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11월호를 발간했습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였고 비전향장기수로 총 27년의 감옥생활을 한 윤희보 선생의 구술을 연재한다. 윤희보 선생의 구술은 특히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어떤 활동을 하였고 박헌영, 이승엽 세력과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어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윤희보 선생은 1917년 10월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당시 북으로 건너갔으며 2015년 3월 사망,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수원 도시빈민 생활
내가 10살에 수원에 갔습니다. 그 전까지는 재산이 몰락하는 집안에 있었어도 춥고 더운 거 모르고 고생 모르고 자랐죠. 그런데 수원으로 가서는 배고픈 게 뭔지, 집이 없어서 남의 집에서 사는 게 얼마나 궁색하고 어려운지 그런 걸 느꼈죠. 수원에서 이사를 여러 군데 다녔습니다. 평균치면 일이년에 한 번씩은 이사를 다니다시피 했을 거예요. 어머니가 바느질을 잘 하시니까 부잣집이나 일가집, 더러 아는 집 바느질을 해주고 20전을 받았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보통 사람의 몇 배를 하시는 거예요. 빨리 하시고, 꼼꼼하게 손보면서 하시고, 20전이니까 한 달 내내 하신다 하더라도 보통 5~7원 되는 거지. 그러니 그 걸로 생활이 안 됩니다. 형님은 나하고 같이 학교를 다녔으니까 땔나무는 우리 둘이 했습니다. 땔나무 하다가 왜놈 산감한테 걸리면 도망가야 됩니다. 아버님은 패가하셨기 때문에 빨리 현실에 적응하는 게 싫고, 계속 종교쪽 나쁜 사람들하고 만나셨어요. 그래서 내가 반대했지만 좀처럼 끊지를 못하시는 거예요. 거의 평생을. 그래도 돌아가실 적까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반대하시지 않고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북한 방송 들으면 바깥에 가서 감시도 하시고 적들의 동태를 살피시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그 동안에 믿고 실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너희들이 지금 가려하는 데하고 다 통하는 것이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셨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철저히 가지고 계신 거죠. 전쟁 때 나 때문에 체포되셔서 고문을 많이 당하셨는데 아버지로서는 무서운 고문을 당한 거죠. 형님이 나보다 2살 위인데 수원서 도시빈민 생활을 하면서 소학교를 못 마쳤어요. 나하고 학교 다니면서 신문배달을 같이 했는데 몇 푼 되는 학비를 못 내서 5학년인가에 그만두고 서울 와서 점원생활을 하셨어요. 일본놈 큰 식료품가게 점원 노릇을 하셨어요. 나는 6학년까지 다녀서 졸업을 하긴 했는데 월사금이라고 한 달에 내는 돈을 못 내서 내가 직장에 들어간 후에 차압이 나왔어요. 그 때 돈 3원인가 얼만가 나왔어요. 집에 딱지 붙여놔서 내가 갚았어요. 아무튼 4학년까지는 그래도 성적이 중간 이상은 됐는데 5학년부터는 만날 돈 가져오라고 쫓겨나는 바람에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병원에 취직하다
졸업하고 한 달 있다가 병원에 취직을 했어요. 수원에 직장이라고는 갈만한 데가 인쇄소 몇 군데, 대장간 몇 군데, 철공장 그리고 성냥공장 있고. 그래서 병원에 취직한 건 굉장히 잘 된 겁니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 동안 많은 동지들을 만나고 신문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사귄 친구들이 우유배달, 신문사 여러 직공들, 전기 직공 이런 사람들이었죠. 경향도 좋았고, 책도 내가 주고. 그런 사람들 지금 다 북에 가 있어요. 병원에 취직해서 보니 ‘아! 의사면허가 아니라 의생면허만이라도 가졌더라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생면허라는 게 의사자격증이 없더라도 병원 등에서 한 5~6년 근무한 사람들이 강습을 6개월 받으면 한지의생(限地醫生)이라고 해서 면에서는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면허입니다. 