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김일성 주석은 중국 난징 방문에서 뭘 관찰했던가?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4/21 [18:03]  최종편집: ⓒ 자주시보

 

난징시의 녹화사업 

 

중국에는 역사가 오랜 도시들이 많다. 허나 수도였던 걸 자랑하는 도시들은 많지 않다. 여러 번 수도로 되었음을 자랑하는 도시들은 더욱 적다. 산시성(섬서성)의 시안(서안, 옛날의 장안), 허난성(하남성)의 뤄양(옛날의 낙양) 등이 한국에 꽤나 잘 알려진데 비해, 장수성(강소성)의 성소재지 난징(남경)은 “스차오구두(十朝古都,10개 왕조의 옛 수도)”라고 자랑하지만 그 역사나 현실이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셈이다. 난징시의 녹화에 대해서는 더구나 아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난징시는 오랜 세월 중국에서 녹화의 본보기 도시였고 국제적인 영향까지 끼쳤다. 주요한 인물이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까지 했던 노혁명가 펑충(彭冲, 1915~ 2010)이다. 

 

▲ 장수성에서 오래 사업했던 펑충     © 자주시보, 중국시민

 

푸젠성(福建省복건성) 장저우(漳州장주) 사람으로서 18살에 혁명에 참가한 펑충은 1937년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군대에서 정치사업, 지방에서 행정사업을 맡다가 1949년 건국과 더불어 푸젠성에 가서 통일전선분야 등에서 사업했는데 1954년 8월에 중공 장수성 위원회 비서장으로 전근했고 1955년 후부터 난징시 시장, 중공 난징시 위원회 제1서기, 장수성 위원회 서기처 후보서기 등 직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시장으로 불렸다. 후에는 장수성의 주요한 영도직무들을 두루 맡았고 1976년 10월 “4인방” 분쇄 이후 상하이(상해)로 옮겨가 “4인방”의 근거지인 상하이를 다스리는 중책을 걸머졌으며  뒷날 베이징으로 가서 전국 정치협상회의와 인민대표대회에서 요직들을 맡았으니, 만년에는 중국의 법치를 위해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난징은 지난 국민당 정부의 수도로 20년가량 존재했는데 그중 몇 해는 일본군과 괴뢰정권이 차지했다. 1937년 12월의 유명한 난징대학살에 앞서 일본군의 공격과 파괴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고, 충칭(중경)으로 물러갔던 쟝제스(蒋介石장개석) 정부가 1946년에 난징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곧 내전을 일으키다나니 시내건설이 별로 진행되지 않았다. 하기에 1949년 4월에 중국인민해방군이 난징을 해방하고 첫 시장으로 부임했던 류버청(刘伯承유백승, 1955년에 10대 원수의 하나로 됨)이 한 첫 번째 일이 외지에서 묘목 수천 그루를 옮겨다가 국민장의 창시자이고 중국 공산당이 “위대한 민주혁명 선구자”라고 떠받드는 순중산(孙中山손중산, 손문)의 무덤인 중산릉을 녹화했다. 몇 달 뒤 서남지대를 해방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떠나간 류버청은 특별히 나무씨 한 주머니를 인편으로 보내와 난징이 나무가 사철 푸르고 환경이 아름다운 도시로 되기를 바랐다. 

 

1955년 난징 시장으로 된 펑충이 류버청의 이야기들을 듣고 걸머진 책임이 무거운 걸 느꼈는데 최고영도자 마오저둥(모택동)이 한결 강조할 줄이야.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오후, 시찰차로 장수성에 온 마오저둥 주석이 성위서기 단전린(谭震林담진림) 등 간부들과 함께 당시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천문대인 난징 교외의 즈진산(紫金山자금산) 천문대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았다. 주변의 뭇산은 푸른데 난징시는 온통 잿빛이었다. 마오저둥 주석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공산당원들이 왜 시내 전채를 녹화할 수 없는가?(我们共产党人为什么不能把整个城市绿化起来)” 

성, 시 간부들은 수령의 반문에 큰 충격을 받았고 펑충은 속으로 꼭 난징성을 푸르게 하리라 다짐했다.

