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회사의 초기 애니메이션들에서 미키 마우스는 사냥을 비롯한 모험을 무척 즐겼다. 후기에는 낚시, 골프 같은 훨씬 안전하고 편한 취미생활을 했다. 이는 창업자이며 최종결제권자인 월트 디즈니의 나이가 많아진 것과 직결된단다.
1997년 봄에 중국과 필리핀을 거쳐서 한국으로 망명한 조선(북한)인 황장엽 씨는 서울에 도착하자 전쟁을 막으러 왔다고 선언했다. 70대 중반의 고령에도 그처럼 거창한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의의를 부여했던 것이다. 마치 내일모레면 북이 남을 공격할 것 같은 분위기를 띄웠던 그는 예언(?)이 빗나가니 전공인 철학을 내세워 강의했는데 학생 수가 차차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욕조에서 죽은 다음 한참이나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총리급 경호”를 받았다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사후에 유산 분배논란, 남에서 자식 출생설 등등이 불거지면서 사생활이 알려지기는 했다만, 생전에 공개적으로는 줄곧 정치와 철학을 논했다. 디즈니보다 낫다고 해야 할지 천진했다고 평해야 할지 헷갈린다.
황장엽 이후 일부 한국인들이 “고위급 탈북자”에 주렸던 차에, 태영호 전 런던주재 조선대사관 공사의 2016년 망명이 그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덜어주고 기대도 부풀려주었다. 늘 태영호 전 공사라고 표기되는 이 분이 국정원의 조사를 거친 다음 2016년 말~ 2017년 초에 공개 활동을 개시할 때에는 황장엽 씨보다 더 큰 포부를 내비쳤다. 황장엽 씨는 고작 전쟁을 막겠다면서 남북분단의 고착을 인정했으나, 태영호 씨는 자기가 암살되면 통일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통일을 지향했으니까. 2017년에는 북이 태영호 씨의 형제들과 전 동료, 전 이웃들을 내세워 태씨를 맹렬히 비난했기에 태씨의 예언이 혹 맞을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좀이나마 이뤄졌는데, 2018년 초 북의 평창올림픽 참가결정부터 시작하여 남북관계, 북미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북이 태씨를 암살할 확률이 0. 000000000000001%쯤으로 떨어졌다. 5월 중순에 《3층 서기실의 암호》를 낼 때까지만 해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을 “통일을 위해 나의 마지막 힘까지 보탤 수 있는 자리”라고 여겼던 분이 바로 그 달 말에 사직한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https://www.jajusibo.com/sub_read.html?uid=42550§ion=sc51§ion2=)
사직 후 반년 남짓이 강연도 하고 언론에 기고도 하면서 나름 활동을 벌이고 있는 태영호 전 공사는 서울에서 차량운전이 평양과 어떻게 다르다느니, 서울에서 김치 담그기가 평양과 어떻게 다르다느니 등 생활적인 이야기 비중이 정치적 발언보다 더 많다는 인상을 준다. 결론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런데 서울 교통, 한국 김장 등은 이른바 “3만 명 탈북자시대”에 아무 탈북자나 다 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이고 특히 김장은 주부출신 여성탈북자들이 훨씬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루한 시시콜콜 이야기가 지금까지 알려진 현존 탈북자들 중에서 최고위직 출신이라 하고 통일의 기폭제가 되리라 결심했던 태영호 씨의 위상에는 전혀 걸맞지 않다. 정치적인 예언도 가끔 한다마는 그런 수준의 판단은 이미 한국에 흔해빠진 “북한 전문가”들이 적어도 십 여 년 곱씹은 것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특화된 내용이 없는 것이다.
태영호 씨의 서울에서의 행복한 생활 자랑이 일부 사람들의 구미에 맞을 건 분명하다. 허나 “*포 세대” 청년실업자들이 본다면 그야말로 열불이 나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영호 씨의 한국생활체험기는 오히려 남남갈등이나 조장할 위험성이 다분하다. 웃기는 건 진정한 보수우익으로 자처하는 이들도 태영호 씨의 서울생활기 따위에 불만스러워하는 현상이다. 그러지 말고 아예 미국으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우라는 충고도 나왔다. “북한 망명정부”는 거론된 지 꽤나 오래고 그 주역도 여러 번 바뀌었다. 또한 망명정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우두머리로 내세워서 반북활동을 벌이려던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난 세기 90년대에 한 탈북자는 자신이 중국의 어느 도시에 가서 전 연안파 아무개에게 나서기를 권했으나 실패했다고 털어놓았다. 당년이나 지금이나 중국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을 권했으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승낙하겠는가? 비교적 진지한 망명정부논의에서 수반으로는 황장엽 씨가 거들어지다가 한때는 김정남도 언급되었는데, 이제는 앞의 두 사람보다 체급이 훨씬 낮은 태영호 씨에게 기대를 거니 갈수록 쫄아드는 셈이다. 이 셋과 상관없이 망명정부를 운운한 탈북자들도 있는데, 한국에 갔던 탈북자들이 망명정부를 세운다면 우선 한국헌법에 어긋나고 다음 미국이 지지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수십 년 역사는 남북, 북미 관계가 좋지 않으면 “귀순용사”, “탈북자”들이 거대담론을 선호하고, 남북, 북미 관계가 완화되면 시시껄렁한 담론에 매달림을 보여준다. 하기에 태영호 씨가 어느 시점에서 거대담론을 다시 꺼낼 가능성은 남아있다. 단 그전까지 남북생활비교나 한다면 존재감이야 유지하겠으나 별 의의는 있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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