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반미스케치- 고양시 금정굴 학살터 답사기
장재희
기사입력: 2019/10/30 [16:23]  최종편집: ⓒ 자주시보

 

107일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걸음을 서둘러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금정굴 답사를 다녀왔다. 차를 타고 서울 외곽에서부터 약 40분 정도 가니 작은 뒷산 같은 곳, 그곳은 바로 약 70년 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금정굴 학살터였다

 

도착하니 선생님이 우리를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에 홀로 묵묵히 금정굴 학살을 알리기 위해 일하고 계신 선생님의 얼굴에는 수많은 일이 스쳐지나간 듯하면서도 웃음 속에서는 낙관이 느껴졌다.

 

▲ 열띤 해설중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연구소 소장. 묵묵히 금정굴 학살을 알리기 위해 일하고 계신 선생님의 얼굴에는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 듯하면서도 낙관이 느껴졌다.     © 장재희

  

금정굴 사건은 인민군이 고양에서 후퇴한 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부역자였다는 이유로 굴에 끌려가 학살을 당했던 사건으로 사건 이후 학살의 사실조차 숨겨야 했던 유가족들은 4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유해발굴을 시작하고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유가족들은 금정굴 학살 사건의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으니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당시 전시 계엄 하에서 경인지구 계엄사령부가 모든 상황을 통제·감독하고 있었다)과 금정굴에 화해와 상생을 위한 평화공원을 설립하고, 영구적인 유해안치소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고양시도 설립을 권고하는 결정을 하였지만 현재까지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현재 유족과 고양지역 시민사회는 힘을 모아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을 (http://www.gjpeace.or.kr/) 설립해 희생자 위령 사업과 함께 다양한 인권·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사건의 책임자들은 진상규명을 방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고 있다고 한다.

그 작은 뒷산에 경찰들은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도 모자라 산어귀에 작은 초소까지 만들어 놓고 누구도 찾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게다가 학살의 책임과 관련된 문건들을 영구 봉인해 사실상 진상규명이 어렵게 은폐하고 있다. 

 

그런 오랜 침묵 속 방치된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학살터라고 하기에는 남루한 천막과 컨테이너 박스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을 오가는 등산객만이 잠시 기웃거리며 초라한 금정굴 안을 살펴볼 정도이다.

 

▲ 천막으로 가려져 있는 금정굴 학살터.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관리가 매우 소홀한 상태이다.     © 장재희

 

착잡해진 마음에 더해 선생님의 말씀이 시작되고 나는 더 복잡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가족분들은 대부분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다라는 선생님의 말에서 연좌제 속에서 살아야 했던 두려움이 그분들을 자유한국당의 지지자들로 몰아갔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광화문 광장에 나와 광기 어린 눈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태극기부대가 떠올랐다. 문득 분노를 넘어선 안타까움과 슬픔이 교차했다.

 

유가족분들이 자유한국당 지지자가 되셨다고요?”

 

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이리저리 시류에 따라 생존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었죠. 특별할 만한 사상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생존을 위해

 

학살의 피해자들은 끊임없는 사회적 격리를 당해왔다. 빨갱이라는 오명으로 죽임을 당한 것도 모자라 가족들은 연좌제의 그늘 속에 침묵하고 또 침묵하며 살아왔다.

 

▲ 금정굴 학살의 피해자분들의 사진.     © 장재희

 

▲ 금정굴 내부. 안쪽도 역시 열악하게 보존된 상태다. 바닥에는 나무판자로 굴의 입구를 봉해 내부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있다. 초록색 펜스 안을 들여다보면 굴 내부가 보인다.     © 장재희

  

분단은 광기를 낳고, 폭력을 낳는구나. 또 혐오와 불신, 극단을 낳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에 나와 죽일 것처럼 우리를 쳐다보던 이들의 눈빛 속에 서린 분노. 그리고 그들의 화살은 세월호 유가족을 향하고 있었다. 어딘가 꼭 닮은 듯한 금정굴 학살과 세월호 참사. 억눌린 세월을 토해내듯 누군가를 마구잡이로 탓하고 싶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분노에 상처받는 또 다른 피해자들. 결국 분단은 이렇게 끝없는 원한과 폭력의 굴레라는 고리 속에 우리 삶을 내몰고 있었다.

 

광장에서 우리가 본 그것은 결국 분단된 이 땅의 해묵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멀게만 느껴지던 70년 전 그날, 수백의 무고한 생명을 매장한 학살의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정굴 학살의 책임자는 여전히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 사건의 책임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는 분단에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단 한 번도 세상에 제대로 드러난 적조차 없다.

 

분단이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어쩌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을 이 시대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부정의 한 책임자들을 청산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미쳤다.

 

분단이 아닌 평화통일, 적폐가 아닌 정의.

 

그것이 우리가 금정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자 진상을 규명하는 옳은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금정굴을 덮어 싼 남루한 천막을 거두고 단단하고 커다란 기억과 참회의 공간을 세우기로 마음 굳게 약속했다.

 

여전히 계속되는 이 해묵은 원한과 한의 고리를 끊어내자는 약속을 하며 우리는 좁고 평온한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 *1950년 9월 7일 미 합동참모본부와 맥아더는 반격을 통해 인민군 전력을 분쇄하는 데 동의했으며, 그 후의 군사작전은 38선 남북 양쪽의 도시와 깊은 산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미군보다는 한국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것이 적합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투방식은 한국전쟁 발발 전의 군경토벌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결국 내전의 특성을 확대해 부역 혐의자 등 민간인 피해가 확대될 것이 분명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아직 실증적인 자료가 많이 공개되지 않은 현실이 있으나 학살의 책임을 주한미군에게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함께 간 이들은 민중 예술인들     © 장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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