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회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회 구조와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교재는 북한 헌법이다. 헌법을 분석하다보면 북한 사회의 기본 이념과 국가 정체성, 사회 구조와 작동 원리, 국가 정책과 노선을 잘 알 수 있다. 이에 nk투데이 편집부는 북한 헌법을 하나하나 파헤쳐보는 연재를 기획하였다. 분석할 북한 헌법은 현재 한국에서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신판인 2019년 8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2차 회의에서 수정보충한 헌법을 기준으로 한다. 또한 표기법은 한국의 맞춤법을 따르되 불가피한 경우 북한 표기를 그대로 두었다. 북한 헌법은 통일부, 법무부, 법제처가 공동 운영하는 통일법제 데이터베이스(https://unilaw.go.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주체적인 혁명노선을 내놓으시고 여러 단계의 사회혁명과 건설 사업을 현명하게 영도하시어 공화국을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로,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로 강화 발전시키시었다.” [서문4]
이 문장은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에 대한 내용이다. 4가지로 나눠 간단히 살펴보겠다.
첫째, ‘주체적인 혁명노선’을 제시하였다.
이 말은 다른 나라 혁명노선을 그대로 도입하지 않고 북한 사회의 현실에 맞는 독창적인 혁명노선을 개발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하면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무산계급이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무산자) 혁명이라고도 한다.
최초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혁명이다.
1917년 3월(러시아력으로 2월)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하여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리는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한 후 다시 사회주의자(볼셰비키당)가 11월(러시아력으로 10월)에 부르주아 정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다른 경로를 거쳤다.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건설한 중국은 이후 일제 침략에 맞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했다가 1945년 내전이 발발, 공산당이 승리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다른 사회주의 혁명도 대체로 사회주의 세력이 부르주아 정부를 뒤엎고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다른 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혁명노선을 걸었다.
김일성 주석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반일운동을 시작하면서 반공노선을 가진 민족주의 세력과도 손을 잡고 연합하였다.
대표적 사례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였던 양세봉 조선혁명군 사령관과의 합작 추진이었다.
당시 독립군은 대부분 중국 본토로 옮겨갔지만 양세봉은 끝까지 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워 일본군 최대의 표적이 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부대를 만든 초창기인 1932년 양세봉을 찾아가 합작을 추진했다.
양세봉은 김일성 주석의 부친과 의형제이기도 하였다.
비록 공산주의를 반대하던 양세봉의 거부로 합작은 무산됐지만 이후에도 김일성 주석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합작 추진을 계속하였다. (「남과 북이 모두 기리는 양세봉 장군, ‘유일’의 역설」, 오마이뉴스, 2020.9.20.)
당시 만주 지역에는 일제 지배를 받지 않는 여러 유격구가 있었다.
초기 중국 공산당은 유격구에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소비에트란 노동자·농민·병사 대표로 구성된 평의회를 말하는데 당시 유격구의 소비에트 정부는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소유,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형태는 당시 실정에 맞지 않아 주민의 반발을 샀다.
김일성 주석은 소비에트 방식이 현실에 맞지 않는 좌편향 노선이라고 주장하며 반일에 동의하면 지주, 자본가도 인정하고 개인소유도 인정하는 인민정권 노선을 제시하였다.(「“김일성 장군, 100번 싸워 100번 이겼다”」, 오마이뉴스, 2005.8.11.)
해방 후에도 북한의 정권 형태는 부르주아 정권도, 소비에트 정권도 아닌 인민민주주의 정권이었다.
그리고 이후 사회주의 과도기 단계를 거친 후 사회주의로 넘어갔다.
김일성 주석의 혁명노선은 부르주아, 지주 계급을 대하는 데서 다른 혁명노선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다른 사회주의 혁명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지주 계급을 타도하는 혁명이라면 김일성 주석의 사회주의 혁명은 이들을 반동과 포섭 대상으로 분리하여 대하는 방식이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매판자본가, 친일지주의 재산을 철저히 몰수했지만 그렇지 않은 소부르주아, 중소지주 계급에 대해서는 재산을 인정하되 사회주의 과도기 단계에서 노동자, 농민으로 포섭하였다.
포섭의 방식은 교양과 설득이었다고 한다.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교양하고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자본과 땅을 출자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협동농장을 만드는 과정도 농민들을 강제로 협동농장에 가입시키는 방식 대신 협동농장의 우월성을 교양하고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협동농장을 만들도록 유도하였다고 한다.
둘째, ‘여러 단계의 사회혁명과 건설 사업을 현명하게 영도’하였다.
북한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단계(항일운동시기~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건설)를 거쳐 사회주의 이행 단계로 넘어갔으며 한국전쟁을 겪고 1958년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하였으며 1970년 사회주의공업국을 선포하였다.
이후 시기는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하기 위한 시기로 본다.
북한의 역사 서술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항일운동 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었으며 해방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1945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1946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194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1948년), 조선노동당 위원장(194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1972년)을 역임하여 북한 사회를 ‘영도’하는 지위에 있었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 특성상 집권당인 노동당이 사회 전체를 ‘영도’하게 되는데 김일성 주석은 노동당 위원장(1966년부터 총비서로 개칭)을 역임하였다.
헌법의 해당 문구는 이런 역사 서술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속)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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