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판문점 통역 출신의 중국의 핵과학자 주광야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4/28 [12:48]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7년 말에 발표한 정문일침 387편 “북의 인구 1/10이 과학자, 기술자”(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330&section=sc51&section2=)는 1945년 광복 직후 반도 북반부에 자연과학분야의 전문가가 고작 12명이었다가 30 여 년 노력을 거쳐 100만을 훌쩍 넘긴 변화를 소개했고 지금은 1/10이 과학자, 기술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광복 직후 북반부 인구가 800만으로 추정될 때 12명이 0.00015%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천지개벽의 변화이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의문을 품던 필자는 요즘 마침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직후인 1950년에 과학계가 집계한 수자를 보았다. 

전국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자연과학자가 도합 865명이었는데 그중에서 147명이 아직 국외에 있었다. 

당시 중국 인구는 5억 정도로 추정된다. 자연과학자의 비례가 0.00017%니까 반도 북반부의 상황과 비해 별로 나을 바가 없었다. 

 

1950년 당시 외국에 있던 자연과학자들이 다수 귀국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챈쉐선(钱学森, 전학삼)이다. 미국은 그가 어디에 가나 5개 사단에 맞먹는다면서 몇 해 동안 강제, 억류했다가 1955년에야 귀국을 허용했으니, 실제로는 6. 25 전쟁시기 중국 동북을 폭격하다가 격추된 미군 비행사 10여 명과 맞교환한 셈이. 챈쉐선의 귀국을 강력히 요구하던 중국은 미국과의 최종담판에 앞서 먼저 미군 포로들을 석방했으니 이는 공을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미국 측에 공을 넘기는 수법이었다.

 

1950년대 초에는 챈쉐선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귀국도 순조로웠던 주광야(朱光亚주광아, 1924~ 2011)는 뒷날 중국의 원자무기 연구에서 거대한 역할을 하여 “원수들 중의 원수(众帅之帅)”라고 불린 과학자다. 

 

▲ 마오저둥(모택동) 주석과 주광야     © 자주시보,중국시민

 

원래 1945년 미국의 원자탄 사용으로 원자무기가 “절대무기”로 소문난 다음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원자무기 전문가들을 배양하고자 유명 과학자 3명으로 고찰단을 무어 미국에 보내면서 청년 수재들을 조수로 붙여주었다. 그러나 1946년 가을에 미국에 간 고찰단은 미국이 그 어떤 나라에도 원자탄 기술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접했고, 또 국내정세도 급변하여 저절로 해산되었고 수재들은 각자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물리학자 우다유(吴大猷오대유)의 조수 2명 가운데 하나였고 뒷날 노벨상을 받은 리정다오(李政道리정도)는 주광야 하나만이 핵물리학을 배웠고 또 배운 걸 제대로 써먹었다고 얘기했다. 리정다오는 핵과 무관한 공부를 했고 귀국도 하지 않았으며 다른 청년 수재들도 평생 핵과 관계없는 일들에 종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9년 가을에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얻은 주광야가 1950년 2월에 홍콩을 거쳐 귀국하여 베이징에 도착하여 베이징대학 물리학부 부교수로 일할 때에는 보통물리, 광학 등 과목을 가르쳤을 뿐 핵무기연구는 하지 않았다. 대학들을 오가면서 교수로 사업했던 주광야는 1959년에 핵무기연구소(제2기계공업부 제9연구소)의 기술총책임자로 되었다. 

그를 선발한 핵물리학자 챈싼챵(钱三强전삼강, 1913~ 1992)은 1983년 5월 21일자 《런민르바우(人民日报인민일보)》에 발표한 문장에서 선발기준을 이렇게 설명했다. 

 

▲ 중국 핵무기연구의 틀을 잡은 챈싼챵     © 자주시보,중국시민

 

“이른바 ‘선두자’는 꼭 본연의 학과나 공사 기술분야에서 나이가 제일 많고 위망이 제일 높은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반드시 재주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재주란 바로 학술이나 기술에서 일정한 조예가 있고, 지식을 운영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으며 열성과 창조정신이 있고 사람을 알아보고 쓰며 사람들과 단결하는데 능해야 된다는 것 등등이다.(所谓‘带头人,并不一定是本门学科或本项工程技术里,年龄最老、威望最高的人,但应该是有本事的人。本事就是:在学术上或技术上有一定造诣;有运用知识解决问题的能力;有干劲和创新精神;善于识人,用人,团结人。)” 

 

뒤이어 첸싼챵은 당시까지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던 주광야를 가리켜 “노, 중, 청”으로 가르는 세대에서 그 동무는 중년세대에 속해 30대 중반이었는데 경력은 그다지 오래지 않고 명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中字辈,35、6岁,论资历不那么深,论名气没那么大)고 그러나 발탁했고 성공을 거뒀으며 지금 60살 정도여서 아직도 여러 해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보다시피 챈싼챵은 인간관계처리를 유달리 강조했다. 또한 핵무기연구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주광야의 인간관계처리와 복잡한 문제 해결방식을 찬탄해마지 않았다. 그러면 학교에서 공부했고 학교에서 강의했던 주광야는 어떻게 유능한 관리자로 변신했던가? 

