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의 추학18-최종 편] 고지식한 사람이 최고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2/25 [07: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변절을 누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해수로 3년, 실제로 1년 몇 개월 "변절의 추학"시리즈를 쓰면서 가끔 곤혹을 느꼈다. 변절자로 판정됐던 사람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인정되고, 뛰어난 혁명가였던 사람들이 변절자들보다 혁명에 더 많은 해를 끼쳤으며, 어떤 사람들은 변절이냐 아니냐는 상반되는 견해들이 팽팽하게 맞서는 등 인간문제, 역사문제가 하도 복잡하여 변절이란 개념자체의 정의조차 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여 변절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저우쿤(周昆주곤)같은 사람들도 시리즈에서 다뤘는데(변절의 추학 6편참조,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4938), 마무리하는 18편에서 그 동안 느낀 바를 정리해본다. 

 

“중공의 최대 변절자(中共最大叛徒)”가 누구냐? 중공의 “삼대 변절자(三大叛徒)”가 누구누구냐는 쟁론은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예전보다 훨씬 치열해졌다. 논자마다 일정한 기준과 근거를 제시하므로 그런 주장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긴 글들이 오가게 된다. 

혹자는 왕밍(王明왕명, 1904~ 1974)을 “큰 변절자(大叛徒)”명부에 꼽는다. 1930년대의 여러 해 동안 모험주의노선을 내리먹여 중공과 홍군의 90% 손실을 조성한 장본인으로서 그가 중국혁명에 끼친 해는 이루다 말할 수 없다. 

 

▲ 100% 볼세비크로 자처했던 교조주의자 왕밍     © 자주시보, 중국시민

 

또한 1950년대에 병치료차로 소련에 가서 눌러앉고는 중소논쟁에서 중공을 공격하는 글과 책자를 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행동을 변절도주(叛逃)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소련으로 갈 때에는 중국과 소련,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이 사이좋게 지냈으니 말이다. 만년의 행동을 놓고 “중공의 변절자”라고 부를 수는 있더라도 공산당 국가에 가서 공산주의이념을 나름 견지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의 변절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군벌이나 국민당 혹은 일본, 미국에 투항한 중공 변절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니까. 

 

어떤 사람들은 캉썽(康生강생, 1898~ 1975)을 변절자라고 단언한다. 사망 당시에는 굉장히 높은 규격의 장례가 치러졌고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중국인민의 위대한 혁명전사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영도자 중의 한 사람, 중국인민의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영광스러운 반수정주의전사.(中国共产党的优秀党员,是中国人民的伟大的革命战士和马克思主义理论家,是党和国家卓越的领导人之一、中国人民的伟大的无产阶级革命家,光荣的反修战士)”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헌데 5년 뒤 1980년에 당중앙이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면서 골회가 빠바오싼혁명공묘(八宝山革命公墓팔보산혁명공묘)에서 퇴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사람에 대해 음험하다, 위험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곪았다, 음모가다, 욕심쟁이다, 문화재를 약탈자, 파괴자다, 문화재들을 많이 보호, 기부했다, 글씨가 형편없다, 글씨가 일품이다 등등 많은 주장이 나온다. 외국에서도 그에 대한 설들 특히 황당한 설들이 꽤나 많이 떠돈다. 

 

▲ 평가가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캉썽     © 자주시보, 중국시민

 

40살 전후에 벌써 “캉라오(康老강로, 라오는 늙은 사람을 존경하여 붙이는 칭호)로 불렸던 캉썽은 오랫동안 중공의 정보조직을 책임졌는데 그의 사후명성이 나빠지는 바람에 그보다 직급이 낮았던 리커눙(李克农이극농), 판한낸(潘汉年반한년)등 사람들이 중공 정보계통의 대표인물로 부각되면서 갖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캉썽이 늦어서 옌안(延安연안) 시기부터 당내에서 많은 사람들을 의심, 조사하여 뒷날 억울함이 밝혀진 사건들을 만든 건 사실이다. “문화대혁명”기간에도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고생하거나 지어 죽은 사람들이 적잖다. 또한 전쟁시기부터 그에게 갖은 악담이 쏟아진 것도 맞는데 전쟁시기와 평화시기의 악담과 악평들이 모두 사실에 부합되느냐에는 의문이 많다. 그에 대한 악평들을 접한 마오쩌둥(모택동) 주석은 캉썽이 중공의 보위부문을 맡았으니 적들이 악담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느냐고 심상하게 대했다. 그런데 중공이 공식적으로 캉썽에 대한 평가를 바꾼 뒤에는 공식평가서류에 없는 확인불가한 소문들도 사실로 포장되어 떠돈다. 죽은 자는 말 없으니 아무렇게 말해도 괜찮다는 식이다. 

