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북중 친선과 중국 관광객 교통사고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5/10 [13:20]  최종편집: ⓒ 자주시보

 

7세기부터 과거제도가 정착한 후, 천 여 년 동안 중국에서 벼슬하는 공식통로로 되었다. 공신의 후대는 조상 덕에 벼슬할 수 있었고 부자들은 벼슬을 사기도 했다. 그러면 학식, 조상, 재산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들은 벼슬과 담을 쌓았을까? 아니다. 편법들이 많았으니 그중의 하나가 강도, 화적으로 되어 살인, 방화하여 소문을 자자하게 냄으로써 관청의 주의를 끄는 것이었다. 소동을 크게 부리면 진압할 능력 혹은 의지가 부족한 조정은 적당한 관직을 주겠다고 회유하여 체제 내에 편입시키곤 했으니 “초안(招安)”이라는 전문술어가 있었다. 고전소설 《수호지》에서 양산박의 화적패 대두령 송강이 자나 깨나 황제의 “초안”을 꿈꾸다가 뜻을 이뤄 관군으로 변신하는 건 문학작품에서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고전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용궁과 지옥을 드나들면서 소동을 부리니, 옥황상제가 천궁으로 불러다가 낮은 관직을 주어서 안착시키려 한 것도 “초안”의 일종이다. 

강도, 화적으로 되거나 봉기를 일으켰다가 관청과 타협하고 벼슬을 하는 일이 하도 많았으므로 《수호지》가 그린 12세기 송(宋)나라 때에는 “요주관 살인방화수초안(要做官 杀人放火受招安,벼슬을 하겠으면 살인 방화한 뒤 초안을 받으라)”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 수법은 20세기 전반기까지 이어졌으니 중화민국에는 토비출신 관리들이 수두룩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몇 해 사이에 수천 년 내려온 토비우환을 말끔히 해소한 뒤에야 그런 편법이 사라졌다. 

 

근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벼슬보다 더 중요한 게 재부인데,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벼슬과 재부를 얻으려면 쉬운 방법이 명성 얻기이다. 특히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의 발달로 하여 명성만 얻으면 다른 것들도 저절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방송국, 출판사들이 주겠다는 돈만 해도 어딘가. 하기에 명성을 얻기 위해 갖은 편법들이 동원되는 판이다. 

약 10년 동안 조선(북한)에 불법적으로 드나들거나 합법적으로 들어갔으나 현지법에 어긋나는 행위들을 하다가 잡힌 사람들이 꽤나 된다. 잡히는 사람들마다 국제뉴스들을 만들어냈고 전, 현직 국가수반들이 움직이는 경우도 적잖았다. 불법으로 조선에 들어갔다가 잡힌 2명의 미국 여기자를 클린턴 전 대통령이 찾아간 사건에 대해서는 필자가 글을 몇 편 쓴 적 있다고 기억된다. 

 

조선에 억류되어 화제로 되었던 3명의 한국계 미국인이 5월 9일 자유를 회복하고는 자신들을 집에 데려다 준 미국 정부, 트럼프 대통령, 폼페이오 장관과 미 국민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밝혔고 기독교인답게 신도 들먹였다. 그들이 정말 신의 뜻으로 조선에 들어가서 행동했다고 여기고 풀려난 것도 신의 덕이라고 여기는지는 외인들이 단언할 수 없지만, 일단 명성을 얻은 건 확실하다. 조선 나들이가 명성 얻기 위해서였다고 그 주관적인 동기를 의심하면 좀 억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으나, 중국 역사상 소동으로 황제를 놀래키고 덕을 보던 사례들이 수없이 많음을 잘 아는 필자로서는 그 3명의 친척, 지인들이 흘린 “순수한 동기”를 문자 그대로 믿기 어렵다. 귀국하는 그들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맞이하겠다는 예고부터 “살인방화수초안”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가. 

전에 조선에서 잡혔다가 풀려난 사람들은 책을 출판하여 자신을 미화하고 조선을 악마화하곤 했는데 ‘케네스 배’로 알려진 인물이 전형이다. 단 요즘은 미국이 조선과 잘 지내려는 자세를 거듭 보이는 판이라 “조선 악마화”가 예전 같은 시장을 가질지 예전처럼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허나 그 3명이 얻은 명성을 낭비하지 않을 건 분명하다. 어떻게 움직일지 두고 봐야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나 명성을 쌓아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흔해 빠졌다. 반대로 수걱수걱 일하다가 자의와는 상관없이 이름이 알려지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4월 22일 밤 황해북도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사망한 중국인 댜오웨이밍(刁伟铭)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32명의 중국인 관광객들과 4명의 조선 일꾼이 사망한 대형사고가 일어난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 대사관과 병원을 찾았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지시를 내렸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중국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을 실은 열차를 직접 전송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박봉주 내각총리가 함께 중국 지도자들에게 전보를 보내 사과했다. 그리고 5월 7일 중국 다롄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40여 일만에 다시 만난  시진핑 주석이 사고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중시와 진실한 처리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조선과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전례 없는 반향들을 보였기 때문에 숱한 설들이 생겨나서 퍼졌다. 사망자들 속에 중국의 옛 수령 마오저둥(모택동) 주석의 손자 마오신위(毛新宇모신우) 소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요란스레 떠들어지고 한국 언론들도 열심히 받아쓴 설이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우선 마오 소장의 친구가 부인하고 뒤이어 마오 소장이 공개활동을 하면서 웃음거리로 되었다. 