 

뒤이어 난징시에서 일어난 건설고조에서 녹화가 중점으로 되었으니 펑충은 시정부 앞의 베이징동로(北京东路)부터 면모를 일신시켜 본보기로 만든 다음 보급하는 방법을 취했다. 초기에 펑충의 생각은 비교적 단순하여 나무를 심어 살리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소련 전문가의 제의를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당시 중국의 여러 분야에 소련 전문가들이 와 있었으니 군사와 공업 분야에 제일 많았고 이야기도 많이 남겼으나 도시건설 분야에도 없은 건 아니었다. 한 소련전문가가 푸르게만 하지 말고 계절이 바뀌면서 볼거리들이 있으면 좋다고 제의하여, 펑충은 선뜻 받아들이고 또 실천을 거쳐 “4화(四化)” 기준을 내놓았으니 녹화만이 아니라 “미화(美化)”, “차이화(彩化,컬러화)”, “정화(淨化)” 등도 포함시켜 시민들이 일년내내 나무도 보고 꽃도 보면서 깨끗한 공기를 즐길 수 있도록 노렸다. 

 

1956년 1월에 난징시를 다시 시찰한 마오저둥 주석은 특별히 시교의 산마루에 올라가 부근의 민둥산들에 과일나무를 심을 걸 지시했고, 시정부에 와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당시 상하이 시장이던 천이(陈毅진의) 원수는 난징 시정부가 상하이 정부보다 훨씬 낫다고 평했고 공안부장 뤄루이칭(罗瑞卿나서경)은 전국의 시정부들 가운데서 제일 낫다고까지 말했다. 

수령과 상급, 전우들의 호평을 받은 펑충은 녹화사업을 더 다그쳐나갔으니 임업 전문가 탕젠싱(唐建行당건행)을 불러다가 빨리 자라는 나무가 없느냐고 물었다. 유칼리나무(중국어로 안쑤桉树)가 빨리 자라기에 불교 성지인 쥬화산(九华山구화산, 신라 고승 김교각이 활동했던 산)에서 나무를 얻어다가 심어보았는데 난징의 기후와 풍토에는 맞지 않아 사름률(활착률)이 낮아서 결국 포기했다. 이러저러한 시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난징시는 전문 투자하여 묘포장들을 10여 곳 꾸렸고 난징에서 생장하기 적합한 용백(龙柏), 설송(雪松)< 수삼(水杉) 등을 키웠다. 또한 펑충인 시의 각 구에 녹화대를 설립하여 재배로부터 경영까지 체계를 갖춰 “4화”요구를 실현했다. 

 

난징시는 “푸른 성(绿城)”이라고 불리면서 중외 귀빈들의 칭찬을 받았는데, 1970년대 중반에 난징을 방문한 김일성 주석은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난징시의 녹화전문가를 조선으로 보내 지도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난징시 정부에서 탄젠싱을 위수로 하는 녹화전문가소조를 파견했다. 

 

김일성 주석의 요청과 난징시의 처사는 평양이 도시 속에 공원이 있는 게 아니라 공원 속에 도시가 있다는 평가를 듣기까지, 다른 나라들의 경험과 교훈을 많이 참고했음을 시사해준다. 

 

김일성 주석은 뭘 보고 어떻게 생각했던가? 

 

난징과 펑충의 역사를 쓴 중국인들은 김일성 주석의 초청과 전문가들의 출국까지 안다. 허나 난징의 녹화가 다른 면에서 조선에 영향을 끼친 건 모른다. 중국과 조선의 책들과 자료들을 두루 모아 보아야 역사사건을 폭 넓게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건 필자가 얻어낸 교훈이다.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수십 년 째 펴내는 김일성 주석 덕성실기집 《인민들속에서》는 이미 100권을 훌쩍 넘겼는데 볼 줄 알면 흥미로운 내용들이 무수하다. 2001년 3월에 출판된 61권에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한국의 도지사에 해당됨)이었던 한상규가 2000년 11월에 쓴 회고문장 “산에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하겠습니다”(66~72쪽)가 실려있다. 