캉썽이 변절했었다는 설은 역사가 꽤나 오래다. 그에 대해 마오쩌둥 주석은 캉썽이 체포된 적 없는데 어떻게 변절하느냐고 일축했다. 중공 공식문건에도 캉썽을 변절자로 찍지 않았으나 근년에는 그가 변절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나 된다. 

 

헌데 근거가 꽤나 웃긴다. 루푸탄(卢福坦노복탄, 1890~ 1969)이란 사람의 증언이 지금까지는 유일한 증거다. 

루푸탄은 어떤 사람인가? 중공 6차 당대표대회가 결정한 노동자 출신을 중용한다는 원칙에 따라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어 역시 노동자출신으로서 총서기로 된 샹중파(向忠发향충발, 변절의 추학 3편 참조,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9292)과 함께 중앙의 노동자 대표자 격이 되었다. 두루 요직을 맡다가 1931년 6차 4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샹중파의 체포, 변절, 처형 후에는 총서기로 되고 싶어했으나 공산국제가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허나 왕밍 일파의 득세 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가 1933년 1월에 체포된 후 변절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당년에 중용된 노동자출신 중공 고위간부들 중 뒤가 좋은 사람이 별로 없다고 비꼰다. 6차 대회 중앙위원 36명 중 노동자 출신이 22명이었는데 국민당에 변절한 자가 15명이나 된다니 기막히지 않은가. 

 

변절 이후 루푸탄은 국민당특무기관에서 일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인 1951년 5월 24일에 체포되어 장기간 감금되다가 1969년에 처형되었다. 이른바 “비밀처형”이라고 알려졌고 캉썽의 지시로 이뤄졌노라는 설이 도는데, 캉썽의 살인이유는 루푸탄이 캉썽의 체포와 변절을 고발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 설에 의하면 캉썽이 상하이(상해)에서 잠깐 체포되었다가 변절했다는 걸 문화대혁명기간에 루푸탄이 고발했단다. 진짜배기 변절자에다가 진짜배기 국민당 특무의 설을 절대화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캉썽의 인간됨과 공과에 대한 평가를 그가 변절했느냐와 결부시키는 건 굉장히 유치한 짓이라고 보인다. 

 

 

저우언라이의 장모 양쩐더의 안목 

 

중공 역사에서 제일 큰 소문을 낸 건 이른바 “61인 변절자집단사건(六十一人叛徒集团案)”이다. 1936년에 북방에 가서 중공 북방국(北方局)의 영도자로 일하던 류사오치(刘少奇유소기)는 각지 조직들이 심하게 파괴되어 간부들이 부족한 반면 베이핑(北平북평)의 명목 각이한 감금시설들에 중공당원들이 많이 수감된데 비추어, 일정한 “출옥수속”을 밟고 출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시에 응한 사람들이 곧 중용되었고 20여 년 뒤에는 수십 명이 부장급, 성급 간부로 되었는데, “문화대혁명”기간에 변절자집단사건에 말려들었다. 

 

당시 내건 이유는 간부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과 적들 즉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일본군이 북방을 점령하면 그 수감자들이 살해되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절대다수 수감자들은 “가짜 자수(假自首)”를 하거나 “반공계사(反共启事)”에 서명하라는 지시를 단호히 거부했으나, 조직의 결정이라는 통지를 받고는 고분고분 따랐다. 반공계사를 거부한 게 전에는 정확하지만 새 형세에서는 불필요하다, 그러니 말을 들으라...는 설득이 통한 것이다. 20여 년 동안은 극소수를 내놓고는 다수 출옥자들이 열심히 일해 꾸준히 승진했고 특히 조직계통을 류사오치 일파가 장악했기에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홍위병들이 옛날 신문에서 “반공계사”를 발견하고 적발하여 문제가 커졌다. 당중앙과 마오쩌둥 주석은 일정한 수속을 밟고 출옥시키겠다는 류사오치의 청구에는 찬성했으나, 그처럼 노골적인 “반공계사”들이 신문에 실린 것은 몰랐다가, 30년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게 반공과 변절이 아니면 뭐가 변절이냐는 공론이 이뤄졌고 “61인 변절자집단”성원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1978년에 중공중앙 조직부장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이 앞장서서 억울한 사건, 가짜사건들 피해자들을 명예회복시키면서 “61인 변절자 집단사건”도 뒤집혀졌으니 그중에서 특별히 유명한 인물은 보이보(薄一波박일파)로서 그의 아들 보시라이(薄熙来박희래)도 어릴 적에 아버지 사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필자는 여러 해전 꽤나 긴 글을 써서 61인과 달리 반공글을 쓰지 않은 사람을 소개했다. 류거핑(刘格平유격평, 1904~ 1992)은 아무리 조직결정이라 해도 반공글에 이름을 적지 않겠다고 거부하여 출옥하지 못했다. 하여 이듬해 일본군이 베이핑을 점령한 뒤에도 감옥에 계속 갇혀있다가 1944년에야 자유를 찾았다. 61인 집단성원들이 벌써 꽤나 높은 직위를 가졌던 것과 달리 고향에 돌아가서 밑바닥으로부터 혁명사업을 재개한 그는 남들에 비해 기회(?)를 놓쳤다만 “변절자” 혐의와는 인연이 없었다. 

