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90]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7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3/06 [15: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동부여에서 관가와 그 곳 백성들, 주로 지도 계급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들에 의해 목숨을 위협을 느낀 고구려 시조 고추모는 그와 의기가 투합한 오이, 마리, 협보 등과 함께 어머니 유화부인의 권유에 따라 뱃 속에 아이를 잉태한 부인 예씨를 버리고 동부여를 탈출하였다.

 

추모는 동부여 병사들의 추격을 받으기 엄사수에 이르러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추격병들이 쫓아오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니 그 다리를 밟고 엄사수를 무사히 건넜다. 추모일행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았던 다리는 모두 흩어져버리니 추격병들은 더 이상 추모 일행을 쫓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물고기와 자라들의 도움을 받아 엄사수(삼국유사는 엄수, 한단고기는 엄리대수, 광개토대왕릉 비문 엄리해수)를 무사히 건넌 고추모는 졸본촌에 이르렀다. 졸본천에 무사히 다다른 고추모 일행의 행적에 대하여 단재 선생은 아래와 같이 고증을 하여 기록했다. 이를 인용하여 보도록 한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그 곳의 부호 연타발의 여식이자, 미인인 소서노가 부친 재산을 상속하고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처가 되어 비류, 온조 두 아들을 낳았으나 우태가 죽어 과부로 지내고 있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소서노가 추모를 보고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니 추모가 이에 그 재산에 의지하여 명장 부분노 등을 불러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모아 왕업의 기틀을 닦았다. 홀승골 산 위에 도읍을 세워 국호를 <가우리>라 하고 이두문자로는 <고구려>라고 썼다. <가우리>는 중경 혹은 중국이란 뜻이다. 졸본부여의 왕 소양과 활쏘기 솜씨를 비교하며 그를 꺾어 누르고 이어서 부분노를 보내어 그 무기고를 습격, 탈취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시키고 부근의 예족들을 몰아내어 거주민들의 해를 제거하고 오이, 부분노 등을 보내니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을 멸하여 성읍으로 삼고 부위염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 <가시라>의 일부분을 탈취하니, 이에 고구려의 기초가 세워졌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68>

 

위에서 인용한 단재 선생의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사에서는 다른 사서들에 보이지 않았던 고구려, 백제, 백제와 고구려의 그 뿌리 관계가 보인다. 그 어떤 연고도 전혀 없었던 졸본천에서 어떻게 고구려를 건국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졸본천에 도착한 고추모 일행은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고 비류수가에 초가집을 지어 살면서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고추무가 소서노를 만나 재혼을 하기 이전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윙에서 인용한 단재 선생의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의 기사에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그 곳의 부호 연타발의 여식을 만나 재혼을 한 부분부터 다루었다.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년도에 나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바로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이요, 신라 시조 박혁거세 21년인 갑신년(B.C 37)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때 주몽의 나이 22세이다.”고 하였다. 반면 삼국유사는 “(이 때) 주몽의 나이 12세였는데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 갑신년에 즉위하여 왕이라고 일컫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할 때늬 나이가 삼국사기는 22세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는 12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할 때의 나아기 삼국유사의 기록한 것은 오기이다. 물론 삼국유사를 일연언사가 지을 때에 12세라고 하였는지 아니면 후 조선조에서 다시 기록을 할 때 오기를 했는지, 일제강점기 우리 겨레의 역사를 왜곡할 때 실수로 12세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확증할 수는 없다.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졸본천·졸본부여에 이르러 그곳 부호 연타발의 여식인 과부 소서노와 재혼을 하였다는데 대하여 삼국유사는 그 어떤 기록도 하지 않았다. 반면 삼국사기는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사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백제본기에서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 혹은 고구려 주몽이라 한다.”고 하여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가 졸본천에 온 이후 백제 시조인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와 혼인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간접적이라 함은 고추모가 결혼을 하였던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과부로 살다가 재혼을 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백제 건국기사들을 다룰 때 상세할 예정이다.

