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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3/05/11 [17:01]

[기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3/05/11 [17:01]

지난 5월 1일 세계노동절 아침,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조사를 앞두고 있었던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故 양회동 3지대장이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앞에서 분신했다. 

 

그는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검찰이 적용 혐의가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네요”라며 분신의 이유를 밝혔다. 양 지대장은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불행하게도 5월 2일 오후 결국 운명했다.

 

유서 전문이다.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저는 자랑스런 민주노총 강원 건설지부 양회동입니다.

제가 오늘 분신을 하게 된 건 죄 없이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네요.

힘들게 끈질기게 투쟁하며 싸워서 쟁취하여야 하는데

혼자 편한 선택을 한 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해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동지들 옆에 있겠습니다.』

 

▲ 양회동 열사가 남긴 유서. [사진출처-오은미 순창군 의원 페이스북]     

 

이는 윤석열 정권의 무지한 반노동 적대 정책과 건설노조에 대한 탄압과 폭력이 불러온 사회적 타살이다.

 

민중은 그동안 숱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청년 학생들의 분신을 피 울음을 삼키며 보아왔다. 

 

또한 멀리 재일조선인의 억압과 차별 그리고 혐오도 막아주지 못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과 전태일의 분신

 

박정희는 5.16군사쿠데타 직후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했다. 1961년 8월부터 노동조합은 인정되었지만, 군사정권은 통제하기 쉽도록 전국 단일 산별 노동조합으로 재편했다. 그리고 11개 산업별 노동조합 연맹체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결성된다. 그런데 한국노총과 산별노조는 본연의 임무인 개별 노동조합의 노동운동에는 소극적이고 방관적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1972년 유신이 선포되자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어용단체로 변한다.

 

1960, 1970년대 경제성장의 주역은 노동자였다. 특히 노동집약적 수출 산업인 섬유, 봉제, 전자, 신발 등에서의 비조직 노동자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희생이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노동 현장은 너무 열악하였고 비위생적이었다. 마침내 허리띠를 졸라매고 국가 시책에 따랐던 노동자들이 생존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평화시장 노동자인 전태일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꿈인 재단사가 되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인간 이하의 가혹한 노동조건에 절망한다. 하루 평균 14~15시간, 한 달에 28일을 일해야 했다.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평화시장 노동자의 실태를 언론에 호소하고, 혼자서 근로기준법을 배워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 투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자 죽음으로 항거하기로 했다.

 

조선 시대 저항 수단은 안중근 의사처럼 보통 혈서였다. 

 

그런데 전태일은 최후 저항으로 한국 최초의 분신을 택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휘발유를 끼얹은 몸에 성냥불을 긋고 구호를 외치면서 분신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계와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1월 16일부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에서 “전태일 씨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농성을 벌였다. 

 

한편 이보다 먼저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분신이 있었다.

 

재일조선인 양정명의 분신

 

1970년 10월 7일 『아사히신문』 사회면은 「고요하던 장소는 어디로 - 와세다대 학생, 항의의 분신」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일조선인 양정명의 죽음을 보도했다.

 

6일 새벽 와세다 대학 학생이 분신자살했다. 죽기 직전에 쓴 ‘항의‧탄원서’가 아파트에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 2세로서의 고뇌, 제2문학부(야간) 학생으로서의 경제적인 고통 …중략… 학우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야마무라(양정생) 씨의 양친은 조선인으로, 그것도 강제적으로 일본으로 이주당한 가난한 가정이었다고 한다. 본인은 귀화했지만 어릴 때부터 멸시를 당했던 체험이 지워지지 않았고, 온전한 일본인이 되지 못하는 고뇌를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게는 정착할 곳이 없다”라고.

 

▲ 양정명 분신을 전한 아사히신문 기사.     

