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읽기] 5.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

이인선 통신원 | 기사입력 2020/11/07 [10:50]

[러시아 읽기] 5.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

이인선 통신원 | 입력 : 2020/11/07 [10:50]

러시아 벌판, 광활한 대륙, 우리는 러시아를 부를 때 ‘대륙’이나 ‘벌판’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는다. 러시아의 총면적은 1,707만 5,400km², 남북의 길이가 2,500~4,000km이고 동서가 9,000km에 달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눈 빈대떡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 조각이 러시아가 차지하는 몫이다. 그래서 러시아 땅으로만 지구를 거의 한 바퀴를 돌고 러시아를 횡단하면 열 한 개의 시간대를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라고 하면 또 어떠한 것들이 생각날까? 

 

모스크바, 마트료쉬카, 소련, 톨스토이, 볼쇼이 발레, 시베리아 벌판 등 갖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린 아직 러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 러시아에 대해 얘기를 하면 소련을 기억하시는 분들로부터 “러시아? 거기 소련 아니야? 빨갱이 나라.”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2000년대 들어와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시베리아 가스를 끌어오는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러시아가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이 사실이다. 이에 러시아라는 숲을 다 보여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러시아를 정확히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 8편에 걸쳐 [러시아 읽기]를 연재한다.


 

[러시아 읽기] 5.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하 소련)이 1991년 해체되었다. 소련의 지도자는 레닌-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로 변해왔다. 우리가 들어본 이름은 레닌, 스탈린, 흐루쇼프, 고르바초프 정도일 것이다. 각각의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들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사람이 다음과 같이 떠올릴지도 모른다. 소련을 열어낸 레닌, 폭압 정치와 독재로 유명한 스탈린,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인 흐루쇼프,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소련을 끝마친 고르바초프.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특히 스탈린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스탈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단련되는 강철,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1878년생으로 본명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강철’이라는 뜻으로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부터 필명으로 쓰던 것이었다.

 

스탈린은 1899년 5월 신학교에서 제적되고 노동운동에 몰두하다가 1902년 4월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캅카스연맹 위원으로 선출되어 이르쿠츠크 지방의 유형지 발라간스크로 추방되기도 했다. 스탈린은 ‘이스크라(레닌, 마르토프, 플레하노프 등의 주도로 1900년 12월부터 서유럽에서 발행된 지하신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를 통해 레닌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닌에게서 희망을 발견한 스탈린은 볼셰비키가 되었으며 직업혁명가로서의 삶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다. 1904년 초 유형지를 탈출해 티플리스로 잠입한 그는 자캅카지예에서 레닌의 주장을 옹호하고 실천하면서 ‘레닌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05년 첫 번째 러시아 혁명 당시 트로츠키와 동갑인 스탈린은 변방 그루지야에서 글을 쓰며 토론하고 때론 연설하면서 레닌의 노선을 대변했다. 이런 활동은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1905년 12월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볼셰비키 모임에 참석한 스탈린은 레닌과 처음 대면했다.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다시 만났다. 당 기관지 ‘프라우다’를 창간한 스탈린은 이후에도 레닌과 만남을 이어가며 레닌이 창당한 볼셰비키당(러시아볼셰비키사회민주노동당->러시아볼셰비키공산당->전연방볼셰비키공산당->소련공산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스탈린은 레닌과 함께 ‘사이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부르주아적 본질을 폭로할 수 있는 볼셰비키만의 민족이론을 마련하기로 논의했다. 이를 토대로 민족자결권 및 각 민족의 지역자치권 보장을 근간으로 하는 ‘맑시즘과 민족문제’를 썼다. 이 글의 기본 방향은 곧 민족문제에 관한 볼셰비키당의 강령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스탈린은 볼셰비키 정부, 즉 인민위원평의회에서 민족문제인민위원부의 수장이 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의 정치적 위상을 평가하면 안 된다. 당시 당 중앙위원회는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4인에게 모든 긴급 문제의 결정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스베르들로프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서의 업무로 인해 긴급회의에서 멀어져 갔다. 따라서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3명이 당 최고지도부를 구성했다고 본다. 1918년 봄 레닌의 지시로 스탈린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헌법을 제정하는 일에 착수했다. 민족문제인민위원으로서 연방제적 국가체계를 조직해가던 그에게 적합한 임무였다. 1918년 7월 공포된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헌법과 1924년 1월 공포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헌법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1918년 6월부터 약 2년 동안 그의 활동은 볼셰비키 정권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들 및 내전 상황에서 발생하는 최우선 과제 해결에 집중했다.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곡창지대인 북캅카스의 관문 차리친(이후 스탈린그라드, 현재 볼고그라드)으로 급파되었고, 내전이 시작되면서 군사적 위기 상황 해결을 위해 뱌트카, 페트로그라드, 스몰렌스크, 쿠르스크, 하리코프 등으로 급파되었다. 스탈린은 독자적으로 군사전략과 전술을 제시, 운용했고 이에 레닌은 스탈린을 “어떤 자리에도 유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인민의 영도자, 스탈린’

