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89]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6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3/02 [18:20]  최종편집: ⓒ 자주시보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증을 하였다.

 

“<위서>에서는 추모를 주몽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자, 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주원류고>에는 지금의 만주어에 활을 잘 쏘는 자를 卓琳莽阿(탁림망아:이를 만주어에서는 주리무얼이라 읽는다.)라고 하는데 주몽은 곧 주림무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서는 주몽을 추모라 하고, 주몽이라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고 한 것은 중국사에서 전하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따라 쓰다가 고구려 본기에 올렸기 때문이다. 이두문자인 추모는 중 혹은 주무로 읽어야 할 것인데 이는 조선어이다. 한편 주몽은 주물로 읽어야 할 것인바 이는 예어(濊語), 곧 만주족 선대의 말이다. 중국사에는 주몽이라고 한 것은 예어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으로 <만주원류고>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그럴 듯하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박기봉옮김, 비봉출판사 166~167>

 

이미 주몽, 추모는 우리말 <>, <주무>를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 혹은 <주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 한 줌도 안된다.”한 주먹감 밖에 안된다.” 등에 쓰이고 있는 바로 그 <>, <주무>를 의미한다. <온 누리>한 줌에 틀어쥐고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자, 또는 신과같은 무한의 힘을 가진 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당시에는 활을 잘 쏘는 자가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집단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 사회였기에 그를 일컫어 <>, <주무>라고 하였으며, 이를 만주지방에서는 <주림무얼>이라고 하였을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만주지방 말 <주림무얼> 역시 이두법이며 <> 또는 <주무>로서 똑같은 발음을 하고 있다.

 

그럼 아래에서 단재 선생이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성장과정과 그리고 고구려 건국에 대해 고증한 내용을 보자.

 

금와왕은 일곱 형제의 자식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대소라 하였다. 대소가 추모의 재주와 용기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매번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하였다. 추모가 19세가 되어 왕실 목장의 말을 맡아 기르게 되었는데 모두 다 살찌고 튼튼하게 기르면서 유독 한 마리 준마만을 골라 바늘을 혀밑에 찔러 놓아 말이 먹지 못하게 하니 그 말은 날로 비쩍 말라 갔다. 하루는 왕이 왕실 목장의 말들을 둘러보고 추모의 공을 칭찬하고는 그 비쩍 마른 말을 그에게 상으로 주었다. 추모가 말의 혀에서 바늘을 빼버리고 다시 먹이를 주어 길러서 신수두 10월 대제에 타고 나아가 사냥에 참여하였다. 왕이 추모에게는 겨우 화살 한 개만을 주었으나 말은 잘 달렸고 추모는 활을 잘 쏘았으므로, 추모가 쏘아서 잡은 것이 대소의 일곱 형제들이 잡은 것을 전무 합한 것보다 몇 배가 되었다. 대소가 이에 그를 더욱 시기하여 살해하려는 음모가 더욱 심해졌다. 추모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예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밖으로는 아내에게 빠져서 다른 마음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속으로는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고별하고 처를 버리고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때 추모의 나이가 22세였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박기봉옮김, 비봉출판사 167~168>

 

