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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미국, 조선을 침략하다 3.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구산하 | 기사입력 2022/08/26 [10:05]

[이 산하에] 미국, 조선을 침략하다 3.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구산하 | 입력 : 2022/08/26 [10:05]

1871년, 미국이 조선을 침략했다. 그렇지 않은 전쟁이 있나 싶지만, 양국의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조선 측 사망자 350명, 미국 측 사망자 3명. 이 수치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당시의 처참한 현장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도 당시 조선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당당히 선포했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는 이것이 ‘알려지지 않은 전쟁’으로 역사에 파묻히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의 야심

 

신미양요를 일으킬 당시 미국은 자신의 침략 야욕을 포장하기 위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해당 사건의 책임이 조선에 있다며 진상조사와 손해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조선이 사죄와 배상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도둑이 매를 드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 미국의 본심은 이를 통해 조선을 개항시키는 데에 있었다.

 

이는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48년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캘리포니아 땅을 차지함으로써 태평양 앞바다를 얻게 되었다. 미국의 다음 목표는 아시아였다. 미국의 아시아 침략의 첫 대상은 일본이었다. 1853년, 멕시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페리 제독의 함대는 일본을 무력으로 압박해 개항시킨다. 근대식 무기를 앞세워 손쉽게 일본을 개항시켰으니 미국의 자신감은 충만했다. 특히 1865년 미국의 내전, 남북전쟁이 끝이 나자 아시아 침략 정책은 더욱 본격화된다. 남북전쟁 직후에는 아예 ‘아시아함대’를 꾸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적 담보를 마련한다. 그 새로운 침략 대상이 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 조선이었다. 일본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로 뻗어나가는 길에 훌륭한 발판이 되어줄 조선! 아직 그 어떤 서양 국가도 개척하지 못한 조선! 미국의 새로운 상품 시장이 되어줄 조선! 각종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조선! 조선을 향한 미국의 야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손돌목에서의 충돌

 

전권을 위임받은 청나라 주재 미국 공사인 프레드릭 로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존 로저스를 중심으로 조선으로의 원정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1871년 5월 초순 1,230명의 해병을 싣고 대포 85문을 갖춘 총 5척의 군함이 일본 나가사키에 모였다. 이들은 보름 동안 해상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미국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6일 조선 개항의 부푼 꿈을 안고 조선으로 향했다. 

 

▲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 [사진출처- 한국정보문화원]  

 

5월 23일 강화도 인근에 도착한 미 함대는 본격적인 군사 작전을 앞두고 조선 연안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5월 30일 조선은 물치도 인근에 정박한 미 함대에 미국과 협의를 위해 세 명의 사절을 파견한다는 서신을 전달했고, 5월 31일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러나 프레드릭 로는 이들의 관직 품계가 낮고 위임장이 없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절했다. 미국은 오히려 자신들의 해안 조사와 해안 측량을 방해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이 조선에 먼저 편지를 보내 ‘화목하게 지내려고 왔다’, ‘의심하지 말라’, ‘절대로 해칠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으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미국은 조선과 대화나 협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갈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6월 1일 조선과 미국 사이의 첫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미국이 강화도 해협을 측량하겠다며 손돌목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손돌목은 조선 방위에 중요한 요새였다. 특히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침략을 겪은 후에는 군사를 증강하고 방비를 더욱 엄격히 한 곳이었다. 하물며 조선의 관청이나 개인 배도 통행증 없이는 통과시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손돌목까지 들이닥쳤으니 조선의 처지에서는 이 침략자들을 그대로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실제 당시 해협을 측정하려 한 미국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작성한 해도를 근거로 탐측을 진행하였으니, 병인년 침략자와 신미년 침략자의 속셈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선군은 일제히 포를 쏘아대며 더 이상의 진입을 막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배가 해류에 밀리며 손상되었고 미군 2명이 약한 상처를 입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적반하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은 ‘평화적’인 자신들의 탐측 활동에 포격을 쏟아부은 것이 비인도적 야만 행위라며 강하게 비난하며 조선에 대표를 보내 공식 사죄와 손해배상을 진행하라고 나섰다. 당연히 조선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허락도 없이 조선의 해안을 멋대로 헤집고 다니는 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이자 영토침략행위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또한 미국과의 교섭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아래는 당시 대원군이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8년)

 

서로 각자의 나라를 잘 다스리고 침략과 약탈이 없도록 하자는 조선의 호의에도 미국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의 본 속셈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손돌목에서의 충돌이 아니었더라도 미국은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 공격에 나섰을 것이다. 미국은 조선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으며 보복 공격을 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조선에 보냈다. 

 

 

전쟁이 시작되다

 

6월 10일 미국이 공격을 감행했다. 참혹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공격 목표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3개의 해안 진지였다. 이를 파괴, 점령해 미 함대가 강화해협을 따라 북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미국이 예상한 전체 작전 소요 시간은 22시간이었다. 식량과 탄약 역시 딱 그만큼만 주어졌다. 채 하루가 되지 않는 시간. 미국이 자신들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숱한 전쟁을 통해 쌓아온 전투 능력을 얼마나 자신했는지 알 수 있다. 

 

초지진에 함포를 발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651명의 병력이 상륙 공격에 나섰다. 상륙한 미군을 처음 맞이한 것은 조선의 드넓고 깊은 갯벌이었다. 허리까지 빠지는 갯벌에 미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갯벌에 포까지 빠져 이를 끄집어내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미국 군함에서는 상륙 부대가 공격당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함포 사격을 퍼부어주었다. 조선을 우습게 여기던 미국은 조선 땅을 밟기도 전에 갯벌에서 허우적대야 했다. 미국이 장담했던 22시간은 이미 어그러진 계획이 되었다. 

