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 조국분단] 2. 재일민단과 조선총련
박명훈
기사입력: 2018/06/17 [12:1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재일한청, 학생협 대표들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 방문했다. 2월 10일 강릉에서 열린 민족화합한마당에서 '우리는 하나'를 함께 낭독한 모습.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재일대한민국민단(재일민단)과 재일본조선인연합회(조선총련)는 자이니치사회를 뒷받침하는 두개의 기둥이다. 해방 이후 조국의 분단을 마주한 두 단체는 각각 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 ‘냉전’의 격화로 자본주의-사회주의 진영 간 신경전이 험악했던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전두환 정권 시기, 적대적 대북정책으로 일관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마다 곳곳에서 심각한 대립이 분출했다.

 

이처럼 조국분단의 여파로 찢어진 자이니치사회. 그러나 자이니치들은 함께 손을 맞잡는 연대의 꽃도 활짝 피웠다. 일본정부의 부당한 억압에 맞설 때,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자는 목소리가 움틀 때에는 손을 맞잡았다. 실제로 오늘날 개별 자이니치들은 재일민단계이든 조선총련계이든 또는 한국국적이든, 조선적이든 개의치 않는다. 특히 ‘조선학교(우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느 한쪽 편을 가르지 않고 우정을 쌓으면서 왁자지껄한 학창시절을 공유하고 있다.

 

재일민단과 조선총련의 갈등의 역사가 아닌, 두 단체의 경계를 넘나든 자이니치들을 발굴해 생생한 목소리를 여러분께 전달해 드리고 싶다. 다만 그를 위해서는 자이니치가 살아온 시대의 굴곡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2편에서는 먼저 해방 이전의 동포사회를 디딤돌 삼아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해방 이전 ‘주권 쟁취’에 나선 동포사회

 

해방 직후의 동포사회를 단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혼란기를 틈타 사재기와 암시장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누린 극소수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일제가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 1945년 9월까지 홋카이도(北海道)의 외떨어진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들도 있었다. 일본 곳곳의 항구가 ‘귀향’을 희망하는 동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일본에 남기로 결정한 이들도 40만 명이 넘었다. 이렇듯 여러 모습의 동포사회를 하나로 못 박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에 남기로 한 동포들, 즉 자이니치들은 서로 자이니치를 대표하는 조직임을 자임하는 재일민단과 조선총련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 이 배경을 알려면 해방 이전의 재일조선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반드시 들여다봐야 한다. 두 단체의 설립에 앞서 해방 이전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회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재일조선인에게 일본은 애증이 교차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일단 식민지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이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생존을 위한 방도를 찾아나서야 했다. 1910년의 경술국치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꺼려하는 공사판 막노동, 하천 개수 공사, 폐품 회수 및 판매, 방적공장 노동 등 잡역을 맡아 도시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고작 잡역을 하는데 무슨 영향력이 있었겠냐는 반문이 나올 법 하다. ‘집단 재일조선인’의 조직력이 공고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1918년에는 일본인 관리자를 향해 ‘일본인과 차별 없는 동일한 임금을 달라’며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1919년에는 3.1운동의 단초가 된,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결의한 2.8독립선언을 적극 지원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1923년에 관동대지진의 혼란 와중에 일본인이 조선인 6000명 이상을 학살하는 관동대학살이 발생하자 유학생들과 함께 항의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관동대학살은 일제가 고의적으로 조장한 사건이었다. 일제의 내무성(한국의 행정안전부)은 대지진의 여파로 ‘폭동’ 등 사회혼란이 일파만파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퍼뜨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경찰이 그 ‘날조된 사실’을 공표하면서 토쿄(東京), 사이타마(埼玉), 치바(千葉) 등 수도권에서 대학살이 자행됐다. 각 마을의 3.1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재향군인’ 출신 일본인들이 스스로 안전을 지킨다는 구실로 자경단(自警団)을 결성해 눈에 띄는 대로 재일조선인을 끔찍하게 살해한 것이다.

