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유럽 떠받치던 독일 경제의 끝 모를 추락
한때 유럽연합(EU)을 떠받치며 잘나가던 독일 경제의 전망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암울하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기준 순위 세계 4위인 독일 경제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독일 경제의 몰락을 보여주는 뚜렷한 통계가 있다. 독일 경제자문위원회는 올해 독일의 잠재성장률을 0.36%, 내년·내후년도 잠재성장률은 0.3%대로 내다봤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2023년 10월 독일 경제가 0.5% 후퇴할 것으로 진단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3년 9월 발표한 보고서 「세계 경제 중간 전망」에서 2023년 기준 독일의 경제 성장률을 -0.2%로 예측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경제 성장이 후퇴한 국가는 독일과 이전부터 경제 침체가 극심했던 아르헨티나(-2.0%)뿐이다. 세계 4위 경제대국 독일이 망신살을 뻗친 셈이다.
세계무역기구(WTO)가 2023년 10월 발표한 보고서 「세계 전망과 통계(Global Outlook and Statistics)」에 따르면 독일은 2023년 상반기 기준 수출과 관련한 상업 서비스 교역액 증가율에서도 4% 후퇴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경제자문위원회는 올해부터 독일 경제가 10년 넘게 1% 이하 잠재성장률에 머무는 장기 침체에 빠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오는 2026년에는 독일의 잠재성장률이 0.31%까지 낮아져 최근 50년 사이 최저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관측했다.
독일의 심각한 경제 부진은 고물가, 고금리, 세계 경제 불황에 제조업 등 산업 전반 부진에 따른 경제 침체가 겹친 탓이다. 전 세계가 발 빠르게 IT, 전기자동차 등 첨단산업으로 옮겨가는 가운데 독일은 포드, 아우디, BMW 등 디젤엔진을 고수하는 낡은 제조업에 머물러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도 독일 경제 부진의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 경제 현장 역시 침울한 분위기다. 지난해 독일 경제 상황 전반을 취재한 한국경제 기사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제조업, 산업, 화학, 철강, 금융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말 그대로 ‘곡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경제는 2023년 10월 17일 보도에서 “세계적인 고금리 환경과 무역 활동 둔화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가 독일”이라고 했다. (「獨호황 이끈 ‘3A 엔진’ 꺼진다…교민 “韓 외환위기 시절 떠올라”」, 한국경제, 2023.10.17.)
여기에 줄 잇는 기업 파산, 주택 건설업 악화 등 온갖 산더미 같은 악재가 독일을 덮쳤다.
올해 1월 14일 YTN 보도에 따르면 독일 함부르크에서 14년째 거주한 신미리 씨는 “지난 6개월 동안 특히 눈에 현저히 띈 거는 고깃값이 많이 오른 것 같아요”라면서 “그다음에 유제품 거의 고기 같은 경우는 30~40%다 오른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부담스러워요”라고 했다.
독일 파견 광부 출신 강범식 씨는 “(독일에 파견된 한인 대부분은) 연금을 받아서 생활하는데 연금 받는 것이 한계”가 있다면서 “예를 들어서 그전에 1,000유로 받아서 생활했다면 지금은 물가가 한 뭐 30~50% 이렇게 막 오르다 보니까 연금은 오르는 게 거기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좀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죠”라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독일 국민의 삶 만족도는 유럽 내 꼴찌 수준이다. 2023년 12월 11일 EU 통계기구 ‘유로스탯’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 국민의 행복지수는 6.5점으로 EU 27개 국가 중 26위였다.
독일에서 새해를 맞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는 ‘나라의 미래가 불안하다’라는 응답이 무려 83%로 나타났다. 이는 독일의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를 보여준다.
독일 경제가 EU 내 4분의 1을 차지하는 만큼, 독일의 추락은 유럽 경제 전반에도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② 중러와 거리두기가 불러온 추락···한국의 시사점은
독일의 추락이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독일은 경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모범 국가로 여겨져 왔다.
돌아보면 1990년대 들어 독일은 ‘유럽의 환자’로 불렸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는 과정에서 생긴 막대한 재정 적자가 독일 경제와 사회 전반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랬던 독일은 2000년대 들어 러시아, 중국과 긴밀한 경제 협력을 통해 유럽의 성장과 발전을 이끄는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했다.
독일은 러시아에서 값싸게 들여온 천연가스, 석유, 석탄 등 원자재로 공장을 쉼 없이 돌렸다. 또 독일은 이렇게 생산한 자동차 등 제품을 중국에 수출했다. 즉, 러시아와 중국이 경제대국 독일을 떠받치는 근간이었던 셈이다. (「[경제합시다] “독일이 ‘일본화’ 되고 있다”」, KBS. 2024.1.8.)
2020년 유엔의 세관통계 사이트인 유엔 컴트레이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독일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비중은 석탄 56.6%, 천연가스 55.2%, 석유 33.2%에 이르렀다.
중국은 2016년 독일의 1위 교역 상대국이 됐고, 이에 따라 독일 경제에서 중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나날이 커졌다. 유엔 컴트레이드에 따르면 독일의 대중국 교역액은 2020년 기준 2,450억 달러(대략 323조 9,000억 원)에서 2021년 들어 크게 오른 3,178억 달러(대략 420조 1,316억 원)로 나타났다.