 

뒤에서 인용한 단재 선생의 기록 가운데 “~추모가 이에 그 재산에 의지하여라는 내용은 졸보천 근처의 부호 연타발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뜬금없다고 여길 수가 있다현재 강단 사학의 자료들 가운데 <연타발>을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천에 도착한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있어 재산상으로 큰 기여를 한 연타발이나 소서노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한단고기의 기록을 인용하기로 한다. 참고로 아래에서 인용하게 될 내용을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한단고기의 기사를 다룰 때 상세히 분석할 것이기에 여기서는 인용만 한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를 칠 대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도읍이라고 해야 한다.)을 늘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289>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용문에 대하 분석은 한단고기 고구려 건국기사를 다룰 때 할 것이다.

다만 단재 선생이 언급한 “~추모가 그 재산에 의지하여라는 내용과 위 인용문을 연결하여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고추모가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천에 도착한 후 그 곳에 우선 궁실을 짓지 못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그곳의 부호인 연타발의 여식이자 과부인 소서노와 혼인하여 그 재산에 의거하여 고구려 왕업의 기초를 닦았다고 하는 단재 선생의 고증은 정확한 것이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단재 선생의 분석은 한단고기 기사 내용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는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또 단재 선생이 고증 가운데 부위염을 보내여 동부여를 쳐서 북 <가시라>의 일부분을 탈취하니라는 내용은 한단고기 인용문 가운데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를 칠 때 양곡 5,000석을 바쳤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다만 한단고기와 단재 선생의 기사 가운데에 동부여를 쳐서 북 <가시라>의 일부분을 탈취했다는 내용과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를 칠 때~“라는 부분에서는 단재 선생의 기사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본다. 즉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했을 때는 이미 북부여는 그 국운이 다하여 나라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건국되던 시기 북부여가 붕괴되었다는데 대해 한단고기 북부여기 하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해 2(B.C 58)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르르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의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고 북부여 제 6세 단군 고무서 조에 기록되어 있다. 무론 다음 기사에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에 나이가 23세였다.”라고 기록하여 북부여 제6세 단군 고무서가 죽기 전에 이미 북부여를 고추모에게 양위하기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미 위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고추모는 연타말의 딸 소서노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기록들이 백제 건국기사를 다룬 삼국사기나 한단고기에 실려있다. 또 한단고기 고구려국 본기 고구려 건국기에도 “32년 갑오(B.C 147-임승국, B.C 27-삼국사기) 10월 북옥저를 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단고기의 <북옥저>는 단재 선생이 고증한 <가시라>의 일부분을 말하는 거승로 두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 <북옥저>는 곧 <북 가시라>이다. ‘옥저는 고갱이 우리말 <가시라>라는데 대해서는 여러차례 강조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북옥저>는 즉 <북가시라>를 정복한 사실에 대해 삼구사기 고구려국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10왕은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 없애고 그 땅에 성읍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서기 전 28 혹은 갑오 27년에 부위염을 보내 <북가시라>를 정북했다는데 대해 삼국사기, 한단고기, 단재 선생의 기록이 일치한다.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후 가장 먼저 인근의 국가들 중 무너뜨린 나라는 비류국이다. 이에 대해 단재 선생은 졸본부여의 왕 송양과 활 솜씨를 비교하여 그를 꺾어 누르고라고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왕을 비류수 가운데 채소 잎이 흘러 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사냥을 하면서 찾아가 비류국에 이르니 국왕 송양이 나와 보고 하는 말이 내가 해우에 떨어져 있는 까닭으로 군자를 얻어보지 못하다가 오늘 뜻밖에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하였다. 왕은 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고 하였다. 소양이 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여러 대 왕 노릇을 하였다. 땅이 적어 두 임금은 용납될 수 없으니 그대는 도읍을 정한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즉 우리 소속이 되는 것이 옳지 않은가하였다. 왕은 그 말에 분개하여 그와 언쟁을 벌이다가 또 서로 활을 쏘아 재주를 시험하니 송양이 능히 대항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재위 2년 조에 “2(B.C 36) 여름 6, 송양이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그 당으로 다물을 만들고 송양을 봉하여 지주를 삼았다.”라고 하였다. 신단민사에는 비류를 빼앗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단실기에는 그 땅은 읍르와 경계가 연해 있어서 이를 물리치니 읍주는 감히 덤비지 못했다.”고 하여 고구려 시조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직후 비류를 정벌했음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관련 사서들에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가장 먼저 송양왕의 비류국을 정벌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추모는 고구려를 건국하고 행인국을 점령하고 고구려의 성읍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6년 겨울 10, 왕은 오이와 부분노에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재 선생의 인용문을 보면 오이, 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을 멸하여 성읍으로 삼고라고 하였다. 신단민사에는 행인고 북옥저를 멸하여 군현으로 삼고라고 기록하여 고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초기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멸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태백산>을 현 조선반도 남쪽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이라고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된다. <태백산>은 고갱이 우리 말로 <밝뫼>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신성하다고 받아들이는 <=>, 앞에 <>자를 부여하여 <밝뫼>라고 불렀다. <밝뫼>는 뜻글자를 빌어 <백두산>·<태백산>·<장백산>·<마리·마니산> 등등으로 불렸다. 이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따라서 <태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하여 현 강원도의 태백산으로 받아들이면 역사 해석을 절대로 바르게 할 수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신단민사의 동쪽으로 읍루를 물리치며에서의 <읍루>는 화하족들이 <마리가라> <말갈>을 자신들 발음에 따라 뜻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마리가라> 역시 이두로서 <말갈>을 말하며, <말갈>은 우리 말 <물길>, 즉 물가의 땅에 있는 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읍루>·<물길>·<말갈> 등은 모두 물가의 땅에 있는 나라 <물길>을 말한다.