위는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출생을 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과정을 단재 선생이 고증하여 기록한 자료 중 일부이다. 위 단재 선생의 고증 가운데는 다른 사서들에서는 다루지 않은 주요한 내용이 있다. 즉 고추모가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기에 앞서 동부여에서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서들은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류가 동부여에서 돌아오니 추모가 그를 태자로 삼았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왜 혼인은 하게 되었는지, 그 아내(‘안해이다. 안해는 자신의 베필을 하늘의 해로 받아들이며 숭고한 존재로 부르는 말이다.)의 성씨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고증하여 밝혀주고 있다.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동부여의 관가와 사람들이 시기하여 목숨을 해치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했다는 것에 대해 삼국사기는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고 다만 고구려 제2대 유류왕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리명왕이 즉위하니 휘는 유리 혹은 유류라고도 한다. 주몽의 원자요, 어머니는 예씨이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어린 아이를 가졌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낳게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유리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제2대 유류왕 조에 예씨가 아들 유류가 짓궂은 장난질로 사는 동네에서 말썽을 피우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 버릇이 없이 군다는 소리를 듣는 것에 화가 나서 너의 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시다. 이 나라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미리 남방으로 피해가서 나라를 개척하고 왕이 되었다.”라면서 아들 유류를 꾸짖는다. 고추모의 본 부인 예씨는 아들 유류를 꾸짖으면서 아버진인 고추모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뛰어난 능력을 가진 탓에 현재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부여에서 주류세력과는 함께 할 수 없기에 이를 미리 알고 몸을 피해 남방으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고구려 제2대 임금인 유류의 동부여에서의 본 이름은 <여해>였으며, 아버지인 고추모가 나라를 건국하였음을 알고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에 왔을 때 아버지 추모는 아들에게 <여달>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에 대해 <위서>에는 주몽이 죽자 여달이 이어서 왕이 되었고, 여달이 죽자 그 아들 여율이 왕이 되었으며 여울이 죽자 그 아들 막래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였는데 부여는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속되었다. 막래의 자손들이 서로 이어가면서 전하여 그 후손인 궁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고구려의 건국년대와 왕계 삭감문제를 다룰 때 상세히 고증하고 논증하겠다.

 

고추모가 동부여에 머물던 청년기에 국영 목장에서 말지기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사서들이 일치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에 대해 따로 분석하지 않기로 한다. 모든 사서들이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고추모가 청년기 동부여에서 국영 목장의 말지기를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고추모가 국영 목장에서 말지기를 할 때 준마를 골라 혀 밑에 바늘을 꽂아 여물을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르게 했다던가, 그 말을 동부여 임금인 금와가 고추모에게 주어 다시 그 말을 살찌게 하여 사냥시합에 나가 그 말을 타고 많은 짐승을 잡아 사냥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과 같은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전체적인 사실을 파악하는데 변수가 되지 못하기에 따로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위 단재 선생의 글 인용문 가운데에는 대단히 중요한 그러나 북부여와 동부여 그리고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년대와 세계에 대해 커다란 모순을 가진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북부여·동부여기를 먼저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동시에 단재 선생 역시 같은 오류를 범k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북부여

<고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전한서>에 선제 신작 3년 임술년(B.C 59) 48일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흘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컫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고 아들을 나하 부루라 했는데 해를 씨로 삼았다. 왕은 이후에 상제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라 했으니 바로 고구려이 시조이다.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55~56>

 

동부여

북부여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데로 피해가라. 동해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를 삼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고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잇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큰 연못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아들이로구나!”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서 금와라고 하였다. 그가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태자 대소에게 왕위가 전해졌다. 지황 3년 임오년(22)에 이르러 고구려왕 무휼이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그 후로부터) 나라가 망하였다.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55~56>

 

고려 후기 중 일연이 지은 북부여기와 동부여기는 인용문과 같다. 물론 일연선사가 고기를 인용하여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다루지 않았던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 기록으로 남긴 공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대한 공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지나치게 압축, 요약하다보니 북부여의 건국과 가슬라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를 건국한 년대 등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에 대해 하나씩 보기로 한다. 이는 고추모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과는 뗄레야 뗄 수가 없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일연이 지은 북부여기에는 “<전한서>에 선제 3년 임술(B.C 59) 48일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컫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북부여의 건국에 대해 전하고 있다. 하지만 북부여가 화하족이 나라인 한나라 선제 3년 임술(B.C 59)년이라고 기록한 것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년대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건국년대와 비교해도 성립이 불가능한 북부여 건국년대이다.