 

류거핑 같은 생생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류사오치가 주도한 “수속”과 출옥의 필요성이 강렬한 질의를 받은 것이다. 중국의 각지를 점령한 일제는 수감자들을 만기출옥시킨 경우가 상당히 많으니 우리 민족의 항일명장 최현(1907~ 1982)이 바로 일본군 점령하의 연길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뒷날 최현 때문에 골치 아팠던 일본침략자가 최현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냐를 알았더라면 놔주지 않았을 텐데 서류상으로는 최현이 형사범죄자였으므로 멋모르고 내보냈던 것이다. 

 

류사오치와 북방국의 예언과 달리 국민당 감금시설 수감자들은 일본군의 침략 때문에 대량 학살되지 않았다. 전국 범위에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경우가 존재했다. 

 

61인 집단처럼 국민당이 요구하는 수속을 밟고 나온 경우, 

류거핑처럼 형기를 마치고 뒤늦게 나온 경우, 

일본군의 점령을 앞두고 중공이 감금시설을 습격해 구출한 경우(베이핑에서 이런 일이 있었음), 

일본군의 점령을 앞두고 국민당 지방군벌 혹은 지방정권이 놔준 경우(산둥성山东省산동성에서 이런 일이 있었음), 

국민당 감금시설이 문을 닫으면서 풀려난 경우. 

 

이러한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61인 변절자집단” 성원들은 변명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들 중 다수는 확실히 견정한 혁명가고 “중앙 지시”라는 걸 따랐으니까 변절자 감투가 억울하지만 반공서류에 손도장을 찍거나 서명하는 여파와 후과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건 어떤 의미에서 잘 된 일이 아니다. 

 

1930년대에 국민당은 징역을 언도해 만기복역한 사람들도 “반성원(反省院)” 따위 명목의 시설에 불법감금하였다. 이놈의 “반성”이란 뒷날 한국에서 악명자자해진 “전향”과 지위가 비슷하건데, “반성원”은 1970년대에 한국에서 “사회안전법”과 더불어 생겨났던 “보호감호소”의 선배쯤 된다. 

감옥과 반성원 등에는 중공 당원들 외에 국민당군 장교들이나 민주인사들도 있었다. 수많은 수감자들 가운데서 양쩐더(杨振德양진덕, 1875~ 1940)라는 할머니의 처사는 유달리 주목을 끈다. 

 

▲ 양쩐더(양진덕)와 딸 덩잉차오(등영초)     © 자주시보, 중국시민

 

후난성(湖南省호남성) 창사시(长沙市장사시)의 몰락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글과 의술(中医한의)을 배웠던 양쩐더는 14살에 천애고아로 되어 의술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25살 때 청나라 군관의 후실로 들어갔다. 29살에 낳은 딸이 뒷날 유명한 공산혁명가로 되었으니 저우언라이(周恩来주은래)의 부인 덩잉차오(邓颖超등영초, 1904~ 1992)였다. 

 

양쩐더는 1910년대에 벌써 사회주의사상을 접하는 등 진보적인 사람이었으나 정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딸과 사위가 중공 요인으로 된 뒤에는 상하이(上海상해)와 쟝시성(江西省강서성) 소베트구역에서 중공의 사업을 적극 지지했는데 1934년 10월 중앙홍군이 장정한 뒤 소베트구역에 남아 유격대를 따라다니다가 1935년 4월에 체포되어 쟝시성 규쟝시(九江市구강시)의 반성원에 갇혔다. 

저우언라이의 장모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적들이 그를 불러다가 공산당원이냐고 물으니 그는 딸과 사위의 사업을 지지하지만 아쉽게도 나이가 많아 사상인식과 각오가 공산당원 요구에 이르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홍군이 됐느냐는 질문에는 나는 소베트구역에 와서 홍군병원에서 의사노릇을 했는데 당신들이 홍군이라 말해도 된다고 응대했다. 홍군이 모조리 소멸되고 사위와 딸이 죽었으니까 빨리 반성문을 쓰면 곧 놔주겠다는 말에는 깜짝 놀랐으나 곧 요언을 잘 꾸미는 적들의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반성할 게 없으니 반성문을 쓰지 않겠다고, 내가 한 일은 다 해야 할 일이라고 단정해 한 건데 뭘 반성할 게 있느냐고 반문했다. 