 

양정명이 일본에 살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강제로 연행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옮겨가 살게 된 것은 일본 식민 지배로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지만, 이후는 탄광과 광산 그리고 군수 공장 등으로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조선인은 법무부(현 법무성) 민사국장의 일방적 통보로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 그리고 일반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귀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와나미 서점 발행 일본어 고지엔(広辞苑) 사전에 따르면 ‘귀화’의 뜻은 “군왕(일본은 천황)의 덕화에 귀복(歸服) 한다”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귀화 후 이름을 비롯해 모든 것을 일본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에게는 일제 강점 지배에 이어, 또 지배받아야 하는 너무나도 큰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양정명의 가족 전체가 귀화한 것은 아홉 살 때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그는 “나는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조국 조선에서 태어나고 싶었다. 내가 아홉 살 소년이 아니었다면 귀화를 거부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양정명은 러시아문학을 동경해 1964년 고학을 각오하고 도쿄에 상경해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다. 그동안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페인트공, 트럭 운전 조수, 창고 직원, 신문 배달부, 우유 배달부, 야간경비원, 건설 공사 인부로 일한다. 그리고 “10엔짜리 고로케 하나로 끼니를 때우거나, 식당에서 된장국만 주문해 실소를 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유고집 『이 목숨, 다 타버려도(いのち燃えつきるとも)』에서 “우리들 남매에게만 쏟아지는 비웃음의 말 ‘조센, 조센’, 어렸던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그저 슬픔과 분한 눈물로 지샐 뿐이었다. …중략… 가난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다른 집 아이들이 희희낙락 재미있게 놀고 있을 때, 논밭에서 일하거나 나무를 하러 작은 몸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픔을 …중략… 부모는 그 모든 굴욕을 잊으려 했다. 귀국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귀화를 결심했던 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분신 현장에 남겨져 있던 ‘항의·탄원서’의 마무리에는 “남·북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 “재일조선인의 민주적 민족 권리의 탄압을 용납하지 말자!”, “김희로 동포의 법정투쟁을 단호히 지지한다!”라는 구호도 있었다.

 

양정명은 조선인으로 끝까지 남북통일을 염원한 것이다.

 

전두환 5.18광주학살의 배후 미국을 규탄하며 분신하는 반미자주 열사들

 

1985년 8월 15일 금남로에서 건설노동자 홍기일은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 살포 후 분신한다. 그리고 9월 17일에는 경원대생 송광영도 “학원안정법 반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라며 분신한다. (10월 21일 운명)

 

▲ 송광영 열사. [출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1986년 4월 28일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는 전방부대 입소 거부 시위 도중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분신(김세진 5월 5일, 이재호 5월 26일 운명), 5월 20일 서울대생 이동수는 문익환 목사의 강연회 도중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등을 외치며 분신, 6월 26일 강상철은 목포지역 민주화운동 탄압 중지와 5.18진상규명, 직선제 개헌 단행을 촉구하는 양심선언 후 분신, 11월 5일 경성대생 진성일은 “건대 농성 사건 해명, 독재 타도, 미제 축출”을 요구하며 분신한다.

 

▲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식.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3월 6일 호남대생 표정두는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 집권 음모 분쇄, 광주사태 책임지라”라며 미 대사관 앞에서 분신(3월 8일 운명), 5월 17일 노동자 황보영국은 “독재 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분신한다. (5월 25일 운명)

 

열사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광주는 부활하였다.

 

그리고 87년 6월항쟁의 불씨를 만들어 전 민중적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6월항쟁을 뒤이은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백담사에 강제 ‘은둔’ 중이던 전두환을 끌어내 1989년 12월 31일 5공 특위 연석회의에 증인으로 나오게 하였다.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한 양회동 건설노동자

 

故 양회동 3지대장이 마지막 남긴 말이다.

 

“노동자를 자기 앞길에 걸림돌로 생각하는 못된 놈 꼭 퇴진시키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꼭 만들어 주십시오. 동지 여러분 사랑합니다.”

 

▲ 양회동 열사의 생전 모습.     ©건설노조

 

 

동지 여러분! 

 

우리는 윤석열 시대를 사는 대가로,

금수강산에 조선 얼굴을 한 일본 놈과 미국 놈들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민족혼과 국격이 땅에 파묻히고,

수없는 민중의 분노가 눈물의 강을 이루고 있습니다.

 

동지 여러분! 

 

분노를 분노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추모를 추모로만 끝내서는 안 됩니다.

시국선언을 시국선언으로서만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온 강토에 전쟁의 피바다가 넘쳐나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 앞에 가는 길 험하다 해도,

시련을 함께 넘으며

이때까지 투쟁을 같이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이놈들아!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게 나라냐!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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