삼구사기도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대폭 삭감하여 기록하였다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북부여를 이었고,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고구려 제19(삼국사기 기준)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열제릉비에도 분명하게 기록하여 그 사실을 전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는 북부여의 황손이 분명하며, 고구려는 북부여를 이어 건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북부여 건국년대인 화하족의 한나라 선제 3년 임술년(B.C 59)이 정확하고, 이 기록을 믿는다면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는 부여의 황손이 될 수 없으며 또 고구려는 북부여를 이어 건국한 나라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서기 전 59년에 북부여가 건국이 되는데 그로부터 23년 후 즉 고추모가 22세 때인 서기 전 37년 갑신에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고추모는 북부여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동부여에서 출생하여 성장기를 거치고 나이 22세에 동부여를 탈출한 후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물론 해모수가 임술년 48일에 북부여를 건국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 역시 정확하다. 단 임술년이 한나라 선제 3년인 임술년(B.C 59)가 아닌 그보다 3갑자 이전인 서기 전 239(B.C 239)년의 임술년이다. 삼국유사의 이같은 오류는 혹 조선시대 아니면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왜곡하면서 임술년 48의 앞에 전환서에 선제 3이라는 문굴덧붙이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즉 일연은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년대, 서기가 아닌 우리의 천간과 지지에 의한 년대르 정확하게 임술년이라고 하였으며, 그 날짜까지도 “48이라고 정확하게 기록을 하여 놓았기 때문에 이를 전환서에 신작 3이라고 할 수 없는 정확한 북부여 건국년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은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북부여 건국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다시 짧게 인용해 보기로 한다.

 

임술원년(B.C 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역, 정신세계사 125>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했다는 임술년 48일 한단고기, 북부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이 동일하다. 또 오룡거를 타고 다닌다는 기록 또한 동일하다. 한편 한단고기, 단군세기 제 47세 고열가 단군 57년 조에는 임술 57(B.C 239) 48일 해모수가 웅심산에 내래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고 기록하여 한단고기 북부여와 삼국유사이 기록과 똑같이 임술년 48로 같다. 삼국유사, 한단고기 북부여기와 단군세기의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년대가 임술년 48로 똑같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기록은 신뢰할 수 있으며, 건국년대가 정확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전환서>에 선제 신작 3(B.C 59)"라는 기록은 북부여의 건국과 존속기간, 가시라(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하고 존속 기간, 마지막으로 고추모의 동부여에서의 출생과 성장과정, 고구려 건국년대와 비교, 분석하면 성립될 수 없는 기록이다. 따라서 북부여 건국 전한서에 선제 신작 3은 무시하고 임술년 48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후박달나라가 붕괴되고 그를 이어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했다는데 대해 단기고사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대를 이을 후사가 없으므로, 종친 해모수가 옛 도읍지 북여에서 반기를 들어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라 하였다. 훈단제는 이것으로 대가 끊기니 1세 솔나로부터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23875년간이다. 전단조 1,222년 후단조 875년 모두 2,096년 간이다.”

 

위 단기고사에서는 해모수가 후박달나라를 이어 임술(B.C 239)년에 북부여를 건국했다고 직접적으로 임술년 48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후박달나라 47세 고열가 단군 58년에 후박달나라갖 종말을 고했으며 전단조 1,222년 후단조 875년 총 2,096년간 존속을 했다고 하여 임술년(B.C 239)에 북부여를 건국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후박달나라가 2,096년간 존속했다는 기록은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지금까지 삼국유사, 한단고기, 단기고사의 북부여 건국에 대한 기록을 비교, 분석한 결론은 북부여는 화하족의 나라였단 한나라 선제 3년 임술(B.C 59)년에 건국한 것이 아니고 후박달나라가 붕괴되기 1년 전인 임술(B.C 239)년에 건국을 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추모 탄생설은 대동소이하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추모는 동부여 제2대 금와왕 재위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심각한 세대의 오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추모 탄생설은이 심각한 모순을 가지게 된 이유는 북부여의 건국과 존속 기간, 동부여의 건국과 존속 기간을 실제 역사적 사실에 맞게 다루었다면 그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양 부여의 건국 및 존속 기간과 동시에 임금의 계보를 누락시키지 않고 재위기간만 다루었어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서 보이는 추모의 탄생시기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이를 다루지 않고 누락시키면서 북·동부여의 시조 그리고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를 동시에 다루다보니 시기 등이 대혼란을 빚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북·동부여의 기록과 고추모의 탄생과 성장시기 등이 혼선을 빚으면서 심각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보니 위에서 인용한 단재 선생의 고추모 탄생설과 성장과정 역시 같은 모순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추모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세게에 대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해 조사사회과학원 손영종 역시 광개토왕릉비문연구에서 필자와 동일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럼 아래에서 손영종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간략히 인용해보도록 한다.