적들이 그러면 사위와 딸에게 편지를 써서 공산당에서 물러나라고 권하라고 말하니, 앞의 말이 요언임을 확인한 양쩐더는 반박하려다가 그만두고 담담히 말했다. 지금 세월에 애들 일을 부모가 관계할 수 있는가? 쟝 위원장(쟝제스, 장개석)의 아들이 소련에 가서 글을 써서 아버지를 막 욕한다던데 쟝 위원장도 아들을 다루지 못하지 않는가? 

말문이 막힌 적들은 양쩐더를 계속 감금했다. 곰팡이 낀 쌀과 남새를 먹는 어려운 상황에서 60대의 양쩐더는 젊은이들과 함께 버텨나갔는데, 얼마 후 반성원에서 상한병이 유행되어 원장의 조카도 감염되었다. 양의가 고치지 못할 때 양쩐더가 치료해줘, 좀 나은 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더는 땅바닥에서 자지 않고 널판자 침대를 하나 얻었다. 양쩐더는 반성원에서 범인, 간수와 가족들을 가끔 치료해주면서 갖은 기회에 간수와 가족들에게는 소베트구역의 형편을 들려주고 홍군을 찬양했고 수감자들에게는 지조를 지키라고 격려했다. 

 

2년 남짓이 지나 1937년 봄에 원장이 갑자기 이제는 국공이 또다시 합작하니 수감자들이 빨리 보증인을 찾으라고, 그러면 곧 보석된다고 선포했다. 적잖은 사람들이 밖의 친척, 친구들과 연계를 맺어 보증을 서달라 부탁해서 풀려났는데, 양쩐더는 걱정스러웠다. 이게 적들의 덫이 아닐까? 풀어줘서 미끼로 삼아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넣으려 하지 않을까? 하여 그는 원장에게 나는 친척도 지인도 없어서 보증서줄 사람이 없다고, 당신이 놔주겠으면 놔주고 놔주지 않겠다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결국 양쩐더는 반성원이 문을 닫을 때에야 나온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선량한 사람의 도움으로 쥬쟝의 한 여승암자에 머물러 딸과 사위의 소식을 기다리던 그는 이듬해 저우언라이가 활동하는 우한시(武汉市무한시)로 찾아가 딸과 사위를 만났고 1940년에 충칭(重庆중경)에서 사망했다. 

중공당원이 아니었으나 상당수 당원들보다 더 높은 안목을 지녔던 양쩐더의 처사는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다중간첩을 어떻게 믿을까? 

 

2015년에 《위장자(伪装者)》라는 48부 드라마가 방영되어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항일전쟁시기 왕징워이(汪精卫왕정위)괴뢰정권 성립 전후를 배경으로 하여 상하이 밍씨(明氏명씨) 오누이의 시각으로 중국공산당, 중국국민당, 일본 등이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생사격투를 벌리는 이야기를 엮었다. 

 

▲ 간첩전을 다룬 드라마 위장자     © 자주시보, 중국시민

 

가장 주목을 끈 배역은 밍러우(明楼명루)였으니 여러 방면의 세력과 모두 연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 몇 가지 배역을 한 몸으로 연기하는 밍러우     © 자주시보, 중국시민

 

중국의 영화, 드라마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위장자》도 원형이 누구냐는 쟁론을 불러왔다. 다른 배역들과 달리 밍러우의 원형은 하나로 좁혀졌다. 1930~ 40년대에 상하이의 정계와 문화계에서 활약했고 일생 수많은 가명을 썼으나 위안수(袁殊원수, 1911~ 1987)라는 이름으로 제일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 청년시절과 중년시절의 위안수     © 자주시보, 중국시민

 

중국 언론과 네티즌들은 “중공 역사상 나아가서는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5중간첩”이라면서 위안수의 경력을 들췄다. 이른바 “5중간첩”이란 중국공산당(中共), 중국 국민당의 중통(中统)과 군통(军统), 일본점령자와 괴뢰정권(日伪), 건달조직 칭훙방(青红帮청홍방) 도합 5개 단체에 모두 몸을 담았다고 하여 붙여진 칭호이다. 일본점령자와 괴뢰정권의 특무, 정보계통이 같지 않고 칭훙방(青红帮)은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칭방(青帮청방)과 훙방(红帮홍방)이므로 이런 “5중”집계는 상당히 엉터리다. 단 위안수가 여러 세력과 모두 연계를 가졌던 건 사실이다. 

