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6. 25전쟁의 세균전과 김일성 최고사령관의 갱도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5/12 [20: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6. 25전쟁은 설들이 유달리 많은 전쟁인데, 그중에서도 유엔군이 벌린 세균전은 주장이 심하게 엇갈린다. 중국과 조선(북한)은 비인간적인 세균전의 존재를 강조하는 반면, 미국은 지금까지도 승인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세균전을 공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 산물로 치부한다. 전쟁사를 제법 진지하게 다룬 저서들마저 세균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판이다. 

당시 중국 동북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계절에 맞지 않는 벌레, 지역에 없던 벌레 등을 발견하고 잡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건만, 그런 집단기억도 천사같은 미국이 어찌 세균전을 벌리겠느냐고 단정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몰라서인지 아니면 전문가들은 알면서도 거들지 않는지 중국과 조선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자들이 내놓은 세균전 보고서가 있다. 1952년 유럽과 브라질의 과학자들이 중국 동북과 조선을 고찰한 다음 쓴 《조선과 중국에서의 세균전 사실 조사 국제위원회 보고서(调查在朝鲜和中国的细菌战事实国际委员会报告书)》이다. 

 

”조선과 중국에서의 세균전 사실 조사 국제과학위원회(调查在朝鲜和中国的细菌战事实国际科学委员会)“는 스웨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브라질, 소련의 7명 과학자로 이뤄졌다. 위원들은 중국의 초청으로 1952년 6월 22일에 베이징(북경)에 도착하여 7월 10일에 베이징을 떠나 동북과 조선에 가서 현지조사를 진행하고 중국 백성, 조선 백성, 미군 조종사, 미군 포로, 중국인민지원군 등과 대화했으며 8월 10일에 베이징으로 돌아와 거듭 토론한 끝에 부록까지 합쳐서 한자로 45만 자나 되는 두터운 보고를 작성했다. 프랑스,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조선어, 독일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등 8종 언어판본을 만들고 프랑스어본을 정본으로 삼은 보고서는 조사과정을 상세히 서술한 다음 이런 결론을 내렸다. 

 

“대량의 사실들이 위원들의 앞에 펼쳐졌고 그중의 일부 사실들은 시작과 끝이 연관되고 고도의 설득력을 가져 예증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하기에 위원회는 이런 사실들의 연구에 특별히 역량을 집중했다. 

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조선 및 중국 동북의 인민은 확실히 이미 세균무기의 공격목표로 되었고, 미국군대는 수많은 부종한 방법으로 이런 세균무기를 사용했다는 것, 그중의 일부 방법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사용한 세균전방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는 논리적을 절차를 거쳐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각국 인민의 일치한 질책을 받는 인간성이 사라진 수단이 사용된 것은 위왼회 이원들이 과거에 쉬이 믿기 어려운 바였으나 지금 본 위원회는 사실 앞에서 반드시 이런 결론을 내려야 한다.(有大批事实摆在委员面前,其中有一些事实,首尾连贯、富有高度说明性,足以例证、所以,委员会特别集中力量来研究这些事实。

委员会已得出下面的结论:朝鲜及中国东北的人民,确已成为细菌武器的攻击目标;美国军队以许多不同的方法使用了这些细菌武器。其中有一些方法,看起来是把日军在第二次世界大战期间进行细菌战所使用的方法加以发展而成的。

委员会是经过逻辑的步骤而后达到这些结论的。这种遭各国人民一致谴责的灭绝人性的手段,竟见诸使用,此为本委员会的委员们过去所不易置信,现在本委员会迫于事实,必须下这些结论。)” 

 

여기서 미군의 세균전 수법을 일본군의 세균전 수법과 결부시킨 건 소련 위원 주코브 베레스니코브 교수가 세균학자이자 소련 의학과학원 교수로서 1940년대 후반 극동에서 진행된 일본 세균전 전범 심문의 수석 의학전문가로 활동했기에 권위성을 띈다. 

뒷날 공개되었다시피 미국이 일본군 731부대의 부대장을 비호하고 731부대의 실험결과들을 차지했는데 수많은 생체실험결과들을 그저 금고에 넣어만 두었겠는가? 엄연한 사실들이 많은데도 일본과 한국에는 6. 25전쟁 중의 세균전 하면 고개부터 젓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참으로 황당하다. 

위원회에서 특별히 활약하고 영국의 생물화학자 조지브 니덤(1900~ 1995)이었다. 바로 뒷날 과학기술사 편찬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린 그 사람이다. 중국어와 영어를 정통한 그는 중국인, 미국인 조사에서 남다른 역할을 했고 늘 영문타자기로 조사결과를 타이핑했으며 그런 자료는 최종 보고서에 많이 들어갔다. 

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놓은 다음 모든 성원들이 사인하느냐 아니면 일부만 사인하느냐는 결론의 권위성에 큰 차이를 만든다. 조선과 중국 동북에서의 세균전 사실 조사 국제과학위원회는 1952년 8월 31일 베이징에서 조사보고서 사인의식과 기자회견을 진행하면서 모든 위원들이 사인했다. 

