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열혈 국민당원이지만 중국서 인기높은 타이완 가수 덩리쥔(등려군)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5/05 [00: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인간은 인기를 얻기도 어렵거니와 인기를 유지하기는 더구나 힘들다. 하기에 인기배우나 가수들은 팬관리, 정보관리 등 인기관리에 무척 신경을 쓰고 소속 연예회사가 전담팀을 만들어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 허나 아무리 애를 써도 인기가 식는 건 변화속도가 빠른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추세라 인력과 재력으로 막기 힘들다. 인기관리필요성이 사라지고 인기관리팀이 없어진 뒤 특히 사망 후에는 인기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는 사례들이 많다. 

 

헌데 사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인기가 유지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점들이 드러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연예인들도 있다. 타이완 가수 덩리쥔(邓丽君등려군, 1953.  1.29~ 1995. 5.8)이 바로 전형적인 인물이다. 

중국 타이완에서 연예사업을 시작한 덩리쥔은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97년에 나온 홍콩 영화 《첨밀밀(甜蜜蜜)》이 한국에서 상영되면서 사후에 알려졌다 한다. 

덩리쥔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반공선전에서도 무척 활약한 인물이었는데, 변절의 추학 14편(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602)에서 썼다시피 중국 대륙에서 도망간 “반공의사”들과도 만나서 활동을 벌렸다. 

 

▲ 덩리쥔과 해방군 비행사 변절자들, 오른쪽의 순탠친(孙天勤손천근)은 한국을 거쳐 갔음.     © 자주시보, 중국시민

 

또한 대륙과 제일 가까운 진먼도(金门岛금문도)에도 군부대 위문공연을 갔고 대륙을 상대로 하는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여 반공내용을 말했다. 

덩리쥔의 노래가 특별히 나른하고 그 본인 또한 연예인들 중에서 반공활동에 많이 참여한 편이므로 중국 대륙에서는 덩리쥔이 가장 인기가 높던 1980년대 초반까지 그녀의 노래를 금지했고 언론과 전문가들이 비평도 많이 했다. 단 민간에서는 주로 녹음테이프 복제 형식으로 꾸준히 유행되었다. 1980년대에는 대륙사람들이 낮에는 라오덩(老邓노등, 늙은 등씨, 덩샤오핑등소평)의 말을 듣고 밤에는 샤오덩(小邓소등, 작은 등씨, 덩리쥔등려군)의 노래를 듣는다는 설이 돌 지경이었다. 

 

한편 1983년부터 중국 중앙텔레비전방송국(영어약자 CCTV)가 음력설연환야회(春节联欢晚会춘절연환만회, 중국어로 줄여서 춘완春晚이라 함)를 제작, 방영하기 시작했는데 영향력이 엄청났다. 직접 시청하지 못하는 해외사람들도 녹화테이프를 통해 보았으므로 전 세계의 중국인들과 중국계, 화교들이 아는 프로로 되었고, 볼거리가 풍성한 인터넷 시대에도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음력설연환야회는 초기부터 홍콩, 마카오, 타이완 연예인들을 초청하는 게 인기포인트로 되었고 누가 거기에 한 번 출연하면 지명도가 대번에 올라갔다. 이름을 대륙에 날린 다음에는 공연초청이 빗발쳐 돈을 엄청 많이 벌게 되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다음 해 야회에는 어느 해외 연예인이 출연하겠는가는 추측들이 생겨났고, 유명 연예인들 소속사들이 알게 모르게 경쟁도 벌렸다. 덩리쥔의 이름이 거들어졌던 건 당연한 일이다.

 

덩리쥔보다 하위인 연예인들이 대륙공연으로 새 시장을 차지하던 시절, 덩리쥔의 대륙공연설이 자주 돌았고 타이완 당국이 친척방문금지령을 1980년대 후반에 푼 다음에는 덩리쥔의 옛 고향 방문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본인은 타이완에서 태어났으나 부모가 대륙 출신이기에 고향은 원적(原籍원적지)개념으로도 쓰였다. 덩리쥔을 자기 고장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명인쟁탈전도 비공식적으로 전개됐다.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해외인사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상황에서 반공색채가 짙었던 덩리쥔도 대륙 쪽에서 초청대상에 꼽혔다. 홍콩의 일부 배우와 가수들은 대륙공연 때문에 타이완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때는 중국어연예계에서 아주 큰 셈이던 타이완 시장을 잃어버렸는데, 덩리쥔의 신분과 지위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걸림돌은 정치문제였다. 

