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화 가꿔가기30] 남에선 친일파, 북에선 영웅비행사 '이활'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3/18 [01: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사진 앞줄 중앙이 김일성 주석. 앞줄 왼쪽에 비행사 이활 

 

 

남에서 친일파로 매도된 비행사 이활

 

2017년 말에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충칭(중경) 임시정부 청사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방명록에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이고 우리의 정신이라는 글을 남겼다. 근 20년 간 임시정부의 수장(주석 등 칭호)으로서 임시정부의 상징으로 되었던 백범 김구가 1948년 단독선거를 반대했고 한국정부에도 끼이지 않았는데, 한국을 임시정부의 계승으로 보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게다가 한국의 건국을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로 소급하겠다는 것도 현실을 위한 역사왜곡이라고 보인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필자는 한국의 “진보”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니 건국 1948년 설을 주장하는 한국의 “보수”들과 견해가 일치하다. 물론 이유는 다르지만. 

 

워낙 논란의 여지가 없어야 할 건국시점과 법통문제마저 쟁론을 자꾸 불러일으키는 건 1948년 건립된 한국 정부에 친일파가 다수 끼었다는 “원죄” 때문에 생겨난 한국인들의 콤플렉스 때문이다. 

 

혈통과 가문을 자랑하는 수백 년 전통이 있다나니 불미스러운 과거를 정시하지 못하고 백방으로 왜곡, 미화하는 동시에, 남을 흉보는 짓도 서슴지 않는 게 일부 한국인들의 행태다. 구체적인 행위로는 1948년에 세워진 조선(북한)의 초대 내각과 군의 요직, 그리고 문화예술계에 친일파들이 끼웠다고 자꾸만 곱씹는 걸 거들 수 있다. 

 

문예계에 최승희 같은 “월북명사”들이 여러 명 친일논란에 말려드는 것과 달리 인민군에서는 친일논란 인물이 적으니 필자가 아는 바로는 비행사 이활 1명뿐이다. 한국에서는 이활이 구 일본군에서 복무했고 가미가제 특공대에 끼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 한국전쟁에서 활략한 북의 IL-10 습격기     ©



북에서 말하는 리활

 

그와 달리 조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은 이활(아래에서는 북의 맞춤법에 따라 “리활”이라 표기함)은 1918년 5월 6일 평안북도 염주군에서 태어났는데,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가서 민간항공학교에서 비행을 배우고 신문사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광복 직후에는 신의주에서 구일본군이 남긴 비행기들과 부품들을 접수, 정리해 항공대를 창설했고, 조선항공대 대장, 조선항공협회 기술부회장, 평양학원 항공과 부과장을 역임했으며 남으로 오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북에서 활동했다 한다. 만약 리활이 남에 가서 공군 창설에 참여했더라면 지금쯤은 친일파가 아니라 공군영웅쯤으로 떠받들릴지도 모르니, 남에서 붙인 “친일파”딱지를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온다. 

 

리활 본인이 《인민들속에서 15》(조선로동당출판사 1977년 4월, 277쪽)에 발표한 “대를 이어 정치적생명을 빛내여주시려고”(165~ 185쪽)에서 회억한 바에 의하면, 귀국하여 서울에서 광복을 맞았고 사흘 만에 북으로 넘어갔다. 신의주에서 낡은 비행기를 고치다가 9월 하순에 평양에서 찾는다는 통지를 받고 평양에 가서 가명으로 활동하던 김일성 장군을 만나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해 11월 신의주학생소요를 해결하기 위해 내려온 김일성 장군을 보고서야 전날 만난 “그분”임을 알게 되었고 12월에는 김일성 장군을 조선항공협회 회장으로 모시면서 직접적인 연계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의 가정이 해방 전 괜찮게 살았고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활동했던 인텔리라고 하여 그를 배척하는 편협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김일성 장군은 그를 믿어주면서 큰일들을 맡겼다 한다. 

 

조선의 자료에 의하면 리활은 1947년 8월 군대에 입대하여 비행부련대장으로 복무하면서 비행사육성과 공군부대창설 사업에 적극 기여하였고, 전쟁시기에는 항공사단장, 항공사령부 부사령관으로서 활동했다. 

