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나와 내 동료를 다시 간첩으로 만들려고 해”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1/05/24 [16:45]

이정훈 “나와 내 동료를 다시 간첩으로 만들려고 해”

김영란 기자 | 입력 : 2021/05/24 [16:45]

▲ 공안 당국이 이적표현물이라고 주장하는 책.     ©김영란 기자

 

“제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저와 동료들을 다시 간첩으로 만들려는 사건으로 본다. 저를 간첩으로 만들기가 여의치 않자, 국가보안법상 ‘통신회합죄’로 시작한 사건이라고 본다.”

 

지난 14일 국가정보원과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연행되어 구속된 이정훈 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이 편지에서 이처럼 밝혔다. 공개된 편지는 지난 17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쓴 편지이다. 

 

공안 당국은 이 연구위원이 2017년 페루 국적의 고니시라는 사람을 만나 포섭되었으며, 그 후 이메일을 통해 지령을 수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편지에서 차후라도 “이 사건은 통일운동, 평등세상, 사상의 자유를 찾는 길에서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작원, 간첩으로 다가오는 그런 사건”이라며 “아마도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이러한 악순환은 저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체제에서 자주와 평등을 지향하는 모든 분들께 마찬가지라고 본다”라고 짚었다.

 

즉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진보와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누명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편지에서 국가보안법 체제를 넘어서자고 호소했다. 

 

이 연구위원은 “저는 늘 제가 ‘선’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분단체제, 국가보안법 체제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 위에서 늘 고민”한다며 “허나 외세와 분단 기득권 세력이 그어놓은 반쪽의 자유, 반쪽의 조국, 반쪽의 사상 안에서 결코 살 수 없기에, 매일 선을 넘어 새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라고 호소했다. 

 

이 연구위원은 “공포를 넘는 길, 선을 넘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알기에 슬프기도 하지만, 후대들이 살아갈 ‘행복한 평화와 통일, 평등의 새 세상’을 만드는 길이기에 설레고 기쁘기도 하다”라며 “다 함께 감히 ‘선을 넘는 사람들’이 되어 시대의 고난을 함께 넘기자고 말씀드린다”라고 밝혔다. 

 

▲ 4.27시대연구원을 비롯해 종교·시민·통일운동 단체는 지난 18일 ‘공안탄압 저지! 국가보안법 철폐! 4.27시대 연구원 이정훈 연구위원 무죄석방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영란 기자

 

한편, 이 연구위원이 활동했던 4.27시대연구원을 비롯해 종교·시민·통일운동 단체는 지난 18일 ‘공안탄압 저지! 국가보안법 철폐! 4.27시대 연구원 이정훈 연구위원 무죄석방 대책위원회 (약칭 이정훈 대책위)’를 구성했다. 

 

이정훈 대책위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정훈 석방’을 위해 연속으로 기고 글 쓰기, 탄원서 작성 등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오는 6월 10일 오후 7시에‘ 국가보안법 폐지 이정훈 연구위원 석방대회 겸 후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아래는 이 연구위원의 편지 전문이다.

 

---------아래--------------

 

[창밖의 벗들 동지들께]

 

지난 5월 14일 금요일 오전에 갑자기 국정원과 검찰에 긴급체포되어 3일이 지났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전까지 조사를 받고, 저녁에 이 종로 경찰서 유치장으로 돌아옵니다. 지금은 월요일 저녁입니다.

 

이 유치장도 오랜만입니다. 1984년 2.12 총선 때 제가 ‘전두환 독재 타도, 민정당 반대’ 시위를 하다 29일간 구류를 살던 곳이 여기입니다. 1985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후 체포되어 잠시 조사차 머물던 곳도 여기 종로서입니다. 별로 추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의 장소로 다시 왔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면회 와주신 벗들, 동지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힘쓰고 계신 모든 분들께도 연대와 건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저와 동료들을 다시 간첩으로 만들려는 사건으로 봅니다. 저를 간첩으로 만들기가 여의치 않자, 국가보안법 상 ‘통신회합죄’로 시작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차후라도 언제든지 간첩사건으로 몰고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 사건은 통일운동, 평등세상, 사상의 자유를 찾는 길에서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작원, 간첩으로 다가오는 그런 사건입니다. 아마도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이러한 악순환은 저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체제에서 자주와 평등을 지향하는 모든 분들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두렵기보다 다시 단련될 뿐이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정보기관의 일상적 생활 감시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사람이 언제든지 진정한 자유를 위해,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벗들, 가족과 떨어져 감옥을 감수할 생각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한 뼘 국가보안법 상자에 가둘 수 있을까요? 이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저는 늘 제가 ‘선’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분단체제, 국가보안법 체제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 위에서 늘 고민합니다.

 

허나 외세와 분단 기득권 세력이 그어놓은 반쪽의 자유, 반쪽의 조국, 반쪽의 사상 안에서 결코 살 수 없기에, 매일 선을 넘어 새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 선을 한사람, 열 사람이 넘으려면 수십 미터 철옹성처럼 높고 강합니다. 하지만 천사람, 만 사람이 넘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벽처럼 허물어지는 벽이자 선입니다. 결국 이 선은 사람들의 공포로 유지되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포를 넘는 길, 선을 넘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알기에 슬프기도 하지만, 후대들이 살아갈 ‘행복한 평화와 통일, 평등의 새 세상’을 만드는 길이기에 설레고 기쁘기도 합니다.

 

다 함께 감히 ‘선을 넘는 사람들’이 되어 시대의 고난을 함께 넘기자고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모든 벗들, 사람들, 동지들을 위하여!

 

감사합니다.

 

2021. 5. 17. 저녁

종로경찰서 유치장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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