이처럼 러시아, 중국은 독일 경제와 긴밀하게 연동돼 있어서 무턱대고 ‘이별’을 하기에는 위험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독일 경제가 거꾸러진 근본 원인은 정권 교체 뒤 잇따른 러시아와의 결별, 중국과의 거리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21년 12월 8일 출범한 올라프 숄츠 정권은 친미를 앞세워 독일의 대외 정책을 전환했다. 같은 진영이 아닌 러시아, 중국 등의 국가와도 경제 협력을 통해 실리를 챙긴 독일의 기존 대외 정책을 뒤집은 것이다. 숄츠 정권은 러시아를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적대국, 중국은 체제가 다른 경쟁국으로 낙인찍으며 경계했다.
2022년 5월 1일 독일 경제·기후부는 성명을 통해 독일로 수입하는 원자재 가운데 러시아산의 비중을 원유 12%, 석탄 8%, 천연가스 35%로 각각 줄였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로베르트 하벡 부총리 겸 경제·기후부장관은 원자재를 러시아가 아닌 나라에서 들여오게 됐다고 밝혔다.
다만 이에 관해 하벡 부총리는 “(러시아를 향한) 이 모든 조치는 모든 관계자의 엄청난 공동 노력이 수반돼야 하고 경제와 소비자 모두 치러야 하는 비용을 뜻한다”라며 “우리가 러시아의 공갈과 협박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하벡 부총리의 위 말은 독일 국민을 상대로 값싼 러시아산 원자재를 들여오지 못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겠지만, 이를 함께 감수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독일 중앙은행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완전히 중단하면 물가가 더욱 높아질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 생산량이 약 5%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후 독일은 2023년 7월 첫 ‘대중국 전략’을 채택하며 중국과 거리두기를 선언했다. 당시 숄츠 총리는 “새로운 대중국 전략을 통해서 공격적인 태도로 변한 중국에 대응하려는 것”이라며 “우리에게 중국은 협력자이자 경쟁자 그리고 체제적 경쟁 상대”라면서 중국을 자극했다.
독일이 러시아와 중국 대신 미국을 선택한 결과는 직접적인 경제 부진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 미국유럽경제팀은 2023년 9월 3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독일 경제가 부진한 이유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러시아 에너지 의존을 줄이는 과정에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화학·금속 등 에너지 집약 산업 생산의 큰 위축, 가계의 실질 구매력 감소 ▲미중 무역 갈등에 따른 불확실성 확대 등으로 제조업 경기가 위축된 점을 꼽았다. (한국은행 조사국 국제경제부, 「최근 독일경제 부진 배경과 시사점」, 『국제경제리뷰 제2023-4호』, 2003.9.3.)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3년 11월 독일 헌법재판소는 숄츠 정권이 국내총생산 대비 0.36% 규모의 국가부채로 편성한 국가 예산 600억 유로(대략 86조 원)의 집행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독일 헌법은 재정 건정성 유지를 위해 국가부채 규모를 0.35% 이하로 유지하라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숄츠 정권에 제동을 건 셈이다.
숄츠 정권은 허리띠를 졸라맨다며 노동자, 농민에게 지급하던 보조금 등 예산을 많이 삭감했다. 러시아, 중국에 등을 돌려 나빠진 독일 국민의 살림살이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다. 이에 견디다 못한 농민, 노동자들은 새해부터 독일 곳곳에서 ‘폭동’에 가까운 시위와 파업을 벌이고 있다. 독일 내무부와 경찰에 따르면 1월 8일 기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만 270건이 넘는 시위가 벌어졌다. 트랙터와 트럭 등 차량 2만 5,000대가 고속도로 봉쇄에 나섰다고 한다.
새해 들어 숄츠 총리의 국정 지지율은 19%로 곤두박질쳤다. 독일 ARD방송이 지난 1월 4일(현지 시각) 발표한 월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숄츠 총리의 지지율은 해당 조사가 실시된 1997년 이래 역대 최저치다. 독일 국민이 숄츠 정권에 기대를 접었음을 알 수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2023년 11월 14일 발간한 보고서 「2024년 세계경제 전망」은 올해 독일 경제와 관련해 “독일의 국채금리는 미국 국채시장의 영향권에 들어 있으며, 유로지역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중기 목표치(2%)를 상회하고 둔화 속도가 더뎌 고금리의 장기화 가능성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전망”이라고 짚었다. 독일 경제가 미국 영향권에 깊숙이 연동돼 있고, 이 때문에 경제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는 진단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숄츠 정권의 대책 없는 친미 노선, 이에 따른 경제 실패가 독일의 침체와 혼란을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숄츠 정권이 일방적으로 미국을 편들지 않고 러시아, 중국과 경제 협력을 유지하며 실리를 챙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독일의 경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높다.
독일은 한국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IMF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독일의 무역 의존도는 80%에 이른다. 한국은 70% 남짓으로 나타났다. 중국과의 대규모 무역, 원자재를 가공한 수출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점에서도 독일과 한국은 비슷하다.
미국 바라기 대외 정책이 사실상 실패로 드러난 ‘독일의 길’은 경제 구조가 비슷한 한국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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