 

“1952년 1월 1일 김포비행장에 대한 야간습격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를 능숙하게 지휘하여 《비29》를 포함한 적기들을 수많이 격파격추하였다.

전쟁전기간 그가 지휘한 부대에서 10여명의 공화국영웅이 배출되였다.

전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하고 공군강좌장으로 복무하였다.

1987년 6월부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공로해설원으로 일하고있다.

1995년 10월에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것을 비롯하여 많은 훈장을 받았다.“ 

 

위의 약력을 보면 전쟁 후에서 1987년으로 넘어가 지나친 비약이 느껴진다. 사실은 리활이 30년 가까이 군을 떠났고 그중에서도 10년 가량은 시골에서 어렵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리활 본인의 회억문장이나 조선의 인텔리정책 해설서적에서는 반당종파분자들의 모해로 하여 외진 벽촌에서 고생을 했으나 수령을 믿는 마음이 변하지 않다가 1968년 4월 연락을 받고 평양으로 급히 올라가서 김일성 수상의 지시를 전달받아 명예를 회복했다고 간단히 거든다. 

그런 내용들도 대체로 애매하다. 예컨대 어느 책에서는 이렇게 썼다. 

 

“믿고 사랑하는 한 지식인의 신상에 부딪친 곡절을 뒤늦게야 아신 *** ***께서는 너무나도 격분하시여 해당 부문 일군에게 그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당장 그를 불러다가 놈들이 날조한 문건도 보여주고 그가 보는 앞에서 흔적도 없이 불살라버리라고 하시였다.” 

 

리활 본인은 이렇게 언급했다. 

 

“한때 당과 정부의 지도적자리에 들어앉았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 ***의 두리에 굳게 뭉친 우리 인민의 사상의지적통일단결을 약화시키고 저들의 음흉한 목적을 실현해보려고 ***께 충실한 일군들을 음으로양으로 모해하고 혁명대오에서 떼여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일군들은 종파분자들의 강압에 못이겨 하루밤사이에 혁명대오에서 밀려나게 되였다. 

전후복구건설이 한창 벌어지던 어려운 시기에 공군후비양성을 위하여 *** ***의 존함을 모신 군사과학의 최고전당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나는 반당종파분자들의 도전과 모해로 말미아아 대오에서 쫓겨나게 되였다.”(《인민들속에서 15》 180~ 181쪽)

 

역시 정치적인 술어가 가득할 뿐 구체적인 죄명이 없다. 알고 보면 리활의 몰락(?)은 1955년 7월 공군 부사령관으로부터 대학으로 옮겨가는데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사연은 금성청년출판사가 1997년 7월에 출판한 책 《사랑의 은빛날개》(박승록 지음)에 나온다. 

 

▲ 《사랑의 은빛날개》 표지와 107쪽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보다 앞서 1954년 10월에 당시 공군사령관이 리활을 헐뜯었는데 모함에는 조금 특별한 내용이 있다. 106쪽의 사진에서 푸른 줄을 친 대목이다. 

 

▲ 사랑의 은빛날개 소설 중에서     © 자주시보, 중국시민


“그러면서 그자는 리활이가 외국으로부터 접수하는 비행기를 시험비행하겠다고 한 제의에 대하여 자기는 부결하였는데 그 리유인즉 중국땅인 공주령에서 연길까지 시험비행하겠다는 거리는 남반부까지 갈수 있는 비행거리이므로 그의 출신성분으로 보아 의심스러워 그랬다고 하였다.”(106쪽) 

 

공주령(公主岭, 꿍주링)과 연길(延吉, 옌지)는 모두 길림성(吉林省, 길림성)의 도시이다. 2017년 10월 10일에 발표한 “타산지석” “김일성주석, 노획 미제 헬기 통째로 러시아에 제공”에서 필자는 중국이 비행장을 통째로 조선인민군에게 빌려준 적 있다고 거들었는데, 공주령과 연길에 바로 그러한 비행장들이 있었다. 

중국 자료에 의하면 공주령 비행장은 활주로 길이가 2, 000미터, 너비가 100미터로서 당시 동복지역의 비행장들 중에서 조건이 아주 좋았고, 1952년 9월에 공군 15사가 이전하면서 인민군이 훈련기지로 쓰도록 했다. 

