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10월호를 발간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유해발굴이 본격 시작되었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9월 22일 오전 10시 30분에 사건 현장에서 개토제를 열고 40여 일간의 유해발굴에 들어갔다.
국가기관이었던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6월 25일부터 9월 22일 사이에 약 70여 일에 걸쳐 사건 현장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사유지였고, 토지소유주와의 협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굴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극히 일부 유해매장 추정 장소를 발굴한 결과 2곳에서 총 34구의 유해만을 발굴하였다. 유해와 함께 재소자 또는 예비검속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갑, 신발, 단추, 숟가락, 빗, 열쇠 등의 유품과 탄알 그리고 탄피가 다수 출토되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유해발굴도 더는 진척되지 못했다. 이에 민간차원에서 토지소유주들을 설득해 대량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을 2015년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진행했다. 발굴은 여건상 7m×3m 면적의 1개 지점에서 진행되었고, 모두 20여 구의 유해와 32점의 유품이 발견되었다. 당시 민간차원의 유해발굴을 진행하면서 유해발굴의 책임을 진 국가와 지방정부의 역할을 호소한 바 있다. 이번에 진행하는 유해발굴은 학살 사건 70년을 맞아 사건의 책임을 진 국가와 지방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유해발굴을 진행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20여 일간 법적 절차 없이 충남지구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최소 1,800명 이상, 최대 7천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당해 암매장당한 비극의 현장이다. 하지만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9·28수복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부역 혐의를 받은 이들은 1950년 6월 28일 공포된 긴급명령 1호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특별조치령)’ 위반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사형을 선고받아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또한 형무소의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어 병사·동사하거나 고문과 가혹 행위로 사망하기도 했으며, 열차로 대전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많은 재소자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 시기 학살당하거나 사망한 인원은 제대로 추산되지 못하고 있다. 특별조치령은 단심제여서 단시일에 가혹한 처벌을 가능케 한 문제적 법령으로서 시행 당시부터 그 위헌성이 지적되어 왔다.
한국전쟁 초기 학살 사건 직후 산내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팜플렛 기사에서 “6개의 구덩이는 6피트 깊이에 6~12피트의 너비로 파여 있었다”라며, “가장 큰 구덩이가 200야드였고, 2개는 100야드, 가장 작은 것은 30야드였다”라고 밝히고 있어, 그 구덩이들을 모두 이으면 1km, 1천 미터에 달한다. 그래서 산내 골령골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난 2015년 민간 차원의 유해발굴의 후속 조치로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등 유해발굴에 동참했던 대전지역의 단체들은 흙으로 덮은 유해 발굴지점을 포함해 구덩이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너비 5m, 길이 35m가량을 봉분으로 만들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을 형상화했다. 이번에 진행되는 유해발굴은 이 무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유해발굴 현장의 유골 바로 옆에서 탄두와 함께 발견된 탄피는 확인 사살 또는 근접 사살의 결정적 증거로 드러났다. 한국전쟁 초기 군인과 경찰은 예비검속부터 처형에 이르는 전 과정을 불법적으로 자행했다. 국가는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선다는 것이 모순일 수 있으나, 수차례 정권 교체로 인해 실제 가해세력들은 국가권력에서 퇴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해발굴의 책임과 의무가 민간이 아닌 국가에 있고,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국가의례를 통해 본격적으로 수습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국가 차원의 반성과 조치가 미흡하고, 미진한 것은 가해세력 또는 가해세력과 이해관계가 있는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건이 발생한 지 70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유해가 땅속에 묻혀 있는 기막힌 현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넘어야 할 산은 미국의 책임을 묻는 일이다. 그간 미국은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책임을 시인하지 않았다. 미국은 미군정을 통해 한국군의 창설에 깊숙이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미소 양군 철군 이후에도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해 한국군에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미국은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해 한국군에 구조적 영향을 미쳤다.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과 관련된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자료인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보고서를 작성한 이는 주한미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즈(Bob E. Edwards) 중령이었고, 보고서에 첨부된 18장의 사진은 미 극동군사령부, 최고사령부 연락사무소의 애버트(Abbott) 소령이 촬영했다. 이 보고서는 1950년 9월 23일 워싱턴의 미 육군 정보부로 보내졌다. 에드워즈 중령은 주한미대사관 소속 무관이었지만, 일본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 G-2의 직접 지휘를 받는 고급 정보장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즈 중령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음으로 열린 미군사고문단 비공식 참모회의에 참석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에드워즈 중령은 학살의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리기 위해 처형명령이 ‘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라 표현했지만, 미국도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군은 학살 현장을 직접 촬영했고, 보고서도 작성했다. 보고서가 극동사령부를 거쳐 워싱턴의 미 육군 정보부까지 전달되는 동안 미국은 학살을 저지하거나 규탄하지도 않았다. 또한 미국은 학살 현장에 대한 방조에 대해 행위자가 아니라는 핑계를 댔지만, 1950년 7월 16일 맥아더에게 이양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으로 인해 이후 발생한 군·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확실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대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7월 17일까지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9.28 대전수복 이후에도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미군은 학살책임을 면할 수 없다.
올해 202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면서, 산내 골령골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도 70년이 되는 해이다. 7천 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00여명(7%)뿐이고, 현재까지 발굴된 유해도 50여구(0.7%)에 불과하다. 아직도 많은 유해들이 차가운 땅속에 발굴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고, 유가족들은 유해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추모·교육·전시 공간 등을 갖춘 평화공원을 산내 골령골에 조성 중에 있다. 이번 유해발굴은 평화공원을 준비하는 실질적인 첫걸음이기도 하다.
*임재근은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이며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팀장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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