 

놀라운 일이지만 주광야가 스스로 밝혔다시피 샌님의 중요한 변화는 판문점에서 이뤄졌다. 

판문점 담판으로 영어전문가가 필요하다나니 1952년에 중국 정부는 대학들에서 정치적으로 믿을 만하고 영어수준이 높으며 현대과학기술도 아는 교원들을 선발하여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통역으로 썼다. 베이징대학에서 주광야와 챈쉐시(钱学熙전학희) 2명이 뽑혔으니 4월에 베이징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적기가 무시로 공습하는 산길을 따라 무개차를 타고 이틀을 내달려 개성에 이르렀다. 담판대표단은 개성에서 밤마다 방공 가림막을 치고 어두운 등불 밑에서 일하다가 일단 경보가 울리면 방공굴로 들어가야 했다. 또한 담판석상에서는 미국 대표단이 걸핏하면 “핵몽둥이”를 휘둘러댔다. 쌍방은 상대방에게 허점을 잡히지 않기 모두 참을성과 앉아버티기 능력을 키워냈다. 담판을 통해 주광야는 경솔하게 자신의 태도를 표시하지 않고 남의 발언을 끝까지 듣는 습관을 길렀고 일단 입을 열면 상대방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기준을 갖게 되었다. 판문점에서의 통역활동으로 주광야는 3등공을 세웠는데 공으로는 제일 낮은 공이지만 결코 쉽게 세울 수 없었다. 

 

중국은 군공평가에서 야박한 편이라 항미원조 전쟁의 경우 전투부대에서 보병이 3등공을 세우려면 화점 하나를 까부시거나 점령해야 됐고 탱크 운전사는 탱크 1대를 파괴해야 했으며 비행기 조종사는 비행기 1대를 격추시켜야 했다. 몇 해 씩 생사고비를 넘나든 관병들도 받을까 말까 하는 3등공을 주광야가 받았다는 건 그의 공적이 상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말해준다. 

시험용 원자탄으로부터 실전용원자탄, 수소탄에 이르기까지 핵무기연구과정에서 오만가지 가능성과 방안들을 놓고 열 띈 토론이 벌어지곤 했는데 어느 방안이나 나름 합리성과 근거를 가졌고 어느 방안이나 실시하려면 엄청난 원가가 들어가며 어느 방안을 고르는가에 따라 연구와 시험의 성패가 갈렸다. 주광야는 바로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자금과 물자들과 관계되는 방안들을 비교, 선택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기에 “중국 과학기술계 원수들 중의 원수(中国科技众帅之帅)”라고 불렸고 1999년에 20여 명 “양탄일성 공훈메달(两弹一星功勋奖章)” 수상자의 하나로 되었다. 

이밖에 핵발전소의 장소선택부터 시작해 핵의 평화적 이용에도 참가하여 크게 기여했고 70살이 되던 1994년 6월에 중국공정원(中国工程院) 초대 원장 겸 당서기, 1996년 5월에 중국과학협회 명예주석, 1999년 1월에 총장비부(总装备部) 과학기술위원회 주임으로 되어 챈싼챵의 예언대로 꾸준히 활약했다. 

 

중국의 핵무기연구와 제조는 당시 국제, 국내 정세에 근거한 필연적인 선택이었고 국책으로 추진되었다. 숱한 사람들이 참여한 대공사는 어느 한 사람이 빠졌대서 실패한다는 법은 없고 몇 번의 실패로 포기될 리도 없다. 허나 걸출한 개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기에 높은 성공률을 기록하면서 소련, 미국보다 훨씬 적은 고작 40여 차 실험으로 실전용 핵무기들을 확보했고, 따라서 공로자들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역사는 가정을 모른다지만, 필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주광야가 판문점 통역 경력이 없었더라면 뛰어난 관리자로 될 수 있었을까? 답은 항상 불가능하다이다. 

판문점 담판에 관련되는 글과 책들은 아주 많다. 한국에서도 글, 사진 등등이 사이트들과 책자들에 올랐는데, 중국인민지원군 측 통역들의 사진은 필자가 별로 보지 못했고 중국인민지원군 통역대오에 예전의 미국 모 대학 박사, 뒷날의 중국 핵무기연구 기술총책임자가 있었다는 건 한글자료들에서 거든 것 같지 않다. 

주광야의 변신은 6. 25전쟁의 일종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중국의 동북지방에까지 파급된 전쟁으로 인생궤도가 정해졌거나 바뀐 중국인들은 수두룩하다. 이후 적당한 기회에 소개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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