 

여기에는 재일조선인이 잡역을 떠맡으면서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어졌다는 일본인들의 인식도 한몫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 무기를 팔아 경제력을 성장시켰던 일제의 거품이 꺼져 사회가 침체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의 권력집단은 일본민중들의 불만을 고스란히 떠넘길 대체재로써 재일조선인을 지목했고, 일본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천인공노할 혐오의 감정을 마구 분출시켰던 것이다.

 

관동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외부의 목소리가 커지자 내무성은 또다시 재일조선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내무성과 그에 동조한 사법부는 황태자를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단체 불령사(不逞社: 박열은 일제가 조선인을 불령선인(불만을 품고 제 멋대로 활동하는 조선인이라는 뜻)이라고 업신여기는 상황을 비꼬아서 단체이름을 불령사로 지었다)를 주도하던 조선인 박열을 체포해 법정에 세웠다.

 

박열은 영화 <박열> 개봉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는 1919년에 18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조선인이었으며 인력거노동자였다. 동시에 ‘반역(反逆)’이란 구호를 거리낌없이 담은 현수막을 거주지 창문에 당당하게 내건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박열은 법정에서 관동대학살의 실체를 외부에 알리는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사람의 모습으로 이승에 나타난 살아있는 신(現人神: 아라히토가미)으로 추앙받던 천황을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신랄한 비판을 전개해 조선일보와 일본신문 1면에 실려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박열은 일제 패망의 해인 1945년 10월 27일이 되어서야 22년 2개월의 장기간 수감에서 풀려났고 1946년에 설립 된 재일조선거류민단의 초대 의장을 맡는다.

 

이처럼 재일조선인의 삶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식민지인의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인이 꺼려하는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일상,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노동운동·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재일조선인의 주권 쟁취 운동이 좌파적 색채가 뚜렷했던 배경에는 이런 뒷이야기가 숨어있다.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

 

1920년대에 접어들어 일제는 자본주의의 발흥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이룬 듯 했지만, 양극화가 고착화되어 갔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두드러졌다. 일본의 하층노동을 떠받치고 있었던 재일조선인들은 1922년에는 토쿄와 오사카(大阪)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노동동맹회를 결성했다. 아울러 일본의 노동운동·사회운동 메이데이(노동절)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흐름은 ‘민족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일본공산당과 맞닿았다. 일제가 이른바 불령선인을 ‘눈엣가시’로 여긴 가운데 재일조선인의 움직임이 감시받던 상황.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은 식민지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일본공산당과 힘을 합쳐 더욱 강한 요구를 제기하는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은 1925년 2월 토쿄를 비롯한 여러 대도시에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조선노총)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30년대에 일본공산당계 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로 통합됐다. 이로써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의 연대는 물꼬를 텄다. 비록 재일조선인 조직이 소비에트연방(소련) 코민테른의 공인을 받은 일본공산당 밑으로 들어가는 형태를 취했지만.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은 그 안에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제기할 수 있었다.

 

이후 재일조선인은 일본공산당과 일제에 대한 저항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일제의 탄압이 나날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은 서로에게 든든한 ‘조력자’였다. 재일조선인은 일본공산당 지도부의 구성원으로서 조선민족의 여론을 운동에 반영할 수 있었으며, 일본공산당은 재일조선인의 든든한 조직력을 활용할 수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일제 타도를 목표로 삼는 조선-일본 민중 간 물밑연대가 당대에 버젓이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1년에는 일제가 발동한 치안유지법에 의해 일본공산당이 해체됐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된 재일조선인의 비율은 전체 구속자의 자그마치 30%에 이르렀다. 당시 재일조선인의 인구가 일본 총 인구의 3%에 불과했단 점을 떠올리면 엄청난 수치임을 알 수 있다.