 

대륙공연설이 돌기도 전인 1980년에 타이베이(台北대북)의 콘서트에서 만약 자기가 대륙에 가서 공연한다면 바로 삼민주의가 대륙에서 실행되는 그 날일 것이라고 예언했다. 삼민주의란 국민당의 원조인 순중산(孙中山손중산, 손문)이 창시한 주의이다. 국민당 군대 장교의 딸인 덩리쥔은 장기간 삼민주의의 중국통일을 부르짖었으니, 이는 국민당이 타이완에서 내건 구호는 수십 년 동안 “삼민주의가 반드시 중국을 통일한다(三民主义一定统一中国)”였기 때문이다. 덩리쥔의 그런 말과 행동을 잘 아는 대륙 측에서는 나름 의도로 그녀의 방문을 추진했다는데, 1989년 톈안문 사태(천안문 사태, 중국이 말하는 6. 4사건) 뒤에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1988년 말에 이미 중국어 음반발행을 그치면서 연예계 활동을 줄이기 시작한 덩리쥔이 톈안문 사태를 기념하는 활동들에는 열성스레 참가하였고 반공가요들을 열심히 불렀기 때문이다. 

 

연예계에서 물러나 프랑스 남자친구와 함께 조용히 보내던 덩리쥔은 1995년 5월에 타이치잉마이에서 지병인 천식병 발작으로 급사했다. 

42세 전 가수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대륙에서도 즉시 보도했으며 장례와 묘지조성에 이르기까지 연속보도했다. 단 20여 년 전의 대륙 언론들이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덩리쥔의 관에 국민당 당기가 덮였던 것. 

 

▲ 덩리쥔의 관에 덮인 국민당 당기     © 자주시보, 중국시민

 

▲ 국민당 당기가 덮인 덩리쥔의 관이 무덤구멍으로 내려지는 장면     © 자주시보, 중국시민

 

타이완에 있는 덩리쥔의 무덤은 대륙 관광단의 코스에 끼이고 관광객, 방문객들이 찾는 명소이지만 국민당 당기 부분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관에 국민당 당기를 덮은 건 국민당이 그만큼 덩리쥔을 높이 보고 인정했음을 말해준다. 국민당 특무조직의 전직 고관 구쩡원(谷正文곡정문)은 덩리쥔이 특무조직 소속이었다고 회고했는데 유족들은 그 주장을 단호히 반대했지만 법정놀음까지는 가지 않았다. 

구쩡원의 말에 의하면 덩리쥔은 해외공연을 허락받는 대가로 특수임무를 완수했다 한다. 흥미로운 건 구쩡원의 장편회고록에서 다른 내용들은 대체로 사실이라고 인정받는 반면, 덩리쥔 관련부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현상이다. 혹시 믿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야겠다. 

 

중국 대륙에서 덩리쥔 금지령은 무형 중에 풀렸다가 사후에는 극단적인 반공가요를 내놓고는 거의 다 시중에서 테이프와 CD로 퍼졌다. 또한 후진타오 시절 국민당과의 통일전선을 강조하면서 덩리쥔에 대한 선전이 격을 높이기 시작했는데, 2017년 5월에는 여러 매체가 덩리쥔을 기념하는 비정상적인 현상도 일어났다. 사망 22돌이란 특별히 기념할 이유가 없건만 그렇게 한 사람들은 내재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겠다. 중공의 문예정책과 중공식 문예작품의 대립면으로 덩리쥔을 내세우려 하는 사람들은 예전의 타이완만이 아니라 지금의 대륙에도 가득하니까. 

