활동에 차질이 빚어지기를 바랐지만, 홍콩과 마카오에서 쉬쟈툰 때문에 망한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의 후임자인 저우난(周南주남)의 활약으로 홍콩의 회귀가 한결 순조롭게 추진되어 1997년 7월 1일 예정날짜에 홍콩이 중국으로 돌아왔다. 

쉬쟈툰은 자신이 홍콩에 가서 열심히 일했고 성적도 많았으나 상부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후야오방 실각 후의 중앙과 모순이 생겼으며 1989년 정치풍파에서는 중앙의 아무개아무개가 한심하게 놀았다는 식으로 회고록을 엮었다. 

 

쉬쟈툰의 눈에는 한참 후배로 비칠 쟝저민(江泽民강택민, 1926~), 리펑(李鹏이붕, 1928~)을 중심으로 새로운 중앙이 이뤄진 후 1990년 2월에 그가 해임되어 대륙으로 돌아왔고 건국 전에 혁명에 참가한 간부대우에 따라 이직휴양(离休)이 시작되었다. 

그해 4월 허가를 받지 않은 채로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여행휴식(旅游休息)”하러 갔으니 외국에서는 즉시 망명에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돌아오라고 권하던 중공은 이듬해 그의 당적을 취소했고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직무도 취소했다. 

로스안젤레스 부근의 작은 도시 치노 윌(Chino Hills)에서 거주하면서 1993년에 회고록을 출판한 쉬쟈툰은 2016년 여름에 로스안젤레스 집에서 죽었다. 

 

쉬쟈툰이 자신의 망명을 정치신념과 정치방식의 차이로 설명한 회고록과 달리 2007년에 출판된 책 《저우난 구술, 옛시절의 깃털부채, 윤건을 회상하며(周南口述:遥想当年羽扇纶巾)》에서 쉬쟈툰의 후임자 저우난은 쉬쟈툰이 홍콩에 가서 물질유혹에 굴복하여 부화한 생활을 했고 국가에 자금 1억 달러를 요구하여 회사를 만들고는 자기 사람을 배치해 사복을 채웠으며, 정치투기행위를 일삼아 개인세력을 키우고 남들을 배척했기에, 중앙이 그의 직무를 해제했다고 해석했다. 또한 그가 서방의 반중국세력의 도움을 받아 본처를 버리고 정부와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다고 지적했다. 

 

저우난은 또 국무원 홍콩, 마카오 판공실 부주임이었던 리허우(李后이후)의 회고록을 인용하여 쉬쟈툰이 독단적으로 처사하고 중대한 문제들에서 함부로 대외에 의견을 발표하고 행동을 취했으며 종파정서가 농후해 숱한 사람들의 원망을 자아냈다고 주장했다. 홍콩에서 일하는 많은 간부들이 분분히 베이징에 의견을 제기했는데, 중앙에서는 쉬쟈툰이 73세에 이르러 나이가 이직기준선을 넘은 걸 고려해 전근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쉬쟈툰은 돌아가기 싫어서 자기가 전근되면 홍콩 주식시장이 흔들린다는 이유를 댔다. 중앙 영도자들은 그의 이유가 아주 우습다고 여겼고, 신화통신사가 전근소식을 발표한 다음 홍콩 주식시장이 전혀 흔들리지 았았다. 그래도 쉬쟈툰은 떠나기 싫어 홍콩과 인접한 선전(深圳심천) 특구에서 살겠다고 계속 홍콩문제를 연구하겠다고 제기했다. 나중에 중앙은 그의 의견을 부결하고 베이징이나 쟝수성 정부 소재지 난징(南京남경)에서 거주하라고 요구했으니 이는 그가 홍콩의 사업들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쉬쟈툰과 저우난의 주장들이 어느 편이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까우냐는 보고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단 쉬쟈툰의 회고록만이 아니라 그가 수십 년 동안 남긴 글들 특히 문화대혁명시기에 했던 말, 썼던 글들을 살펴보고, 남들이 그를 언급한 내용들을 보면 쉬쟈툰이란 인물의 사람됨을 잘 알 수 있다. 

쉬쟈툰이 쟝수성의 1인자로 있을 때 중공중앙 주석이었던 화궈펑(华国锋화국봉, 1921~ 2008)이 시찰하러 갔는데 쉬쟈툰이 “영명한 영수(英明领袖)”로 불리던 화궈펑의 팔을 부축하면서 모시고 다녀 뭇사람의 빈축을 샀다. 어떻게 3살 연하인 사람을 부축하느냐고, 아첨이 지나치지 않느냐고. 화궈펑이 덩샤오핑 일파에게 밀려나 1980년에 실각한 뒤에도 쉬쟈툰이 쟝수성에서 1인자로 3~4년 있은 건 그가 새로운 형세에 편승해 화궈펑을 비판하고 덩샤오핑 쪽에 붙었음을 증명한다. 