 

항일전쟁기간에 한간(汉奸친일파)로 찍혔던 위안수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비밀리에 수베이(苏北소북, 쟝수성 북부) 해방구로 옮겨갔고 1949년에는 중공 정보부문 책임자 리커눙(李克农리극농)에 의해 중앙정보부문으로 전근해 일본과 미국의 동향을 조사연구하는 일을 맡았다. 1955년에 “판한낸사건潘汉年案)”의 영향을 받아 체포되어 12년 징역을 받았는데 만기되는 1967년에는 마침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라 풀려나지 않고 8년 뒤의 1975년 5월에 출옥하여 어느 농장에 가서 노동개조를 했다. 1982년에 명예를 회복했고 1987년 11월 26일 베이징에서 병사했으며 《위안수문집(袁殊文集원수문집)》을 남겼다. 

 

재능이 많고 경력이 풍부한 이 사람의 일생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수두룩하다. 후베이성(湖北省호북성) 치춘현(蕲春县기춘현)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위안쉐이(袁学易원학이)로서 아버지가 국민당의 시조인 쑨중산이 조직한 동맹회(同盟会) 회원이었고 뒷날 국민정부에서 일했기에 국민당 계열과 잘 어울릴 여건을 타고났다. 

소년군인으로서 북벌전쟁에 참가해 국민당에도 가입했던 그는 1927년 쟝제스가 벌인 칭당(清党당내정리라는 뜻으로 주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원과 좌익인사들을 제명, 살해했다)운동에서 국민당 및 군대에서 밀려났다. 1929년에 일본으로 가서 와세다대학과 일본대학에서 신문학과 동양사를 공부했고 1931년 초에 귀국했다니 졸업은 하지 않았다. 3월에 상하이에서 주간 《문예신문(文艺新闻)》을 창간하면서 좌익문예계소식을 실었다가 국민당 정부에 의해 휴간되었다. 

 

1931년 10월,판한낸이 남의 소개와 자신의 고찰을 거쳐 20살 난 위안수를 직접 공산당에 받아들이고 정보사업에 참여시켜 이때로부터 죽을 때까지 위안수는 판한낸과 갈라놓을 수 없게 되었다. 

신문을 만들고 통신사를 운영하는 등등 일을 하던 위안수는 일본군이 상하이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영국, 프랑스, 미국 조계지가 일제세력이 미치지 않는 특수상태여서 이른바 “꾸다오(孤岛고도, 외로운 섬)”을 이루던 시기(1937~ 1941)에 외국인과 손잡고 언론활동을 전개했으며, 진주만 공격이후 일본군이 조계지들을 점령한 뒤에는 중공의 명령에 따라 일본점령자와 괴뢰정권 내부로 들어가 “친일” 《신중국보(新中国报)》를 만든다는 명목과 괴뢰직무를 방패로 삼아 정보사업에 종사했다. 

전설에 의하면 위안수는 독일의 소련침공정보와 일본군의 전략정보를 정확히 제공했다는데, 독일의 소련공격에 대해서는 근년에 아무개가 사전에 알아냈다는 설들이 하도 많아 믿어주기 어렵다. “동방 조르게”라는 수식어가 붙여지면서 위안수를 부풀리는 추세가 갈수록 심해지는데, 정말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단 위안수가 건국 후에 몇 해는 잘 쓰였다는 걸 보면 위안수의 능력이 리커눙 같은 고수의 인정을 받은 모양이다. 

위안수가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였다는 게 정설로 굳어져 그의 불행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꽤나 되고 따라서 중공을 원망하는 말들도 많은데, 역지사지하여 위안수 같은 이른바 5중간첩을 거느린 상관이라면 어떻게 믿어주겠는가? 

 

위안수가 유일한 5중간첩인지는 모르겠다만, 이중간첩, 삼중간첩 쯤은 많은 기록에 남아있다. 가장 성공한 이중간첩 사례들로는 2차세계대전시기 영국이 운영한 독일간첩들이다. 영국에 상륙한 독일간첩들을 체포하여 전향을 거부하는 자들은 죽이고 전향한 자들은 영국인들의 지시에 따라 거짓정보들을 독일에 무전으로 날리게 했으니 나치스 독일은 망할 때까지 진상을 몰랐다 한다. 5년가량 진행된 그 작전은 규모와 효과에서 모두 기록을 창조했단다. 독일이 신개념무기- V로켓(뒷날 미사일의 원조)을 개발하여 영국으로 날린 뒤 이중간첩들이 줄여서 왜곡한 결과를 전보로 보고해 독일 지도부의 오판을 조성한 것,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복잡한 기만작전을 성공시킨 것 등등은 모두 모범사례다. 그런데 이런 성공에는 특수한 여건이 있다. 이중간첩을 영국 정보부문이 감금상태에서 완전히 통제했다는 점이다. 이중간첩들이 독일의 표창을 받더라도 실물이나 돈을 받을 기회는 없었고 독일로 달아날 가능성도 없었다. 하기에 영국의 정보기관은 마음 놓고 이중간첩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이중간첩이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한다면? 그가 도대체 어느 편에 충성하는지 누가 어떻게 단정한단 말인가? 