그밖에 중국의 유명한 군사전문가 다이쉬(戴旭대욱)이 황해북도에서 죽었나는 소문도 났으나 강경파의 대표인 다이쉬가 4월 말 특강하는 장면이 알려져 역시 낭설로 밝혀졌다. 

다이쉬와 성이 같은 유명 좌파 다이 아무개가 죽었다는 설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는데 그 정도 명인이면 추모활동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었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역시 낭설로 짐작된다. 

 

한국 언론들은 해외 중문매체들의 주장들을 부지런히 옮기면서 명사들의 죽음을 추측했고 사망자들의 신분(예컨대 “유명좌파학자”)을 전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확실히 사망한 댜오웨이밍마저도 그 신분을 좌익 학자로 정의하면서 좌익 사이트 우유즈샹(乌有之乡)의 편집 혹은 편집장이라고 전했으나 틀렸다. 댜오웨이밍이 우유즈샹과 인연이 있는 건 맞으나 학자도 편집도 아니고 편집장은 더구나 아니었으니까. 

우유즈샹은 필자도 꽤나 익숙한 좌익사이트로서 필자가 알기로는 2010년 전에는 조선과 줄을 달지 못했다. 그 후 해외 “붉은 여행(红色旅游, 공산혁명관련 관광)”선로들이 개발되면서 우유즈샹을 비롯한 좌익 사이트들에 조선, 러시아, 쿠바, 프랑스, 독일 등 나라들을 목적지로 하는 관광예고가 실렸고 몇 달 지나면 방문기들이 오르곤 했다. 이제 와서 알게 되었지만 그 일들을 댜오웨이밍이 해냈던 것이다. 

 

▲ 추모모임장소에 걸린 댜오웨이밍 초상     © 자주시보,중국시민

 

댜오웨이밍과 잘 아는 사람들의 추억에 의하면 1967년생인 그는 상하이(상해) 모 구의 세무국에서 일하다가 사직하고 선전(심천)에 가서 회사에서 일하다가 눈에 거슬리는 현상이 많아 물러나왔으며, 상하이에 돌아가서는 소형 공사들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심리적으로 고통이 심했다 한다. 그러다가 인터넷을 통해 좌파들과 마음이 통했고 우유즈샹이 조직한 활동들에 몇 번 참가한 뒤 2011년부터 중국 국내의 붉은 여행에 참여했고 2012년부터 조선을 드나들었으며, 2015년에 “싱훠뤼유(星火旅游성화여유, 성화는 한 점의 불꽃(星火)이 넓은 들판의 불길로 번진다는 마오저둥의 명언에서 따온 이름이고, 여유旅游는 여행, 관광이란 뜻이다)” 관광회사를 꾸리고 경영했는바, 글재주는 별로 없었고 봉사성격의 일을 많이 했는데 늘 웃는 모습을 보였다 한다. 우유즈샹에서 일하고 관광을 조직하면서 여러 모로 고달펐으나 정신적으로는 유쾌했다는 것이다. 

그는 붉은 여행을 여러 해 조직했으나 돈은 얼마 벌지 못했고 80고령의 부모와 2016년에 결혼한 아내 그리고 2017년에 태어나 이제 겨우 여덟 달 된 아들을 남겼기에 그의 동지들은 기부금을 모아 댜오웨이밍의 아내에게 전하기도 했다. 

댜오웨이밍의 마지막 활동에서 다녀온 상감령은 1952년 가을 중국인민지원군이 “유엔군”의 금화공세를 이겨낸 유명한 전적지이고 “상감령정신”이라는 말을 낳았으니 중국군대의 정신적 역량이다. 상감령 일대를 조선에서는 오성산이라고 부르는바 전쟁 때문만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 조선이 가장 어려울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찾아가서 더욱 유명해진 고장으로서 선군혁명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오성산- 상감령은 당연히 군사분계선 일대에 위치했고 따라서 관광이 허용되지 않은 전연지대였다가 처음 허가가 나왔는데, 첫 팀을 거느리고 갔던 댜오웨이밍과 그 일행이 돌아오는 길에서 불행히도 사고를 당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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