 

해모수와 북부여를 연결시킨 것은 <삼국유사>의 북부여에 관한 서술에서 볼 수 있다. <삼국유사> 1이 북부여에 관한 서술에서 <고기>에서 인용한다고 하고 해모수는 천제인데 신작 3년 홀승골성에 내려와서 나라를 세우고 북부여라고 하였으며 아들은 부루이고 성은 해씨라고 하였다. 그리고 해부루는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이 기사와 <삼국사기>의 기사를 종합하여 보면 해부루와 주몽은 다같이 해모수의 아들로써 형제간이나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구삼국사>의 동명왕 본기에는 주몽은 금와의 박해를 받은 것으로 되고 어려서 금와의 아들인 대소 등과 같이 지낸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증손자들과 같은 세대의 사람으로 기록되는 셈이다. 이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인 문헌자료들은 일치하게 주몽이 북부여의 왕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주몽을 북부여의 천제의 아들로, 즉 북부여 왕실의 핏줄로 해석하는 것은 문헌자려와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만약 주몽을 북부여의 왕자였다고 본다면 그가 북부여 왕실에서 겪은 일들을 반영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구삼국사><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실린 주몽 전설에는 주몽은 금와 왕의 재위시에 태어난 것으로 되는데 그렇다면 주몽은 금와 왕의 일곱 아들들과 같은 세대로 된다, 또한 금와왕은 자기의 삼촌을 박해하고 살해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말을 기르는 일까지 시킨 것으로 된다. 계급 사회의 왕실에서 가까운 육친 사이에 왕의 자리를 둘러싸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왕아 자기의 삼촌을 죽이면 죽였지 궁중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시키면서 반기를 들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사회과학원, 송영종 중심, 161~162>

 

이상 간략히 살펴본 조선사회과학원 손영종의 글에서는 역시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 고추모가 금와왕의 아래 대인 대소 형제들과 한 세대라는 데 대해 실례를 들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손영종은 고추모가 금와왕보다 한 세대 위 즉 삼촌이라고 가정을 하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추모가 대소 형제들과 한 세대라는데 대해 반론을 제기하여 실제상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손영종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일련 타당성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이번에는 고추모가 동부여 2대 임금인 금와왕의 한 세대 아래, 즉 금와왕의 자식들인 대소의 일곱 형제들과 같은 세대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데 대해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 보기로 한다. 물론 전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신단민사, 신단실기, 단재 선생이 기록하고 있는 고추모의 탄생설화와 성장과정 등이 시대적, 세대 등이 그 어떤 사실성이나 논리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화들이 지니고 있는 세밀한 모순점들을 모두 하나씩 분석하는 것은 너무 방대하기에 이번 분석에서는 큰 줄기만을 분석하기로 한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후일 북·동부여와 고구려에 대해 다룰 때 상세하기로 한다.