 

한국에서 이중간첩과 관련하여 나온 작품으로는 한석규 주연 영화 《이중간첩》만 기억나는데, 주인공의 망명은 아주 극적으로 설정되고 한국 기관에서 발붙이기도 흥미롭게 엮어졌지만, 조선(북한)의 상관이 그처럼 품을 들여 주인공을 잠입시킨 이유가 분명하지 못하다. 이중간첩으로서 주인공이 북을 위해 한 일은 고작 북파특공대 하나의 북파소식을 알려 특공대가 섬멸되게 한 것이다. 특공대의 출발을 알리지 않았더라면 북에서 특공대에 그저 당하기만 할까? 1만 명을 넘기는 북파공작원 중의 70% 이상이 귀환하지 못했다는 집계를 보더라도 그럴 리 없다. 필자는 오래 전에 영화를 보면서 절반만 재미있어 아쉬웠다. 여러 해 품을 들여 배양하고 정착을 성공시킨 이중간첩이라면 특공대 따위 전술적 정보가 아니라 뭔가 전략적 차원의 정보들을 다루고 나른다고 설정했더라면 훨씬 믿음이 가겠는데...  

 

현실에서는 1998년 “북풍사건”으로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이 폭로된 박아무개 씨가 “이중간첩”이다 아니다는 논란을 빚어냈었다. 한국의 정보기관이 암호명을 부여하여 파견한 사람이지만 북에서 최고위층과 접촉했고 장사를 했으니 의심스럽다는 논리였다고 기억된다. 한국 정보기관이 통제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활동했기에 정치싸움에 말려든 다음 그의 정체성과 충직성을 담보해주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닐까? 그는 후에 개인사업을 하다가 북 공작원에게 무슨 자료들을 넘겨주는 간첩행위를 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가 한국 정보기관을 떠난 뒤에는 정말 북의 간첩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중간첩”이 아니다. 

이중간첩이든 삼중간첩이든 5중간첩이든 동시에 몇 개 세력 혹은 몇 개의 정보기관에 소속되거나 연계를 맺고 정보에 대한 보수를 받아야만 개념자체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최고 미덕은 고지식함 

 

위에서 언급했듯이 위안수는 판한낸 사건에 연루되어 고생했다. 판한낸(1906~ 1976)은 중국의 현대문학사와 중공 정보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건국 후 상하이시 부시장으로 일하다가 1955년에 실각했다.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나와 조용히 지내다가 사망했는데,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었고 소설, 영화나 드라마들에 등장한다. 

중용되던 그가 체포되고 징역을 산 게 억울하다는 평이 많고, 그 이유에 대해 설도 많은데, 한국에도 일부가 퍼져 판한낸을 동정하고 마오쩌둥을 비하하는 이른바 “중국 전문가”도 있다. 

20여 년 정보와 함께 한 판한낸을 우러러보는 사람들과 달리 필자는 그를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 다방면 재능은 뛰어나지만 몰락을 자초했고 숱한 부하들도 연루시킨 등 약점이 두드러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판한낸사건의 시초는 후쥔허(胡均鹤호균학)라는 인물의 체포였다. 상하이 해방 뒤에 국민당 특무들이 대량 잠복했고 또 새로 파견되어 들어오는 상황에서 상하이 공안국은 부시장 판한낸과 국장 양판(扬帆양범)의 결정에 따라 전 국민당 특무, 전 변절자 등을 상당수 채용했는바, 그런 자들의 인맥과 안목이 비상시기에 효과를 내기도 했는데 부작용도 적잖았다. 뒷날 대오정리과정에서 잘못 투성이인 후쥔허가 체포되었다. 1955년 4월 회의차로 베이징에 가 있던 판한낸은 소식을 듣고 상하이시 시장 천이(陈毅진의)를 찾아 자기가 1943년 4월 후쥔허와 함께 난징(南京남경)으로 가서 리쓰췬(李士群이사군)을 따라 왕징워이를 만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천이는 일단 판한낸을 안심시킨 다음 마오쩌둥 주석에게 보고했고 마오 주석은 진노하여 “이 사람을 이제부터는 믿고 쓸 수 없다”(此人从此不可信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여 판한낸이 먼저 체포되고 양판도 잡혀서 “판양(潘扬반양)사건”이 이뤄졌고 판과 양의 역사를 낱낱이 파헤쳐지다나니 그들과 연계된 수많은 사람들이 잇달아 조사를 받거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면 마오 주석은 왜 진노했던가? 