딴 데로 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되죠. 그걸 한지의생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때는 그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왜냐면 의사들이 주머니 진찰을 한단 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야. 돈이 없으면 안 봐줘요. 그러니 뻔히 치료해야 할 사람이 죽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거를 해서는 안 되겠다, 바로 혁명 전선에 뛰어든 거야. 병원은 개인 병원이었는데 의사 이름이 박병태라고 의술이 좋아서 여러 과를 많이 봤어요. 본시는 외과의인데 안과도 하고 산부인과 하고 또 내과도 하고, 환자가 들어오면 다 보는 거야. 또 민족주의적인 감정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나하고 나이가 20살 차이가 나는데 내가 사회운동하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터놓고 얘기를 해본 적도 있어요. 이 분하고는 내가 인연이 마지막 만날 때까지도 좋았어요. 그때 나는 저런 의사들이 ‘빨치산 같은 데 갔으면 좋겠다. 가서 응급 치료도 하고 웬만한 병 고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내가 실력이 부족해 그런 얘기는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 병원에 들어가 보니까 월급이 너무 적어요. 내가 일 하는 거에 비해서 너무 적어. 나는 약실, 수술실 죄다 그냥 청소했고 구공탄(연탄) 피우는 것도 내 담당이었어요. 입원실이 전부 온돌방 7개예요. 그걸 불 때야 하는데 불 때는 게 고역이거든요. 젖은 장작 같은 거 때려면 불이 잘 안 붙고 힘들고. 내가 15살이지만 만으로 따지면 13살 반이에요. 이건 유년 노동이야. 유년 노동에 물건 사오라면 그거 사와야 되고 안팎일을 죄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해가 높이 떠가지고서야 아침 먹으러 가야 되고 아예 점심은 먹으러 가지도 않고 아침도 못 먹는 수도 있고. 그런데 배고프다고 일 안 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냥 일하는 거죠. 배고파도, 밥을 못 먹어도. 그때는 식사시간에 집에 가서 밥을 먹었어요. 직장에선 밥을 안 줬어요. 보니까 월급이란 게 3원이에요. 쌀 세 말 값. 그래서 내가 그냥 안 가버렸어요. “왜 안 나오냐?”라고 해서 월급 적은데 내가 일하기 싫다고 그랬더니 “월급 올려주마” 그래서 따지지도 않고 갔는데 조금 올려주는 거예요. 그냥 있었죠 뭐. 임금 투쟁을 15살 때, 유년 노동 때 한 거예요. 그때 월급을 50% 올려줬어요. 사실 300%쯤은 올려줘야 돼. 그 때 받은 돈의 3배는 더 받아야 돼. 그래야 간호원 월급하고 나하고 비슷해지거든요.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육체적 노동하고 힘든 노동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적냐 해서 임금투쟁을 한 겁니다. 내가 17살쯤 되어서 바바라는 놈이 있어요. 일본말로 바바라고 하는데, 마장입니다. 말 마(馬)자, 장터 할 때 장(場), 조상이 말 장터에 살던 놈인가 봐요. 이놈이 어찌나 악질인지. 그 놈이 하루는 아들 병을 보러왔어요. 바바라는 놈이 지 아들을 침대에다가 뉘여 놨거든요. 그래서 내가 체온을 재려고 하니까 이 새끼가 별안간에 날 때리는 거예요. 내가 한 대 얻어맞았잖아요? 그래서 내가 확 잡아당겼죠. 아무리 장사라도 걸려서 떨어지면 발이 떠 있으니까, 1m나 되는 데 앉았다가 떨어지니까 죽는다고 그냥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내가 이놈 새끼 죽인다고 목을 졸라맸어요. 그랬더니 아들놈하고 그놈하고 둘이 소리를 지르고 하는 바람에 의사들이 왔습니다. 사실 그때 의사들이 도박을 해요. 돈 생기면 모여서 도박을 합니다. 도박을 하다가 소릴 듣고 대여섯 명이 뛰쳐나왔어요. 왜 그러냐고 그러기에 내가 체온을 재려고 하는데 나를 먼저 때렸기 때문에 내가 죽이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만하란 말도 안 해. 의사도 알아요. 그 못된 놈 잘 두드려 팼다고 생각했겠죠. 그놈이 나쁘지, 먼저 때렸고. 얘길 들어보니 의사도 아닌 게 의사 얼른 불러오지 네가 뭐 체온 재려고 하냐 이거야.