 

1922년 봄 레닌은 스탈린을 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책임자, 즉 서기장으로 앉혔다. 서기장은 레닌을 보좌하는 자리로 레닌의 권력을 보다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스탈린은 정치국원이자 조직국의 좌장, 민족문제인민위원, 노농감독인민위원부(감찰기관)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점은 당시 서기장이라는 형식보다 스탈린이라는 내용이 당내 권력 관계에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1922년 5월 레닌이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지고, 약 1년 후 그가 회생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정치국 내의 트로츠키,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네프(신경제정책) 3년 차에 대한 처방을 둘러싼 이견과 대립을 표출했다. 1924년 봄 스탈린은 ‘레닌주의의 기초’를 통해 일국사회주의론을 제시하며 네프를 공고히했다. (네프가 노동자 정권의 유지를 위해 불가피했지만, 이제는 사회주의 부문을 최대한 강화하며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기다려야 한다는 영구혁명론의 주장은 정통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데 스탈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원 없이도 러시아에서 노동자·농민의 제휴를 통해, 즉 네프를 통해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사회주의적 혼란이 높아지긴 했어도 국가재정은 안정되었다.

1925년경 네프는 농촌에서 토지 임대 및 노동력 고용을 허용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반대하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이 스탈린의 노선을 방해하기 위해 트로츠키와 연대했다. 이들은 이른바 연합반대파로 일국사회주의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스탈린의 정책을 반동이라 평가했다. 민중의 뜻과 다른 이러한 반대파의 행보로 사회주의 노선을 흔들고 혼란만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스탈린과 볼셰비키당은 이들을 당에서 제명했다. 제명된 이들은 추방되었는데 트로츠키는 망명한 프랑스, 노르웨이 등에서도 추방되었고 미국에서도 거부당해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1925년 말 스탈린은 공업화를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 확정했다. 공업에 집중적 투자와 함께 비약적인 공업 발전을 도모했다. 반면 농업의 성장세가 둔화하자 그는 1927년 말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를 당의 총노선에 추가했다. 동시에 경제계획의 원리를 강조했는데, 1929년 5월 확정된 인민경제 5개년계획은 계획기간 중 공업 136%, 농업 55%, 국민소득 103%의 증대를 예상했다. 그런데 농업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공업으로 편중된 자본 투자(총투자 자본의 78%)의 결과 경공업 제품의 만성적 상품 기근이 발생했고, 결국 도시와 농촌 간의 상품 교환이 마비되었다. 1928년 초 도시민과 병사의 급양 및 수출을 위한 곡물 조달이 계획에 한참 미달하자 스탈린은 내전 때 시행되었던 무보상적 곡물 징발을 전국에서 감행했다. 특히 공업 발전에 필요한 기계 설비를 수입하기 위한 수출용 곡물이 확보되지 못하면 경제계획이 무너질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1929년 봄 스탈린은 곡물 조달 전선에서 재현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농업집단화 계획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우파의 조직적 방해가 있는 상황에 각종 공장과 건설현장 등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고 추월하자!’는 구호 아래 ‘사회주의적 경쟁을 조직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트랙터 생산을 독려하고 농촌에 기계·트랙터관리창이 설치되는 가운데 1929년 가을부터 곡물 조달은 부농해체 정책과 함께 추진되었다. 농업집단화는 1932년 가을 완료되었고, 이로써 스탈린은 콜호즈(집단농장)라는 ’거대한 곡물공장‘을 확보하는 동시에 노동자와 집단농장원을 기본 축으로 하는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를 완성했다.