문화인으로부터 정보책임자로 변신한 판한낸은 어디에서 무슨 훈련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으니 대체로 독학으로 성공한 사람인데, 항일전쟁기간에 상하이와 홍콩, 강남 일대를 무대로 거대한 조직망을 만들어 활동하던 판한낸의 중요한 정보원천의 하나가 괴뢰정권의 두목들이었다. 변절의 추학 9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6037에서 언급했던 리쓰췬은 중공당원이었다가 국민당에 체포되어 변절해 특무조직에서 활동했고 일본 침략 후에는 상하이 괴뢰 특무조직의 두목으로 되어 악명을 떨쳤는데 쟝수성 성장으로 된 다음 나름 계산이 많았다. 일본에 붙어서도 일본과 모순이 있고 왕징워이의 부하이면서도 직계가 아니어서 점수를 따야 할 필요가 있고 국민당과는 서로 잡고 죽여서 관계를 회복할 가망이 적었다. 옛집인 공산당은 폭 망하면 자기의 입지가 줄어들고 너무 강해져서 공산당의 신사군이 너무 활약하면 성장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기에, 그는 일본군의 “토벌”정보를 공산당에게 슬쩍 흘리기도 했다. 그처럼 복잡한 계산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리쓰췬은 중공당원시절부터 알던 판한낸과 이래저래 연락했고 둘 사이에서 연락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중공 변절자 출신인 후쥔허였다. 

 

▲ 중공 정보역사의 인재로 꼽히는 판한낸     © 자주시보, 중국시민

 

한편 화중국(华中局) 사회부장, 연락부장 판한낸은 리쓰췬의 심리를 파악하여 그를 끌어당기려고 노력했고 가끔 만났다. 1943년 4월에 리쓰췬과의 만남을 약속했을 때 리쓰췬이 자꾸만 지점을 바꾸면서 난징에까지 가게 했고 만난 다음에는 왕징워이가 판한낸을 만나고 싶어한다면서 끌었다. 판한낸은 리쓰췬이 왕징워이 앞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그런다는 걸 눈치챘지만 거절하면 체면이 깎인 리쓰췬이 중공과의 연계를 끊으리라 생각하여 마지못해 따라갔다 한다. 

판한낸과 왕징워이의 짧은 대화는 실질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괴뢰정권의 최고 두목을 공산당 요인이 만났다는 건 당연히 다양한 해석이 나올 엄중한 문제이고 견결히 항일하는 중공의 이미지를 흐리게 된다. 쟝제스의 국민당이 냄새를 맡아, 임시수도 충칭(重庆중경)의 언론들이 판한낸이 왕징워이를 만났다더라고 보도하면서 중공을 공격했다. 판한낸에게서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한 중공 중앙은 당연히 국민당의 일관적인 요언으로 치부하면서 반박했다. 

 

화중국에도 중앙에도 보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판한낸 자신의 해석인즉, 근거지로 돌아가서 화중국의 책임자 라오써우스(饶漱石요수석)에게 보고하려 했는데 당시 “챵쮸윈뚱(抢救运动긴급구원운동)”에서 사람들을 마구 의심하고 잡아서 조사하는 현상을 보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판한낸은 라오써우스와 친한 사이였기에 그런 해석은 힘이 없다. 

판한낸에게는 진상을 보고할 기회가 있었다. 1945년에 7차 당대표대회 참석차로 옌안에 갔을 때 마오쩌둥 주석을 만났는데, 그 자신의 설명대로는 마오 주석에게 진상을 이야기하려고 왕징워이 건을 거들자 마오 주석이 말을 끊으면서 그거야 결론이 난 일이 아닌가고, 국민당의 요언이 아니었는가고 말해서 설명을 포기했단다. 뒷날 판한낸 자신의 해석은 소자산계급의 체면의식과 개인영웅주의 때문에 말을 삼켰다 한다. 

 

판한낸이 마오 주석의 말 때문에 설명을 포기했다면 잘 생각해서 보고서를 써서 바치면 되지 않겠는가? 허나 판한낸은 10여 년 동안 말로도 글로도 거들지 않다가 리쓰췬과의 연락자이며 그때 함께 움직였던 후쥔허가 잡힌 뒤에야 즉 후가 역사를 시시콜콜 말하게 되리라고 판단한 뒤에야 털어놓았으니, 상급의 입장에서 그걸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후쥔허가 잡히지 않고 계속 쓰였더라면 판한낸도 영원히 입을 다물리라고 여기지 않겠는가? 더욱 엄중한 것은 지극히 엄중한 사건을 10여 년이나 숨겼으니까 다른 무엇들을 숨기지 않았다는 보증은 누구도 설 수 없다. 게다가 이후에 무슨 짓을 하고 위에 보고하지 않을지 누가 장담하랴! 