 

자기보다 젊은 사람을 부축했다는 세부 하나만으로도 쉬쟈툰이 치사한 인간임이 드러나는데, 그런 사람이 전에 접촉하지 않았던 홍콩, 마카오 사무를 전담했다는 건 후야오방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오판했음을 말해준다. 개혁개방에 열성을 부린 겉모습에 속았을까? 간부선발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쉬쟈툰의 경력으로도 알 수 있겠다. 

 

쉬쟈툰은 중공 고위간부출신이라 미국에서 민주투사들과 어울릴 리 없었고 국민당 출신의 화교나 미국시민들과도 다툼을 벌렸다니까 오래 산 게 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상전을 잘못 만나 목숨을 잃은 류랜쿤 

 

중국의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국민들의 해외여행이 날로 많아지면서, 타이완을 향한 변절은 예전의 비행기 몰고 가기보다 극성이 약해졌다. 대신 발각된 과정과 체포경과의 극성이 강해져 두고두고 화젯거리를 만든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소장이었다가 국민당군대의 소장 계급도 받았다는 류랜쿤(刘连昆, 1933~ 1999)을 예로 들어보자. 중국이 군사법정의 비공개재판을 거쳐 사형에 언도하고 집행하였으므로 100% 확실한 정보들이 적고 설들이 많은데, 꽤나 믿을 만한 정보들을 추려서 옮긴다. 

 

▲ 적대적인 두 군대의 소장노릇을 했던 류랜쿤 


1940년대 후반에 동북에서 참군하여 오랫동안 군사장비부문에서 일하다가 해방군 총후근부 군계부(总后勤部军械部) 부장 직에서 퇴역한 류랜쿤은 1992년에 타이완 간첩으로 되어, 해협 양안에서 소장 대우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군계(쥔쎄军械)란 군대의 무기장비를 가리키는 말이니 부장이었던 사람은 당연히 고급정보를 많이 알았고 군대 내부의 인맥도 넓었다. 

 

그의 변절에 줄을 달아준 사람은 해방군 군계부 국장이었던 대좌 싸오쩡중(邵正宗, 소정종)으로서 1991년에 “타이완 상인” 장 아무개를 통해 타이완 “국방부 군사정보국”에 가입해 “싸오캉 1호(少康一号)”라는 암호명을 받았다 한다. 싸오쩡중이 열심히 설득하여 류랜쿤은 타이완의 정보기관에 들어갈 마음을 먹었는데, 톈안먼 사태 처리에 대한 불만과 중장진급을 하지 못하고 퇴역하게 된다는 게 원인이었다 한다. 

 

소식을 받은 타이완 측은 국장 인중원(殷宗文은종문)이 직접 지휘하여 1992년 11월에 6처의 왕 아무개 상좌 부국장의 계급을 한 등급 올려 소장 신분으로 대륙에 보냈다. 목표는 “싸오캉 2호” 류랜쿤를 쟁취하는 것. 왕 소장이 광저우(广州市)의 이름난 바이텐어빈관(白天鹅宾馆백조호텔)에 투숙하자, 싸오쩡중이 곧 베이징에 있는 류랜쿤에게 통지하여, 류랜쿤가 기차를 타고 광저우로 갔으니 이는 비행기를 타면 기록이 남는 현상을 피하기 위해였단다. 지금은 기차를 타도 신분증을 제시하고 표를 사기에 기록이 남게 된다. 

 

광저우 교외의 어느 공원에서의 첫 대면 효과가 괜찮아 류랜쿤과 왕은 식당으로 옮겨가 식사하면서 서로 알고 싶은 일들을 얘기했다. 왕은 첫 선물로 2만 달러를 건넸고 “국군” 소장 계급에 준하는 대우를 하겠다고 알렸으니 월급은 3500달러, 상금은 별도로 지급하는바 정보들은 타이완 위안으로 40만~ 100만 위안으로 계산하여 해외은행구좌에 대신 저금해주기로 했다. 퇴직하면 “군사정보국”이 생활과 복지를 돌봐주고 또 류랜쿤의 개인의사에 따라 타이완이나 외국에서 거주하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류랜쿤은 해방군 고급장령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한편 일부 고위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 등을 털어놓아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했다. 

 

더러운 거래가 성사되어 류랜쿤은 1999년에 체포되기까지 7년 동안 대륙의 중요한 군사정보를 대량 제공했는바, “싸오캉 프로젝트(少康项目)”가 “군사정보국”의 “보물(镇山之宝)”로 간주되었다 한다. 