수원의 운동가와 문필가
그 때는 내가 소년 시절에 왜놈을 두드려 팼다, 임금 투쟁도 해 봤다 하고 동지들을 자꾸 사귀었습니다. 또 병원에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봤어요. 그 중에 김장성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수원 격문사건의 주범으로 억울하게 몰렸어요. 그래가지고 폐결핵, 척추결핵에 걸려 다 죽어가지고 병보석으로 나왔어요. 의사가 어떻게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못 나왔냐고 하니까 옴이 옮았대요. 옴이 옮으면 감옥 전체가 옮으니까 그래서 내놨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얼마 있다 죽었어요. 또 한계창이라고 나보다 5살가량 많은 분도 있어요. 이분은 집이 카톨릭 집안으로 잘 살아요. 소학교를 나왔는데 한문을 많이 해서 한시 시인이에요. 어디 직장에 다니지는 않는데 반일감정이 대단한 분이었고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죠. 축농증 환자로 병원에 왔어요. 이분이 제암리 사건 얘기를 해줬어요. 이분은 경기도 발안 사람인데 3.1 운동 때 피해를 많이 본 지역입니다. 거기서 교도들을 집어넣고 불을 질렀어요. 한계창 선생은 수원에서 주요 인물이었고 걸핏하면 만주에 다녀왔어요. 해방 전에 나 때문에 두 번이나 잡혔어요. 수원경찰서랑 도 경찰부랑. 다행히 나랑 인간적으로만 가깝고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서 풀려났어요. 이분 아버지와 형은 경찰들에게 죽었습니다. 누이는 병들어 죽고. 이분은 9.28 서울 수복 때 동생과 둘이 북에 들어갔습니다. 이분 밑에 있던 사람들이 일을 잘 했는데 그래서 이분도 잘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사를 몰라요. 거기서 만난 일이 없고 소식도 못 들었고. 차개영이란 분도 만났습니다. 나보다 4~5살 위입니다. 총독부 급사였는데 1933년인가 34년인가 총독부 기밀을 꺼내다가 사회주의자들한테 줬다고 징역을 살고 나왔어요. 이분은 아버지, 형 다 희생되고 동생하고만 북으로 올라갔는데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훈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분도 잘 했을 거예요. 내가 이분을 일찍부터 알았는데 정신적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차개영 선생이 소학교 동창인 김건배 동지를 소개해줬어요. 김건배, 김형배 형제입니다. 둘 다 북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수원 병원에서 사귄 사람 중 북으로 간 사람이 10명이 넘어요. 또 치질 수술을 하러 온 조동호 조동호(趙東祜, 1892년 9월 24일(음력 8월 4일) ~ 1954년 9월 11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풍양. 호(號)는 유정(榴亭)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을 지냈으며, 1921년 중국 각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의 민간인들 사이에서 한중친선과 한국독립 지원, 반제국주의 활동 등을 목적으로 결성한 민간단체 한중호조사에 관여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에 관여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주요인물로 활동했고, 해방 정국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근로인민당 등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중국 상해에서 구국일보 신문기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인으로 논설주필을 맡았으며, 국내에서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편집고문, 논설주필위원으로 지냈다. (출처: 위키백과) 선생도 만났습니다. 조 선생 처남 되는 서정옥의 추천으로 병원을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한테 별로 영향을 끼친 게 없어요. 그때 나에게 민족의식이나 계급의식을 집어넣어줬으면 사회운동을 빨리 시작할 수가 있었겠죠. 하지만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그것뿐이지. 나는 ‘아!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시구나’하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수원에는 그때 문인도 많았습니다. 임화, 설정식은 해방 전부터 대립했습니다. 백두산 서사시 쓴 이찬, 극작가 송영, 시인 박세영, 정지용하고 같이 소사에서 살았던 박석정과 이동규, 박승극, 한효, 박아지. 연극배우들도 있습니다. 황욱인가, 심영, 태을민, 신고송, ... 김화에 살던 이기영 선생도 있었고. 대부분 북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동규 씨는 남쪽에 남아서 지리산에서 전사했어요. 문예봉은 지금도 살아있어서 얼마 전까지 출연하고 그러는데 대단하데요.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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