 

덩리쥔이 국민당 특무조직 소속이었던지 아니었던지 국민당 군인의 가족에서 태어나 국민당 통치환경에서 자라나 활동했으며 반공에 앞장섰던 건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덩리쥔 사후에 타이완을 지배하던 국민당이 엄청난 격으로 장례를 치르고 지위를 부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역사는 항상 그런데에서 굽어돈다. 중국을 통일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던 국민당이 덩리쥔 사후 5년 만에 타이완에서마저 야당으로 밀려났고 8년 뒤 다시 집권했으나 또 8년이 지나 정권을 잃었으며 그 사이 몇 개 당으로 쪼개졌고 명목을 유지하는 국민당도 내분이 심하다. 지금 와서는 국민당에서 삼민주의를 논하거나 통일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소수일 지경이다. 타이완에서의 여러가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원래 색깔을 지워야 된다는 투기꾼들이 늘어나다나니 국민당은 애매모호한 단체로 변해버렸다. 반대로 중국공산당은 전에 없이 강해져 타이완 문제쯤은 분 단위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군사전문가들이 나올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돌이켜보면 덩리쥔의 일생에서 했던 많은 말, 불렀던 적잖은 노래들이 설 자리를 잃었고 가치가 사라졌으며 심지어 웃음거리로 되었다. 또한 덩리쥔은 타이완에서 대륙출신으로 꼽히기에 이른바 본토박이들의 타이완을 주장하는 “타이완독립파”들이 보기에는 “외래침략자”의 대표로 된다. 덩리쥔의 무덤이 훼손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다. 

 

덩리쥔으로서는 다행스러운 게 노래를 많이 부르다나니 비정치적인 노래, 특히 사랑의 노래들이 생명을 이어가면서 여러 나라와 지역들에서 팬들을 확보한 점이겠다. 허나 덩리쥔 전기에서 반공선전부분을 빼고 덩리쥔 사진첩들에서 반공장면들을 빼는 수법이 옳은가에 대해서 필자는 의문을 품는다. 어떤 저자들은 덩리쥔의 반공활동을 언급하더라도 수동적인 행동으로 해석하고 특무조직소속설은 아예 부정해버린다. 덩리쥔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의적인 왜곡이라 할까. 진한 정치색채를 띄었던 덩리쥔은 정치색깔이 점점 옅어지면서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덩리쥔의 상당수 노래들을 필자도 좋아하지만 정치견해와 입장은 시답지 않게 여긴다. 반도에는 덩리쥔과 맞먹는 인물이 없다. 냉전시기에는 물론 한류가 놀라운 성공을 거둔 근년에도 정치색채가 진한 듯 연한 듯 하면서 정견과 연령을 넘어서 오랜 세월 두루 환영 받는 연예인을 꼽을 수 없으니 말이다. 반공, 반북 단체나 개인들로서는 “한국의 덩리쥔”이 없는 게 유감일 수도 있겠다. 당의 이름들이 자주 바뀌고 당의 취지도 쉬이 변하는 한국 정당들에서는 누군가의 시체나 관에 당기를 덮을 만한 정객마저 나오기 어려울 테니 당기를 덮어줄 연예인이 생겨나기는 더구나 어렵겠다. 

 

반도에 덩리쥔 같은 인물이 없고 이제 나올 가능성도 없는 게 어찌 보면 필연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반도의 행운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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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 18/05/05 [17:03]
등려군한테 그러한 내막이 있다니. 잘 읽었습니다 수정 삭제
오타자 18/05/05 [20:00]
무엇을 주장함인가 ? 논점파악이 안되는데 내가 어리석은 것인가, 글이 애매모호한 것인가? 중국대륙에서 덩리쥔 노래부르는 사람 많이 보았다. 그러나 부르는 노래는 단 하나였다. 덩리쥔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 이도 없었다. 오로지 요절한 것에만 동정을 느낄 뿐이었다. 소비에트시절 고려인으로 유명했던 가수도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요절했기때문이다. 덩리쥔이 조용필 나이들만큼 늙어서도 활동하고 하고 했다면 누가 덩리쥔을 그렇게 기억할 것인가 ? 조용필, 이미자가 한창의 아니인 35쯤에 요절했다고 치자.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 ? 일개 가수가 특무원이던 아니던 나는 관심없으며 또한 사람들도 관심없을 것이다. 박근혜가 첨밀밀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 덩리쥔이 특무원이었음을 기억하고 한 말이던가 ? 이 글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자주신보에 어울리지 않는 글이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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