때문에 공주령에서 비행기들을 연길로 옮겨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사령관이 남반부로의 도주 시험비행으로 의심하면서 부결했을까? 

오랫동안 품던 의문은 21세기에 들어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노금석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풀렸다. 

 

 

휴전 직후 미그 15- 비스를 몰고 월남한 노금석 

 

전쟁기간에 미국은 선전에 무척 품을 들였으니 그중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게 비행 가능한 MIG 전투기를 몰고 넘어오는 첫 비행사에게 10만 달러 상금을 지불한다는 작전이었다. 전시에는 전혀 효과가 없다가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에 인민군 미그기 1대가 넘어가니 선전담당자들이 자기들의 노력이 먹혀들었다고 좋아했으나 곧 조종사 노금석이 그런 선전을 전혀 몰랐음이 밝혀져 담당자들이 허탈해났다 한다. 선전작전 관계자들은 노금석에게 그 “물라작전”을 알고 있었노라고 거짓말을 해달라고 간청했다는데, 근년에 한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부탁”과 “간청”들과 오버랩된다. 

 

노금석에 대해서는 한글 인터넷 자료들이 꽤나 되고 영어와 일본어 책자들에도 등장하니까 일일이 인용할 필요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1932년에 일본 재벌회사 간부사원 가정에서 태어난 노금석은 어릴 적부터 미국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미국을 동경했는데, 해방 후 가세가 변하니 1949년 8월 육군 징집을 피하려고 해군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교육받다가 비행사 선발에 응시하여 합격했고 중국 동북(만주)에서 비행교육을 받아 우수한 성적을 따내서 미그기를 몰게 되었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미군과의 공중전에서 동료들과 자기가 망탕 포를 쏘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휴전과 더불어 소속 부대가 만주에서 의주로 이동했고, 2개월 뒤인 9월에 평양 부근의 신설 순안비행장으로 이동했다가 21일 편대가 훈련을 마치고 귀항할 때 홀로 빠져서 김포로 날아가버렸다. 

 

아버지의 경력을 위조하여 군에 들어가고 교육기간 골수 공산주의자 행세를 했으며 비행사로 자원한 것도 교육과정에서 전쟁이 끝나리라는 계산 때문이고, 비행사로 된 다음에는 탈북을 궁리하게 되었다는 등등이 노금석의 자랑거리다.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부대에서 가장 우수한 비행사 집단에 끼었다는데, 당시 성능최고로 알려진 미그 15- 비스를 몰았다는 걸 보면 그저 허풍은 아니다. 

노금석이 보상금 10만 달러를 받기는 했으나 “돈을 바라고 미그기를 훔쳤다”'는 주장은 기어코 반대했다니 나름 원칙은 있은 모양이다. 

 

그가 몰고 간 MiG-15비스는 오키나와의 가데나(嘉手納) 공군기지로 옮겨져 미군 비행사들이 거듭 몰아보고 평가했으니 F86과의 성능비교세부는 《조선전쟁에서의 미국 공군》이라는 미국 책에 나온다. 

 

노금석은 후에 미국으로 가서 델라웨어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꾸렸으며 미국 국적을 얻었고 그라망, 보잉 등 회사에서 항공 기술자로 일했으며 엠블리 리들 항공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68세에 은퇴했다.

 

뒷날 1980년대에 비행기를 몰고 남으로 넘어가서 유명인사로서 활약하다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은 이웅평과 달리 노금석은 처음부터 한국이 아니라 미국을 겨냥했고 또 소원을 이뤘기에 꽤나 장수한 것 같다. 

 

1960년에 결혼한 그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정신장애아이고, 차남은 항공우주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결혼 직후 부인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총으로 자살했는바, 어쩌다나니 노금석이 탈북했던 9월 21일에 일을 저질렀다 한다. 

 

노금석의 생존여부는 인터넷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9월 21일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유가 둘이나 된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시사해주는 점 

 

노금석이 직접 리활과 관계가 있었는지는 확실한 자료를 보지 못했다만, 여러 해 동안 비행교육과 훈련에 관여한 리활이 당시 비행사 수자가 별로 많지도 않던 상황에서 공부 잘하고 비행기를 잘 몰았다는 노금석의 존재를 모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노금석의 탈북 때문에 공군부대 성원들에 대한 엄격한 조사가 진행됐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아울러 1954년에 공군사령관이 부사령관 리활의 시험비행부결의 이유가 그때로서는 상당수 사람들에게 먹혀들었으리라는 것도 가늠할 수 있다. 