조사참여와 보고서 사인 때문에 위원들은 불이익을 받았는데, 조지프 니덤은 몇 해 동안 미국 비자를 받지 못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조사를 뉘우치지 않았고 결론도 뒤엎지 않았으니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당년에 과학자들을 초청했고 조사사업에 관여했던 물리학자 챈산챵(钱三强전삼강, 1913~ 1992)를 만나 회포를 나누곤 했다. 

챈산챵은 프랑스 유학시절 큐리부인의 딸과 사위인 쥴리오- 큐리 부부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고 1950년대 초반에는 국제 과학자 조직의 지도자로 있던 옛 스승 쟝 프리드리크 쥴리오- 큐리(1900~ 1958)를 통해 유럽과 브라질의 과학자들을 초청했다.

 

▲ 중국의 과학자 챈싼챵     © 자주시보,중국시민

 

1952년 당시 국제과학위원회를 위해 중국은 접대위원회를 조직하였는바, 행정일꾼들 외에 박사, 교수 등 전문가들도 망라되었다. 중국과 조선 측은 조사인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적잖은 조치들을 취했으나 외출조사할 때에는 보안부대를 파견하여 호위했고 군의가 따라다녔다. 또한 평양에 가 있을 때에는 조사단 전체 성원을 김일성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 갱도에 거주시켜 심리적 안전감을 증강했다. 그렇게 했어도 조사단은 무시로 미군 비행기의 돌연습격을 받았고 갱도에서도 위험과 절연되지는 못했다. 중국 곤충학자 주훙푸(朱弘复주홍복, 1910~ 2002)는 중국과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던 사람으로서 조선에서 간발사이로 죽음을 면했다.  

 

▲ 중국의 곤충학자 주훙푸     © 자주시보,중국시민

 

引自 1993年第3期 转引自葛能全《钱三强》215,

 

중국과학원이 연혁사 편찬을 위해 자료들을 모은 《원사 자료와 연구(院史资料与研究)》 1993년 3호에는 《주훙푸 교수가 이야기한 반세균전 참가 경력(朱弘复教授谈参加反细菌战斗争)》이 실렸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 우리는 김일성 장군의 방공굴에 거주했다. 아주 튼튼했으나 지하 배수가 되지 않아 변소가 없었다. 어느 날 밤 나와 팡강(方纲방강, 세균학자)가 나왔는데 그가 문밖의 조선 병사에게 비행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샤오샤오디(小小的, 있다는 뜻이다) . 우리는 부득이 중도에 되돌아섰다. 바로 이때 변소가 미군 비행기에 작살났다. 거리로 보면 만약 우리가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위험에 부딪쳤을 것이다. 그날 밤 모두들 다시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到平壤以后,我们住在金日成将军的防空洞里,很坚实,但是地下排水不行,没有厕所。有一天晚上,我和方纲(细菌学家)出来,他问门外的朝鲜士兵,有没有飞机,答说”小小的“(意思是有),我们只好半途退回,正在这时候,厕所被美军飞机炸掉,从距离上看,如若我们不退回,就要遇上危险。那天晚上,大家都再也不敢出去了。)” 

 

▲ 챈산챵 전기에 실린 주훙푸의 회억 일부     © 자주시보,중국시민

 

“샤오샤오디(小小的”는 워낙 “아주 작다”는 뜻인데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은 “적다”는 말인 “사오(少)”를 모르기에 “샤오샤오디”로 적다는 뜻도 표현한다. 즉 그 보초병은 하늘에 미군 비행기가 조금 있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우연찮게도 그때 미군 비행기가 갱도 밖의 변소를 파괴하는 바람에 국제과학위원회와 중국의 접대위원회 사람들이 밤에 외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 조선의 전쟁사 책자     © 자주시보,중국시민

 

▲ 조선의 책자가 언급한 세균전     © 자주시보,중국시민

 

조선에서는 세균전과 관련하여 1952년 3월 31일에 나왔다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발표한 조선에서의 미국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곧잘 인용하는 반면에 1952년 8월에 나온 국제과학위원회의 보고서는 별로 거들지 않는 모양으로 필자는 조선의 서적들에서 보지 못했다.

 

주훙푸 교수의 경력을 보면서 필자는 지하작전실에서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잠깐 거주했던 사람들이 고작 한 번 죽음과 스쳐지나면서 온밤 긴장했고 수십 년 뒤에도 큰 사건으로 기록했는데, 거기에서 달과 해를 넘긴 조선사람들은 김일성 최고사령관 보호를 전담했던 이을설 차수를 포한하여 변소 문제를 전혀 거들지 않았거니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보냈노라는 경력담도 별로 하지 않았다. 거든다면 고작 미군이 던진 폭탄이 김일성 최고사령관과 멀지 않은 곳에 떨어졌는데 터지지 않았다는 등 신기한 색채를 띈 이야기이다. 조선사람들의 신경이 특별히 든든해서일까? 그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단 정전 후에 조선이 전국 요새화를 실현하면서는 지하배수 문제를 풀어 갱도 안에 변소들을 만들었으리라는 건 틀림없다고 보인다.

 

전국 요새화로 “반타격”, “2차 타격” 능력을 갖추었기에 조선이 미국 및 그 추종세력들과의 대결과 대화에서 배짱이 든든했으리라는 건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해 보이던 조미 정상회담이 수십 일 뒤로 다가온 시점에서 김일성 최고사령관이 썼던 갱도를 돌이켜보는 게 결코 무의미한 노릇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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