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소련의 외교관 겸 고급통역이었던 베레즈코브(В.М.Бережков)는 뒷날 회고록 몇 권을 출판했다가 1982년에 《cтpаницы дипломатической истории》라는 제목으로 합쳐서 출판했고 1984년에 수정본을 내놓았다.
중국에서는 상하이역문출판사(上海译文出版社)가 1991년 3월에 《나는 스탈린의 통역이었다(我是斯大林的译员)》는 제목에 원제인 “외교사의 페이지들(外交史的篇章)”을 부제로 삼아 출판했다. 668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이다.
여러 해 전 필자가 쓴 글들에서 스탈린이 통역을 어떻게 대했고 트루멘이 원자탄시험성공소식을 알렸을 때 스탈린이 어떻게 대응했느냐 등등은 모두 이 책에서 본 내용들이다. 요즘 다시 읽어보다가 느낀 바가 있어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1943년 10월에 모스크바에서 소련, 미국, 영국의 외교수장 회의가 열렸다. 몇 해 뒤 같은 곳에서 같은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연 회의는 반도 역사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라고 불리면서 왜곡보도되는 바람에 이른바 “찬탁”이냐 “반탁”이냐는 쟁론을 불러일으켰는데, 1943년의 3상회의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10월 30일 밤 회의의 폐막을 축하하여 스탈린이 예카제린나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담판 참가자들과 소련공산당 정치국 위원들, 국방위원회 성원들과 부장들이 참가했다. 소련 붉은 군대가 연초에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격멸하고 여름에는 쿠르스크에서 적군을 대량 소멸한 뒤 전쟁의 승리가 내다보이는 상황에서 회의가 열렸고 따라서 분위기도 좋았으며 성과도 거두었다. 그 기초 위에서 다음 달인 11월에 소련, 미국, 영국의 3대 거두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 모여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테헤란 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궁전에 놓인 제일 큰 테이블 복판에 스탈린이 앉고 오른 쪽에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1871~ 1955)이 앉았으며 왼쪽에는 모스크바 미국 대사 윌리엄 헤리먼(1891~ 1986)이 앉았다. 통역인 베레즈코브가 헐의 곁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소련 외교수장 모로토프의 양쪽에 영국 외무대신 에든과 모스크바 주재 대사 켈이 앉았다.
축배를 들고 담화를 나누던 과정에 스탈린이 헬의 등 뒤에서 베레즈코브를 향해 몸을 구부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오라고 표시했다. 베레즈코브가 스탈린 쪽으로 상반신을 굽혀 접근하니, 스탈린은 겨우 알아들을 만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주의해 듣고 글자마다 구절마다 아랫말을 헐에게 통역하시오. 소련 정부는 극동의 정세를 연구하고 결의를 통과하였다고, 일단 동맹국이 히틀러 독일을 타승하고 유럽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소련은 즉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고. 헐에게 이 말을 우리의 정식 입장으로 간주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하시오. 그런데 잠시 우리는 이에 대해 비밀을 유지해야 하오. 때문에 당신 자신도 낮은 소리로 말하여 누구도 듣지 못하게 해야 되오. 알았소?”
“알았습니다. 스탈린 동지.”
베레즈코브는 나직이 대답한 다음 스탈린의 말을 지극히 정확하게 영어로 옮기느라고 노력했다. 스탈린은 헐의 반응에 주목하면서 무시로 고개를 끄덕여 베레즈코브의 말을 실증해주었다. 헐은 그 소식을 듣고 무척 흥분했다. 미국인들은 그런 확답을 고대한지 오랬는데 이제는 소련 정부 수뇌에게서 공식성명을 받은 셈이다.
한 달 뒤 스탈린은 테헤란 회의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일전쟁참가결정을 선포했고 1945년 2월에는 얄타 회의에서 재차 보증했다. 물론 다 알다시피 1945년 5월에 히틀러 독일이 망한 다음 소련이 즉시 대일선전포고를 한 건 아니고 석 달이 지나서였고 그건 전쟁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소련의 대일전쟁참가는 이제는 지나간 역사라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1943년 10월 30일 밤에 소련의 결정을 알게 된 첫 비소련인으로 된 헐은 자신이 받은 특전의 무게를 잘 알았다. 헐은 회고록에서 이튿날 새벽에 곧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보로 소식을 전했다고 썼다. 전보 원문은 전쟁 후에 미국 국무부가 공개했으므로 역사 연구자들과 애호자들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미국인들은 당시 보안유지를 위해 전보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은 해군암호로 발송하고 둘째 부분은 육군암호로 발송했다.