류랜쿤가 팔아먹은 정보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건 1996년 3월 타이완의 “총통”선거기간에 대륙이 진행한 군사연습 정황이었다. 류랜쿤가 잡힌 다음 타이완 여론은 원인을 두 가지에서 찾았으니, 하나는 군사정보국 내부의 알력과 공로다툼 때문에 류랜쿤을 과도하게 이용한 실수였고, 하나는 타이완의 일인자로서 해협 양안이 두 나라라고 주장(“량궈룬(两国论양국론)”이라고 불린다)하면서 거대한 정치파동을 일으켰고 “총통”자리를 확보하려던 리덩후이(李登辉리등휘)의 막말이었다, 

 

1996년의 연습은 쟝저민 주석의 지휘 하에 굉장한 규모로 진행되었는데, 원래 계획은 실탄사격, 해협 중앙선 넘기, 잠수함 동원, 외부도서 점령 등이었다가, 타이완이 류랜쿤의 정보를 받고 미국도 끼어들어 항공모함집단 2개를 파견하는 바람에 중공 중앙은 대전의 폭발을 걱정하여 미사일이 타이완섬을 넘지 않고, 군함과 비행기가 해협 중앙선을 넘지 않으며 외부도서들을 점령하지 않는다는 3불원칙을 정했다 한다. 그 정보 역시 류랜쿤이 즉시 제공해 타이완이 순조로이 “총통”선거를 치렀다는 것이다. 

 

중공 중앙의 계획변경여부는 아직까지 비밀해제되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그때 리덩후이가 유세장에서 한 말은 전파를 타고 세계에 퍼졌다. “중공의 모든 행동은 우리에게 장악되었다. 대륙의 페이딴은 공포탄이다(中共所有行动都在我们掌握中,大陆的飞弹是空包弹)”. 페이딴(飞弹)이란 타이완에서 미사일을 부르는 말로서 대륙에서는 “다오딴导弹”이라 부르는데, 리떵후이는 그 번 연습에서 사격할 미사일들의 탄두부분에 정밀측험시스템(精准测试系统)만 있으니까 백성들이 마음 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이 대륙 보위기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엄밀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류랜쿤의 꼬리를 밟게 되었는데, 그동안에도 류랜쿤은 타이완의 거듭되는 요구에 의해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하면서 귀순운동대상으로 될 만한 장령명단도 작성해주었다 한다. 언젠가 리떵후이가 대륙에 군(군단)이 24개 있으니까 군장에서 1억 위안씩 주어 귀순시키면 24억이면 해방군을 장악할 수 있다고 무식한 소리를 한 것도 그 나름대로의 정보를 가졌기 때문이겠다. 허나 필자가 전날 어느 글에서 지적했듯이 해방군의 군은 군장 혼자 움직일 수 없다. 상부를 젖혀놓고 군에만 해도 동급의 정치위원이 있으니까, 리떵후이는 해방군을 몰라도 한참 몰랐다. 

 

1999년 4월 타이완 간첩 예빙난(叶炳南엽병남)이 1999년 4월 체포되어 류랜쿤과 싸오쩡중의 정체를 털어놓아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대륙 보위기관은 두 자를 체포했다. 예빙난의 말에 의하면 그가 류랜쿤에게 전달해준 돈만 해도 50여 만 달러나 되었다니, 다른 연락자들까지 합쳐서 류랜쿤에게 준 돈은 훨씬 많을 것이다. 구체적인 수자는 타이완 “군사정보국”이 알겠다만, 류랜쿤의 체포와 처형으로 해외에 저금하던 돈은 절약하게 되었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다나니 입을 건사할 줄 모르는 정객 때문에 류랜쿤이 드러나고 목숨을 잃었으니 상전을 잘못 만난 변절자가 어찌 보면 불상하다. 

 

여러 해 지나 타이완 해협의 분위기가 또다시 긴장될 때 연임을 노리던 타이완 “총통” 천수이밴(陈水扁진수편)이 가오슝시(高雄市고웅시)의 천수이밴 팬클럽 밴유후이(扁友会 편우회) 성립대회에서 타이완을 겨냥한 대륙 연해 600킬로미터 범위의 미사일이 496기이고 각 성들에 얼마얼마씩 있다고 아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대륙에서 긴급정밀수사를 하여 남방 일대에 분포된 타이완 간첩망을 분쇄했다. 

 

리덩후이, 천수이밴의 정치이념을 이어받은 타이완 현 “총통” 차이잉원(蔡英文채영문)은 임기 1년 미만에 지지도가 팍팍 떨어지는 곤경에 처했는데 언제 대륙에 대해 아는 소리를 해서 간첩들을 대륙에 갖다 바친대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전통이란 무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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