마오 주석의 “믿고 쓸 수 없다”는 결론에는 바로 그런 뜻이 담겨져 있다. 전쟁시기 판한낸의 정보사업에 대해서는 중앙에서 대체로 만족했다지만, 판한낸은 왕징워이를 만나기 전에도 잘못 처사하여 마오 주석의 불만을 자아낸 적 있다. 

 

1936년 4월에 판한낸은 소련에서 공산국제가 주는 새 무전연락암호책(한국식으로 말하면 난수표)을 통째로 외운 뒤 모스크바를 떠나 프랑스를 거쳐 5월에 홍콩에 도착했다. 제대로 일하자면 중공 중앙이 소재한 싼베이(陕北섬북)으로 직접 가서 암호를 전해야 되는데, 판한낸은 국민당이 공산당과 줄을 달아 담판하련다는 정보를 듣고 자신이 국민당 요인 천리푸(陈立夫진립부)의 대표 쩡양푸(曾养甫증양보)와 만났다. 비밀회담에서 국민당 대표는 소련에서 돌아온 판한낸이 중공을 대표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품었으나, 판한낸은 대표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나섰다. 허나 쩡양푸가 판한낸에게 산베이에 가서 중공중앙 책임자와 연락한 다음 다시 담판하자고 말해, 판한낸은 1936년 8월에 산베이에 도착해 암호를 전했다. 마오 주석은 굉장히 불쾌하여 이처럼 중요한 연락암호를 몇 달이나 걸려서 가져왔으니 말이 되느냐고 이야기했다 한다. 판한낸의 오류는 단순히 연락암호전달지연만이 아니였다. 소련에서 들은 공산국제와 공산국제 주재 중공 대표 왕밍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중공을 대표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 훨씬 더 엄중하다. 이를테면 자주파나 외세파냐에서 그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중공을 대표한다고 여겼기에 마오 주석으로서는 굉장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허나 항일전쟁기간과 해방전쟁기간 그리고 건국 후에 충분히 믿고 써주었는데, 10여 년 기만한 일이 있다니 진노하지 않을 리 있는가. 

 

법정과 서류들에서 판한낸에게 씌운 “네이잰(内奸내부의 적)” 감투와 죄명들- 1936년 국공담판에서 투항했다, 일본 특무기관에 붙었다 등은 공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왕징워이를 만났다 해서 누구 하나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후에 명예가 회복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헌데 전쟁기간에는 그로 인해 잘못된 사람이 거의 없었던데 반해, 평화시기에 그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그의 성격적 약점과 처사의 부족점이 무척 아쉽다. 

적들을 대할 때에야 물론 그 어떤 기만수단도 정당하겠지만, 상관, 특히 최고지도자 앞에서 솔직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후유증이 발작한다. 변절하지 않고도 변절자로 몰렸던 사람들의 운명이 남겨주는 교훈이다. 인간은 고지식해야만 변절하지 않을 수 있고 변절혐의를 받더라도 면하기 쉽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최고미덕은 고지식함이니라. 

변절의 추학을 마무리하기에 적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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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통 18/02/25 [10:32]
그간 관련 글을 읽으며 각 자료를 어찌 찾아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국에도 남한의 '친일 인명사전' 같은 자료가 있는지요?
(또한 북한에도 유사한 자료가 있나요?)

중국시민님 글의 애독자로서 대부분 다 읽었습니다만.
사실 중국의 역사나 현실 정세에 어두운지라 요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변절의 기준...
사후 평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또 판단의 근거는 충분한가?
고심이 많으셨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정 삭제
죽음을 넘어섰다 18/02/25 [17:25]
중국시민 선생님 글들을 읽으면서 진정성이 함께 하여 글들이 생명력과 호소가 있었습니다. 특히 글을 쓰시면서 자신의 주관이나 견해 감정을 가능한 적게 개입하려고 애쓴 흔적과 충실하게 자료를 모아서 글을 만들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혼탁한 것이 정상이고 가끔씩 위대한 지도자가 세상을 바른 법도로 평안히 하다가 다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질서와 이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우린 조선민족도 그간의 오랜 무질서가 위대한 지도자들을 기난긴 노력으로 바르게 국가질서가 잡혀갈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그 분들에 대한 감사로 끝없이 달려갑니다. 하늘에 계신 두 지도자와 그 분들과 함께 조국의 해방 그리고 통일을 위하여 목숨과 가족까지 멀리 하셨던 분들에게 그리고 그러한 분들의 삶을 다시 조명하여 주신 중국시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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