 

1929년 10월 이후, 소련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가 대공황의 여파로 휘청거리고 있을 때 공업화의 대역사가 추진되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선진국들보다 50~100년을 뒤처져 있으며 이 간격을 10년 이내에 극복하지 못하면 소련은 그들에 의해 분쇄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은 트랙터 등 대규모 영농에 필요한 농기계들이 부족한 상태였다. 1931~32년은 1920년대 중반 이래 농업 생산이 최대로 감소한 시기였다. 그래도 스탈린은 연차, 계획에 따른 곡물 조달을 명령했고 곡물 수출도 계획대로 감행했다. 비록 1932년 농촌에서는 대규모 기근이 빚어져 우크라이나, 북캅카스 등에서 아사자가 나오며 농업 정책의 실패를 확증하는 듯했지만 1933년 풍작은 소비에트 사회의 분위기를 뒤바꿔놓았다. 도시와 군대로 공급될 식량과 수출 곡물이 계획대로 확보되었고 농촌에서는 기계화된 대규모 영농이 자리 잡았다. 1934년 말에 식량 배급제가 폐지된 것은 공업과 농업 및 상업을 포괄하는 소비에트 경제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스탈린은 공업과 농업의 성공을 통해 ‘인민의 영도자’로 우뚝 섰다. 1934년 초 제17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했고 좌우를 막론하고 옛 반대파 지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스탈린의 지도력에 찬사를 보냈다. 스탈린은 인민 경제의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적 경영 요소들의 도입도 마다하지 않았다. 1935년 가을부터 스타하노프 운동(노동 생산력 증대 운동)을 대대적으로 고취하며 인민들의 사회주의 발전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스탈린은 독재자가 아니다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나치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을 언급하며 이에 대비할 것을 당원들에게 촉구했다. 히틀러는 이미 1925년 출간한 『나의 투쟁』에서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생활공간) 확보를 위한 동방정책, 즉 러시아 정벌의 당위성을 공공연히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된 키로프가 암살되었다. 범인은 트로츠키를 따르던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였다. 스탈린은 당에서 제명된 지노비예프파의 조직적 범죄로 간주하고 소위 ‘12월 1일 자 법’을 제정해 소비에트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이에 1934년 말부터 1937년 초까지 지노비예프파, 트로츠키파, 노동자반대파, 부하린파 등 과거의 반대파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우익 편향주의와 기회주의적 관용을 청산해 누구도 흔들지 못할 소비에트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볼셰비즘으로 무장해 일치단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본적으로 국가의 사회주의성은 당에 의해, 당은 당 간부에 의해, 간부들의 사회주의성은 영도자에 의해 담보되는 구조가 소비에트 사회주의였다.

 

몰로토프는 인민위원평의회 주석이자 외무인민위원이었던 1930년대를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쟁 후 어떤 반대파 집단이 없었는데, 이로 인해 올바르고 훌륭한 정책 방향을 잡는 게 용이해졌소. 그런데 만약 그 사람들 다수가 살아남았더라면 과연 우리가 굳게 서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오. 스탈린이 특히 그 모든 어려운 과업을 짊어졌고, 우리는 그를 올바르게 보좌했소. 스탈린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아주 어려웠을 것이오. 특히 전시에 말이오. 분열했겠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8일 끝났다. 2,600만 이상의 인명과 국가적 부의 약 30%를 상실하는 등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 얻어낸 승리에서의 선봉에는 단연 스탈린이 있었다. 1930년대부터 파시즘과의 전쟁에 대비했고 전방과 후방을 엮어가며 전쟁을 총지휘했던 스탈린이었다.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소련공산당의 군사적 교리는 ‘죽어가는 자본주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마지막 결전의 불가피성을 선전했고 소비에트 사회는 전투적 분위기로 충만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인민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에 참여했던 유럽 국가들보다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고 인민들의 혁명적 열정을 통해 신속히 사회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대다수 소련 인민들은 큰 충격 속에서 영도자를 애도했다. 레닌부터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인민은 거대한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는 기계를 운전하는 ‘작은 바퀴와 나사못’이었다. 다시 말해 인민 없이 소련은 있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인민을 중심으로 소련을 이끌어갔고 이에 인민들도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러시아 레바다센터(Levada Center)는 2019년 3월에 러시아 137개 도시의 18세 이상의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러시안인들의 51%가 스탈린을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았다. 레바다센터는 러시아에서 지난 20년간 스탈린이 가장 인기가 높은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애도하는 사람들  © 이인선 통신원

 