 

겨우 상륙을 마친 미군은 초지진을 점령했다. 미국은 함포 사격을 퍼부은 후 보병이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자신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조선군의 전력을 최대한 약화하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조선군의 구식 포와는 비교되지 않는 미군의 강력한 전력을 과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지진의 조선군은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미국은 성벽과 남아있는 조선군의 무기를 모두 파괴한 후 초지진 일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조선은 침략자들이 단잠을 자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조선군이 한밤중에 함성과 함께 총을 쏘며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무기의 열세로 물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으나 미군을 긴장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갯벌에서 사투를 벌이느라 노곤한 상태였음에도 편히 쉴 수 없게 된 미군의 피로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튿날 미군은 덕진진을 향했다. 덕진진 역시 조선군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미군은 보병 공격 15분 만에 덕진진은 손쉽게 점령했다. 점령 후에는 초지진과 마찬가지로 성벽과 무기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 광성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총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마지막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험한 길과 무더위, 조선군의 계속되는 매복 공격으로 이전보다 진격이 어려웠다. 그렇게 도착한 광성보에는 조선군이 자리를 잡고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중앙군, 지역 지방군, 그리고 의병까지 600여 명의 조선인이 광성보를 지키고 있었다. 가파른 절벽 위, 천혜의 요새 광성보에는 이곳을 지키는 것이 조국을 지키는 일이고 곧 자기 삶을 지키는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흘렀다.

 

미국에는 빨리 점령하고 싶은 마지막 고지, 조선에는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고지였다. 광성보를 둘러싼 팽팽한 긴장감을 깬 것은 미국의 함포 사격이었다. 미국은 미친 듯이 함포 사격을 퍼부어댔다. 보병들이 끌고 온 야포 공격도 계속되었다. 

 

포사격과 함께 미군이 총을 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를 막을 조선군의 무기는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구식 화승총은 사정거리도 짧고 총알이 나가는 시간도 너무나 길었다. 슬프게도 그 낡은 총마저도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조선군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조선군은 포탄에 몸이 찢겨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도망가는 이가 없었다. 항복하는 이도 없었다. 무기를 놓치면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그마저도 여의찮으면 맨주먹을 휘둘렀다. 숨이 붙어있는 찰나의 순간까지 싸우며 생을 마감했다. 지휘관이었던 어재연 장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용을 자랑하며 펄럭이는 거대한 대장 깃발, 수자기 아래에서의 결사 항전. 그것은 그 어떤 무기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제 눈에 마주친 장면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성안에 모든 있음 직한 자리에는 사망한 조선인으로 덮여있었고, 일부는 아마도 모노카시호의 포격으로 끔찍하게도 절단되어 있었습니다. 내부는 커봐야 우리 거실 두 개만 하고 외부는 10피트 도로 이내의 크기에서 저는 108구의 시신을 세었으니 이 끔찍한 파괴를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헨리 슬로슨이 부모님께 보낸 편지. ‘신미양요: 참전 기록과 두 미군의 편지’에서 인용)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350여 명이 전사했다. 적군에게 죽지 않은 병사들은 스스로 목을 찌르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하기도 했다. 찢기고 불태워진 시신 위로 미국의 성조기가 올랐다. 미국이 수자기를 탈취하고 그 자리에 성조기를 게양한 것이다. 여기서 수자기는 진중(陣中)이나 영문(營門)의 뜰에 세우는 대장(大將)에 딸린 군기(軍旗)를 이르던 말이다. 열두 폭으로 되었으며 누른 바탕에 검은색이나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수(帥)’ 자를 써 놓았다.

 

▲ 미군이 탈취해 간 수자기. [사진출처- 한국정보문화원]  

 

그러나 대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조선군의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해버렸다. 당시 참전했던 미군의 기록을 보면, 조선군의 모습이 미군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대부분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고 아군(미군)의 눈에 모래를 뿌렸다. 수십 명은 총탄을 맞아 강물에 나뒹굴었고, 어떤 자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근대적인 총기 한 자루 없이 노후화한 무기로 미국 총포에 대항했던 조선군….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슐레이 소령의 「기함에서의 45년」, 1904년)

 

오히려 조선군에 대한 두려움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겼으나 그 누구도 이겼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산 자가 죽은 자를 두려워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미국은 개항과 통상 교섭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미국이 계속된 협박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며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무력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고 겁박하고자 한 계획은 말짱 헛것이 되어버렸다. 함대를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개항에 성공했던 일본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전면전을 벌여서라도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킬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미국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상황상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 내에서 조선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들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 뉴욕데일리 트리뷴 등의 미국 언론에서도 이 전쟁이 완전한 실패였으며 이것으로 인해 미국의 국제적 체면이 손상되었음을 지적했다. 

 

이로써 전쟁의 승자는 명확해졌다. 외세에 맞서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조선의 애국심이 승리한 것이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단순히 무기에 있지 않음을 알려주고 조선 민족의 애국심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힘인지를 보여주는 값진 승리였다. 조선은 전국 각지에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워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침략을 통한 조선 개항 계획을 포기하고 청나라와 일본을 통한 외교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청나라가 조선의 개항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을 적극적으로 앞세우게 된다. 실제 일본은 신미양요와 관련된 정보, 미국의 실패 원인 등을 적극적으로 분석해 조선 침략의 움직임을 본격화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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