 

한편, 고구려 초기 <물길>을 정벌했다는데 대해 삼국사기는 그 지역이 말갈부락과 연접하여 있으므로 장차 침략의 피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를 쳐서 물리치니 말갈이 겁내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물길이 이 때 바로 고구려에 패하고 편입하여 성읍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말갈은 그 이후로도 수백 년 간을 지속하였다. 따라서 이 때 말갈은 고구려의 속한 속국 혹은 제후국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이와 같이 고추모는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물길>·<비류>·<행인>·<북옥저(북가시라)> 등을 물리쳐 고구려의 성읍을 만들거나 속국으로 삼아 고구려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웠다. 또한 신단민사에는 서쪽으로 선비를 막아 물리치니라고 하여 고추모는 고구려를 건국하고 선비까지 징벌하여 그 위력을 떨쳤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 건국 초기 이웃 나라들을 연이어 격파 하니 힘이 약한 나라들은 스스로 고구려에 굴복하여 성읍이 되거나 속국이 되었다. 이를 단재 선생은 고구려의 기초가 세워졌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는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의탁하는 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신단민사에는 사방에 소문이 퍼져 와서 붙는 자가 많았다.”라고 기록하여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 나라들에게 강력한 위력을 떨쳤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제 인용문에 대해 단재 선생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보자. 대부분의 사서들이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과 성장과정 그리고 고구려 건국기 등만을 기록하고 있으나 단재 선생은 그에 대한 오류 또는 해석을 하였다. 우리는 그 해석에 대해서도 고찰을 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럼 아래에서 단재 선생의 해석을 인용한다.

 

이전 사서에서는 흔히 <송양.을 국호라고 하였으나 <이상국> 동명편에 인용한 <구삼국사>를 가지고 고찰하면 거기에서는 비류왕 송양이라고 하였다. 비류는 곧 부여로서 졸본부여를 말하는 것이므로 송양은 국명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왕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추모가 졸본부여 왕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왕이 돌아간 후에 추모가 그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추모의 아들 유로였고 추모가 아내로 맞은 여자는 소서노였지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었다. 추모왕은 고구려 본기에서는 <동명성왕>이라 하였으나 <동명><한몸>으로 읽어야 할 것이니 <한몸><신수두> 대제에서 높이 받르어 제사지내므로 <한몽>, <동명>의 호를 올렸던 것이고 <성왕><()><주무>의 의역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68~169>

 

인용문에서 단재 선생이 지적한 송양을 국호라고 하였으나라는 내용은 현대 일부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사들 사이에서도 일부는 <송양>을 국호로 <비류>를 임금의 호칭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언급하였듯이 <송양>은 이금의 이름이고, <비류>가 나라 이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구가기에서도 비류국에 이르니 국왕 송양이 나와 보고라고 하였으며 신단민사에는 비류를 빼앗고라 하여 비류가 나라 이름이고 <송양>이 비류국 임금의 호칭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류 역시 이두로서 <··>을 말한다. <··>은 이두로 <부여>로 대부분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비류는 곧 부여로서 같은 나라 이름을 다른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다만 고구려 건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비류국>은 북부여나 동부여와는 또 다른 <졸본부여>를 말하는 것이라는 단재 선생의 고증이 정확하다고 본다. 