 

이미 앞 선 연재에서 간략히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좀 상세히 다루어 보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는 동부여 시조인 해부루 재위시 태어났으며 그 시기 성장기르 거치게 된다. 이는 고추모의 세대가 해부루가 큰 돌을 들추어내고 얻은 금와와 같으며 성장과정 역시 금오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고추모는 금와의 아들들인 대소의 일곱 형제들보다 한 세대 위로써 그들과 같은 시기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이러한 시점을 감안하면 삼국사기의 이 때 금와은 때마침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중략- 금와에게 아들 7형제에가 있어 항상 주몽과 어울려 노는데 재주가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중략- 그 장자 대소가 왕께 아뢰기를 주몽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게 아니요, 그 위인이 무척 날래니 만약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청컨대 빨리 조처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중략- 왕자 및 여러 또 모해하려 하자라는 부분의 기록은 전혀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고구려 건국시기와 동부여왕 대소가 고구려 제3대 임금인 대주류 5년에 고구려 무장 괴유에게 참살을 당한다는 기사와 년조에 비추어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이와 같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금와는 그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금와는 괴이하게 여겨 유화를 방안에 몰래 가두었더니” “금와왕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예가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자 맏아들 대소가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아마도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왕의 아들들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주몽을 해치려 하자라는 기사의 내용 역시 전혀 신뢰할 수가 없으며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사와 고구려 제3대 대주류 임금에게 패해 전사한 동부여 제3대 임듬 대소의 기사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설화에 기록을 한 단재 선생의 고증 역시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삼국유사에는 북부여가 화하족 한나라 선제 신작 3년 임술년(B.C59) 48일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컫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유사는 북부여가 임술년 즉 서기전 58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 삼국사기에 고구려 건국 년대에 대해 보기로 하자.

그 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미처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 위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이 때 주몽의 나이 22세이다. 바로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이요, 신라 시조 박혁거세 21년인 갑신년(B.C 37) 이었다.”

<삼국사기 김부식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87~288>

 

삼국사기는 고추모가 나이 22세 되던 한나라 효원제 건소 2, 신라 시조 박혁거세 재위 21년인 갑신년 즉 서기 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것도 한나라 효원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재위 년도까지 거들면서 확정적으로 고구려 건국 년대를 조증하며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북부여 건국 년대와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년대를 비교해보면 고구려 건국기와 추모의 탄생설 등 모든 것이 성립이 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즉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년대가 확실하다고 한다면 고추모는 북북여가 건국된 바로 다음 해인 계해년(B.C 58)에 탄생하게 된다. 이 말은 고추모는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던 해인 임술년에 이미 어머니 유화부인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결국 해모수는 임술년에 우화부인을 유혹하여 임신을 하게 만들고 또 같은 시기 북부여도 건국하였다는 논리가 성립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설정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써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북부여와 동부여의 건국 년대와 존속기간 그리고 임금의 계보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압축하여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와 동부여 시조 해부무만을 기록하다보니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해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내용도 성립될 수가 없다. 이는 삼국유사가 기록하고 있는 세대와 년대수 그리고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시기를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증명이 된다. 즉 삼국유사의 기록대를 보면 초기 북부여 건국시기와 동부여 건국시기 그리고 고구려 건국시기를 년대 별로 일별하면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던 해 고추모가 이이 밍태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추모를 동부여를 건국한 시조 해부루보다 앞 선 세대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자마자 죽고 이미 장성해 있던 해부루가 곧바로 북부여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또 가슬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도저히 불가능한 논리가 서게 된다.

 