 

리활의 생존여부도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는데, 1960년대 말부터 전력공업부문의 어느 기업소에서 책임자로 일하던 그가 중장 군사칭호를 받고 전승기념관에서 공로해설원으로 일하게 된 게 김정일 지도자의 결정임은 “인덕정치”, “광폭정치”의 표본으로 널리 선전되었고, 세상 떴다면 아마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을 것이다. 자식들도 대학공부를 하고 군과 다른 분야에서 일했다고 알려졌는바, 지금쯤은 제3대, 제4대가 활약하리라 짐작된다. 

 

골수 친미파였던 노금석, 친일파 딱지가 엉뚱하게 붙여진 리활, 어느 편이 더 나으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입장차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더라도, 사후에 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만으로 따진다면 리활이 노금석보다 윗자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중간에 곡절을 겪었으나 만년은 잘 보냈고 후대들도 잘 돼갔을 리활과 탈북 후 별 곡절 없이 미국식으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자식들 때문에 속을 꽤나 썩였을 노금석, 한때 인민군 공군에서 함께 복무했던 두 사람의 인생은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이런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도 통일문화를 가꿔가기 과정의 일환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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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바그네 18/03/18 [04:11]
리활 선생은 2007년 7월 3일 89세로 영면 했음 . 수정 삭제
잘모르는 북한보다 18/03/18 [11:51]
교활한 기회주의자들.. 지 나라 지 현실을 떠나 남의 현실 남의 나라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진보성과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태도 자체가 사대주의 그 자체이고 주체주의의 부정이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를 위대하다고 무조건 빤다고 통일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들이 위대하고 안하고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지난 세월 일제강점이 끝나고 미제 강점이 시작된 이래 70년 도합 100년이 넘는 근현대 식민지 남한의 역사를 관통한 것은 바로 이런 자들의 교활한 기회주의적 사대주의가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중국시민이면 네들 중국 내부문제에 대한 올바르고 정의롭고 인민대중이익에 충실한 관점으로 중국을 먼저 걱정하라. 남의 나라 문제에 대해 마이 아는듯이 뇌까리지 말고!!! 아무 도움 안된다. 오히려 네같은 기회주의 반동분자들의 교묘한 사회입지가 마련되어 사회분열,인간분열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 하지만 중국시민은 중국국적을 버리고 조선국적을 취득하든지 남한국적을 취득하든지 한 연후에 남북한 관련 기사든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 안그러면 죽는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이창기 이 개새기! 중국시민 이 종간나새기.. 그리고 111은구더기라는 닉네임의 골수 종북분자 이런 극단적인 반동분자 새기들은 통일혁명의 암세포들이다. 지금 북한에서도 네들같은 스레기 쁘띠기회주의 극단분자들 좋아하지 않아!!! 네들의 주둥아리에서 내뱉는 말은 네들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목숨을 걸고 때론 전생을 걸고 만든 피땀어린 공적을 마치 제도 일부 도와서 만든 것인양 떠벌이는 것으로 자신의 위신과 권위를 세우려는 아주 고약하고 사악한 반동분자 짓거리의 전형이다. 이창기..중국시민.. 내가 네들을 처단할 것이다. 개새기들.. 그리고 네들 주위에 있는 아주 사악하기 그지없는 민족반동분자들 모두!! 진보 통일 민족을 아주 같잖은 네들 개새기와 가족들 스레기에게 봉사시킬 수 없음이다.!! 수정 삭제
위대한 중국 18/03/18 [14:59]
청나라 롤 모델를 따르면 된다,
북한이 중국을 지배하고, 중국은 피지배자로 따르면 세계를 지배할수 있다,

이유는 , 부정부패, 이것만 없으면 세계 일등 국가 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딱하나, 북한의 지배를 받는다고 북한에 간청하고,
북한이 받아 들이면, 중국은 세계 일등 국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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