 

인용문의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 ~후략~”라는 단재 선생의 고증역시 정확하다. 이미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추모가 졸본부여에 와서 아내로 맞이한 여인은 소서노이지 그 어떤 부여 임금, 즉 북부여 마지막 임금인 <고무서> 단재의 왕녀 혹은 비류국 <송양왕>의 왕녀가 아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에서는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 혹은 고구려의 주몽이라 한다.”라고 하여 졸본천에 도착한 고추모가 소서노와 혼인을 하엿음을 전해주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시조 온조왕 원년조에 일설에 시조는 비류왕이앋. 그 아버지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 비류요, 다음은 온조이다. 우태가 죽으니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B.C 37)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소서노를 데러댜 왕비로 삼았는데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나라를 세우고 기반을 닦는 일에 업적을 쌓았는 바)을 창건함이 대해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 아들이나 같았다.”라고 하여 동부여를 탈출하고 졸본천에 도착한 고추모가 그곳 부호의 딸이자 남편 우태가 죽고 혼자서 비류와 온조를 키우며 살고 있는 소서노와 혼인을 하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신단실기에서는 백제의 시조 온조의 성은 해씨이다. 처음에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 우태가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은 비류, 다음은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하고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비를 삼고 터를 얻어 왕업을 시작하는데 아내의 힘이 컸다. 그런 때문에 주몽은 비류 등을 사랑하고 잘 대접하여 자기의 아들처럼 여겼다.”라고 삼국사기와 동일한 기록을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시조인 추모는 동부여에서 관가와 부여인들과 갈등을 빚다가 목숨의 위협을 받자 어머니 유화부인의 권유를 받아들여 동부여를 탈출하여 우여골절 끝에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 가우리를 건국하고 그곳 부호 연타발의 딸이자 과부인 소서노와 혼인을 하여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의지하여 고구려 건국 초기 그 기초를 닦았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백제의 근본 뿌리와 줄기는 하나이다. 우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나라의 건국과정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백제 건국기를 동시에 비교분석해야 한다.

 

단재 선생의 글 가운데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추모의 아들 유류였고에 대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년 조 기사에 “2(B.C 18) 가을 7, 다물후 송양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라고 단재 선생의 글과 동일한 기록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기에서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당도하니 마침 왕의 아들이 없다가 주몽을 보고서 범상한 인물(범상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해석해야 한다)임을 알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도 함이라고 유류왕조와는 완전히 다른 기록을 하여 후대의 역사 해석에 대혼란을 초래하였다.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기록으 바로 아래 기록 즉 왕은 그 말에 분개하여 그와 언쟁을 벌이다가 또 서로 활을 쏘아 재주를 시험하니 송양이 능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2(B.C 36) 여름 6, 송양이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그 땅을 다물군을 만들고 송양을 봉하여 지주로 삼았다.”라는 내용과도 완전히 배치되는 기록을 하였다앞에서는 졸본부여 즉 비류국의 왕이 아들이 없어서 주몽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어 왕이 죽자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다고 하고, 바로 이어지는 기록에서는 주몽이 송양왕과 활을 쏘는 재주를 시험하여 이기니 바로 다음 해인 추모 재위 2년에 나라를 들어 항복을 했다고 기록을 했으니 그 기록의 모순과 오류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사기 자체 내용이 서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추후 본 삼국 혹은 다국시대를 다룰 때 하나씩 철저하게 고증하고 반론을 제시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추모가 졸본부여왕의 왕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돌아간 후에 추모가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추모의 아들 유류였고, 추모가 아내로 맞은 여자는 소서노였지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었다.”는 고증과 논증은 정확하다.

 

마지막으로 인용문의 추모왕을 ~중략~ 성왕의 성은 주무의 의역이다.”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다. 추후 후박달나라를 다룰 때 <수두>·<한몸>·<철군> 등에 대해 상씨 분석할 것이다. 또 동명에 대해서는 고추모 탄생설화와 고구려 건국깅 대한 <한단고기>의 기사를 다룰 때 명확히 고증하고 논증할 것이다.

 

-계속-

 

2018217

 

서울동부구치소에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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