제1부분에서는 헐이 직접 대통령에게 드린다고 밝힌 다음 “최대 권력을 가진 인물이 나에게 부탁하여 당신에게 이 극비소식을 전한다”고 그 중에는 참전 및 적을 전승하는 걸 방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고 쓴 다음 보충부분은 다른 비밀전보에 있다는 말로 끝맺었다. 이런 전보는 적들이 해독하더라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제2부분에서는 극동과 독일이 전패한 뒤라는 말들이 끼어있어 일본과의 관계를 추측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거들지 않았으므로 당시 시점에서 적수들은 스탈린의 확약을 짐작할 수 없었다. 헐과 루즈벨트 등 미국의 최고위층 인물들만이 무슨 뜻이냐를 알았다.
그날 밤 연회가 끝난 다음 소련공산당 정치국 위원들과 영국, 미국 대표단 단장들 그리고 대사들은 영화를 보았으니 그 영화가 시베리아와 빈해지구가 신생 소베트 정권을 간섭했던 일본군 점령하에서 해방되는 내용을 담은 《월로챠에프스키 시기》였다. 1920년대 초반을 묘사한 영화는 1938년에 발행되어 높은 인기를 누리는 동시에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의 항의를 자아냈다는데, 1943년 10월 말의 소규모 상영이 물론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스탈린이 그 영화를 돌리게 한 참뜻을 아는 비소련인은 헐 하나 뿐이었다.
상영과정에서 스탈린은 여러 번 헐에게로 몸을 돌려 사건들을 해석해주면서 소련인민들이 일본점령에 맞서 싸운 사적들을 회고하였다. 72살의 헐은 스탈린 쪽으로 상반신을 굽히고 흥분된 어조로 이제는 나는 스탈린 원수 당신이 일본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때문에 당신은 적당한 시기에 당연히 그들에게 제기할 것이라고, 나는 당신을 십분 이해하고 또 당신의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헐이 내민 손을 잡고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은 맞습니다. 우리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우리의 국토에서 한 짓들을 잊을 리 없지요....”
영화감상이 끝난 다음 스탈린은 미국 국무장관을 크리믈린궁전으로 통하는 대리석 층계 곁까지 바래다 주었고 두 사람은 잠시 멈춰서서 서로 미래를 축원했다. 스탈린은 또다시 헐의 손을 잡고 이번 만남에 대만족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스탈린이 영국인들을 배제하고 미국 대사도 빼고 헐에게만 비밀스런 방식으로 정치국 결정을 전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었고, 미국 국무장관도 그런 처사의 중요성을 잘 알았으므로 스탈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처사했다.
그 다음 달에 먼저 카이로 회의, 후에 테헤란 회의에 참가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의 참가자들인 영국 수상 처칠이나 중국의 지도자 쟝제스(장개석)와 달리 대일전쟁의 승리를 전에 없이 낙관하면서 기정사실로 간주했으니 그런 자신감의 원인들 중에 남들이 모르는 스탈린의 보증을 안다는 것도 중요한 하나였을 것이다.
외교란 공개적인 것과 비밀스러운 것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당분간은 비밀을 유지해야 되는 내용이 공개적인 내용보다 훨씬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건 국제정치의 상식이다. 그리고 비밀유지에 대한 신임이 쌓여야 비밀외교가 성립된다. 헌데 한국의 대외교류에는 너무나도 비밀이 없다. 이명박정부의 아랍에미리트 원전외교처럼 추접한 막후 교역이 끼인 엉터리 비밀외교들이나 더러 있어서 사후에 드러나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따름이지, 그 밖의 대외교류에서는 자기네가 한 말, 상대방이 한 말들이 거의 즉시 공개되고 정당과 정치인들 사이의 공방이유로 된다. 한국 정치인들과 무게 있는 말을 하기가 주저되는 외국인들 특히 정치인들이 많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비밀유지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조선(북한)과 비밀유지가 전혀 되지 않는 한국은 극과 극을 이룬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미국이 소련의 대일본전쟁참가결정을 대했던 처사는 한국에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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