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5/09 [09:07]  최종편집: ⓒ 자주시보

 

러시아 대문호 레브 톨스토이 만년에 숱한 숭배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톨스토이주의자”로 자칭하는 사람들은 공책과 펜을 쥐고 톨스토이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말마디들을 모조리 적었고 후에 톨스토이가 혹시 생각이 바뀌면 전날의 기록을 내놓으면서 시정을 강요했다. 짜증이 날대로 난 톨스토이는 지인에게 자기는 톨스토이주의라는 게 뭔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사실 톨스토이는 무슨 사상이나 철학을 새로 내놓지 않았으니 톨스토이주의라는 말부터 어울리지 않는데, 톨스토이가 사망하니 톨스토이주의자들은 재빨리 사라져버렸고 톨스토이주의도 이제는 별로 거드는 사람이 없다. 

 

톨스토이보다 10살 이상인 칼 마르크스는 며칠 전 탄생 200돌을 중국에서 성대하게 기념했고 시진핑 주석이 마르크스주의의 진리성을 재강조하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금도 세계적으로 아주 많다. 

그밖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면서도 마르크스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탄생 200돌을 계기로 쏟아져 나온 책들과 해석들 가운데는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만년에 마르크스가 사위 폴 라파르그에게 “만약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는 혹시 놀라운 말일 수도 있겠다만, 중국에서는 널리 알려진 말이고, 그 결론 앞에 전제가 하나 있다.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이 말한 그런 모양이라면, 나 본인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이는 마르크스 생전에 그의 학설에 대한 검출, 해석, 수정, 오해, 왜곡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또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이 말한 그런 모양이라면”이라는 전제를 잘라버리고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부분만 뽑아낸다면 한국의 《**일보》식 악마의 편집과 엇비슷하니, 본질 및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한때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진짜 마르크스주의를 배우지 못하고 소련이 뜯어고친 마르크스주의를 배웠기에 잘못을 저질렀다는 식의 해석들이 유행되었다. 중국에서는 소련을 “쑤롄(苏联)”이라고 표기하다나니 이른바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를 줄여서 “쑤마(苏马소마)”라고 부르는데, 쑤마 반대자들은 스탈린과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마르크스의 원본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떠들면서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일부 저작의 일부 구절들을 잘라내어 과대, 해석하는 방식을 선호했고 만년의 엥겔스가 공산주의를 반대했다는 따위 해괴한 주장들을 퍼뜨렸다.

한편 현대 서방(西方)의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에서 줄여서 “시마(西马서마)”라고 부르는데, 중국이 발달한 자본주의국가에서 통하는 시마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국인들도 있다. 

 

모든 사상, 모든 철학 및 모든 종교는 해석논쟁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종교에서는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종종 유혈사태도 불러온다. 사상, 철학, 종교 등이 현실정치와 모순되고 충돌을 빚어낼 때면 통치자들은 진압, 수용, 순화 등 방식을 취한다. 로마제국 피정복지대의 불순세력에 지나지 않아 탄압을 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변신한 게 전형적인 진압- 수용 사례이다. 진압도 수용도 하지 않고 순화시키는 경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창시자를 현실에 해롭지 않은 융화주의 신으로 부각시키는 방식이고 하나는 창시자의 세부들을 강조하고 치부들을 들추거나 가짜치부들을 만들어서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깎아내리는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철학자, 경제학자, 혁명가 등 배역을 했고 젊은 시절에는 괜찮은 시들도 썼으니 청년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건 혁명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인간적 모습을 되찾는다는 사람들은 개인사를 시시콜콜 캐면서 일찍이 부정된 낭설들도 주저 없이 받아들여 형편없는 마르크스의 인간상을 그려낸다. 또한 어떤 학자들이나 정객들은 마르크스를 단순한 경제학자로 간주하면서 혁명가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를 무시한다. 잉여가치학설만은 옳았지만 다른 학설들은 다 틀렸고 혁명 활동들도 시시했거나 옳지 않았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르크스 폄하나 반대의 백 수십 년 역사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학설, 마르크스주의 등에 대한 해석권 쟁탈전이었다고도 정의할 수 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왜곡했고 이미지를 조작했다는 게 해석전의 최고봉이다. 그런 해석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을 일찍이 마르크스가 했다. 

 

“철학자들은 그저 부동한 방식들로 세계를 해석하지만 문제는 세계를 개변하는데 있다.”

 

해석은 입술이나 나풀거리고 펜이나 달리고 키보드나 두들기면 된다. 허나 세계를 개변하자면 손과 발을 놀리고 땀을 흘려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피도 흘리거나 목숨도 내대야 한다. 

 

마르크스는 먼 나라의 옛 사람이라 특별히 관심하지 않는 한국인들도 많겠다만, 조선(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우리 민족 구성원 치고 주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10여 일 전에 이미지의 극적인 전환을 이룬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한국에서 “사랑스럽다”, “귀엽다” 따위 반향들이 나온다는데, 전에 여러 해 지속된 “악마화 작업”의 반대라는 점에서는 유익한 면이 있겠으나 김정은이라는 인간에 대한 전면적이고 정확한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다. 동족과의 만남에서 보여준 화기애애한 모습은 인간 김정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제 외부와의 접촉과 교류들이 늘어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여러 장소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면 단호하고 강한 모습들도 나오기 마련인데 다양한 모습들을 충분히 모아야만 완전한 김정은 형상이 그려지지 않겠는가. 지나치게 성급한 해석과 결론은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존재한다. 

 

4월 27일 판문점 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만찬에서 앞으로 부딪칠 수 있는 어려움도 많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으나 한국에서는 장밋빛 환상이 너무 많아서인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했다. 조선의 정책변화, 노선변화가 대북제재의 결과라고 믿는 사람들은 아예 조선의 무장해제를 점친다. 이제 조미(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반도의 비핵화 프로세스가 추진되면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을 되새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리라고 믿는다. 

세계 전반은 아니더라도 여러 나라,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반도에서 비핵화를 실현한다는 게 어디 떡 먹듯이 쉬운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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