 

훗날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서자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당대에는 사회활동을 하는 재일조선인 대다수가 일본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한반도에 두 개의 조국이 생기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냉전의 시작, 재일민단과 조선총련의 탄생

 

일제가 패망하자 자이니치와 일본공산당 사이에는 큰 균열이 생긴다. 자이니치와 일본공산당이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불순한 세력이라고 판단한 GHQ(General Head Quarters: 연합국 최고사령부, 1945년 10월 2일부터 1952년 4월 28일까지 패전국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국의 관리기구)는 일본공산당에 대한 ‘공직추방령’을 단행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차단했다. 당시는 GHQ가 이른바 ‘레드 퍼지(Red Purge, 공산주의자 추방)’를 밀어붙이며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억눌렀던 시절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사회주의 간 진영다툼의 여파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동시에 강타하면서 자이니치는 그 파장을 직격으로 받았다. 자이니치사회는 각각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갈렸다.
해방 직후에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있던 자이니치단체는 5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둘로 나뉜다. 훗날 조선총련으로 거듭나게 되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내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반공주의를 내걸고 우익 성향 민족주의자와 친일파를 포함해 새롭게 조직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전신)이 그것이다.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은 1946년 10월 3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과 신조선건국동맹(건동)이 합쳐지면서 결성됐고 박열을 초대 단장으로 맞았다. 이후 1948년 8월 들어선 한국의 이승만 정권이 재일동포의 공인단체로 인정한 뒤에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1994년부터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개칭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단은 강령에 ‘대한민국의 국시 준수’와 ‘재류동포의 권익 옹호’라는 내용을 담아 한국정부와의 연계를 강조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 전선에 재일학도의용단을 파견해 한국정부를 지원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조선총련이 1959년부터 북한 이주 희망자를 북한으로 보내는 ‘귀국사업(北送: 북송)’을 추진하자 반대집회를 벌이는 등 한국정부와 동조하는 활동을 이어간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는 6.25전쟁 뒤인 1955년 설립됐다.

 

일제 패망 이후 북한과 연계해 자이니치의 주권향상을 도모하려 한 재일조선민주전선(민전, 1949년 GHQ가 조련을 폭력단체라며 해산한 이후 1951년 새롭게 출범한 조련의 계승단체)과 일본사회의 변혁에 집중하려 한 일본공산당의 목표는 엇갈렸다. 1955년에는 일본공산당의 당적을 가지고 있던 민전 회원 3000명이 일본공산당을 대거 탈당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민전 내부에서 북한을 지지한 한덕수가 부상한 점이 꼽힌다. 아울러 북한의 남일 외무장관은 김일성 주석과의 논의를 거쳐 “(재일동포를) 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 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는 조선총련이 북한의 지원을 받는 조직임을 분명히 한 조치였다.

 

이렇게 장장 25년에 걸친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의 연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민전에서 명칭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한 조선총련은 소속 자이니치가 ‘주권국가 북한의 공민’임을 기치로 내세웠다. 조선총련은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연계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조선학교에 재정을 지원하는 한편 북한으로 이주하는 귀국사업 등을 추진하게 된다.

 

재일민단과 조선총련의 탄생과정을 들여다보면 자이니치사회의 복잡다단함이 그대로 와 닿는다. 한반도의 분단을 정확히 반영해 일본에서마저도 조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단체가 존재하는 현실. 조국의 분단은 일본정부의 적나라한 차별에 더해 자이니치의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자이니치들의 마음속에서는 꽃말로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꽃’이 피어나고 지길 되풀이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한국인인가, 북한인인가, 조선인인가, 일본인인가)’라는 불안과 ‘얼른 조국통일이 되어 일본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라는 소망이 교차하고 있다.

 

 

*3. 자이니치의 내적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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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06/17 [16:06]
왜놈들...잊지 말라,,, 반드시 계산하리라, 누가,, 주체조선이...괴뢰 이른바 데한민국이라는 머저리들이 아니라...우리가..주체조산이..빈드시,,,빈드시, 빈드시.. 수정 삭제
가만 두어라 18/06/18 [11:49]
지금처럼 10년에 한번 꼴로 대지진만 발생해도 40년후에 일본은 소멸된다. 놔 두어라 후쿠시마 지역에 큰 지진 한번 더 때리는 날, 일본은 인간이 거주하지 못하는 지역으로 변모한다. 일본이 제일 걱정하는 시나리오다. 지금은 핵연료 장전된 현재 상태로 그대로 있다. 2050년이 되어야 핵연료 빼내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일본이라는 나라, 정말 답이없다. 2050년까지 후쿠시마에 큰 지진이 오지말란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늘에 기도도 하지않는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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