 

▲ 김일성 주석 덕성실기집 《인민들속에서 61》     © 자주시보,중국시민

 

글에 의하면 1979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황해북도를 시찰하는 김일성 주석을 도의 입구 황주군에서 맞이한 한상규는 농사를 잘 지었다는 칭찬 뒤에 벌거숭이산들이 많다는 지적을 받고 몸둘 바를 몰랐다. 황해북도는 농업도여서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고 여겼던 한상규는 나무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척박한 야산들에는 워낙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황주군 신상리, 침촌리, 룡천리를 현지지도한 김일성 주석은 간부들에게 다른 군을 더 보자면서 봉산군 청계협동농장에 갔다. 

 

“그곳 일군들과 인사를 나누신 *** ***께서는 하나와 같이 잘된 벼들을 둘러 보시고 나서 《… 가로수가 논밭에 그늘을 지어 주어 농사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가로수를 심지 않을수는 없습니다. 가로수가 논밭에 그늘을 지어 주기는 하지만 바람을 막아 주는 역할도 하기때문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라고 하시였다. 

그때까지 나는 가로수에 대하여 이렇다할 견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로수가 길옆에 있는 포전들에 그늘을 지어주기 때문이였다. 

그리하여 한때는 꿩 잡는 것이 매라고 농사만 잘 지으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으로 가로수를 다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 해 보니 그렇게 하면 나무 한그루 없는 도로는 정말 꼴불견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이날 이때까지 호미난방격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나였다. 

*** ***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신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시였다. 

몇해전 중국을 방문하신 *** ***께서 남경지구를 참관하시였을 때였다. 

그 지방의 가로수는 모두 키 낮은 나무들이였다. 

플라타나스라는 나무였는데 나무모때에 가지들을 잘라주면 키가 크지 않고 옆으로만 퍼지였다. 

신통히 우산처럼 생긴 이 나무는 길에는 그늘을 지어 주고 농경지에는 한 점의 그늘피해도 주지 않았다. 

*** ***께서는 호기심이 동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도 나무를 묘목때부터 키가 크지 않고 옆으로 퍼지게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가로수와 관련한 우리들의 견해를 알아보시고 나서 잠시의 휴식도 없이 서흥호로 가시였다.”(69~ 70쪽)

 

서흥호에서 6년 전에 지시해 심어진 나무들을 살펴보고 만족해한 김일성 주석은 다음 날 황해북도 당, 행정경제일군협의회를 소집하고 산림조성사업을 잘할 데 대하여 강조했다. 

 

“농사를 잘 짓자면 부식토가 많아야 하는데 잡관목들이 없는데서는 나무를 많이 심어 부식토 원천을 조성해야 한다고, 그러자면 빨리 자라는 아카시아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하시였다.”(72쪽) 

 

한상규는 속다짐을 했고 황해북도는 교시관철 투쟁을 벌렸다. 

 

“야산들에 사과, 배, 복숭아를 비롯한 여러가지 과일나무도 심고 나무가 자랄 수 없다고 하던 척박한 곳에는 아카시아 나무림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좌우에 논과 밭이 있는 큰 길 옆에는 키 낮은 나무도 심었다. 

그리하여 오늘 황해북도안의 많은 《번대머리》야산들이 점차 푸르러 가고 있으며 도로에 심은 키 낮은 우산모양의 나무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72쪽) 

 

플라타나스를 중국어로는 “쉬안링무(悬铃木, 뜻으로는 방울을 단 나무)”라고 부르거나 “파궈우퉁(法国梧桐, 프랑스 오동)”이라고 부른다. 근년에 조선에 가본 중국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은데, 혹시 황해북도를 지나가면서 낯익은 나무들을 발견한 난징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그 내력은 모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차에 앉아 거리를 지나면서도 나무의 특징에 주목했고 그것을 농사에까지 결부시켰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어디로 가든지 항상 주위지형을 관찰하던 습관이 전투마다에서의 승리를 가져왔다면, 평화건설시기에 어느 나라로 가던지 항상 주변을 살펴보던 습관이 황해북도 농촌 포전길의 모습을 바꿔주었다. 

 

김일성 주석만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어디에 가면 남다른 관찰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점들에 주의하고 조선 사람들의 실리로 만들려고 애썼다. 

 

다음 주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할 말들은 상당수 곧 보도되더라도,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한 것들은 세월이 흘러야 알려질 것이다. 흥미 있는 이들이 열심히 정보들을 모으노라면 남보다 먼저 알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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