이와 같은 논리에 따르면 북부여라는 나라는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이다. 이는 고추모가 22살 때인 갑십년(B.C 37)에 고구려를 건국했기 때문에 억지로 그에 맞춰 삼국유사의 북부여 건국 년도인 임술년(B.C 59)과 또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 한 해, 그리고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태어나 22살이 될 때까지 성장기를 거쳤다는 상황에 맞춰 생기는 상황설정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해모수는 이미 장성한 아들 해부루가 있다. 그런 해모수가 임술년(B.C 59)D에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놀러나온 유하를 꾀어 사통하고 고구려 시조 고추모를 임신하게 한 다음 유화부인을 버리고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이 때 논리상 즉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칭한 것을 보면 이제 막 북부여를 건국한 직후였다. 그리고 해모수는 유화부인과 사통하여 고추모를 임신하게 한 다음 돌아가 죽게 된다. 이는 버리고 간 것이 아니고 해모수가 승천, 곧 죽은 것이 된다. 해모수가 죽자 이미 장성해 있던 해부루가 북부여 임금의 자리를 잇게 된다. 이 해 역시 임술년(B.C 59)이다, 그리고 북부여 2대 임금의 자리를 잇게 된다. 이 해 역시 임술년이다. 그리고 북부여 2대 임금의 자리에 오른 해부루는 고두막한에게 위협과 협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재상 아란불의 동해가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어 왕도론 삼기에 적합하다.’는 청을 받아들여 <가시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하게 된다.

해부루는 동부여를 건국하자마자 태백산 남쪽 우발수가에서 유화 부인을 만나 데려다가 방안에 가두어 두었다. 때는 이미 계해년(B.C 58)으로서 유화는 해모수와 사통한 1년 여가 흐르니 유화부인은 만삭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화부인은 해부루에 의해 방안에 갇히게 되자마자 고추모를 낳게 된다. 그리고 고추모는 해부루가 동부여 임금으로 재위시에 성장기를 거치게 된다. 그 때 고추모는 능력이 출중하여 해부루와 관가에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추모는 22살 나던 해인 갑신년(B,C 37) 동부여 임금 해부루와 관가에서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위 가상의 내용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북부여 건국 가슬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하고 또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거친 다음 나이 22살에 이르러 동부여를 탈출하여 갑신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줄거리를 억지로 엮어본 것이다. 아마도 필자가 억지로 꾸며 지은 내용을 보고 황당함을 느낄 것이다. 필자 역시 황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느끼는 위의 내용마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맞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논리적으로 모순이 존재하지 않도록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억지로 꾸며낸 내용도 황당하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은 얼마나 더 황당한가. 이를 증명해보도록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북부여·동부여 건국과 고추모의 동부여에서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동부여를 탈출하여 갑신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시간에 맞춰 구성해 본 필자가 꾸민 내용으로 보면 고추모를 임신한 유화부인을 해부루가 곤연 큰 바위돌 아래에서 얻은 금와가 임금에 재위할 때 데려다 방에 가두어 둘 수가 없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던 해인 임술년에 이미 임신해 있었던 유화부이을 태어나지도 않은 아니 잉태조차 하지 않아던 금와가 어떻게 데려다 방안에 가두어 둘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고추모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몸에 잉태되어 있을 때 금와조차 잉태도 되지 않았을텐데 어찌 또 그의 일곱의 아들들과 고추모가 함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거친단 말인가.

이와 같이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금와가 동부여 임금으로 재위 할 때 태어난 것도 아니다. 또 대소를 포함하여 금와왕이 일곱 아들들과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기를 거쳤으며 고추모의 뛰어난 재능을 시기하여 대소가 그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금와왕에게 청하였다는 내용은 황당 소설보다도 훨씬 더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고추모의 세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맞춰 필자가 억지로 꾸며 낸 내용이 사실에 부합하다. 즉 고추모는 북부여 임금의 자리에 오르던 해 가스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한 동부여의 시조 <해부루>가 재위에 있을 시 태어났으며 해부루가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산천에 벌어 곤연가의 큰 돌을 들추어 내고 얻은 금와가 같은 세대이다. 이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부합하는 사실이다. 물론 그 년대에 대해서는 다음에 고증하고 논증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단재 선생이 기록한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 중에 금와는 그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금와는 괴이하게 여겨 유화를 방안에 남몰래 가두었다.” “금와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다.” “맏아들 대소가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에게 태어난 것이 아니니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아마도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소가 금와왕에게 청하였다.” 등의 내용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내용들이이다. 그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등의 기록들이 그 반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 자체가 위의 내용들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계속-

 

2018211

 

서울동부구치소에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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