진실에는 거짓이 따르기 마련이다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은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제안했던 것이었다. 단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업화에 관해 입으로만 떠들었던 반면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공업화를 준비하고 조금씩 추진해나갔다. 스탈린이나 레닌은 준비 없이 공업화를 바로 시작하는 것은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업화는 외국 차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독자적 자금과 힘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트로츠키파는 “우리 혁명이 망해도 좋다. 그러나 우린 실패를 딛고 다시금 혁명가가 되리라”라고 말하며 농민을 비롯한 인민들에 대한 고려 없이 가속화된 공업화를 외쳤다. 트로츠키파는 인민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스탈린은 생전에 자신에 대한 칭송을 거부했다. 스탈린은 대조국전쟁 이후 소련영웅 칭호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웅이란 용감성을 직접 발휘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나는 그런 용감성을 발휘하지 않았소.”라고 얘기하며 금성훈장도 받지 않았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노동영웅훈장만 달았고 “레닌주의만 있는 게 아니라 스탈린주의도 있습니다!”라는 말에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레닌 이후 스탈린보다 더 초지일관하고 더 재능 있고 더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고 몰로토프는 “그에게 과오가 있지만, 그보다 더 적게 과오를 범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지도부에 내재했던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때 제기됐던 과제들을 해결한 유일한 인물이 스탈린이었다”라고 말했다. 실례로 스탈린은 특별히 기계를 다뤄본 적도 없고 그것을 연구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기계 관련 보고서들을 정확히 분별했고 주의 깊게 읽고 대조하며 취약점을 찾아내 합당한 지시를 내렸다.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 자체적으로 독일을 능가하는 대포, 포병부대 등을 개발하고 발전시켜내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 사망 후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격하 운동이 벌어졌다. 사실 격하는 어디에나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만약 스탈린이 비난받아 마땅한 지도자였다면 격하 운동이 벌어질 이유가 없다. 흐루쇼프는 스탈린과는 다른 정치를 지향했다. 그는 우파였고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결탁해 부농계급에 의지하며 스탈린의 정책에, 레닌주의 정책까지 반대했다. 이랬던 흐루쇼프가 스탈린 사망 이후 집권했으니 격하시키고자 했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탈린의 범죄들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특히 스탈린이 키로프를 죽였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밑밥을 뿌려 사람들이 그것을 지금까지도 믿게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고 스탈린에게 불리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기근은 있었지만 1933년에 1,2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입증되지 않은 것이었다고 당시 우크라이나, 우랄, 시베리아 등에 곡물을 조달하러 다녔던 몰로토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스탈린이 완수한 일과 전반적인 맥락을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보이는 과오만 들추면서 날밤을 새우고 있다. 격하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스탈린의 과오를 바로잡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오를 이용해 당의 노선을 훼손했다.”

 

스탈린은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높은 노동생산성, 결속력, 정치적 적극성 등 유대 인민에 있는 많은 장점을 이해하고 있었고 유대인 집거지를 유대인 자치주로 명명했다. 유대인은 감옥과 유형지에 많이 있지 않았다. 다만 소련 수립 후 많은 유대인이 반소비에트 세력과 결탁했다.

 

스탈린은 “거짓의 대대가 진실을 지킨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진실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어서 늘 그 주위에 거짓과 날조가 동반된다는 뜻이었다. 

 

스탈린의 말처럼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다음 편은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러시아 읽기] 4. 치솟는 혁명의 불길과 소련의 탄생-> http://www.jajusibo.com/5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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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기사다 2020/11/08 [20:38] 수정 | 삭제
  • 스탈린은 폭군도 독재자도 악마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련뿐 아니라 전세계 인민의 위대한 수령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압도적인 열세속에서도 나치독일을 물리침으로써 사실상 전세계를 구한 사람이다.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의 지도자들도 스탈린을 높게 평가한다. 스탈린을 독재자니 악마니 하는 것은 제국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비방이자 프로파간다 세뇌공작인데, 소련 붕괴후 여기에 넘어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진짜 인간말종 악당들은 트로츠키와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같은 혁명의 배신자들이며 솔제니친같은 제국주의가 던져주는 개밥그릇이나 핥는 광대들이다. 자칭 진보라는 것들조차 스탈린과 북의 지도자들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편견과 악담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이 괴뢰국가의 처참한 현실에서, 간만에 보기드문 등불같은 기사를 발견하여 반가운 마음에 댓글을 단다. 기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 쓰레기언론의사기구라질~ 2020/11/07 [12:03] 수정 | 삭제
  • 스탈린이- 독재자인지아닌지는- 진실을알려주지않는-대한미국쓰레기언론개/자식들의-거짓기사만으로는알수없지..... 한가지분명한건-소련을침공한-독일의히틀러군대를물리치고-독일을패망시킨주역이란건-엄연한진실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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